







먼저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이야기’라는 슬로건이 인상적인데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이감각이 디자인하고 싶은 한국스러움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이감각의 작업은 ‘전통의 현대화’나 ‘전통이 무엇인가?’를 다루기보다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것은 우리안에 있다’였죠. 디자인에 우리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탐색 의지를 담습니다. 우리가 가진 특색이 보다 일상에 가깝고 편하게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이감각에게 전통은 어떤 의미인가요?
나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나를 인식하는 일입니다. 전통은 할머니의 오래된 가구를 엄마가 쓰고 엄마의 젊은 시절 원피스를 내가 입는 것과 아주 다르지 않아요. 누군가 아꼈던 물건들을 통해서. 그걸 물려주는 마음을 통해서. 그들을 헤아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신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인식하는 것은 외부를 통해서가 아니죠. 한국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 또한 입에서 입, 손에서 손, 그리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왔다 생각해요. 우리만의 히스토리가 있는 오브제들을 통해서 한국적인 해학, 소박, 흥을 전하고 싶어요. 더불어 세상에 유일한 나를 사랑하고 즐기는 경험을 전하고 싶습니다.
요즘 한국의 전통에서 디자인 언어를 얻으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적인 멋’을 탐구 중인 창작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한국 고유의 디자인 언어를 딱 하나로 좁혀서 말하긴 힘들지만! 저희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요소는 ‘해학’입니다. 유머라고 하죠. 주어진 현실을 과장하거나 비꼬는 게 우리게에 있어요.
유튜브 댓글 창 같은 거 보면 한국 사람들은 말을 되게 웃기게 하잖아요.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꼬인 걸 풀려고 하고. 풀린 건 꼬면서 놀고.
이런 해학적인 태도가 한국만의 위트인 것 같아요.
해학이 디자인 언어가 된 사례는 어떤 게 있을까요?
도자기에 그린 그림이나 표현 방식이 그래요. 그릇에 점 하나 탁 찍어서 마무리하는 기법 같은 게 그렇죠.
또 하나는 호랑이 그림인데요. 다른 나라는 무섭게 그려요. 두려운 존재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맹수를 귀엽게 묘사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표현햐요.
호랑이를 친근하게 그리는 건 호랑이와 친한 관계를 원했던 게 아닐까요?
호랑이처럼 무서운 대상을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는 존재 혹은 허물어진 존재로 여기는 거죠.
이건 한국인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관계성일 텐데요. 우리는 남을 포용하고 함께 섞인 채 노는 상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감도 그런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양처럼 자연과 나를 독립시키려는 태도와는 달라요. 지금까지 얘기했던 점들이 이감각의 제품이나 디자인 스타일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감각이 요즘 푹빠진 한국의 디자인 언어는 무엇인가요?
‘매듭’입니다. 저희는 한국적인 디자인의 맥락이 해학이라 보는데요. 해학을 떠올리면, 농담을 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얽히는 모습이 떠올라요. 그것을 실을 써서 조형적으로 풀면 실과 실이 꼬인 매듭이 나옵니다.
매듭 자체가 한국문화 특유의 관계성이 반영된 조형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서양에서는 그냥 도구 내지는 수단이거든요. 끈을 묶어서 뭔가 물건을 만들고 고정을 하는 목적 그 자체만 남는 건데 우리나라는 달라요. 매듭 자료도 많이 남아있고 한국인이라면 매듭의 의미적인 맥락을 볼 수 있지요.
매듭은 재밌어요. 2d인데 3d고 2d가 3d가 된 거라서. 묘한 해학이 생기죠. 완전 평면인데 접으면 입체니까. 이감각이 하고 싶은 디자인. 이감각이니까 할 수 있는 디자인 이야기가 생기는 거죠. 평면인데 자수를 넣고 엮고 접고 하면서 얘기가 생기고. 그 면과 면 사이에 또 다른 관계성이 생기는 것. 그런 게 좋습니다. 실 뿐만 아니라 흙이나 실리콘 등 다양한 소재로 매듭 디자인을 만드는데 도전하고 있어요!
특히 패브릭 소재 매듭은 사람손을 타는 디테일인데요. 공임 과정에서 매듭을 전담해주실 협업파트너의 존재가 정말 소중합니다. 저희가 그동안 매듭에 매달리면서 이걸 전담해주실 수 있는 장인분을 만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 덕을 많이 볼 거 같아요. 원하는 디테일을 만들기 위한 파트너를 만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frice 사무실(마포구 상수동)에는 주변의 카페에서 가져온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홍대앞 지도가 붙어있다. <스트리트 H>는 홍대앞의 다양한 변화와 문화예술 활동, 홍대앞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동네문화 잡지로, 매월 다른 주제의 색다른 그래픽과 유용한 정보를 담은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함께 무료 배포한다. 최근 는 창간 15주년(2009년 6월 창간)을 맞이했고, 인포그래픽 포스터도 2024년 현재 100종 이상 발행하였다. 왜? 누가? 이러한 수고를 15년 동안이나 하고 있을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대표이자 <스트리트H> 공동 발행인입니다. 2003년 창업할 때 회사명은 ‘디자인 스튜디오 이공삼’이었어요. 규모를 키우지 않고 하고 싶은 일 위주로 하고 싶어 ‘디자인 스튜디오(한 칸짜리 작은 공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한국의 현실에서 디자인이라는 용어의 쓰임이 너무 오염되어 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추구하려는 활동, 작업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더이상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16년 회사 명칭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란 단어를 과감히 빼고, ‘이공삼(203)’ 만 남겼습니다. 지금은 ‘인포그래픽 연구소’라는 부분을 더 부각하고 있어요.
이공삼 인포그래픽연구소의 모토는 ‘직관적 이해 만들기’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 모든 지식의 시각적 지혜화’입니다. 저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열심히 외웠다가 시험 보고 나서 잊어버려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것이 ‘지식’. 살아가는데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지혜’. 불은 뜨겁다, 날카로운 것엔 베인다, 생명체는 존중해야 한다. 같은 것이죠.
요즘은 우리 회사, 또는 나 개인의 브랜딩은 어떤 걸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007 영화 속에서 악당이 페르시아고양이를 품에 안고 세계 정복을 읊조리는 것처럼, 저도 우리 사무실 고양이 ‘모모 부장’을 끌어안고 재미나게 저희의 야망을 피력합니다.
TALK THEME 1.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K’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포스터 중에서 한국 문화를 주제로 한 내용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국 문화를 다루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한국’이란 주제는 포스터 주제들 전체로 보면 일부분이에요. 지금까지 만들었던 한국 문화 관련 인포그래픽들은 비빔밥, 소주, 김밥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문화적으로 유니크한 걸 제작하려다 보니, 그중에 한국적인 소재가 자연스럽게 포함된 거죠.
2015년 8월,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맛 MAT – 한국의 멋과 맛”이라는 전시회를 했었어요. 그때 저희가 김치, 막걸리, 소주 등 대형 인포그래픽 설치 작업으로 참여했는데요. 주최 측에서 비빔밥도 추가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스터디를 해보니 ‘비빔밥’이 아니라 ‘섞어 먹는 밥’에 더 가까운 거예요. 예를 들면 국밥, 그리고 삼겹살 구워 먹고 남은 재료 다 넣고 섞어 먹는 것, 찬물에 밥 말아서 섞어 먹는 것 등등. 일본에도 오차즈케가 있긴 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섞는 것을 싫어해요. ‘그렇게 예쁘게 해놓은 걸 왜 섞느냐. 미적으로 추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한국은 달라요. 한국 대표 비빔밥의 전형은 전주비빔밥이겠지만, 일상 속 서민의 식탁에서는 아무거나 넣어도 되잖아요. 자기 기호대로 찬밥에 열무김치를 비비거나, 치즈 좋아하면 치즈를 넣는 식이죠. 김밥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의 이런 뒤섞이는 문화가 재밌는 포인트라고 생각해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국 문화 외에도 다양한 주제를 다루시는데요. 포스터의 주제는 매달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저는 ‘그냥’이라는 단어를 싫어해요. 매사에 ‘그냥’ 하지 말자고 강조합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그냥은 금기어였습니다. 그냥은 부모 자식 사이나 연인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단어라고 말해 줍니다. 모든 게 원인과 결과인데, 특히 디자인 프로젝트는 매우 공적인데 클라이언트에게 ‘그냥’ 디자인했다는 말을 쓸 수는 없지 않나요?
그리고 ‘나열’했다는 것도 말이 안 돼요. 공깃돌 5개를 던질 때도 모여있게 할지, 떨어뜨려 놓을지, 의도를 갖고 던지잖아요. 그런데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그냥 나열했다’고 하는 건 사전에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자백과 다름없는 거죠. (웃음)
그래서 저희는 포스터 주제 결정을 위해 구글 시트로 시의성, 정보성, 심미성 등 기준들을 세팅해 놓고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모읍니다. 개인의 취향은 중요하지만, 이런 걸 생산하는 데는 개인의 취향에만 치우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기준들이 더 중요해요.
아이디어는 인턴부터 대표까지 함께 생각을 모읍니다. 그러고 나서 합계를 내보기도 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검토합니다. 때로 어떤 주제는 합계 총점보다 시의성이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시의성이 중요했던 작업은 어떤 것이 있나요?
2019년에 작업했던 1919년 ‘3.1 만세운동 100주년’과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 인포그래픽 포스터입니다. 누리호 발사에 관한 것도 시의성을 고려한 경우고요. 이런 경우는 시의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눈앞의 이익보다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무’를 더 고려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민 판다 푸바오 포스터는 후이바오, 루이바오가 갓 태어날 무렵에 발행했는데 벌써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네요.
그리고 의도적으로 쌓아가는 것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2016년에 상수동의 ‘PACTORY’라는 공간은 두성종이 출신 동업자와 제가 만들었어요.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종이를 만져보고 수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인데요. 그곳에서 진행될 워크숍의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오픈 전 몇 달에 걸쳐 미리 실크스크린, 리소그래피, 레터프레스 등 수작업으로 하는 디자인 제작 시리즈를 만들었죠.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포스터 디자인 프로세스가 궁금합니다.
‘기획개요 마인드맵’을 저희만의 프레임으로 만들어 놓고 그걸 가장 먼저 채웁니다. 저희는 이걸 나침판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여기에는,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대신해서’, ‘타겟 누구에게’, ‘왜 저들이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등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겉보기에는 너무 간단한 방법이라서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정말 효과적이고 중요한 단계입니다.
교과서 같이 텍스트의 단락들로 계속 이어지는 정보를 이공삼에서는 ‘리스트형 정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정보는 눈에 잘 안들어오기도 하고 빠른 이해가 어려워요. 그래서 우리는 리스트형 정보를 반드시 마인드맵으로 정리합니다. 정리할 때 유의 사항은 문장을 *‘개조식’으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정보의 **’하이어라키’와 카테고리가 잘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이후, 본격적으로 메인 마인드맵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자료를 모으다 보면 팀원들끼리도 이게 우선인지, 저게 우선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나침판으로 다시 돌아가서 함께 살펴봅니다. 그러면 누가 타겟이고 왜 이 정보를 만드는지 환기가 되고 합리적인 의견일치가 가능해 집니다.
*개조식: 부호(또는 번호)와 들여쓰기를 활용해 문서의 구조를 시각화한 형식.
글을 쓸 때, 글 앞에 부호나 번호를 붙여가며 중요한 요점을 정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보고서나 기획서는 서술식보다 개조식으로 쓰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하이어라키: 정보의 위계/계층. 마인드 맵에서 정보의 중요도를 시각적으로 정리할 때 중요한 기준.
이와 함께 정보의 갈래를 정리하는 카테고리제이션도 중요하다.
인포그래픽 포스터 한 장에 많은 정보와 그래픽 작업이 필요한데요. 작업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아요.
<스트리트H>의 인포그래픽 포스터는 2015년 6월부터 한 달에 한 종씩 제작하고 있어요. 매달 디자인 팀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담당자가 됩니다. 때로는 서로 두레처럼 도와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전체 진행(주제 선정부터 마인드맵, 자료조사,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은 담당자가 메인이 되어서 진행해요. 특이한 점은 주제 기획, 조사, 디자인까지 디자이너가 완결한다는 것입니다. 인포그래픽에서 편집팀의 역할은 교정, 교열과 추가 의견 정도입니다. 텍스트 콘텐츠 가공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디자이너들을 위해 마인드맵을 활용하게 된 것이죠.
텍스트를 구조화하는 마인드맵 단계를 거치면 ‘내러티브 다이어그램’ 단계로 넘어갑니다.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은 뭔가요?
‘서술적인 정보 관계 구조를 표현하는 다이어그램’이란 의미입니다. ‘내러티브 다이어그램(Narrative Diagram)’이라고 표현한 건 일반적인 다이어그램과 구별하고 싶어서였어요. 해외 컨퍼런스 발표 때도 영어로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이라고 표현합니다. 나중에 물어보면 그런 용어를 처음 듣지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제가 만든 이 용어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웃음) 우리가 만든 단계가 인정된 느낌이라서요.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일상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기획개요 마인드맵 작성 -> 텍스트 정보 구조화 -> 시각적 정보 구조화
이 중 ‘텍스트 정보 구조화’가 중요합니다. 잘 구조화된 텍스트 정보를 시각적으로 발전시키면 기억에 오래 남는 정보 패키지가 됩니다. 그러니 학생들의 책 읽기 등에 활용하면 아주 효과적이지요.
올해 초, 선유도서관과 함께 초등 3, 4학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내용은 마인드맵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막연하게 좋아하는 이야기를 고르고 좋아하는 이유, 스토리라인, 등장인물들의 관계,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 등을 마인드맵을 통해 정리하게 했어요. 몇 주 동안 계속 질문과 대답을 하며 마인드맵으로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물을 보면 정말 초등학생의 것이 맞을까 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냥 읽는 책은 쉽게 잊혀집니다. 저는 이것을 텍스트의 휘발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마인드맵으로 구조화하는 과정 동안, 그리고 완성된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들여다 보면 기억 속에 아주 오래 남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게 되는 셈이니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포그래픽 디자인을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저는 좋은 인포그래픽을 삼각형으로 비유해서 얘기합니다. 정보가 잘 전달되기 위해서는 ‘유익한 정보’ ‘이해하기 쉬운 정보’ ‘매력적인 정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야 해요.
예를 들어 교과서는 유익한 정보이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죠. 그래서 참고서가 이해하기 쉽게 해주려고 밑줄, 형광펜, 다이어그램들을 사용하면서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도 매력은 없어요. 참고서 재밌다고 하는 학생들은 드물지 않을까요?
그런데 학습 만화는 읽지 말라고 해도 식탁 앞에서도 손에서 놓지 않잖아요. 이유가 뭘까요. 내용은 같지만 이해하기 쉽게, 시각적으로도 재미있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매력이고 전달의 핵심입니다.
매력적인 정보에 인포그래픽의 일러스트 스타일이나 인터랙티브 방식 같은 것도 중요할까요?
모든 스타일이나 형식은 기획개요 마인드맵을 통해 설정됩니다. 누가 어떤 타겟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 내용에는 어떤 방식이 적합할까? 인쇄물도 팜플렛, 포스터 등 형식이 다양하고 때로는 *모션 인포그래픽,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이 적절할 때가 있어요. 즉흥적인 판단이 아니라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2018년 7월 경향신문과 함께 작업했던 “평양냉면”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모션 인포그래픽 : 정보를 영상화 하여 제공하는 인포그래픽.
정보의 스토리화, 다양한 강조점 사용, 사운드 효과 등의 장점이 있다.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 : 인터랙션을 이용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인포그래픽.
모션 인포그래픽의 장점을 포함하면서 수용자의 정보 수용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
평양냉면 인터랙티브 아티클 작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언론재단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언론 종사자들이 묻습니다. 종이 신문의 미래가 어둡고 뉴미디어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큰 신문을 어떻게 조그마한 스마트폰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많았어요.
그런데 왜 꼭 그래야만 할까요? 종이 신문은 신문대로 지상 최대의 판형이에요. 손으로 만지고 넘겨 보는 경험과 물성이 있죠. 그에 반면 스마트폰은 종이가 갖지 못하는 모바일, 인터랙티브함이 있는데 왜 굳이 종이신문을 스마트폰 안에 넣어야 하냐는 거죠. 미디어의 특성에 따라 다른 형식의 콘텐츠를 담아내는 것이 필요한거죠.
그래서 경향신문에 평양냉면 지면 인포그래픽과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을 동시에 제안했어요. 같은 주제지만 지면에서는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와 신흥, 두 갈래로 큰 지면에서 보여주고 인터랙티브 쪽에서는 스마트폰을 통해 재료 하나하나를 직접 선택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냉면집을 찾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평양냉면에 맨스플레인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중년 아저씨들의 잔소리죠.(웃음) 그러나 인터랙티브를 통해 누구나 마음 편하게 자신의 취향에 맞는 평양냉면을 고를 수 있게 한 거죠. 인포그래픽이 수직적인 문화와 정보를 수평적으로 개선했다고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지금까지 작업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작업은 무엇인가요?
역시나 3.1운동 100주년 기념 프로젝트예요. 자체적으로 제작한 이 3.1운동 인포그래픽을 가지고 임시정부기념관 설립위원회에 접촉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인포그래픽도 제작했어요. 임시정부가 3.1운동 이후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설득한 거죠.
3.1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3.1절 전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인과관계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역사를 점(點, dot)으로 암기하고, 시험으로 접하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3.1절을 단순한 숫자나 하나의 인물이 아닌 ‘인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사건들이 영향을 미쳐 3.1운동이 준비되었나. 준비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선언문의 작성, 선언문의 의미 등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국내외적 변화까지 담아냈습니다. 눈으로 흐름을 따라가면 책 1권 이상의 정보를 쉽고 흥미롭게 이해하고 기억에 담을 수 있습니다. 이 포스터는 역사교사 모임에도 배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저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 중심의 직업인 것 같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책무를 가지고 눈앞의 이익과 상관없이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TALK THEME 2. 인포그래픽 디자이너의 세계
해외에서 디자인 어워드 수상과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요. 해외와 한국 인포그래픽 디자인의 차이를 느끼시나요?
그래픽 디자인의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수신자가 누구고 발신자가 누구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거겠죠. 뉴스 미디어인가, 흥미 위주 콘텐츠 미디어인가, 출판사인가 이런 차이겠죠. 그리고 회사의 규모, 예산이 미치는 부분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 어워드는 “자기 증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클라이언트들이 인포그래픽 분야가 낯설다 보니 이공삼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신뢰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국내외 인포그래픽과 디자인 공모전에 응모했고 다수의 좋은 성과를 내었습니다. 그랬더니 클라이언트들의 시선이 바뀌더군요. 물론 우리 내부의 스탭들에게도 좋은 격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해외 공모전 수상을 통해 해외에서 이공삼의 인포그래픽이 알려지게 되었고 워크숍 또는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초대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요즘도 디자인 컨퍼런스나 어워드에서 만난 해외 인포그래픽 디자이너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도 관심을 갖고 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인포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 비해 적어서 그런지 만나면 따듯한 형제애 같은 게 있어요.
수많은 인포그래픽이 있지만 핀터레스트에서 인포그래픽을 검색해 보면, 이공삼을 비껴갈 수가 없어요. 우리처럼 100개 이상 일관된 형식으로 만들고 있는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표절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공삼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이런 작업을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지식을 소비하고 있어요. 사람이 지식을 교환하는 첫 번째 방식은 입말과 글말일 텐데요. 인간의 언어는 기차처럼 선형적이어서, 처음과 끝을 다 연결해야 메시지를 온전히 전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 논리가 복잡한 정보일수록 정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워지죠.
이공삼은 문자언어의 한계를 인포그래픽 디자인으로 극복해 왔습니다. 수십년 동안 인포그래픽을 연구해온 디자이너가 알려주는 ‘복잡한 지식을 척 보면 딱 알아보도록 만드는 방법’ 어떠셨나요?
디자인의 힘으로 문자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분들에게 이번 인터뷰가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한지, 이전에는 어떤 곳에 많이 쓰였었나요?
1980년대 이전에 한지가 가장 많이 사용된 분야는 건축 자재 분야였어요. 장판지, 벽지 수요가 많았죠. 병풍이나 족자처럼 표구 분야 수요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건축 자재는 기계로 만든 종이와 PVC 장판으로 대체되고, 표구는 액자로 대체됐죠. 한지의 역할이 대체되니, 쓰임새 역시 점점 줄고 있습니다.
03. 연구, 디자인, 도전
혹시 뜻밖의 산업 군에서 한지를 써보겠다는 제안이 있나요?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 연구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지를 차량 내부 인테리어에 사용하고 싶은데, 같이 고민해달라는 의뢰였죠. 자동차에 종이를 쓰는 것이 자칫 불가능해 보였지만 한지라면 다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 오늘날 한지를 새롭게 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협업에 나섰습니다.
자동차 업계에서 요구하는 스펙에 맞출 수 있었나요? 한지는 수공예품이라 제작이 까다로웠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차량 인테리어용 한지는 실패했어요. 양산(대량 생산)이 어렵습니다. 튼튼한 한지를 만들더라도 균일한 품질을 내기 힘들었어요. 그리고 높은 열을 가하거나 200톤에 달하는 압착기로 한지를 누르는 실험을 거쳤는데, 양산용 자동차에 적용되는 극한 테스트는 한지도 견딜 수 없었어요.
지금은 공예가 선생님이 모터쇼에 출품할 콘셉트카에 직접 설치하는 수준이 최선이죠. 그래도 이런 시도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지의 현대적인 쓸모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산업 군에 있다는 것을 더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기억나는 다른 한지 연구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종로 물나무 사진관과 손잡고 ‘사진 인화용 한지’ 개발을 마쳤습니다. 저희는 ‘인쇄용 도침 한지’라 부르는데요. 성분은 국산닥 100%. 종이 분류 기준으로는 *2합 순지입니다. 한지에 디지털 사진을 인화하려는 디자인 프로젝트였습니다. 기존 한지를 프린트기에 걸면 종이 섬유질이 굵은 탓인지 한지가 기계에 걸리거나 구겨지는 문제가 있었어요.
*2합(이합)순지 : 얇은 홑겹의 순지를 두 장으로 합하여 만든 종이
‘도침’이라는 한지 제작 공정이 있어요. 종이를 두드려서 표면을 고르게 만드는 일인데, 도침을 강화하며 문제를 해결했죠. 이 종이는 미색 한지의 색감을 깊이 있게 유지하는 방향으로 개선을 시도 중입니다.
한지도 샘플북이 있을까요? 디자이너에게 종이 샘플북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있습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산하 홍보관에서 만든 ‘한지 미리보기 책’이 대표적입니다. 몇몇 종이 업체도 생산 가능한 한지들을 묶어 샘플북을 내고, 색이 들어간 색한지를 모아 색깔을 구분하기 위해 샘플북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기계지 샘플북과는 다릅니다. 훗날 샘플북에 있는 한지가 다 떨어져, 그 종이를 비슷하게 만들더라도 결과적으로 비슷하지 않은 종이가 나오거든요. 컬러 팔레트를 찍어 오차 없이 디자인을 보려는 기계지 샘플북과 다릅니다. 제 생각에 한지 샘플북은 역사적인 기록물에 가깝다 봐요.
04. 한지의 내일은?
한지가 요즘 위기라 들었습니다. 한지 업계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유통자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한지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한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줄고, 종이 수요 자체도 줄어서 생산도 나란히 줄어드는 상황이죠. 예컨대 색한지(色韓紙)는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읍니다. 지역별 한지는 염료의 숙성과 건조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나는데요. 이것은 전통한지의 특색이기도 해서 일부러 가게에 질 좋은 물건을 모아두려 해요.
전국 각지의 장인들이 꾸준히 생산을 하셔야 다양한 색을 지닌 한지가 나오는데 그렇지 못해서 큰 고민입니다. 인기 있는 색은 계속 만들어지더라도, 중간을 받쳐줄 색이 줄어드니 결과적으로 한지의 컬러 스펙트럼이 줄어드는 거죠.
또 다른 문제는 수입 한지들을 선별하는 일인데요. 수입 한지의 재료 원산지나 생산지역을 추적하기 쉽지 않은 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지 품질 관리는 앞서 언급한 다양성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내에서 만든 것도 표준을 만드는 게 어려웠는데, 해외에서 만든 것은 관리가 더 어렵죠.
한지의 표준이나 품질관리 기준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한지 품질 표시제’라는 게 있습니다. 한지 생산자, 제조 방식, 재료 원산지 등의 제반 사항을 표기하는데요. 한지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된 제도입니다. 한지를 사용하는 구매자에게 한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전통한지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었어요.
취지는 좋은데,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모자랍니다. 만약 한지 생산처에서 사정이 생겨 표기된 정보를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한지는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공정을 거치는데, 이 중 한 부분만 헐거워도 품질 격차가 나타나요. 사람이 만드는 종이라서 결국 편차가 나타납니다. 아쉽지만 유명무실한 제도가 됐지요.
‘한지를 외국에서 싸게 들여오는 건 어떨까?’ ‘한국 전통과 한지의 우수성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자!’ 이런 고민으로는 한지가 점점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한지는 지금 실제로 위태롭습니다. 특히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진 전통한지가 지금은 후계자가 없어서, 각 지역의 장인이 돌아가시면서, 지역의 전통한지 생산이 끊어지는 곳이 많습니다.
전통이 단절되는 것도 큰 문제군요.
한국은 ‘전통’이라는 화두가 ‘옛 것의 계승’과 연관됩니다. 그 어느 나라보다 변화가 빠르지만, 전통이나 전통의 순서를 건드리는 일만큼은 변화가 더디죠. 제 생각에 한국에서 ‘전통’과 ‘보존’이라는 개념을, 많은 분들이 같은 맥락으로 인식합니다. 저는 두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통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되는 것입니다. 한지의 전통은 ‘닥나무 섬유로 만든 종이’라는 범주 안에서 시대의 요구에 맞춰 변화합니다. 보존은 문화재 보존용 한지나 전통한지 제작 기법처럼 ‘지켜야 할 옛 것’에 필요한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계승된 옛 것이 보존을 벗어나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다’라며 배척 받는 게 현실입니다. 보존이라는 명분이 전통을 막는 셈이죠.
“옛 것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건 계승이지 전통이 아니다.” 라는, 예전에 들었던 어느 지식인의 말씀이 기억나네요.
해외 사례 중 참고할 만한 게 있을까요?
해외 출장 때 만난 화지(일본 전통 종이) 관계자의 말씀입니다.
“원료가 국산인지 수입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시대에 사용될 수 있는 종이를 만들어 잊히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하죠. 옛날 방식으로 자국 전통 종이를 만드는 것은 계승되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현대에도 사용될 수 있는 종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이 말씀이 한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도 부합한다고 봐요. 혁신적인 제작시도나 제조공정의 현대화 같은 건 존중받아야겠지요. 해외 전통 종이 관계자분들은 저에게 “한지에 옻칠을 하는 건 좋은데, 왜 피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성분을 빼지 않느냐?”는 피드백을 전해주셨어요. 옻칠한지에 쓰는 원료는 옻나무에서 추출한 걸 그대로 칠하거든요. 실제로 한국에서 전통 옻을 다루는 분들은 팔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 있어요. 옻의 독한 성분 때문이죠.
‘옻의 특정 성분을 분리하면 그것은 정말로 전통에서 멀어지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대화 과정에서 전통의 개념이나 전통을 규정하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뒤섞이는 것 같아요.
한지의 대중화를 위해 어떤 것을 해볼 수 있을까요?
유통자 입장에서 퍼포먼스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일종의 쇼 엔터테인먼트를 제안하고 싶네요.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니면, 서예나 악기 연주하는 분이 계시죠. 꿀타래 가게 사장님도 타래를 두 배 네 배 늘어뜨리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볼거리를 만드시거든요. 한지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퍼포먼스가 거의 없었어요. 한지에 사람들의 감각을 사로잡는 특별한 물성이 없진 않거든요. 앞으로는 한지를 이용한 예능적인 퍼포먼스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인사동에서 한지를 뜨고 그걸 대중 앞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30여 년 전, 동양한지가 종로 견지동에 있을 때 매장 안에서 한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국에서도 촬영을 왔었고. 거리를 다니시던 분들이 한지에 관심이 생겨 문의도 많이 주셨어요. 한지가 건조될 때까지 기다리다 종이를 사 가셨던 손님들이 있었습니다.
생산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관광지에 체험형 전시공간을 따로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지를 좀 더 대중적인 곳에서 재미있게 퍼포먼스를 하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자체나 공공기관에서 한지산업을 위한 지원사업을 추진하신다면! 생산자나 유통자가 문화 진흥 프로젝트를 직접 만들 수 있게 지원을 하거나, 대중적인 공간에서 감각적인 퍼포먼스를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개선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동양한지는 국산 한지를 지키고 싶어요. 1968년부터 대대로 인사동을 지킨 전문가로서, 앞으로도 국내 생산 업체와 상생하려고 합니다. 한지를 디자인에 활용하는 분들도 국산 한지를 위주로 사용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2부 인터뷰는 한지의 오늘을 업계 전문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간이었어요. 한지를 만드는 사람, 한지를 쓰려는 사람 모두 고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한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자동차 인테리어 소재 연구나 사진 인화용 한지개발은 디자이너의 의지가 느껴지는 시도여서 눈길을 끄네요. 여러분은 한지의 내일을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서로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이종희 이병수는 국일사 사장님인데요. 이름 자수 전문가입니다. 손글씨를 잘 쓰고요. 영문 필기체를 아름답게 새깁니다. 미국대통령이 한국에 오면 맞춤양복을 만든다는 거. 혹시 알고 계세요? 이웃가게인 썬양복점이 미국대통령 양복맞춤을 자주 했는데요. 양복에 이름 새기는 건 꼭 국일사로 오더가 와요. 레이건부터 바이든까지 이병수가 새겼습니다.
이병수 이종희는 아내이자 동료입니다. 사람들이 들고 오는 그래픽 자수 시안을 직접 새깁니다. 이병수가 그래픽 시안의 테두리를 그려서 본을 뜨면, 이종희가 그림을 쓱 보고 옷 위에 그림을 척 새겨요. 한 번 쓱 본 그림을 손자수로 만드는 건 제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이종희 밖에 못해요.
01. “흑백사진으로 본 7080 이태원 전성기”
이병수 옛날 얘기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사진을 꺼내봤어요. 한 번 볼래요? 당시 테일러 샵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런 모습 기억하는 사람은 진짜 이태원 토박이죠.
두 분은 언제 이곳에 터잡으셨나요?
이병수 우리 둘 다 1974년. 나이는 각자 20대 초중반 일 때네요. 저는 동두천에서 군부대 앞 자수가게에서 배웠어요. ‘국일사’라는 이름은 제가 일 배웠던 가게명을 딴 겁니다. 내 옆에 계신 분은 용산역 근처 미싱자수학원에서 미싱을 배웠지요. 아내는 이태원 오기 전에 다니던 미싱학원에서 수업을 맡았던 자수 선생님이었어요. 실력은 전국기능올림픽에 나갈 정도였고요. 그렇게 전국 각지에서 각자 배워온 걸로 이태원 시장에 자리 잡았던 기술자가 많아요. 그때 미싱 기술자를 고용한 사업체가 10곳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대부분 은퇴하거나 그만뒀지만요.
이종희 우린 이웃 가게 친구였어요. 그러다 어느 날. 옆에 있는 이병수 씨가 날 쫓아다니기 시작했어요(웃음). 우리 남편이 젊었을 땐 훤했거든요. 미소도 맑고 선했어요. 만나다 보니 79년 11월에 결혼했네요.
7080 이태원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이종희 80년대부터는 이태원에서 재봉틀로 할 수 있는 사업을 여러 방면으로 시도했었어요. 킹샵이라고 직원을 서너 명 뽑아다 시장건물에서 손자수 전문샵을 하기도 했는데, 2009년부터 하던 사업 다 접고 국일사만 집중하고 있어요. 우리 둘이서만 일한 지는 이제 20년 조금 넘었어요.
이병수 이건 용산구청에서 녹사평역 넘어가는 로터리인데요. 여기에 콜트 장군 동상이란 게 있었던 시절이에요. 6.25전쟁 때 미군 사령관인데 이태원 랜드마크였죠.
사진 보면 이태원이 서울이 아니라 미국 도시 같아요!
이종희 지금 평택으로 미군 기지를 옮겨서 뜸한데, 당시 이태원은 정말 미국 사람이 많았어요. 주한미군 가족도 많이 머물렀죠. 시장에서도 한국생활잡화보다 미군이나 미군 가족이 살 법한 물건을 많이 팔았지. 진짜 밍크는 아닌데, 밍크털처럼 부들부들한 담요가 그때 많이 팔렸어요. 양복점이나 빅사이즈 옷가게도 그런 영향이란 말이죠.
우리는 주한 미8군 계급장 같은 걸 직접 해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정겨웠던 시절이에요. 어느 미군이 양말 가게 단골이면 ‘헤이~싹쓰맨~’하면서 놀러 와요. 7월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이태원 사람들이 용산 미군기지에 초청받아서 가족끼리 파티도 하고 그랬지. 칠면조도 먹고 케이크 떠서 나눠먹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기억에 남는 당시 단골손님이 있나요?
이종희 1984년쯤 일인데 이태원 양복점 단골손님이던 장교가 퇴역 앞두고 단골가게 사장님들을 싹 다 모았어요. 덕분에 한국에서 즐거웠다고. 송탄에 같이 가자고. 기념으로 경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그래서 이웃 가게 사람들이랑 미군 비행장 들어가서 아산만 바다 위를 40분쯤 비행했죠. 옛 이태원 시장 단골 손님이 우리에게 전했던 커다란 감사인사 였어요.
낭만이 있었네요. 영화 <탑건 : 매버릭> 엔딩 같습니다.
이종희 이태원이 미군이 다녔던 클럽이 있어서 그런지 거친 이방인이 많을 거란 오해가 있어요. 물론 그런 사람도 있죠. 오히려 이태원에서 만났던 미군은 대부분 겸손했어요. 군인이니까 기본적으로 듬직하지. 성격이 대체로 정직하고 가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특히 가족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 젠틀한 사람을 손님으로 많이 만났던 거 같고. 영어도 덕분에 쉽게 배웠던 거 같아요. 복무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한테 우리가 양복 셔츠에 이름자수 많이 해줬어요.
이병수 70년대 이태원은 양복점이 유명했죠. 기술자를 고용해서 의류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동대문이 도매시장이라면, 이태원은 까탈스러운 오더를 맞춰주는 소매시장이었어요. 특히 연예인 무대의상을 잘 만들었죠.
우리가 지금은 핸드메이드 자수 작업을 하지만, 양복점에서 맡긴 옷에 부속품이나 특별 오더 디테일을 달아주는 작업도 많이 했어요. 창고나 서랍장 열면 테일러샵에서 쓰던 금장 단추나 옛날 실같은 게 아직도 있어요. 여기 보세요.
세상에! 이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셔야 하는 유물인데요!
이병수 이거 다 가져가셔도 될 거 같아요.(웃음)
이종희 의류는 집단 제작이에요. 양복을 테일러샵 한곳이 다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단추나 실같은 부속품을 팔거나 자수 집처럼 보조 작업을 해주는 가게가 나란히 움직여요. 그러다 보니 자수하는 사람은 별일을 다 맡아요. 우리는 매번 다른 자수를 놔야 하잖아요. 해봤던 자수는 더 잘해야 하고, 못 해본 작업은 하면서 느는 거죠.
이병수 우리 월급이 1970년대 당시 45,000원입니다. 당시 말단 공무원 월급이 25,000원이고 하숙비나 월세가 5,000~6,000원 했을 거예요. 재능 있고 기술이 있으면 일한 만큼 보상은 받는 거죠. 지금은 의류사업이 크게 줄긴 했는데, 우린 미싱 기술이 있으니까 시대에 맞춰서 할 일을 해요.
02. “커스터마이징 서비스를 시작하다.”
한때 이태원 패션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시장에는 지금도 미국 워싱턴 상원 의원이 양복을 주문하는 테일러샵이 있더군요.
이병수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연예계에서 들어오는 창작 의류 제작도 이태원이 잘했어요. 그러다 강남 개발 끝나고 패션으로 청담이 뜨면서 완전 흐름이 넘어갔어요. 우리도 변해야 했지. 어쨌거나 유행이 변하고 상권이 변해도 자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이종희 대단했죠. 88 서울 올림픽 개최준비 때부터 한 풀 꺾였어요. 상표 도용 단속이 있었는데, 이후로 조금씩 상권 활기가 떨어졌지요.
지금은 디자인이나 저작권을 귀하게 다루는 게 상식이지만, 80년대 만해도 그런 인식이 희미했어요. 셔츠에 나이키 스우시 로고 그려달라면 그려주고, 체육복에 줄 세 개 그어서 아디다스처럼 만드는 게 대수롭지 않았던 거였죠. 올림픽 맞이하면서 외국인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니까. 도시미관이나 미풍양속 점검한다는 이유로 짝퉁 의류 생산 단속이 심해졌어요. 문 닫아야 하는 가게도 많았어요.
이종희 그래서인지 90년대에는 비보이팀이나 풋볼팀에서 단체 유니폼 손자수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어요. 당장 어제만 해도 오랜 단골 손님이 구멍 난 데님 재킷을 가지고 왔죠. 거기에 꽃자수를 넣어달라네요.
이제 우리는 상표 걱정 없는 자수를 하는 거죠. 손님들의 사적인 커스터마이징 서비스를 맡는 게 즐거워요. 국일사는 그래서 개인이나 팀을 위한 자수 작업을 전문으로 합니다.
어쩐지 가게 안에 가방이나 여행용 캐리어에 매는 네임태그가 많습니다.
이종희 항공사 직원이 국일사를 많이 찾아와요. 항공사 직원들은 동료랑 똑같은 액세서리 맞추는 게 문화인가 봐요.
이병수 얼마 전 ‘뽀빠이’라는 일본 잡지에서 취재하러 왔는데 국일사가 서울여행 추천장소로 소개됐어요. 서울 놀러왔다가 기념품으로 러기지 네임태그 하나 만들어 가는 곳으로요. 요즘엔 일본인 관광객이 크게 늘었어요.
이병수 종종 어학당 같은 곳에서 외국인 유학생들 네이밍 자수해달라고 가방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요. 그 친구들은 말 배우러 온 거니까 사교적인 활동을 많이 하잖아요. 농구나 축구하면서 친해지고. 여행도 많이 다닐 테고. 뒤죽박죽 어울리다 자기 물건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거지. 거기에다 한글도 열심히 배우고 있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글씨체로 메시지를 새기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야. 한국에서 뭔가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나나 봐.(웃음)
이종희 한국에서는 물건 잃어버려도 비교적 잘 찾을 수 있잖아요. 외국에선 잃어버린 물건을 도로 찾기 힘들대요. 그래서 네임태그 아이템이 꼭 필요한 거죠. 문화 차이 때문에 생긴 수요라 재밌는 오더예요.
손자수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뭘까요?
이종희 일단 그라데이션. 컴퓨터 자수는 깔끔하죠. 그래픽도 정교하고. 그런데 그라데이션 구현은 컴퓨터로는 어려워요. 실 위에 실을 덧대는 자수가 아닌 거죠. 예시로 제가 예전에 작업한 스카잔 재킷을 보여드릴게요.
강아지 얼굴을 큼지막하게 등판에 새긴 건데요. 색을 유심히 보면 실 사이에 그림자 같은 게 져요. 컴퓨터로는 이런 음영을 낼 수 없어요. 엇비슷한 색으로 실을 바꿔 넣으면 입체감을 살릴 수 있거든요. ”검은 실을 수놓은 부분에 살짝 연한 파랑을 끼워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하는 거죠.
이병수 기술만 있으면 컴퓨터보다 빠르게 작업하는 경우도 있어요. 로고면 로고, 욕이면 욕.(웃음) 주문자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표현할 수 있고요. 뭐든 다 되니까 예뻐요. 가끔은 “맙소사… 굳이 이런 걸 꼭 새겨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요. 가게에 걸린 샘플 자수 패치는 컴퓨터 자수가 대부분이지만, 원한다면 손님이 원하는 방향에 맞춰서 따로 재현할 수 있어요.
이종희 다들 사연을 갖고 만들어 달라는 거니까. 예술작품이라 여기고 열심히 해요. 가끔 만드는 나도 깜짝 놀랄 디자인이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다 만들고 나서 주인한테 연락하지만, 너무 잘 만든 작품은 가끔 되돌려주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작업 마치면 조금씩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기고 있어요. 우리 가게에서 자수 작업하신 분들 따로 연락주시면 많이 반가울 거 같아.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쓰이고 있을지 궁금해요. 막내사위가 운영하는 국일사 인스타그램에 올려드릴 테니까 많이 연락 주세요.
자수 작업을 맡기는 비용이 궁금합니다.
이병수 러기지 태그에 들어가는 네이밍 자수는 보통 6,000원에서 12,000원까지. 의류에 새기는 그래픽 자수는 10,000원 부터 시작해요. 스카잔 재킷처럼 등판에 넓은 면적을 한 땀 한 땀 복잡하게 따는 작업은 직접 보고 견적을 내드리고 있습니다.
이종희 우리는 작업하느라 바빠서 SNS할 여력은 없어요. 대신 막내사위가 작품 기록과 대외소통을 맡고 있죠. 우리더러 “장모님 장인어른 가격 좀 더 올려 받으셔라!”라고 하는데…(웃음)
우리는 일단 열린 마음으로 손님이 맡긴 시안을 봐드려요. 가게가 좁기도 하고 사람이 몰리면 난감할 수도 있는데. 직접 와서 언제든 궁금한 거 물어보세요. 우리가 가게에 있을 때, 시간만 나면 다 직접 안내해드려요.
03. “내가 자수 디자인을 사랑하는 이유”
40년 넘게 하셨는데 혹시 일이 질리진 않으세요?
이종희 전혀! 실밥 잘 끊고 싶어서 손톱도 늘 예리하게 깎아요.(웃음)
일을 질리지 않게 만드는 의뢰가 종종 있어요. 예전에 제가 정조대왕 화성능행도를 본떠서 옷에 자수를 새겼었어요. 해마다 패션디자인과 사람이나 의류 공부하는 학생들이 공수가 많이 드는 시안을 들고 와요. 기억에 남는 졸업작품 중 하나였죠.
조선 풍속화 보면 그림 속에 사람이 엄청 많잖아요. 인물 하나하나를 의류에 새겨서 그래픽 디테일로 새기는 작업이니까. 돈도 한두 푼 드는 게 아니거든요.
그때 나한테 졸업작품 맡긴 학생한테 당부했어요. 이런 자수는 완전히 똑같이 재현하는 게 아니라고. 너무 기대하면 곤란하다고. 나도 감각을 발휘해서 툭툭 건드리는 거라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100%에 도달하는 거군요.
이종희 맞아요. 손끝 감각에 집중하면 100%를 넘기도 해요. 중요한 건 우리가 신나는 거죠. 실은 뭘 쓸지. 색의 음영은 어디서 강조할지. 신나서 생각하다 보면 완성도가 100%에 가까워져요.
컴퓨터 자수 완성도를 100%라 치면, 손자수는 처음부터 100%를 할 수 없어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실밥을 뜯어서 다시 새긴다거나. 미리 연습하면서 감을 잡아본다거나 하면서 100%에 닿으려는 거죠.
90%에 그칠 걸 98~99%까지 만들면, 거기서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어요. 단박에 100%를 훌쩍 넘는 결과가 나오면 그 나름대로 예쁘고요. 같은 시안을 새겨도 아주 미세하게 달라요. 그게 사람이 다루는 재봉틀 자수의 매력이고 국일사 자수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국일사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이병수 벌이는 옛날이 더 나을 순 있는데, 지금도 좋아요. 50년 묵은 기계와 이제 한 몸이 된 느낌이에요. 우리는 각자 작업하는 자리는 서로 바꿔 앉지도 않아요. 20년 동안 길들인 작업환경 안에서 우리는 기술자로서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죠. 평면 안에 실을 새겨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는 건 이제 자유자재입니다.
세상이 변하는 걸 느껴요. 이태원 옆 보광동에 폴리텍대학이 있잖아요. 기술 가르치는 학교에 사람이 제법 늘었더라고요. 우리가 수십 년 했던 손자수의 가치도 높아지는 거죠.
이종희 우리가 디자인한 결과를 손님이 마주했을 때, 그분들이 리액션을 한단 말이죠. 기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맡긴 자수가 자기한테 어떤 의미인지. 우리한테 신나서 말해줘요. 사람이 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짜릿하잖아요. 소통하는 재미도 있고요. 아날로그의 매력이라 생각해요. 손님은 원하는 걸 내게 가져오고. 나는 디자인을 완성하고. 손님은 행복하고. 그뿐이죠.
기술 전수를 진지하게 고민하실 거 같아요.
이병수 저희가 이 일 배울 때만 해도 자수 기술자가 천대받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젠 기술 가진 보람이 있고 자부심도 있어요. 자식들도 다 손자수 하나로 키웠고요. 올해 자수 배우고 싶다는 젊은 사람이 국일사를 찾아왔어요. 반갑긴 한데 일단 셋이 쓰긴 좁은 곳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머신을 내 줄 순 없어서 일단 돌려보냈어요. 배우겠다는 사람도 재봉틀을 구해야하고,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죠.
이종희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우리한테 용기를 줘요. 우리는 그냥 만날 하는 일인데 백화점에서 팝업스토어를 해보라고 하거나 지역축제에 초대해서 재봉틀로 공개 자수 작업을 해달라고 불러요. 속는 셈 치고 따라가면, 대부분 우리를 존중하고 즐거워하거든요. 여태까지 너무 이태원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냈나 싶네.(웃음)
이제 다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가치’를 추구하고 살아요. 그래서 우리 손자수 기술이 지금 세상에 더 어울리는 기술이 아닐까 싶어요.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환영해요. 잘 가르치고 싶어요.
😈 이 날, 이미지로만 보여드린 프라이스 로고를 보시고 이종희님은 즉석에서 펜으로 슥슥 밑그림을 그리고 자수를 놓아주셨어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옮기는 일은 많은 집중력과 관찰력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보고 그린 러프 스케치 위에 자수를 직접 놓는 장면은 좀처럼 볼 기회가 없었는데 정말 정교하고 빠르시더라고요!
국일사의 사장님들은 본인들을 기술자라고 하셨지만, 일평생 재봉틀과 한몸이 되어 작업을 해오신 모습이 장인의 경지라고 느껴졌어요. 요즘은 일도, 머무는 곳도 자주 옮기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는데요.
여러분은 일평생 하나의 직업을 가져야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그 일을 수십년 동안 같은 동네에서 하게 된다면 어떤 감정이 들 것 같나요?
frice는 한국의 디자이너를 만나,
‘한국적인 디자인 vs 한국의 디자인’ 두 개념의 차이를 묻고 각자의 생각을 수집하고 있어요.
한국을 무대로 십여년 간 디자인 실무를 맡은 인성님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솔직히 두 개념을 구분하는 게 어려워요!(웃음)
먼저 제 입장부터 말씀드리면, ‘한국적인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태도가 점점 더 필요할 것이라 봐요. 지금처럼 많은 정보와 이미지가 빠르게 공유되는 세상. 모든 게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미래로 갈수록 말이죠. 소위 말하는 ‘전통’에 갇힐 필요는 없어요. 로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우리가 사는 집,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거기에 한국적인 생활 방식이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유래한 기능과 물질의 시대를 지나, 동양의 정신적인 측면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고 봐요. 최근 보이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동양문화의 태도를 여러 문화권에서 흥미롭게 여기는데, 그런 관심이 요즘 한국으로 향하는 것 같아요. 한국은 문화적으로 다른 문화권보다 피드백이 빠르고 개방적입니다. 동양의 토착 문화를 중국과 일본만큼 폐쇄적으로 가두지 않는다면, 거기서 한국적인 디자인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요?
“한국적인 미감은 대체 무엇일까?”
Designer’s comment
<티하우스 하다(teahouse hada)>는 한.중.일 차문화를 다루는 공간입니다. 찻집이면서 작은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 수업이 열리는 교실인데요. 한국적인 미감을 간직한 곳이여서 소개합니다. 세 나라의 동양적인 분위기를 공존시키면서 한국적인 요소도 비중있게 다뤄야 했어요. 공간 설계는 AREA+라는 인테리어 스튜디오에서 진행했고, 저는 프로젝트 처음부터 브랜드 개발과 디자인 파트 협업을 맡았죠. 티하우스 론칭이 끝난 지금도 디자인 업무와 사진 촬영, SNS 운영을 맡고 있습니다. 벌써 3년이 지났네요.
<티하우스 하다>는 말씀대로 세 나라의 분위기가 전해집니다. 그 중 ‘한국적인 미감’이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요?
먼저 전통적인 스타일, 근대적인 스타일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티하우스 하다>는 전통적인 스타일이지 않을까요?
저는 한국적인 미감을 호방한 선, 은은한 매력, 화려하지 않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균형감, 옅지만 분명한 색채감이라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표현할 때 드러나죠. 허례허식이 없는 편인데, 공예 분야는 전반적으로 실험정신이 강한 거 같아요.
중국적인 미감은 디자인에서 볼드하고 강렬한 컬러로 나타나는 듯해요. 음과양(yin & yang)의 조화/대비를 신경 쓰는 것도 특징이네요. 일본은 정제되고 섬세한 디자인을 지향하는 것 같습니다. 선(zen,仙)을 추구하는 문화가 있었고 전통적인 미감을 옛부터 지금까지 고스란히 지켜서 내려온 영향이라 봐요.
<티하우스 하다>에서 한국적인 요소는 어떤 식으로 배치됐나요?
하얀 삼베로 감싼 가구. 한지로 만든 벽. 문으로 만든 작은 방이 있습니다. ‘여백의 미’를 바탕에 깔되, 너무 빛나지 않고 정제되지 않은 소재를 활용할 것. 공간에 어울리는 은색, 색이 말갛게 반짝이는 스틸 소재 사이니지, 포장물에도 도톰한 질감과 자연스러운 색감의 종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죠.
SNS를 통해 받는 고객들의 피드백에서는 사진의 톤이라던가 무드가 분명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브랜드와 기업의 관점에서는 브랜드 이미지가 곧 정체성이고, 이것은 비즈니스의 지속가능성과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필수이기 때문인데요. 이 부분은 많이 신경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아티스트와 연중 2~3회 기획전시를 엽니다. 작가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하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면서 과거와 현재의 것을 살피는데요. 작가의 개성을 티하우스와 연결하기 위해 애쓰는 편입니다.
“한국의 뷰티 브랜드가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이어야 할까?”
Designer’s comment
<디어, 클레어스 (Dear, Klairs)>라는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 쇼룸입니다. 2010년부터 기초 라인의 스킨케어 제품을 전개한 뷰티 브랜드죠. ‘미드나잇 블루 드롭’이라는 제품을 알리기 위한 팝업 스페이스를 요청. 행사를 자사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열겠다는 의사를 전달받았습니다.
팝업 스토어 프로젝트는 생각보다 업무가 다양해요. BI 디자인 개발부터 다양한 프로그램 콘텐츠 디자인, 그리고 층별 공간 인테리어 디자인까지 포괄합니다. 디자이너들이 궁금해하는 건 브랜드 디자인이 경험으로 맞닿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뷰티와 한국적인 미감을 연결하는 프로젝트 사례인데요. 프라이스에서 처음 소개드립니다.
오늘 저희가 만난 작업현장은 한국적인 미감이 현대적으로 반영된 듯합니다.
구체적인 디자인 프로세스가 궁금하네요.
사실 한국적인 미감을 직접적으로 원하는 프로젝트는 많지는 않습니다. 한국적인 브랜드 요소와 철학을 이미 가지고 있는 코스메틱 브랜드나 퓨전 한식을 주력으로 하는 레스토랑, 혹은 신진작가의 작품과 디자인 상품을 판매하는 한국의 편집숍이 대표적이네요.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먼저 서울 강남권 신사동이라는 지역의 특수성과 현재 상황을 살펴봤어요. 주인공은 스킨 케어 제품이고, 그것이 지닌 포뮬러나 컬러의 특성을 체험 프로그램과 시각 디자인으로 녹여내면서 공간과 연결하는 게 중요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개가 열리는 팝업이 트렌드가 되어버린 이 시점에서 <디어, 클레어스>라는 브랜드가 던질 수 있고, 던져야만 하는 키 메세지를 고민했는데요. ‘도심 속의 푸르른 휴식 Blue, Comma’이라 정했고, 그에 부합할 콘텐츠와 브랜드 디자인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스킨 케어와 예술은 교집합이 있어요. ‘아름다운 것을 가꾸고 지킨다’라는 지점이 서로 닮아있기 때문에 브랜드 경험의 관점에서 일부 프로그램에 작가와의 협업도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모인 아이디어를 제안하여 실행여부를 결정합니다.
최근 팝업 스토어의 고객 경험 디자인은 날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뷰티 브랜드를 소개하고 제품을 직접 체험하도록 다양한 공간과 프로그램을 구성했어요. 염색하지 않은 광목 천, 기둥 형태의 전시 매대, 푸른 카펫이 깔린 공간에 놓인 거대한 빈백. 여러 장치가 어우러져 ‘도심 속 푸르른 휴식’이라는 경험을 디자인합니다.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행하셨나요?
키 메시지의 이미지를 ‘한국문화’에서 끌어오기로 결정했어요. 먼저 2층에 티하우스를 구성해 티코스 체험을 기획했는데요. 차 종류를 국내산으로 좁혀 하동의 녹차/홍차를 골랐어요. 다구 곁에 두고 쓸 스타일링 오브제는 한지에 푸른색 염료가 번지는 방식의 작업을 통해 만들었어요. 2층의 한국적인 티코스가 3층에는 작은 전시가 열려서 서로 맞물리는 거죠.
브랜드가 하나의 스킨케어 제품을 어떤 식으로 보여주고, 어떤 소구 포인트를 잡을 수 있는지에 대해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어요. 모처럼 뷰티 브랜드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풀어낸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프로젝트였습니다.
한국의 공간을 디자인하고,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는 작업은 인성님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나요?
‘아, 나는 한국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 때가 있어요. 특히 이른 나이에 외국을 갔다거나, 오랜 기간 유학을 다녀온 디자이너들과 일할 때 느끼는데요. 한국적인 디자인이란 어떤 것인지, 나는 어떤 미감을 좋아하는지, 한국스럽다고 여겨지는 것이 나의 인생에서 어떤 부분에서 스며들었는지 이제서야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하는 단계인듯 해요. 여태까지 수많은 회의와 출장을 거쳤는데도 말이죠.
한국적인 미감을 다루는 디자이너의 역할을 정의하기엔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디자인 실무를 통해 겪은 시행착오를 통해 상대방에게 솔루션을 제공하는 ‘안내자 역할’, 아무리 트렌드가 빨라도 그 안에서 좋은 것을 간파하겠다는 ‘능동적인 태도’. 디자이너가 지녀야 할 중요한 역량이라 생각해요.
그렇다면 그런 디자인은 우리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우리가 선택을 내려야 할 때, 균형을 잡아줍니다. 나와 맞는 것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주는데요. 그게 결국 한 사람의 삶에 어울리는 결과를 안겨줄 가능성이 높죠.
화장품에 빗대면 이해가 빠릅니다. 솔직히 성분으로 따지면 화장품은 브랜드 별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아요. 하지만 다들 패키지 조형이나 브랜드가 던지는 메시지, 화장품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을 보고 구매를 결정하죠. 그래서 공급자의 전략은 소비자가 나와 닮았다고 느끼는 브랜드의 제품을 고르게 만드는 걸 텐데요.
브랜드 디자인은 화장품처럼 선택지가 많은 제품군에서 적절한 안내를 돕습니다. 생애주기라는 말도 있잖아요. 남녀노소 각자 처한 상황을 반영하면, 같은 물건을 고르더라도 선택지가 바뀝니다. 내가 능동적으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성공적으로 구축된 브랜드 디자인은 소비에 필요한 탐색을 쉽게 만들어요.
😈 시도가 시선을 만듭니다. 유인성 디자이너는 공간에 관여하며 아름다움을 배우고, 경험을 설계하며 깨달음을 얻습니다. 좋은 디자인은 내가 스며든 자리를 바라볼 때 시작된다고, 영감은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했어요.
나에게 조금씩 스며드는 한국의 정서와 미감을 인지하기 시작했다고 말하는 유인성 디자이너. 자신의 관점을 좋은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요. 공간과 경험에 관여하며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작업. ‘안내자 역할‘을 하는 디자이너의 생각들. 여러분들은 어떠셨나요?
‘한국적인 디자인은 무엇일까?’ 프라이스가 던지는 질문과 디자이너의 사려깊은 응답. #한국에서디자인을합니다
안녕하세요 인성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디자인 업계에서 일을 시작한지 16년 차인 브랜드 디자이너입니다. 그래픽, 패션, 리조트, 브랜드 에이전시, 건설, 부동산 개발 회사 등을 거쳤는데요. 창작과 라이프 스타일에 관여된 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간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프로젝트를 열심히 했죠. 지금은 공간 디자인을 포함한 브랜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 맡았던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네이버에서 UXDP라는 채용 프로그램을 열었어요. 2010년대 전후 디자이너 지망생 사이에서 인기였던 인턴십으로 기억해요. 연수원에 인턴을 11일 정도 합숙시키고 경쟁형 도전과제를 내요.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죠. 저는 UXDP 참여를 마치고 브랜드팀에 배치됐어요. 그 당시 네이버는 디자인 조직을 크게 ‘브랜드/BX/UX’로 나눴죠. 브랜드팀은 네이버의 브랜드 전략과 각종 서비스를 관리했습니다. 저는 일부 서비스의 선행 개발에 참여했어요.
‘브랜드 경험Brand Experience’도 디자인하시는데요.
지금은 상식처럼 여겨지는 일이지만, 당시 한국에선 낯선 개념이었어요.
제가 입사했던 2000년대 후반, 디자이너 사이에 본격적으로 언급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이직하며 맡았던 실무가 브랜드 경험(BX) 디자인이어서 적응하며 조금씩 눈 떴던 거 같아요. 네이버를 떠나고 JOH.를 6년 정도 다녔습니다. 동료들이 이미 BX나 브랜딩이라는 개념을 실무에 접목시켜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리더들이기도 했어요. 덕분에 빨리 깨우쳤죠.
브랜드 경험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이론서에 따르면
‘브랜드 경험은 정체성, 시각요소, 세계관 같은 걸 따로 설계하고
그것을 사용자가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끔 연결하는 디자인 작업이다.’
라고 정리됩니다. 설명 자체가 너무 추상적입니다.(웃음)
실무를 잡더라도 딱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라 생각해요.(웃음) 브랜드 경험 디자인은 단순한 비주얼 디자인이 아닙니다. 상품이나 서비스가 가진 장점을 살리고, 그것을 좋아 보이게 만드는 일이죠. 이왕이면 브랜드에 얽힌 사람들이 서로 좋은 자극을 받고, 상호 유익한 도움이 이뤄지도록 판을 설계하는 게 핵심입니다. 저는 고객이 브랜드와 서비스를 만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해요. 브랜드를 만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반응하는 지점이 궁금해서 계속 브랜드 디자인에 ‘관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관여’라는 단어가 인상적입니다. 브랜드에 어떤식으로 관여하게 되나요?
먼저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에 관여합니다. 브랜드와 클라이언트가 우리를 찾는 이유를 알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죠. 페이퍼워크를 통해 의뢰인에게 프리젠테이션을 꾸준히 펼치는 식으로 방향성을 정하는 단계가 선행됩니다. 그다음에 시각화visualization 단계를 거치는데요. 디자이너는 이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온갖 업무에 관여되는 듯 합니다.
앞서 말한 업무를 끝내고 본격적인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면 종이나 컴퓨터 화면 같은 2D 표면에 컬러와 도형을 조합해 그래픽과 더불어 다양한 콘텐츠를 구현합니다.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분석하고, 시각요소를 위한 기획이나 전략을 만들어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디자인 요소들을 배치하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인테리어 프로젝트에서 가구가 키 요소라면 적합한 가구를 찾고, 영상 제작이 필요하면 영상전문가를 찾아내 일정을 주도적으로 짜요. 인력섭외와 일정관리는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또한 브랜드를 경험할 고객을 위한 공간에 관여합니다. 만약 오프라인 이벤트가 열린다면, 고객이 방문하는 공간에 세부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설계해야 합니다. 이건 디자이너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와 팀을 이루고, 목표달성을 위해 프로젝트를 발전시켜요. 자신감과 책임감을 갖고 건축 전문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세부사항을 조정하는 거죠.
직무를 브랜드 디자이너라고 소개하셨는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다양한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시작은 그래픽에 관여하는 것이었지만, 언제 어디서 일하더라도 브랜드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계속 깔려있었어요. 대림처럼 부동산 개발과 얽힌 조직에서 근무했을 땐 디벨로퍼의 관점을 익혔어요. 공간을 기획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런 공간이 도시 안에서 어떤 기능과 콘텐츠를 가진 플랫폼이 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두 번째 직장이었던 JOH.의 조직문화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JOH.는 대외적으로 『매거진 B』를 만드는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건축부터 F&B까지 각 분야별 전문팀이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움직여요.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주받으면 팀 별로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업무를 수행해요. 하나의 프로젝트도 다양한 카테고리에 걸쳐져 종합적으로 전개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저도 여러 업무에 관여했습니다.
브랜드 디자이너의 일은 장기간에 걸쳐 있는데다, 비가시적인 성과가 더 많습니다.
디자이너의 업무능력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관점’과 ‘방향성’이 브랜드 디자이너의 무기라고 생각해요. 두 가지가 참 중요해요.
좋은 ‘관점’과 ‘방향성’을 잡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하시나요?
극초반 아이디어 구상은 메모로 하는 편입니다. 레퍼런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인데요. 브랜드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워낙 레퍼런스를 많이 쥐고 있어요. “A브랜드가 B콘셉트로 팝업스토어 연다더라.” “C는 D에서 F를 시도했는데 흥행했다더라.” 온갖 정보가 귀에 들어와요.
그런 레퍼런스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핵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메모에 담은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요.
개인적으로는 핀터레스트를 주의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AI까지 가세했어요. 트렌드를 스타일로 구분하고 순위를 매기는 서비스가 등장했고 유저가 필요로 하는 맞춤형 오픈소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죠. ‘이런 데이터 분석의 결과값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건가?’ 유행에 몸을 맡기는 현대 디자인 트렌드에도 조금은 경계심을 갖고 있어요.
지금 한국에서 전문 조직이 브랜드를 설계하는 경우, 데이터 기반 오픈소스툴 활용사례가 빈번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디자인 업무를 수월하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어요. 좋은 툴입니다. 좋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하라는 거죠. 정서적인 심상과 문제 해결을 위한 직관, 그리고 리서치 데이터를 접목시키는 건 디자이너의 역량이니까요. 이 세상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하고 더 시끄러운 곳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데이터 분석에 의한 알고리즘이 알게 모르게 실무에 반영된다는 걸 의식하고, 좀 더 순간을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거죠.
브랜드에 관여하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관점을 좋은 방향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관점 하나로는 결국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디자인은 결국 추상과 실제를 연결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모순적인 가치를 양립시키며 진전되는 사례도 빈번하죠. 브랜드가 추구하는 사업적인 가치를 따지려면 이성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테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남기 위해서는 동시에 정서적인 관점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프로젝트 초반에 클라이언트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좀 더 많이 듣고,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러고 나서 어떤 직감이나 심상 같은 걸 놓치지 않고 디자인 솔루션과 연결을 합니다. 이건 직관 내지는 본능. 정서적인 측면이죠.
이게 경영전략같은 이성적인 측면과 결합이 잘 되면 좋은 브랜드 디자인이 태어나는 건데요.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기능과 정서의 연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연결에서 나온다고 봐요.
전문가로 활약하려면 디자인 솔루션을 여러가지 패턴으로 쥐고 있어야겠네요.
‘깃발 세우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예쁜 것과 좋은 것을 분류하고, 그것을 남들보다 먼저 얘기해서 명분을 선점하는 방법을 써요. 현상을 분석하고 거기서 얻어낸 직관을 연결하면서 실천가능한 디자인 프로젝트로 개발시킵니다.
저는 ‘경청’을 선호합니다. 가능하다면 일단 남들보다 더 많이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일단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다 듣고, 레퍼런스를 검토하며 아는 게 많아질수록 관점이 다양해져요. 관점이 다양해지면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도 다양해집니다. a와 b만 만족시키지 않는 솔루션, 이질적인 c, d, e가 있어도 추진이 가능한 솔루션이 등장하는 거죠. 만약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완전히 틀어지더라도 나중에 계속 디자인을 이어나갈 수 있는 근거와 독특한 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가장 희열을 느낀 순간은 언제입니까?
열심히 고민한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수용됐을 때입니다. 이제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된 거 같아요.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은 생각보다 힘이 세거든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이미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어요. 이미 누군가가 설계해둔 디자인에 의해서 말이죠.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디자인은 이미 스며들었다. 당신의 선택지는 사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결정됐다.」
이런 정의를 내릴 수 있을만큼요.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 이론을 이해하고 실제 사례를 접하다보면 남들이 만든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와 대중 모두가 브랜드 디자인을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브랜드의 무언가를 관여하며 디자인할 텐데요. 쉽게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는 건강한 취향이 제게도 필요하고, 브랜드 디자인에 영향을 받을 분들에게도 이런 능동적인 태도가 중요할 겁니다. 누군가의 브랜드 디자인을 거스르려는 안간 힘이! 제가 여태까지 했거나, 앞으로 할 디자인에 반영됐으면 합니다.
2부로 이어집니다.
to be continued…😎
😈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비슷한 일을 하는 업계동료와 직업의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경험을 전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하우가 담긴 기획 노트를 볼 수 있는 건 커다란 행운이었어요. 1부는 브랜드 디자이너의 관점을 살펴봤는데요. 이어지는 2부에서는 관점이 실제로 구현된 공간을 소개합니다. 보다 깊은 디자인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2부에서 만나요!
사장님의 한 끗 차이, 스테인드글라스 인테리어
(2)서울 을지로 참프루
@champloo_euljiro
서울 중구 을지로 14길 13 203호 검은문
| 일-목 18:00 ~ 24:00 금토 18:00 ~ 02:00 연중무휴
Q. 업장에 설치된 작품은 무엇인가?
변익수 유리창으로 만든 연못이다. 한옥 중정에 있는 연못을 의도했다. 원형 창문 뒤에 조명을 달았다. 어느 자리에 앉더라도 잘 보일 수 있게 살짝 눕혔다. 가게에서 만난 연극 무대 감독님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수평보다 비스듬히 매다는 게 낫다는 거다.
배자한 한국적인 아트워크를 도면에 담았다. 재화를 상징하는 비단잉어, 고고한 연꽃. 이 둘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징검다리. 특히 징검다리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이라는 상징이다. 무늬의 결을 최대한 통일해 유리가 마치 물의 파동처럼 느껴지길 의도했다. 나무 프레임은 잘린 유리를 받쳐주는 역할이다. 구불구불한 곡선으로 짰다. 작품의 내구성을 보완하는 효과도 있다. 결과적으로 물에 반사 되는 나무의 느낌을 얻었다.
Q. 스테인드글라스는 어떻게 접했나?
배자한 친형이 스테인드글라스 작가다. 군 전역 후 친형이 일하는 공방에 놀러 가서 작은 장식품부터 이것저것 만들다 보니 재미가 붙었다.
변익수 사실 잘 몰랐다. 다만 요즘 들어 유행하는 인테리어라는 생각이다.
Q. 이 디자인을 채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변익수 연못을 연상하는 인테리어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가지 공간 디자인을 검토했는데 스테인드글라스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채택했다. 빛이 투과된 모습이 아름다웠고 그림자처럼 빛이 번지는 게 물과 속성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배자한 사장님 요청 작품이기도 하지만, 여태까지 만든 스테인드글라스 중 가장 큰 규모여서 처음엔 걱정스러웠다. 허나 설치의도가 재밌고 작가로서도 한 발짝 나가 보자는 생각으로 제작에 나섰다.
Q. 실제로 설치한 소감은?
변익수 내심 상상했던 모습이 나왔다. 엉뚱하다 싶은 것도 나름대로 마음에 든다. 광원 조절에 따라 진짜 물결처럼 보이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런 기술적인 건 잘 모르겠다. 아무튼 만족스럽다.
배자한 가게 인테리어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스테인드글라스가 공간에 끼치는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갤러리에서 철수 기한 없는 개인전을 하는 기분이다.
Q. 업장에 설치한 스테인드글라스가 가장 아름다워보일 때는 언제인가?
변익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고개를 들어 창을 바라볼 때. 참프루는 원탁을 중심으로 의자를 배치했다. 원탁 바깥에서 볼 때 연못창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배자한 술 따른 잔 표면에 연못창의 모습이 담길 때. 거짓말 같아도 정말이다. (웃음) 액체의 질감이 잔 위에서 일렁이며 진짜 연못처럼 느껴지는데 참 아름답다.
Q. 최근 인상깊게 구경한 한국 스테인드글라스는?
변익수 한남동 퍼킹어썸 바에서 본 유리창. 창 안과 밖이 연결되는 느낌이 신기했고 사진찍기도 재밌어보였다.
배자한 부산 남천동 성당의 초대형 유리창. 압도되는 느낌이 대단하다.
Q. 업장에 작품을 설치한 후 무엇이 변했나?
변익수 공간에 분위기를 딱 잡아주는 중심이 생겼다. 이전에 설치한 등은 다소 심심하다고 느낄 법한 조명이었다.
배자한 지금 스테인드글라스는 참프루의 확실한 포토스팟이다. 매출도 덩달아 오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웃음)
Q. 스테인드글라스 말고도 자랑하고 싶은 것은?
변익수 사연 있는 술. 그런 술을 참프루에서 많이 소개하는 편이다. 캐나디안 클럽(Canadian Club)이라는 위스키가 있다. 미국 금주법 시대에 성장한 술인데, 영화 <대부>에서 콜레오네 패밀리가 다뤘던 밀주다. 이야깃거리가 있는 술에 흥미를 느낀다. 앞으로 더 열심히 팔겠다.
배자한 다른 인테리어. 자세히 뜯어보면 재밌는 디테일이 많다. 우리는 커튼으로 기와를 표현한다. 현판에 쓴 글자는 한자처럼 보이지만 사실 한글이다. 액자에 빔으로 쏘고 있는 명화까지 재미있는 공간 디테일로 의도했다.
😈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활용해 인테리어 한 끗 차이를 만든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른 사장님이 들려줄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
사장님의 한 끗 차이, 스테인드글라스 인테리어
(1)서울 상수동 슌노오뎅
@SHUNNO_ODEN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 22 1층 좌측 | 19:00 ~ 05:00 매주 월요일 휴무
Q. 업장에 설치된 작품은 무엇인가?
천장에서 떨어지는 조명장치다. 바 테이블 위에 4개 설치했다.
Q. 스테인드글라스는 어떻게 접했나?
3년 전? 창업을 준비하며 다양한 시도를 하기 위해 실내 인테리어를 공부했다. 당시 한창 핫한 인테리어가 스테인드글라스였다.
Q. 실제로 설치한 소감이 궁금하다.
내심 원했던 ‘한 끗’이 생겼다. 사실 요즘 일본풍 주점이 많이 생겼지 않나!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케나 고구마소주같은 외국산 술을 파는데다 콘셉트도 일본 현지의 오뎅바다. 이국적인 무드를 재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별화 또한 절실했다. 차별화 포인트를 빈티지 조명장치로 잡았다. 가게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했는데, 그게 결과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가 됐다.
Q. 굳이 제작한 이유가 있다면?
사실 조명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쓸 계획은 없었다. 업장 내 실내 인테리어가 완성될 무렵, 조명이 고민이었다. ‘우리 가게와 딱!이다’ 하는 조명을 발견하지 못했다. 벽장식 인테리어 견적을 위해 스테인드글라스 업체에 방문했는데, 거기서 슌노오뎅과 딱 어울리는 조명이 걸려있더라.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을 해버렸다. 오뎅바를 준비하며 제일 잘한 인테리어다.
Q. 업장에 설치한 작품이 가장 아름다워보일 때는 언제인가?
추운 계절 새벽. 슌노오뎅은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운영하는 심야식당이다. 한밤중 피크타임이 끝나고 새벽이 다가오면 스테인드글라스 조명만 켜둔다. 키친에서 입구를 바라보면, 창문에 반사되서 보이는 조명이 인상적이다. 가게 문을 여는 오후 7시는 살짝 밝은 조도를 유지한다. 이 또한 아름답다.
Q. 최근 인상깊게 구경한 한국 스테인드글라스는?
삼청동 아원공방 에 전시중인 크리스마스 오너먼트. SNS로 구경했는데 우리 가게에 데려오고 싶었다. 기발하고 아름답다.
Q. 업장에 작품을 설치한 후 무엇이 변했나?
빛이 우리를 표현할 새로운 수단이 된다. 마포구는 대체로 트렌디한 동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귀엽거나 가벼운 이미지가 어울린다. 한편 우리에겐 진지하고 무거운 이미지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대를 이어 오뎅을 만든다는 게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장인정신과 트렌드의 공존. 슌노오뎅의 정체성이 조명의 색과 톤으로 표현됐다.
Q. 마지막 질문이다. 또다른 자랑거리를 소개한다면?
매장 앞 작은 벽. 오뎅바 손님들이 사랑하는 포토존이다. 소품을 활용해 일본 동네 버스정류장처럼 꾸몄다. 퇴근 후 집 앞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눈에 띄는 작고 편한 가게를 의도했다. 혼자 술 마시고 싶은데 약속은 따로 잡기 귀찮을 때 가는 주점. 혼술이 맛있는 가게가 되는 게 우리의 목표다.
😈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활용해 인테리어 한 끗 차이를 만든 사장님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다른 사장님이 들려줄 이야기도 기대해주세요 🙂
나는 1.5세대 작가입니다.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공예는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 건축 인테리어가 대부분이던 1세대와 상업공간 인테리어가 급부상한 2세대 사이에 있어요. 2010년 이후부터 젊은 사람들의 소비패턴을 이해하고 그들을 상대로 사업을 해야 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부터 젊어야겠죠.
이제 작품 제작을 위해 미팅을 가지면, 담당자 대부분이 30~40대 초반인데요. 예전과 비교하면 현장에서 쓰는 언어도, 그들이 표현하려는 이미지도 젊다고 느낍니다.
시작은 2003년입니다. 저는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회사에서 5~6년 근무했는데요. 일하면서 *베벨드 기법을 쓴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나 성당의 장식물이었어요. 제작법도 극소수만 알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도 어깨너머로 배워가며 일해야 했죠.
개신교회는 시트지에 성화를 새겨달라는 주문이 많았는데요. 드물게 스테인드글라스를 주문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시트는 너무 저렴해 보이고 수명이 오래가지 않으니, 스테인드글라스를 발주하는 거였죠. 가톨릭 성당은 주로 유학 다녀오신 분들이 맡았습니다. 해외유학 다녀온 수녀님이나 신부님이 제작법을 배워와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드셨어요.
*베벨드 기법 : 갈고 닦은 유리 면을 신주,아연,납,케임 등에 조립하는 기법
꿈이 생겼습니다. 일반 건축물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접목시키고 싶었어요. 2009년에 회사를 떠나 독립을 했는데, 당시 국내에서 잘 쓰지 않는 새로운 유리를 수입했어요. 디자인 시안도 다시 짰죠. 새로운 유행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업을 다녔어요. 점점 발주처를 확장했는데, 서울 강남이나 도시개발이 한창이던 경기도 분당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요청이 들어왔죠.
일반 가정이나 상업 공간에 들어가는 스테인드글라스 수요가 아예 없진 않았어요. 2000년대 전후는 주택이나 아파트 중문에 들어가는 유리창이 인기가 많았는데요. 저는 베벨드 기법과 색유리를 배합하는 유리창 제작에 나섰죠. 종교 건축과 일반 건축에서 오는 의뢰를 병행하면서 창작을 이어 갔어요.
유리공방과 카페를 같이 해볼까?
2011년 일이네요. 일반 건축물에 조금씩 스테인드글라스 인테리어를 보급하는 중에 악재가 터졌어요.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가 발표됐거든요. 건축에 들어가는 예산이 통째로 줄어드니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장식용 인테리어부터 없던 일이 됐습니다. 당시 스테인드글라스 인테리어를 요청하던 아파트 공사현장 수요가 많아서 뼈아픈 일이었어요. 신축 아파트를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 넣는다는 오랜 꿈은 잠시 접게 됐습니다.
특수유리 계통이다 보니 그래도 발주는 조금씩 들어와서 회사는 운영할 수 있었어요. 경기침체가 생각보다 오래가니 버티기 힘들었죠. 뾰족한 개성이 없는 회사들은 유지가 어려웠습니다. 사업을 접는 업체가 서서히 늘어났어요. 저도 가지고 있던 재산을 지키기가 어려웠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포기할 순 없었어요. 첫 번째 돌파구로 *숍인숍을 기획했습니다. 같은 건물에 카페와 아틀리에를 동시에 운영하는 일이었죠.
*숍인숍 : shop in shop. 한 매장에서 두가지 품목을 함께 판매하는 형태의 운영방식
당시 국내에선 생소했지만, 일본은 창작자가 팀 단위로 사업체를 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카페나 식당을 병행하는 공예작가가 있었죠. 한국도 일본처럼 곧 숍인숍 형식의 공방사업이 커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시작했는데요.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 이른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0년대 초는 지금처럼 골목 속에 숨겨진 가게를 인스타그램으로 보고 찾아가는 시대는 아니었네요. 그래도 왜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벤치마킹을 하러 많이 왔었어요.
영등포 양평동으로 공방 이사를 감행했습니다. 다른 유리공장이나 외주업체에서 발주를 넘겨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어요. 동시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죠. 공간을 나눠서 일부는 카페로 꾸몄습니다. 바깥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카페, 거기서 안쪽으로 한 번 더 문을 열고 들어오면 공방. 손님이 유리공예를 지켜볼 수 있는 작업공간이죠.
팩토리가 아니라 아틀리에.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작업현장이 아니라 예쁘고 쾌적한 공간을 만듭니다. 차도 마시고 작업도 할 수 있는 공간. 나만의 감성을 드러내는 작업장, 분위기 있는 장소를 만들려는 시도였어요.
손님들은 카페인 줄 알고 들렀다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낯선 소재를 신기하게 여겨요. 시간이 더 지나면, 손님들이 창업하는 가게에 인테리어로 써보고 싶다고 주문을 하더군요. 대중친화적인 공간에서 만난 손님이 때때로 작품 의뢰를 요청하는 클라이언트로 변신해요. 이는 제가 불황을 견딜 수 있던 힘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공예의 새로운 흐름입니다. 일반인도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드는 거죠.
‘디자인’의 힘
수익은 크지 않았지만 숍인숍 사업을 하던 2010년대 초반은 디자인의 힘을 느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색다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가 열렸어요.
새로운 인테리어 소재를 써보려고 하는 건축사 사무실, 인테리어 업체에서 발주가 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며 스테인드글라스의 영역이 종교건축뿐만 아니라 상업이나 일반건축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겁니다.
이 시기부터 클라이언트에게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발주에 큰 영향을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조형을 제안하기 힘들었던 회사부터 위기가 찾아오는 걸 실감했죠. 2010년까지만 해도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를 정직원으로 채용한 회사가 거의 없었어요. 시각디자인을 할만한 인재도 없었으니까요. 필요하면 디자이너를 프리랜서로 고용해 오더를 받는 분위기였죠.
우리는 가업승계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컴퓨터 다루는 게 능숙했던 아들 덕을 봤습니다. 고등학생 때 스테인드글라스 시안을 종이에 옮겨보라고 권유했는데, 아들은 컴퓨터로 작업을 해서 시안을 뚝딱 만들더군요. 지금은 회사 대표이자 메인 디자이너인 박진영입니다.
“아들의 이 재능은 누굴 닮은 걸까?”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故박치성 화가가 있습니다. 인천에서 평생 그림만을 고집하며 작업했던 사람. 아들 진영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화실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접하는 생활을 했거든요. 거기에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제 영향이 얹히지 않았을까요? 스테인드글라스를 시작한 나 때문에 아들도 잠재력을 스테인드글라스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가업승계는 우리 가족의 운명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너는 내 운명
2010년대 불황은 길었습니다. 작업공들이 다른 일을 찾아 하나둘 그만두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호황일 땐 제작팀, 시공팀, 디자인팀으로 나눠서 여러 명의 직원을 두기도 했었습니다. 불황 끝에 작업이력이 있는 중견 작업자들이 벌이를 위해 이직한 상태여서 결국 인력난을 실감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분야에서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만큼,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젊은 인재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인터넷에 스테인드글라스 교육공지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수업에 회화과를 나온 미대생이 찾아왔어요. 지금은 며느리가 된 남한울 작가죠. 이것도 참 인연이네요. 손발이 착착 맞았던 수강생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아들 박진영과 셋이서 팀이 됐습니다. 업체에서 받은 오더를 해내느라 자정까지 작업하는 일이 부지기수지요. 새로 시작한 회사인 양 열심을 다했던 나날입니다.
디자이너의 역할 : 의심↓ 확신 ↑
디자인을 강화하고 젊은 피를 수혈하니, 경쟁력이 생겼습니다. 특히 컴퓨터 시안이 큰 힘이 됐어요. 당시만 해도 많은 업체가 시안을 손으로 그려서 색연필이나 컬러 사인펜으로 그려서 의뢰인에 보여줬어요. 수작업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시연이 훨씬 디자인의 폭을 넓힌다는 걸 실감했어요.
“우리는 컴퓨터까지 활용해서 시각디자인의 완성도를 추구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디자이너의 역할은 의뢰인이 원하는 디자인을 대신해 주는 사람들인 거죠. 파트너에게 신뢰감을 주는 게 우선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업장이나 건축물에 설치했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중요해요.
스테인드글라스 업계가 젊어지고 있습니다. 점점 젊은 업체 대표나 젊은 담당자를 만나는 일이 늘고 있어요. 그들이 원하는 디자인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이 생각 못 한 것을 역제안했을 때 자부심을 느낍니다.
오늘날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은 예견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현장에서 시안이 구현될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힘이죠. “생각도 못 했던 기발한 곳에 설치 됐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디자인을 하신다면, 분명 훌륭한 작업을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사명감을 갖고 유리공예를 더 크게 키울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색다를 것. 고유할 것. 독특할 것.
요즘 젊은 사람들이 찾는 실내 인테리어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디자인을 더한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래서 수요가 늘고 있는 듯해요. 젊은 사람들한테 저변이 확대되는 게 신기해요. 변화의 한복판에서 젊은 창작자에 다양한 경험을 전수해 주고 싶습니다. 당장 공방 식구부터요.
직원 모두가 너무나 자기 몫을 잘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오래오래 감각 있는 창작자로 활동하도록 도와야죠. 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지만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저도 성심을 다해 작업하고 있어요. 경험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될 때. 인생선배의 경험담은 큰 힘이 됩니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여성창작자의 기억에서 공예작가이자 사업가, 엄마이자 선생님이기도 했던 모습을 발견합니다.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절실함, 살며 배운 것을 나누려는 다정함. 여러분에게도 작가가 움켜쥐려 했던 마음이 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