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소 긷 최민영 디자이너
서울 창덕궁 담벼락 옆 작은 마을, 원서동. 볕이 잘 드는 한옥 안에서 새까만 쇳덩어리가 움직인다. 납작한 활판을 새하얀 종이 위로 꾹 눌러 멋진 그래픽이 새기는 곳. 인쇄소 ‘긷’은 백 년 묵은 기계식 활판인쇄기와 한지를 조합하는 인쇄디자인 스튜디오다. 최민영 대표 디자이너를 만나 근대적 인쇄기술을 시각 디자인에 응용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인쇄 디자이너 최민영입니다. 한지와 활판인쇄기를 활용하는 인쇄물 작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원서동 빨래터 근처 한옥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사진을 전공했고 2000년대 후반까지 영화 스틸 작업을 했습니다. 디자이너 업무는 2011년에 종로 물나무사진관에 입사하며 맡게 됐어요. 재직 중에는 사진 인화용 한지를 개발하는데 참여하거나 문화 재단과 협업하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았었죠.
‘긷’이라는 스튜디오 이름이 독특합니다.
긷은 ‘기둥’을 일컫던 옛말입니다. 나무가 자랄 때 대지에서 출발하잖아요. 중력을 거스르면서 생명력 있게 자라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기둥을 떠올렸어요. 우리가 생활을 의식주로 구분할 때, 저는 주(宙)가 제일 마지막에 발현된 문화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둥이야말로 집의 기본이자, 지붕을 떠받들며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긷 같은 인쇄물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TALK1. 활판인쇄술과 계절력
2018년에 독립해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어요. 한지를 이용해서 한국적인 멋을 가진 인쇄물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백 년 넘은 미국산 활판인쇄기도 그때 만났습니다. 청담동 앤티크 숍에서 발견했는데 수리와 개조를 마치니 멀쩡했어요. 활판인쇄기에 한지를 끼워 넣으니 그 위에 담기는 아트워크가 참 예뻤어요. 활판의 양각으로 한지를 꾹 누르면, 납작 눌린 자리에 남은 글씨나 그림이 묵직한 분위기를 내죠.
인쇄소 긷의 대표 디자인은 ‘계절력’입니다. 왜 만들기 시작하셨나요?
계절력은 2017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어요. 기존 달력처럼 날짜를 세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계절을 감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태양력은 현대 사회의 기본 약속이잖아요. 원래 태음력으로 일 년을 바라봤던 우리가 절기와 풍속을 잊지 않길 바라며 만들어봤어요.
계절을 기준으로 시간의 시작과 끝맺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했어요. 계절을 기준으로 시간을 나누다 보니까 24절기가 자연스럽게 들어왔네요. 물나무 사진관 시절부터 만들었는데, 독립하고 나서도 꾸준히 만들고 있어요.
절기나 계절은 자연을 구분하는 개념일 텐데요. 「자연은 계속 흐른다. 그 속에서 우리 같이 어우러져서 잘 살아보자!」 라는 생각으로 달력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언제든 있다고 봐요. 2024년은 먹색 잉크로 날짜 표현을 하면서 ‘달의 변화’, ’24절기’, ‘대표 공휴일 표시’에 집중했어요.
해마다 조금씩 다른 디자인을 시도하고 계시죠?
네. 한때 공휴일을 붉은색으로 새기는 작업을 시도했는데 그건 딱 한 해만 했어요. 지금은 공휴일 숫자 위에 점을 찍는 것으로 디자인을 바꿨습니다.(웃음) 활판인쇄기에서 만든 인쇄물은 기계 특성에서 오는 한계가 있어요. 가장 많이 쓸 색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새로운 색을 덧발라야 합니다. 기계 특성상 종이에 여러 색을 동시에 새길 수 없어서 작업을 따로 진행해요.
여러 색채를 쓰려면, 일단 먹색 부분을 한 번 다 찍어내고 나서야 다른 색을 덧바를 수 있어요. 만약 평일 표시는 먹색, 공휴일을 표시는 붉은색을 쓴다면. 우선 먹색 인쇄작업을 미리 마쳐야 해요. 붉은색 전용 활판과 붉은색 잉크를 갈아 끼워서 동일한 인쇄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합니다. 색을 여러 개 쓰려면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먹색과 붉은색을 동시에 찍어냈을 때, 종이 위에서 의도와 다르게 인쇄물이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작업을 하는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고요. 만들면서 잃는 부분이 너무 많이 생기다 보니 지금은 달력에 먹색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컬러는 달력을 거는 실이나 포장지처럼 부속품에 따로 쓰고 있어요.
종이는 대부분 한지를 쓰고 계시죠. 이유가 궁금합니다.
흰색과 여백이 가장 잘 표현되는 종이여서 씁니다. 한지는 언뜻 보기에 비어 있지만, 무언가 차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참 좋습니다. 제가 하는 디자인 작업들이 제일 잘 표현될 수 있는 게 ‘한지’라는 물성을 살릴 때인듯해요. ‘활판 인쇄’라는 표현법이 한지와 제법 잘 어울리고요. 활판인쇄뿐만 아니라 한지를 활용한 디지털 인쇄작업도 맡고 있습니다.
다른 종이는 어떤 식으로 쓰시나요?
한지가 아닌 종이로는 문켄디자인 종이를 제일 많이 써요. 러프하면서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양피지 질감이 나는 쉽스킨도 가끔 즐겨 써요. 기본 세팅은 까끌까끌한 느낌이 드는 종이를 많이 채택하는 편인데, 디자인 주제에 맞춰 응용하는 편입니다.
한지가 디자인의 기준이다 보니, 한지와 잘 어우러질 종이를 선택해서 쓰고 있습니다.
혹시 새롭게 준비 중인 디자인 상품이 있나요?
수 년째 구상만 했지,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가 않네요.(웃음)
불규칙한 텍스처를 갖고 있는 한지로 캐주얼한 봉투를 만들어 쓰임새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어요. 편지를 담거나 용돈을 담는 봉투라면, 선물 교환할 때 쓰지 않을까 싶어요.
계절력을 조금 더 작은 사이즈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월(月)력으로 바뀔 듯하고. 탁상용 캘린더가 된다면, 한지에 직접 펜을 들고 메모를 하는 경험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요즘 들어 사람들이 한지에 글을 써보는 경험이 많이 없어서. 잘 연출한다면 색다를 것 같아요.
TALK2. 한국적인 미감을 새기는 일
종이 위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새기는 ‘긷’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미감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한국 사람들이 오늘날 서양식 문화를 소비해도, 사유하는 방법은 동양의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어요.
거기서 한국적인 사유를 발견해서 응용한다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굉장히 다른 관점의 해석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적인 미감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오늘’에 고착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 달라질 때마다 다른 형태로 발현되는거죠.
저는 자연이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뉘어 바뀌는 걸 아름답다 느끼는 사람이고, 한국의 아름다움은 담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생각을 하나 하나를 모으면, 한국적인 디자인이라는 게 어느새 자연스럽게 배어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미감(美感)’이라는 한자어가 디자인이라는 외래어의 번역으로써 부분적으로 적합하다고 봐요.
그리고 저는 한국적인 미감이 시각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고 봅니다. 예컨대 한지는 그 자체로 예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학습을 통해 한지가 수준 높은 종이라는 걸 알고 아름답다 말해요.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인쇄 종주국이라는 맥락을 알아요. 그런 분들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더 예민하게 느끼실 듯합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을 남들한테 특별하게 인식시키려는 의지가 생겨요. 혹은 대상을 특별하게 인식해야 될 거라 믿게 됩니다. 사물이나 생활양식을 이데올로기화시키는 셈이죠.
민영님으로부터 가장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한국적인 미감은 무엇인가요?
가느다란 줄에 무언가를 매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제게 있어요. 무언가를 프레임에 딱 가둬놓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걸 좋아하나 봐요. 종이 한 장 그 자체는 바람에 흔들리고 약해 보여도. 그 한 장이 바람도 타고 살랑살랑 움직이며 버티는 모습이 예쁘거든요. 줄에 매달린 한지를 바라보면 거기에 빛도 배어들어요. 날씨에 따라 빛에 따라 같은 게 다르게 보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나는 이번 작업물을 진짜 한국적으로 꾸며야지!」 라는 결심을 갖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요. 살아오면서 본 것, 사적인 취향 같은 게 어쩔 수 없이 한 방향으로 기우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전통의 이해와 현대 생활 양식의 파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려 거기에 현대적인 쓰임새를 만드는 일. 제가 안고 있는 고민입니다. 같은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반가울 거 같네요.(웃음)
TALK3. 활판인쇄물 디자인 프로세스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니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작업이 예상됩니다. 실제로는 어떠신가요?
근대적인 활판인쇄술만 고집하진 않아요. 만약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다면, 납판에 직접 글자 조판까지 해낼 텐데요. 저는 납이 아니라 아연 판을 쓰고 있고, 컴퓨터 일러스트 작업을 곁들여 따로 활판을 만들고 있어요.
근대 활판인쇄술은 보통 납판을 썼는데, 납은 잘 알려져 있듯 인체에 해로운 금속이라 아연으로 대체했어요. 납판과 비교하면 아연판의 물성이 상대적으로 무르긴 합니다. 활판을 인쇄기에 끼우면, 잉크가 돌아가는 롤러와 판의 양각이 닿는 면 사이가 미세하게 오차가 나요. 잉크와 종이가 효과적으로 맞물리는 세팅을 찾아내면서 아연판의 높이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인쇄용 활판은 어떻게 제작하시나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으로 아트워크를 만들고, 충무로에 있는 금형업체에 이미지 파일을 전달드려요. 아트워크 모양대로 필름을 떠주시는데요. 그걸 아연판 위에 부식을 시켜서 원하는 활판을 얻어내요. 현대적인 활판 생산법이죠.
근대 이전 활판인쇄는 같은 글자를 크기 별로 다 따로 만들어야 했어요. 결국 수만에서 수 십만 개의 활자들이 만들어집니다. 활자를 판에 따로 모으는 걸 ‘집자’라고 하는데요. 집자를 마친 활판을 기계 위에 올려서 찍어내는 방식이죠.
지금은 전통방식으로 활판을 제작하는 곳은 많지는 않아요. 파주의 ‘활판 공방’ 이라는 곳과 한 두군데 정도예요.
활판을 쭉 모아보니 명함이나 엽서가 눈에 띄네요. 주로 어떤 분들이 활판인쇄물을 찾으시나요?
명함, 청첩장, 레스토랑 메뉴판 같은 의뢰가 많이 들어옵니다. 명함은 스튜디오 진열장에 있는 걸 보고 개인정보만 바꿔 달라는 분도 계신데, 제가 다시 설득을 하죠. 템플릿을 만들고 내용만 바꾸는 게 개인적으로는 용납이 안되네요.(웃음) 활판 디자인은 능동적으로 제안하는 편입니다. 레이아웃, 테마, 서체 … 어떻게든 조금씩 변화시키려고 애써요.
손으로 뭔가 만들어내는 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활판인쇄가 핸드메이드와 같은 결을 지녔다고 보시는 듯해요. 한국적인 미감을 추구하는 회사나 공예품을 다루는 업체도 많이 찾아주세요. 자연을 소재로 활동하는 창작자, 분재 만드는 분이나 식물을 가꾸는 분도 자주 오시죠.
인쇄 목적은 주로 ‘정보 편집’이나 ‘소식 안내’입니다. 명함이나 엽서처럼 브랜딩을 위한 인쇄물 시안의뢰도 흔하고요. 공통적으로 자기자신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세요.
손이나 자연이라는 키워드에서 교집합이 모이네요. 종이를 활용한 패키지 인쇄 의뢰 같은 것도 들어오나요?
라벨지 작업은 해봤어요. 박스 작업은 개인적으로 권하고 싶은 작업은 아닙니다. 박스 패키지는 내용물을 보호하고 견고해야 하니까요. 패키지 속 소품 포장이나 박스를 덮는 슬리브(띠지)는 테스트해 봤어요. 슬리브나 봉투를 만드는 건 흥미로운 디자인이 될 듯합니다.
가장 많이 사용한 활판이 궁금합니다.
일엽편주라는 전통주 브랜드가 오랜 고객사입니다. 저희가 술병을 두르는 띠지를 만들었는데요. 한지를 쓴 활판인쇄물로 띠지 디자인을 부탁하셨어요. 일엽편주 활판을 2019년도부터 쓰고 있거든요. 여태까지 패키지 라벨지를 만 개 이상 찍어냈는데요. 아직까지도 문제없이 쓰고 있습니다.(웃음)
긷의 활판인쇄기에서 찍을 수 있는 인쇄물의 최대 사이즈는 얼마인가요?
가로 25cm, 세로 15cm 폭입니다. 보통 이 사이즈보다 작은 활판을 만들어서 종이에 인쇄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긷은 어떤 활동을 하시려고 합니까?
제가 커리어를 시작했던 사진과 관련한 디자인 작업들, 자연적인 스토리를 가진 작가나 브랜드와의 협업 프로젝트들을 해보려고 해요.
많이 하고 있는 작업은 디지털 사진 작업을 활판으로 만들어서 흑백사진을 인쇄하는 건데요. 사진을 전부 *망점으로 바꾸고 판을 만든 거라 찍고 나면 종이에 아주 작은 도트가 보입니다. 「활판 인쇄로는 정보를 전달하는 텍스트만 표현되지 않을까?」 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요. 도전해 보니 이미지 표현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어서 훗날 인쇄 디자인에 반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망점 : 연속계조가 있는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을 인쇄물로 재현하기 위해 만드는 미세한 점
😈 흘러간 문화를 주목하고 옛 도구를 복원시켜 디자인에 활용하는 방식 어떻게 보셨나요? 디자인을 하는 도구의 구조를 이해하고 소재의 물성을 탐구하는 게 나만의 디자인을 만드는 지름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특정 도구나 사물의 물성에 강한 흥미를 느끼는 편인가요? 그렇다면 스크롤을 올려 인터뷰를 다시 읽어보세요. 그리고 디자이너의 관점과 작업과정을 주목해보세요. 거기서 얻은 여러분의 생각이 근사한 디자인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이야기’라는 슬로건이 인상적인데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이감각이 디자인하고 싶은 한국스러움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이감각의 작업은 ‘전통의 현대화’나 ‘전통이 무엇인가?’를 다루기보다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것은 우리안에 있다’였죠. 디자인에 우리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탐색 의지를 담습니다. 우리가 가진 특색이 보다 일상에 가깝고 편하게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이감각에게 전통은 어떤 의미인가요?
나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나를 인식하는 일입니다. 전통은 할머니의 오래된 가구를 엄마가 쓰고 엄마의 젊은 시절 원피스를 내가 입는 것과 아주 다르지 않아요. 누군가 아꼈던 물건들을 통해서. 그걸 물려주는 마음을 통해서. 그들을 헤아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신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인식하는 것은 외부를 통해서가 아니죠. 한국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 또한 입에서 입, 손에서 손, 그리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왔다 생각해요. 우리만의 히스토리가 있는 오브제들을 통해서 한국적인 해학, 소박, 흥을 전하고 싶어요. 더불어 세상에 유일한 나를 사랑하고 즐기는 경험을 전하고 싶습니다.
요즘 한국의 전통에서 디자인 언어를 얻으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적인 멋’을 탐구 중인 창작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한국 고유의 디자인 언어를 딱 하나로 좁혀서 말하긴 힘들지만! 저희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요소는 ‘해학’입니다. 유머라고 하죠. 주어진 현실을 과장하거나 비꼬는 게 우리게에 있어요.
유튜브 댓글 창 같은 거 보면 한국 사람들은 말을 되게 웃기게 하잖아요.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꼬인 걸 풀려고 하고. 풀린 건 꼬면서 놀고.
이런 해학적인 태도가 한국만의 위트인 것 같아요.
해학이 디자인 언어가 된 사례는 어떤 게 있을까요?
도자기에 그린 그림이나 표현 방식이 그래요. 그릇에 점 하나 탁 찍어서 마무리하는 기법 같은 게 그렇죠.
또 하나는 호랑이 그림인데요. 다른 나라는 무섭게 그려요. 두려운 존재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맹수를 귀엽게 묘사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표현햐요.
호랑이를 친근하게 그리는 건 호랑이와 친한 관계를 원했던 게 아닐까요?
호랑이처럼 무서운 대상을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는 존재 혹은 허물어진 존재로 여기는 거죠.
이건 한국인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관계성일 텐데요. 우리는 남을 포용하고 함께 섞인 채 노는 상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감도 그런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양처럼 자연과 나를 독립시키려는 태도와는 달라요. 지금까지 얘기했던 점들이 이감각의 제품이나 디자인 스타일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감각이 요즘 푹빠진 한국의 디자인 언어는 무엇인가요?
‘매듭’입니다. 저희는 한국적인 디자인의 맥락이 해학이라 보는데요. 해학을 떠올리면, 농담을 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얽히는 모습이 떠올라요. 그것을 실을 써서 조형적으로 풀면 실과 실이 꼬인 매듭이 나옵니다.
매듭 자체가 한국문화 특유의 관계성이 반영된 조형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서양에서는 그냥 도구 내지는 수단이거든요. 끈을 묶어서 뭔가 물건을 만들고 고정을 하는 목적 그 자체만 남는 건데 우리나라는 달라요. 매듭 자료도 많이 남아있고 한국인이라면 매듭의 의미적인 맥락을 볼 수 있지요.
매듭은 재밌어요. 2d인데 3d고 2d가 3d가 된 거라서. 묘한 해학이 생기죠. 완전 평면인데 접으면 입체니까. 이감각이 하고 싶은 디자인. 이감각이니까 할 수 있는 디자인 이야기가 생기는 거죠. 평면인데 자수를 넣고 엮고 접고 하면서 얘기가 생기고. 그 면과 면 사이에 또 다른 관계성이 생기는 것. 그런 게 좋습니다. 실 뿐만 아니라 흙이나 실리콘 등 다양한 소재로 매듭 디자인을 만드는데 도전하고 있어요!
특히 패브릭 소재 매듭은 사람손을 타는 디테일인데요. 공임 과정에서 매듭을 전담해주실 협업파트너의 존재가 정말 소중합니다. 저희가 그동안 매듭에 매달리면서 이걸 전담해주실 수 있는 장인분을 만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 덕을 많이 볼 거 같아요. 원하는 디테일을 만들기 위한 파트너를 만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한지를 연구하고 만들고 판매하는 박창완입니다. 경기도 김포에 한지 소재연구소를 만들었는데요. 염색이나 후가공을 거친 특수한지를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어요. 저는 한지의 현대적인 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작업한 한지들은 인사동 동양한지에서 판매하고 있어요. 부친을 도와 남동생과 한지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01. 왜 인사동에 한지 가게가 몰려있을까?
부친께서 인사동 한지 전문가로 유명한 박성만 선생님이시죠.
맞습니다. 저는 교육학을 공부했어요. 대학원에서는 한지가 아니라 학생 인권을 공부했었죠.(웃음) 인사동에서 한지 가게를 운영하시던 부친께서 한지 업계로 들어오라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한지의 가치를 높이고 맥을 이을 사람이 절실하다고요.
2009년부터 한지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를 위해 미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국내 한지 장인을 만나 사례 분석과 제작 기법을 정리할 수 있었죠. 대학원에서 했던 학술 연구는 큰 힘이 됐습니다. 지금은 문화재 복원용 한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사동 동양한지는 50년 넘게 운영중입니다.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요?
전주에서 할아버님이 일제강점기 때 한지를 만들어 파셨고, 부친께서는 유통에 힘쓰셨어요. 부친은 1968년에 서울 인사동으로 들어와 1972년부터 한지 가게를 여셨죠. 동양한지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인사동이 명동 예술거리의 배후지역이라고 해요. 전성기에는 인사동에 종이를 다루는 지업사만 40여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1982년생인데 인사동 한지 가게 아들이다 보니 이 동네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80년대 후반, 동양한지는 조계사 옆에 있었어요. 매장도 지금의 2배쯤 됐죠. 한지를 배송하는 차량만 8대였어요. 한지 뜨는 장인을 따로 모셔 매장에서 한지를 생산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옛날 인사동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나요?
부친 말씀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인사동은 안국동에서부터 인사동으로 내려오는 길 가운데에 실개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골동품 매장이 있었죠. 아침이 되면 골동품을 수집한 리어카가 다녔다고 전해져요. 병풍을 수리하거나 족자를 꾸미는 표구사가 늘어나면서 부자재를 취급하는 필방, 지업사가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상권이 만들어지면서 ‘전통문화의 거리’가 된 거죠.
창완님의 기억에서 인사동은 어떤 풍경입니까?
제가 기억하는 건 ‘1990년대 인사동’입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에도, 종로 골목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리어카에 실려있는 건 북촌이나 서촌의 한옥집에서 나온 물건들이었어요. 당시 토박이 주민이 집터를 허물고 새 집을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집에서 벽지로 썼던 종이라거나 집 어딘가에 방치된 족자 같은 게 리어카에 실린 채 인사동을 떠도는 거죠.
리어카꾼이 “XX동에서 철거하다 나온 물건인데 필요하면 살래요?”라고 말을 붙이면서 인사동 가게를 돌아다녔어요. 그런 물건이 임자를 만나면 미술품이 되는 거였죠. 안목이 있는 분들은 거기서 문화재급 생활 도구를 건지기도 하셨어요.
“고서나 고미술품을 구하려면 인사동에 가야 한다”라는 소문 같은 게 생기고 실제로 인사동에서 그런 물건을 쥐고 계신 분들이 머무르는 거죠.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사동의 이미지는 당시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임대료 문제도 있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 상권이 되면서 떠나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말씀대로 인사동 거리를 걷다 보면, 예술거리보다는 관광지로 동네 역할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는 거죠. 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에 기반한 문화는 실생활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고, 전통기술이 쓰이는 곳도 점점 사라지고 있거든요. 한지 가게도 많이 줄었어요.
02. 한지란 무엇인가?
한지는 정확히 어떤 종이입니까?
한지는 ‘닥나무 섬유를 떠서 손으로 만든 종이’를 통칭합니다. 한지[韓紙]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건 1958년 ‘대한민국 통계연감’인데요. 그전에는 닥나무 저[楮]에 종이 지[紙]를 써서 ‘저지’라 불렀어요. 전통한지는 닥나무를 비롯한 종이용 나무가 자라면 따로 수확을 해요. 나무결을 손으로 벗겨내 잿물에 삶고, 섬유를 모아 그것을 방망이로 두들겼죠.
화학적으로 보면 닥나무 섬유를 ‘수소 결합’해서 만든 종이입니다. 산도가 적은 중성지고요. 중성지는 산성과 알칼리성을 띄는 일반 종이보다 수명이 길어요. 그래서 천년을 간다는 거죠. 원료인 닥나무의 생장 환경, 한지를 만드는 그 날의 날씨, 장인의 컨디션, 원료의 처리 과정 등의 조합을 거쳐 한 장의 한지가 태어납니다.
한지를 한국에서 만들어야만 한지인가요?
원칙적으로는 「한국에서 자란 닥나무 섬유를 원료로, 한국 고유의 초지 기법인 외발뜨기 기법을 사용하여, 장인이 만든 수제 종이」를 얘기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한지의 범위를 「사람이 닥나무 섬유를 초지 기법으로 만든 종이」로 보는 게 옳다고 봅니다. 지금은 기계로 만들거나 손으로 만든 한지의 구분이 없어져 있어서 고민이네요.
최근 2~3년 사이에 닥나무 재배와 수확이 어려워지고, 인력난이나 비용 증가로 전통방식이나 제작 환경을 지키기 힘들어졌죠. 현실적인 이유로 한지의 범위는 느슨해졌습니다. 오늘날 한지 업계에서는 수입산 닥나무를 사용해 한국에서 만드는 것도, 한국에서 만들지는 않아도 닥나무 섬유로 만든 종이도, 기계로 만드는 것도 다 한지라 부르고 있어요.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로 범위가 넓어진 거죠.
참고로 해외에서도 한지와 비슷한 물성을 지닌 전통 종이를 생산합니다. 일본에서는 화지(和紙), 중국은 선지(宣紙)라고 부르죠.
특히 한. 중. 일 3국이 공통적으로 닥나무 섬유질로 종이를 만들어요. 종이 만드는 기술은 각 나라별 지역, 환경적 차이로 기법이 나뉘게 됐습니다. 제작 기법의 차이는 닥나무 섬유질 배열에 영향을 주는데요. 이것이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에 질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한국 전통한지의 경우, 발틀에 턱을 없애고 닥나무 섬유가 사방으로 자유롭게 배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전통방식을 고증한 한지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전통한지는 제작 공정을 현대화시킨 한지와 비교하면 광택, 질감, 냄새 같은 게 더 좋아요. 한지 장인의 공방 같은 곳을 가면 그 집에서만 나는 나무냄새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자연스러움이 전통한지에 깃들어있어요. 한지 특유의 옅은 풀냄새는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종이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일 텐데요. 종이를 다루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을 줍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한지가 ‘쉼을 주는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우수한 한지는 무엇인가요?
제 기준으로는 ‘미색 외발지’입니다. 오늘날 한지는 여러 가지 색을 지니고 있지만, 한지 속 섬유질이 파괴되지 않은 상태로, 닥나무가 지닌 색감을 드러내는 건 ‘미색’이라 생각합니다. ’외발지’는 외발뜨기라는 기법으로 만든 한지를 뜻해요. 종이를 뜰 때 닥나무 섬유를 넓게 펼치는 판을 ‘발’이라고 하는데요. 천장에 줄 하나만 매달아서 전후좌우로 흔들고, 풀려 있는 닥나무 섬유를 물에서 거르는 기법을 ‘외발뜨기’라 부릅니다.
많은 분들이 「하얀색 한지가 좋은 한지냐?」라고 물어보세요. 표면이 깨끗하니 좋은 물건이라고 여기시는 거죠. 오히려 하얀색 한지는 약품 처리를 강하게 해야 하거든요. 결과적으로 닥나무 섬유질이 상하기 때문에 질 자체는 미색 한지보다 조금 떨어집니다.
오늘날 한지는 ‘누가, 왜’ 쓰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회화 분야에서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지는 기계로 만든 종이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한지만의 발색이 있기에 수요가 있습니다.
한지의 물성을 디자인에 활용하려는 수요도 있어요. 한지는 원료인 닥나무의 섬유를 *고해하는 시간에 따라, **물질을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질감이 나타납니다.
*고해 : 섬유를 풀어내는 작업
**물질: 한지를 만드는 공정 중 하나. 발 위에 있는 닥나무 섬유를 좌우로 흔드는 작업
조명 연출에 적합한 소재로는 ‘운용지(雲龍紙)’가 있어요. 섬유를 덜 갈아서 종이 속에 실타래 같은 게 떠있는 한지인데요. 종이를 빛에 비추었을 때 닥나무 섬유로 표현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유리창에 붙이면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적합한 한지도 있어요. 텍스처감이 몽글몽글한 ‘구름지’같은 한지를 고를 수 있겠습니다.
한지 테두리는 데클 엣지(Deckle edge)라 부르는 자연스러운 보풀이 있어요. 이처럼 한지의 물성을 다양한 목적을 갖고 활용하려는 분들이 한지를 들고 가서 실험하고 계십니다. 업계에 몸담으며 점점 한지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디자인적 실험이 참 소중한 흐름이라 생각해요.
😈 동양한지는 취재하러 갔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추천받아서 알게 됐어요. 한지가 필요하면 동양한지를 간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죠. 인사동의 수많은 종이 가게 중 디자이너가 관심을 갖고 들르는 곳이라면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란 짐작이 들었습니다.
인사동의 옛 모습부터 한지에 대한 전문가 지식까지 유익한 정보를 채집할 수 있었는데요. ‘한국의 종이’ 한지,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