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한지를 말하다
인사동 동양한지 「1」
인쇄소 긷 디자이너 최민영
전통 한지 + 근대활판인쇄술 + 현대적인 쓸모 = 한국적인 미감을 지닌 시각디자인?!
인쇄소 긷 최민영 디자이너
서울 창덕궁 담벼락 옆 작은 마을, 원서동. 볕이 잘 드는 한옥 안에서 새까만 쇳덩어리가 움직인다. 납작한 활판을 새하얀 종이 위로 꾹 눌러 멋진 그래픽이 새기는 곳. 인쇄소 ‘긷’은 백 년 묵은 기계식 활판인쇄기와 한지를 조합하는 인쇄디자인 스튜디오다. 최민영 대표 디자이너를 만나 근대적 인쇄기술을 시각 디자인에 응용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인쇄 디자이너 최민영입니다. 한지와 활판인쇄기를 활용하는 인쇄물 작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원서동 빨래터 근처 한옥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사진을 전공했고 2000년대 후반까지 영화 스틸 작업을 했습니다. 디자이너 업무는 2011년에 종로 물나무사진관에 입사하며 맡게 됐어요. 재직 중에는 사진 인화용 한지를 개발하는데 참여하거나 문화 재단과 협업하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았었죠.
‘긷’이라는 스튜디오 이름이 독특합니다.
긷은 ‘기둥’을 일컫던 옛말입니다. 나무가 자랄 때 대지에서 출발하잖아요. 중력을 거스르면서 생명력 있게 자라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기둥을 떠올렸어요. 우리가 생활을 의식주로 구분할 때, 저는 주(宙)가 제일 마지막에 발현된 문화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둥이야말로 집의 기본이자, 지붕을 떠받들며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긷 같은 인쇄물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TALK1. 활판인쇄술과 계절력
2018년에 독립해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어요. 한지를 이용해서 한국적인 멋을 가진 인쇄물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백 년 넘은 미국산 활판인쇄기도 그때 만났습니다. 청담동 앤티크 숍에서 발견했는데 수리와 개조를 마치니 멀쩡했어요. 활판인쇄기에 한지를 끼워 넣으니 그 위에 담기는 아트워크가 참 예뻤어요. 활판의 양각으로 한지를 꾹 누르면, 납작 눌린 자리에 남은 글씨나 그림이 묵직한 분위기를 내죠.
인쇄소 긷의 대표 디자인은 ‘계절력’입니다. 왜 만들기 시작하셨나요?
계절력은 2017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어요. 기존 달력처럼 날짜를 세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계절을 감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태양력은 현대 사회의 기본 약속이잖아요. 원래 태음력으로 일 년을 바라봤던 우리가 절기와 풍속을 잊지 않길 바라며 만들어봤어요.
계절을 기준으로 시간의 시작과 끝맺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했어요. 계절을 기준으로 시간을 나누다 보니까 24절기가 자연스럽게 들어왔네요. 물나무 사진관 시절부터 만들었는데, 독립하고 나서도 꾸준히 만들고 있어요.
절기나 계절은 자연을 구분하는 개념일 텐데요. 「자연은 계속 흐른다. 그 속에서 우리 같이 어우러져서 잘 살아보자!」 라는 생각으로 달력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언제든 있다고 봐요. 2024년은 먹색 잉크로 날짜 표현을 하면서 ‘달의 변화’, ’24절기’, ‘대표 공휴일 표시’에 집중했어요.
해마다 조금씩 다른 디자인을 시도하고 계시죠?
네. 한때 공휴일을 붉은색으로 새기는 작업을 시도했는데 그건 딱 한 해만 했어요. 지금은 공휴일 숫자 위에 점을 찍는 것으로 디자인을 바꿨습니다.(웃음) 활판인쇄기에서 만든 인쇄물은 기계 특성에서 오는 한계가 있어요. 가장 많이 쓸 색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새로운 색을 덧발라야 합니다. 기계 특성상 종이에 여러 색을 동시에 새길 수 없어서 작업을 따로 진행해요.
여러 색채를 쓰려면, 일단 먹색 부분을 한 번 다 찍어내고 나서야 다른 색을 덧바를 수 있어요. 만약 평일 표시는 먹색, 공휴일을 표시는 붉은색을 쓴다면. 우선 먹색 인쇄작업을 미리 마쳐야 해요. 붉은색 전용 활판과 붉은색 잉크를 갈아 끼워서 동일한 인쇄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합니다. 색을 여러 개 쓰려면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먹색과 붉은색을 동시에 찍어냈을 때, 종이 위에서 의도와 다르게 인쇄물이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작업을 하는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고요. 만들면서 잃는 부분이 너무 많이 생기다 보니 지금은 달력에 먹색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컬러는 달력을 거는 실이나 포장지처럼 부속품에 따로 쓰고 있어요.
종이는 대부분 한지를 쓰고 계시죠. 이유가 궁금합니다.
흰색과 여백이 가장 잘 표현되는 종이여서 씁니다. 한지는 언뜻 보기에 비어 있지만, 무언가 차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참 좋습니다. 제가 하는 디자인 작업들이 제일 잘 표현될 수 있는 게 ‘한지’라는 물성을 살릴 때인듯해요. ‘활판 인쇄’라는 표현법이 한지와 제법 잘 어울리고요. 활판인쇄뿐만 아니라 한지를 활용한 디지털 인쇄작업도 맡고 있습니다.
다른 종이는 어떤 식으로 쓰시나요?
한지가 아닌 종이로는 문켄디자인 종이를 제일 많이 써요. 러프하면서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양피지 질감이 나는 쉽스킨도 가끔 즐겨 써요. 기본 세팅은 까끌까끌한 느낌이 드는 종이를 많이 채택하는 편인데, 디자인 주제에 맞춰 응용하는 편입니다.
한지가 디자인의 기준이다 보니, 한지와 잘 어우러질 종이를 선택해서 쓰고 있습니다.
혹시 새롭게 준비 중인 디자인 상품이 있나요?
수 년째 구상만 했지,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가 않네요.(웃음)
불규칙한 텍스처를 갖고 있는 한지로 캐주얼한 봉투를 만들어 쓰임새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어요. 편지를 담거나 용돈을 담는 봉투라면, 선물 교환할 때 쓰지 않을까 싶어요.
계절력을 조금 더 작은 사이즈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월(月)력으로 바뀔 듯하고. 탁상용 캘린더가 된다면, 한지에 직접 펜을 들고 메모를 하는 경험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요즘 들어 사람들이 한지에 글을 써보는 경험이 많이 없어서. 잘 연출한다면 색다를 것 같아요.
TALK2. 한국적인 미감을 새기는 일
종이 위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새기는 ‘긷’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미감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한국 사람들이 오늘날 서양식 문화를 소비해도, 사유하는 방법은 동양의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어요.
거기서 한국적인 사유를 발견해서 응용한다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굉장히 다른 관점의 해석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적인 미감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오늘’에 고착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 달라질 때마다 다른 형태로 발현되는거죠.
저는 자연이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뉘어 바뀌는 걸 아름답다 느끼는 사람이고, 한국의 아름다움은 담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생각을 하나 하나를 모으면, 한국적인 디자인이라는 게 어느새 자연스럽게 배어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미감(美感)’이라는 한자어가 디자인이라는 외래어의 번역으로써 부분적으로 적합하다고 봐요.
그리고 저는 한국적인 미감이 시각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고 봅니다. 예컨대 한지는 그 자체로 예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학습을 통해 한지가 수준 높은 종이라는 걸 알고 아름답다 말해요.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인쇄 종주국이라는 맥락을 알아요. 그런 분들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더 예민하게 느끼실 듯합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을 남들한테 특별하게 인식시키려는 의지가 생겨요. 혹은 대상을 특별하게 인식해야 될 거라 믿게 됩니다. 사물이나 생활양식을 이데올로기화시키는 셈이죠.
민영님으로부터 가장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한국적인 미감은 무엇인가요?
가느다란 줄에 무언가를 매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제게 있어요. 무언가를 프레임에 딱 가둬놓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걸 좋아하나 봐요. 종이 한 장 그 자체는 바람에 흔들리고 약해 보여도. 그 한 장이 바람도 타고 살랑살랑 움직이며 버티는 모습이 예쁘거든요. 줄에 매달린 한지를 바라보면 거기에 빛도 배어들어요. 날씨에 따라 빛에 따라 같은 게 다르게 보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나는 이번 작업물을 진짜 한국적으로 꾸며야지!」 라는 결심을 갖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요. 살아오면서 본 것, 사적인 취향 같은 게 어쩔 수 없이 한 방향으로 기우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전통의 이해와 현대 생활 양식의 파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려 거기에 현대적인 쓰임새를 만드는 일. 제가 안고 있는 고민입니다. 같은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반가울 거 같네요.(웃음)
TALK3. 활판인쇄물 디자인 프로세스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니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작업이 예상됩니다. 실제로는 어떠신가요?
근대적인 활판인쇄술만 고집하진 않아요. 만약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다면, 납판에 직접 글자 조판까지 해낼 텐데요. 저는 납이 아니라 아연 판을 쓰고 있고, 컴퓨터 일러스트 작업을 곁들여 따로 활판을 만들고 있어요.
근대 활판인쇄술은 보통 납판을 썼는데, 납은 잘 알려져 있듯 인체에 해로운 금속이라 아연으로 대체했어요. 납판과 비교하면 아연판의 물성이 상대적으로 무르긴 합니다. 활판을 인쇄기에 끼우면, 잉크가 돌아가는 롤러와 판의 양각이 닿는 면 사이가 미세하게 오차가 나요. 잉크와 종이가 효과적으로 맞물리는 세팅을 찾아내면서 아연판의 높이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인쇄용 활판은 어떻게 제작하시나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으로 아트워크를 만들고, 충무로에 있는 금형업체에 이미지 파일을 전달드려요. 아트워크 모양대로 필름을 떠주시는데요. 그걸 아연판 위에 부식을 시켜서 원하는 활판을 얻어내요. 현대적인 활판 생산법이죠.
근대 이전 활판인쇄는 같은 글자를 크기 별로 다 따로 만들어야 했어요. 결국 수만에서 수 십만 개의 활자들이 만들어집니다. 활자를 판에 따로 모으는 걸 ‘집자’라고 하는데요. 집자를 마친 활판을 기계 위에 올려서 찍어내는 방식이죠.
지금은 전통방식으로 활판을 제작하는 곳은 많지는 않아요. 파주의 ‘활판 공방’ 이라는 곳과 한 두군데 정도예요.
활판을 쭉 모아보니 명함이나 엽서가 눈에 띄네요. 주로 어떤 분들이 활판인쇄물을 찾으시나요?
명함, 청첩장, 레스토랑 메뉴판 같은 의뢰가 많이 들어옵니다. 명함은 스튜디오 진열장에 있는 걸 보고 개인정보만 바꿔 달라는 분도 계신데, 제가 다시 설득을 하죠. 템플릿을 만들고 내용만 바꾸는 게 개인적으로는 용납이 안되네요.(웃음) 활판 디자인은 능동적으로 제안하는 편입니다. 레이아웃, 테마, 서체 … 어떻게든 조금씩 변화시키려고 애써요.
손으로 뭔가 만들어내는 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활판인쇄가 핸드메이드와 같은 결을 지녔다고 보시는 듯해요. 한국적인 미감을 추구하는 회사나 공예품을 다루는 업체도 많이 찾아주세요. 자연을 소재로 활동하는 창작자, 분재 만드는 분이나 식물을 가꾸는 분도 자주 오시죠.
인쇄 목적은 주로 ‘정보 편집’이나 ‘소식 안내’입니다. 명함이나 엽서처럼 브랜딩을 위한 인쇄물 시안의뢰도 흔하고요. 공통적으로 자기자신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세요.
손이나 자연이라는 키워드에서 교집합이 모이네요. 종이를 활용한 패키지 인쇄 의뢰 같은 것도 들어오나요?
라벨지 작업은 해봤어요. 박스 작업은 개인적으로 권하고 싶은 작업은 아닙니다. 박스 패키지는 내용물을 보호하고 견고해야 하니까요. 패키지 속 소품 포장이나 박스를 덮는 슬리브(띠지)는 테스트해 봤어요. 슬리브나 봉투를 만드는 건 흥미로운 디자인이 될 듯합니다.
가장 많이 사용한 활판이 궁금합니다.
일엽편주라는 전통주 브랜드가 오랜 고객사입니다. 저희가 술병을 두르는 띠지를 만들었는데요. 한지를 쓴 활판인쇄물로 띠지 디자인을 부탁하셨어요. 일엽편주 활판을 2019년도부터 쓰고 있거든요. 여태까지 패키지 라벨지를 만 개 이상 찍어냈는데요. 아직까지도 문제없이 쓰고 있습니다.(웃음)
긷의 활판인쇄기에서 찍을 수 있는 인쇄물의 최대 사이즈는 얼마인가요?
가로 25cm, 세로 15cm 폭입니다. 보통 이 사이즈보다 작은 활판을 만들어서 종이에 인쇄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긷은 어떤 활동을 하시려고 합니까?
제가 커리어를 시작했던 사진과 관련한 디자인 작업들, 자연적인 스토리를 가진 작가나 브랜드와의 협업 프로젝트들을 해보려고 해요.
많이 하고 있는 작업은 디지털 사진 작업을 활판으로 만들어서 흑백사진을 인쇄하는 건데요. 사진을 전부 *망점으로 바꾸고 판을 만든 거라 찍고 나면 종이에 아주 작은 도트가 보입니다. 「활판 인쇄로는 정보를 전달하는 텍스트만 표현되지 않을까?」 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요. 도전해 보니 이미지 표현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어서 훗날 인쇄 디자인에 반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망점 : 연속계조가 있는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을 인쇄물로 재현하기 위해 만드는 미세한 점
😈 흘러간 문화를 주목하고 옛 도구를 복원시켜 디자인에 활용하는 방식 어떻게 보셨나요? 디자인을 하는 도구의 구조를 이해하고 소재의 물성을 탐구하는 게 나만의 디자인을 만드는 지름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특정 도구나 사물의 물성에 강한 흥미를 느끼는 편인가요? 그렇다면 스크롤을 올려 인터뷰를 다시 읽어보세요. 그리고 디자이너의 관점과 작업과정을 주목해보세요. 거기서 얻은 여러분의 생각이 근사한 디자인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정리 프라이스
사진 한창환
장소 원서동 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