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나무사진관은 ‘사진을 통해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하려고 만든 공간입니다. ‘전신사조’*라는 전통 회화 스타일을 응용한 사진관이죠. 저는 90년대부터 패션지 인물 화보 같은 상업사진을 만들었어요. 시간이 흐르며 ‘한국적인 것’을 시각화하고 우리 것의 가치를 알리는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 묘사뿐 아니라 인격과 내면세계까지 표출해야 한다는 동양 초상화론.
ⓒ물나무사진관
이 밖에도 사진 인화용 한지 디자인, 사진관 앞 한옥에서 한국 공예품을 소개하는 상점을 운영하셨는데요. ‘한국적인 디자인’을 탐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궁금하네요.
2000년대 중후반에 한국 문화를 다룬 수카라(スッカラ)라는 일본잡지가 있었어요. 저는 수카라의 사진기자이자 포토 디렉터로 일했습니다. 그때 우리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과 ‘방식’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예를 들어, 특집 콘텐츠로 한지나 한옥을 소개한다고 가정해볼게요. 우리는 한지와 한옥에 대해 너무나 익숙하지만, 막상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외국에 나와 보니, 그들은 문화를 수용하고 알리는 데 나름의 체계적인 방법을 갖추고 있었어요. 또한, 문화를 다루는 기준도 비교적 객관적이고 명확하다는 걸 깨달았죠.
ⓒスッカラ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문제의식이 생겼어요.
“한국 문화를 다루려면 일단 시선이 필요하구나! 그리고 문화를 체계적으로 묶는 방식이 필요하겠구나!”
그래서 대학원에 들어가 기호학을 공부했어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한국 문화가 가진 본질을 탐구하는 연습이었죠.
그 결과 ‘전승’과 ‘계승’의 차이를 구분하게 됐어요.
‘전승’과 ‘계승’은 어떤 차이가 있나요?
‘전승’은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고, ‘계승’은 전통에 오늘의 쓰임새를 더해 이어가는 것이에요. 전통은 알고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진짜 중요한 건 계승이죠.
계승이 ‘전통에 오늘의 쓰임새를 덧입히는 일’이라면 어떤 사례가 있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는 예로부터 말총을 활용해 생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어요. ‘갓’을 만들어 머리에 쓰거나, ‘체’를 만들어 가루를 거르는 식이었죠. 하지만 지금은 이런 전통적인 도구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런데 계승하려는 사람은 이 흐름에 디자인을 더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어요. “자! 말총은 이렇게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라고 애기하며, 말총으로 커피 필터를 만들어 보고, 종이 필터나 융 드립 커피와 비교해 보며, 여러 사람에게 시음을 권할 수도 있겠죠.
백경현 말총공예 장인의 마미체 커피필터 ⓒChwi
한국의 말총공예가 새로운 쓰임을 얻고, 누군가에게 필요해지고, 경제성을 갖추고, 유행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 문화 계승에 문제를 제기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요. 이건 저의 수많은 자아 중, 사회적인 자아일 텐데요. ‘한국적인 XX’를 탐구하는 궁극적인 목표이자 근본적인 동기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한국의 전통과 그 계승 과정에서 ‘근대’가 빠져있다고 생각해요. 전근대 문화는 박물관의 유능한 학예사님들이나 관계자분들이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고 있죠. 그런데 근대는 달라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당시의 생활상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단순한 자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저는 직접 그 시대를 살아온 어르신들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당시 시대상을 들여다보려고 했어요.
“어르신 저는 70년대생이라 그 시절을 잘 모르는데요. 당시 모습을 좀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라고 여쭤보면 대부분 이렇게 답하시더라고요.
“아유~그땐 먹고 살기 힘들었어.”
대화를 나누다보면 기억이 포개지면서 장소성과 분위기 같은 기호학적 요소들이 조금씩 드러나거든요.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이상의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래도 지금 남아있는 걸 보존하고 지킬 수 있었다는게 다행이죠. 비록 서양의 근대화를 일본이 수용하면서 그 흐름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지만, 한국의 근대적 문화 역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일간신문. ⓒ국립민속박물관가로쓰기와 세로쓰기가 혼용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적인 디자인’을 탐구하는 디자이너를 위해 유용한 팁 하나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맥락을 알고 디자인하는 게 중요하다」 특히 한국적인 디자인을 할 때 더욱 그렇죠.
최근 협업에서 한글 세로쓰기를 활용한 시각 디자인을 받았어요. 그런데 확인해 보니, 레이아웃 자체는 가로쓰기에 맞춰져 있더라고요. 사실, 한글 세로쓰기가 흔했던 시대도 있었어요. 한글 가로쓰기가 표준이 된 것은 20세기 중후반부터예요. 만약 디자이너가 한글 쓰기의 역사적 흐름과 배경을 더 깊이 이해했다면, 훨씬 더 좋은 디자인을 만들 수 있었겠죠.
마더그라운드는 디자인에 자연환경이나 도시의 풍경을 반영합니다. 특히 지역색을 반영한 아트워크 일러스트를 활용한 제품들이 인상적인데요.
마더그라운드는 전국을 돌며 보부스토어라는 이름으로 팝업스토어를 열고 있어요.
조선시대 보부상에게 영감을 얻은 기획이죠. 주력 제품은 스니커즈, 티셔츠, 양말인데요. 팝업스토어 출장 일정에 맞춰 한정판을 만듭니다.
예컨대 대전에서는 ’93 엑스포’, 그 중에서도 ‘한빛탑’ 대구는 ‘섬유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떠올려요. 울산 팝업스토어는 ‘수출의 도시’라는 로컬 스토리에서 아트워크를 시작했어요. 공업도시 울산의 이미지를 표현했습니다.
“우리 지역의 핵심을 잘 표현했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애 많이 썼구나!”
디자인에서 그런 인상을 받을 때 그 지역 분들도, 지역을 방문하는 소비자분들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누룩, 밤, 된장. 한글 이름도 흥미로웠어요. 다른 패션 브랜드와 비교해 보면 디자인에 한국적인 소재를 즐겨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사람인 내가, 나다움을 찾아서 무언가 만들고 브랜드를 위해 무언가를 모으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소재가 자연스럽게 디자인으로 모였습니다.
콘셉트가 아니라 익숙한 것을 연상하며서 정해요. 귤이 떠오르면 귤. 색이 누룩처럼 보이면 누룩이라 이름 짓는 식이죠. 의도라기 보다는 무의식에 가까운 디자인 요소입니다.
대표 디자이너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로컬 굿즈 디자인 사례 4가지
36th 보부스토어, 울산광역시
울산은 조선업이나 자동차업계 종사자가 많아요. 그 분들이 주인공인 울산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자동차가 큰 선박에 실려 해외로 나가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걸 귀여운 일러스트로 그려 티셔츠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트워크를 재밌게 보시고 구매해주셨어요. 울산시민분들이 ‘수출의 도시’라는 이미지에 자긍심을 느끼신다는 인상입니다.
45th, 49th 보부스토어, 도보마포 페스티벌
학창 시절부터 머물렀던 서울 마포구! 로컬 큐레이터 ‘도보마포’와 작은 지역 축제를 열었었어요. 가볼 만한 곳을 수집하고 그곳의 인상적인 풍경을 주제로 아트워크를 그려 지도, 티셔츠, 양말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마포의 특별한 공간을 주제로 매달 양말을 만들려 해요! 최근 연남동에 ‘보보스토어’라는 이름으로 상설 매장을 열었거든요. 방 한 켠에 여태까지 만든 아트워크를 전시중이니 언제든 편히 방문해 주세요!
19th 보부스토어, 제주 서귀포
제주하면 생각나는 ‘감귤’, 그리고 제주 동쪽의 자랑 ‘비자림’의 컬러를 담았습니다. 스티커즈와 티셔츠, 모자, 반바지 등으로 단일한 컬렉션을 구성했습니다. ‘플레이스 캠프’라는 호텔 겸 스토어에서 연 팝업인데요. 관광객은 제주를 추억하기 위한 기념품으로, 제주도민분들은 내가 사는 지역을 잘 표현했기 때문에 구매했다 말씀하셨어요. 제주 컬렉션을 각자 다른 이유로 소장하는 게 인상적입니다.
40th, 53th 보부스토어, 경기도 고양~일산
고양~일산에서만 팝업스토어를 3번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랜드마크인 호스공원을 아트워크로 만들었는데요. 최신 굿즈는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어요. 고양에서 고양이를, 일산은 1과 山(뫼 산)을 더하는 식인데 호응이 좋았습니다. 상품과 아트워크로 던진 유머였는데, 제작의도를 설명하다보면 고객과의 거리가 부쩍 좁혀지는 느낌이 들어요.
서울 창덕궁 담벼락 옆 작은 마을, 원서동. 볕이 잘 드는 한옥 안에서 새까만 쇳덩어리가 움직인다. 납작한 활판을 새하얀 종이 위로 꾹 눌러 멋진 그래픽이 새기는 곳. 인쇄소 ‘긷’은 백 년 묵은 기계식 활판인쇄기와 한지를 조합하는 인쇄디자인 스튜디오다. 최민영 대표 디자이너를 만나 근대적 인쇄기술을 시각 디자인에 응용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frice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인쇄 디자이너 최민영입니다. 한지와 활판인쇄기를 활용하는 인쇄물 작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원서동 빨래터 근처 한옥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사진을 전공했고 2000년대 후반까지 영화 스틸 작업을 했습니다. 디자이너 업무는 2011년에 종로 물나무사진관에 입사하며 맡게 됐어요. 재직 중에는 사진 인화용 한지를 개발하는데 참여하거나 문화 재단과 협업하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았었죠.
공간 내부에서 바라본 활판인쇄기. 총 2대가 설치됐고 실제로 운용하는 기기는 1대. ⓒfrice
‘긷’이라는 스튜디오 이름이 독특합니다.
긷은 ‘기둥’을 일컫던 옛말입니다. 나무가 자랄 때 대지에서 출발하잖아요. 중력을 거스르면서 생명력 있게 자라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기둥을 떠올렸어요. 우리가 생활을 의식주로 구분할 때, 저는 주(宙)가 제일 마지막에 발현된 문화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둥이야말로 집의 기본이자, 지붕을 떠받들며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긷 같은 인쇄물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TALK1. 활판인쇄술과 계절력
챈들러 앤 프라이스 활판인쇄기. 미국에서 19세기 후반 제작된 기기로 추정된다. ⓒfrice
2018년에 독립해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어요. 한지를 이용해서 한국적인 멋을 가진 인쇄물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백 년 넘은 미국산 활판인쇄기도 그때 만났습니다. 청담동 앤티크 숍에서 발견했는데 수리와 개조를 마치니 멀쩡했어요. 활판인쇄기에 한지를 끼워 넣으니 그 위에 담기는 아트워크가 참 예뻤어요. 활판의 양각으로 한지를 꾹 누르면, 납작 눌린 자리에 남은 글씨나 그림이 묵직한 분위기를 내죠.
한지와 활판인쇄기를 활용한 긷의 대표 디자인 상품 ‘계절력’. 24절기와 달의 변화를 표기했다. ⓒfrice
인쇄소 긷의 대표 디자인은 ‘계절력’입니다. 왜 만들기 시작하셨나요?
계절력은 2017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어요. 기존 달력처럼 날짜를 세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계절을 감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태양력은 현대 사회의 기본 약속이잖아요. 원래 태음력으로 일 년을 바라봤던 우리가 절기와 풍속을 잊지 않길 바라며 만들어봤어요.
계절을 표기한 글자를 확대한 모습. 활판 양각에 한지가 꾹 눌리며 종이 위로 독특한 입체감이 드리운다. ⓒfrice
계절을 기준으로 시간의 시작과 끝맺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했어요. 계절을 기준으로 시간을 나누다 보니까 24절기가 자연스럽게 들어왔네요. 물나무 사진관 시절부터 만들었는데, 독립하고 나서도 꾸준히 만들고 있어요.
절기나 계절은 자연을 구분하는 개념일 텐데요. 「자연은 계속 흐른다. 그 속에서 우리 같이 어우러져서 잘 살아보자!」 라는 생각으로 달력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언제든 있다고 봐요. 2024년은 먹색 잉크로 날짜 표현을 하면서 ‘달의 변화’, ’24절기’, ‘대표 공휴일 표시’에 집중했어요.
해마다 조금씩 다른 디자인을 시도하고 계시죠?
네. 한때 공휴일을 붉은색으로 새기는 작업을 시도했는데 그건 딱 한 해만 했어요. 지금은 공휴일 숫자 위에 점을 찍는 것으로 디자인을 바꿨습니다.(웃음) 활판인쇄기에서 만든 인쇄물은 기계 특성에서 오는 한계가 있어요. 가장 많이 쓸 색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새로운 색을 덧발라야 합니다. 기계 특성상 종이에 여러 색을 동시에 새길 수 없어서 작업을 따로 진행해요.
원판 위에 잉크를 바르고 롤러를 굴리면 색이 판 위에 고르게 퍼지는 구조다. 색 사용에 제약이 걸리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frice
여러 색채를 쓰려면, 일단 먹색 부분을 한 번 다 찍어내고 나서야 다른 색을 덧바를 수 있어요. 만약 평일 표시는 먹색, 공휴일을 표시는 붉은색을 쓴다면. 우선 먹색 인쇄작업을 미리 마쳐야 해요. 붉은색 전용 활판과 붉은색 잉크를 갈아 끼워서 동일한 인쇄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합니다. 색을 여러 개 쓰려면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먹색과 붉은색을 동시에 찍어냈을 때, 종이 위에서 의도와 다르게 인쇄물이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작업을 하는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고요. 만들면서 잃는 부분이 너무 많이 생기다 보니 지금은 달력에 먹색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컬러는 달력을 거는 실이나 포장지처럼 부속품에 따로 쓰고 있어요.
종이는 대부분 한지를 쓰고 계시죠. 이유가 궁금합니다.
흰색과 여백이 가장 잘 표현되는 종이여서 씁니다. 한지는 언뜻 보기에 비어 있지만, 무언가 차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참 좋습니다. 제가 하는 디자인 작업들이 제일 잘 표현될 수 있는 게 ‘한지’라는 물성을 살릴 때인듯해요. ‘활판 인쇄’라는 표현법이 한지와 제법 잘 어울리고요. 활판인쇄뿐만 아니라 한지를 활용한 디지털 인쇄작업도 맡고 있습니다.
‘긷’의 디지털 인쇄물. 대형 프린트기에 급지가 가능한 특수한지와 피그먼트 프린트로 한국적인 미감을 연출한 인쇄물 작업을 확인할 수 있었다. ⓒfrice
다른 종이는 어떤 식으로 쓰시나요?
한지가 아닌 종이로는 문켄디자인 종이를 제일 많이 써요. 러프하면서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양피지 질감이 나는 쉽스킨도 가끔 즐겨 써요. 기본 세팅은 까끌까끌한 느낌이 드는 종이를 많이 채택하는 편인데, 디자인 주제에 맞춰 응용하는 편입니다.
한지가 디자인의 기준이다 보니, 한지와 잘 어우러질 종이를 선택해서 쓰고 있습니다.
활판인쇄 작업에 필요한 도구가 담긴 진열장 ⓒfrice
혹시 새롭게 준비 중인 디자인 상품이 있나요?
수 년째 구상만 했지,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가 않네요.(웃음)
불규칙한 텍스처를 갖고 있는 한지로 캐주얼한 봉투를 만들어 쓰임새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어요. 편지를 담거나 용돈을 담는 봉투라면, 선물 교환할 때 쓰지 않을까 싶어요.
계절력을 조금 더 작은 사이즈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월(月)력으로 바뀔 듯하고. 탁상용 캘린더가 된다면, 한지에 직접 펜을 들고 메모를 하는 경험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요즘 들어 사람들이 한지에 글을 써보는 경험이 많이 없어서. 잘 연출한다면 색다를 것 같아요.
TALK2. 한국적인 미감을 새기는 일
디자인 견본을 전시해둔 접객 공간 ⓒfrice
종이 위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새기는 ‘긷’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미감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한국 사람들이 오늘날 서양식 문화를 소비해도, 사유하는 방법은 동양의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어요.
거기서 한국적인 사유를 발견해서 응용한다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굉장히 다른 관점의 해석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적인 미감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오늘’에 고착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 달라질 때마다 다른 형태로 발현되는거죠.
저는 자연이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뉘어 바뀌는 걸 아름답다 느끼는 사람이고, 한국의 아름다움은 담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생각을 하나 하나를 모으면, 한국적인 디자인이라는 게 어느새 자연스럽게 배어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미감(美感)’이라는 한자어가 디자인이라는 외래어의 번역으로써 부분적으로 적합하다고 봐요.
ⓒfrice
그리고 저는 한국적인 미감이 시각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고 봅니다. 예컨대 한지는 그 자체로 예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학습을 통해 한지가 수준 높은 종이라는 걸 알고 아름답다 말해요.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인쇄 종주국이라는 맥락을 알아요. 그런 분들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더 예민하게 느끼실 듯합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을 남들한테 특별하게 인식시키려는 의지가 생겨요. 혹은 대상을 특별하게 인식해야 될 거라 믿게 됩니다. 사물이나 생활양식을 이데올로기화시키는 셈이죠.
스튜디오 안 창가에 매달린 입춘첩. ⓒfrice
민영님으로부터 가장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한국적인 미감은 무엇인가요?
가느다란 줄에 무언가를 매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제게 있어요. 무언가를 프레임에 딱 가둬놓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걸 좋아하나 봐요. 종이 한 장 그 자체는 바람에 흔들리고 약해 보여도. 그 한 장이 바람도 타고 살랑살랑 움직이며 버티는 모습이 예쁘거든요. 줄에 매달린 한지를 바라보면 거기에 빛도 배어들어요. 날씨에 따라 빛에 따라 같은 게 다르게 보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스튜디오에 전시된 활판인쇄물 샘플 ⓒfrice
「나는 이번 작업물을 진짜 한국적으로 꾸며야지!」 라는 결심을 갖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요. 살아오면서 본 것, 사적인 취향 같은 게 어쩔 수 없이 한 방향으로 기우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전통의 이해와 현대 생활 양식의 파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려 거기에 현대적인 쓰임새를 만드는 일. 제가 안고 있는 고민입니다. 같은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반가울 거 같네요.(웃음)
TALK3. 활판인쇄물 디자인 프로세스
전시행사를 위한 활판인쇄작업. 최민영 디자이너가 명함 사이즈 인쇄물 200여장을 직접 인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frice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니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작업이 예상됩니다. 실제로는 어떠신가요?
근대적인 활판인쇄술만 고집하진 않아요. 만약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다면, 납판에 직접 글자 조판까지 해낼 텐데요. 저는 납이 아니라 아연 판을 쓰고 있고, 컴퓨터 일러스트 작업을 곁들여 따로 활판을 만들고 있어요.
근대 활판인쇄술은 보통 납판을 썼는데, 납은 잘 알려져 있듯 인체에 해로운 금속이라 아연으로 대체했어요. 납판과 비교하면 아연판의 물성이 상대적으로 무르긴 합니다. 활판을 인쇄기에 끼우면, 잉크가 돌아가는 롤러와 판의 양각이 닿는 면 사이가 미세하게 오차가 나요. 잉크와 종이가 효과적으로 맞물리는 세팅을 찾아내면서 아연판의 높이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활판을 쌓아놓고 측면에서 확대했다. 도톰한 양각에 묻은 마른 잉크가 인상적. ⓒfrice
인쇄용 활판은 어떻게 제작하시나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으로 아트워크를 만들고, 충무로에 있는 금형업체에 이미지 파일을 전달드려요. 아트워크 모양대로 필름을 떠주시는데요. 그걸 아연판 위에 부식을 시켜서 원하는 활판을 얻어내요. 현대적인 활판 생산법이죠.
근대 이전 활판인쇄는 같은 글자를 크기 별로 다 따로 만들어야 했어요. 결국 수만에서 수 십만 개의 활자들이 만들어집니다. 활자를 판에 따로 모으는 걸 ‘집자’라고 하는데요. 집자를 마친 활판을 기계 위에 올려서 찍어내는 방식이죠.
지금은 전통방식으로 활판을 제작하는 곳은 많지는 않아요. 파주의 ‘활판 공방’ 이라는 곳과 한 두군데 정도예요.
‘긷’에서 제작한 다양한 활판 ⓒfrice
활판을 쭉 모아보니 명함이나 엽서가 눈에 띄네요. 주로 어떤 분들이 활판인쇄물을 찾으시나요?
명함, 청첩장, 레스토랑 메뉴판 같은 의뢰가 많이 들어옵니다. 명함은 스튜디오 진열장에 있는 걸 보고 개인정보만 바꿔 달라는 분도 계신데, 제가 다시 설득을 하죠. 템플릿을 만들고 내용만 바꾸는 게 개인적으로는 용납이 안되네요.(웃음) 활판 디자인은 능동적으로 제안하는 편입니다. 레이아웃, 테마, 서체 … 어떻게든 조금씩 변화시키려고 애써요.
손으로 뭔가 만들어내는 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활판인쇄가 핸드메이드와 같은 결을 지녔다고 보시는 듯해요. 한국적인 미감을 추구하는 회사나 공예품을 다루는 업체도 많이 찾아주세요. 자연을 소재로 활동하는 창작자, 분재 만드는 분이나 식물을 가꾸는 분도 자주 오시죠.
인쇄 목적은 주로 ‘정보 편집’이나 ‘소식 안내’입니다. 명함이나 엽서처럼 브랜딩을 위한 인쇄물 시안의뢰도 흔하고요. 공통적으로 자기자신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세요.
손이나 자연이라는 키워드에서 교집합이 모이네요. 종이를 활용한 패키지 인쇄 의뢰 같은 것도 들어오나요?
라벨지 작업은 해봤어요. 박스 작업은 개인적으로 권하고 싶은 작업은 아닙니다. 박스 패키지는 내용물을 보호하고 견고해야 하니까요. 패키지 속 소품 포장이나 박스를 덮는 슬리브(띠지)는 테스트해 봤어요. 슬리브나 봉투를 만드는 건 흥미로운 디자인이 될 듯합니다.
술이 담기는 유리병을 감싸는 한지 인쇄물과 활판. 긷은 전통주 브랜드 ‘일엽편주’의 패키지 라벨지 작업을 맡고 있다. ⓒfrice
가장 많이 사용한 활판이 궁금합니다.
일엽편주라는 전통주 브랜드가 오랜 고객사입니다. 저희가 술병을 두르는 띠지를 만들었는데요. 한지를 쓴 활판인쇄물로 띠지 디자인을 부탁하셨어요. 일엽편주 활판을 2019년도부터 쓰고 있거든요. 여태까지 패키지 라벨지를 만 개 이상 찍어냈는데요. 아직까지도 문제없이 쓰고 있습니다.(웃음)
긷의 활판인쇄기에서 찍을 수 있는 인쇄물의 최대 사이즈는 얼마인가요?
가로 25cm, 세로 15cm 폭입니다. 보통 이 사이즈보다 작은 활판을 만들어서 종이에 인쇄하고 있어요.
카페 오너가 의뢰한 엽서 디자인. 종이에 그린 스케치를 활판으로 이식했다. 잉크와 연필의 물성이 공존하는 인쇄물로 재탄생. ⓒfrice
‘긷’에서 제작한 스튜디오 오픈 기념 파티초대장. 한옥 천장을 올려다볼 때 드러난 기둥을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활판으로 만들어 직접 인쇄했다. ⓒfrice
종이에 촘촘하게 새겨진 점이 디지털 사진의 픽셀처럼 기능한다. ⓒfrice
앞으로의 긷은 어떤 활동을 하시려고 합니까?
제가 커리어를 시작했던 사진과 관련한 디자인 작업들, 자연적인 스토리를 가진 작가나 브랜드와의 협업 프로젝트들을 해보려고 해요.
많이 하고 있는 작업은 디지털 사진 작업을 활판으로 만들어서 흑백사진을 인쇄하는 건데요. 사진을 전부 *망점으로 바꾸고 판을 만든 거라 찍고 나면 종이에 아주 작은 도트가 보입니다. 「활판 인쇄로는 정보를 전달하는 텍스트만 표현되지 않을까?」 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요. 도전해 보니 이미지 표현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어서 훗날 인쇄 디자인에 반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망점 : 연속계조가 있는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을 인쇄물로 재현하기 위해 만드는 미세한 점
😈 흘러간 문화를 주목하고 옛 도구를 복원시켜 디자인에 활용하는 방식 어떻게 보셨나요? 디자인을 하는 도구의 구조를 이해하고 소재의 물성을 탐구하는 게 나만의 디자인을 만드는 지름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특정 도구나 사물의 물성에 강한 흥미를 느끼는 편인가요? 그렇다면 스크롤을 올려 인터뷰를 다시 읽어보세요. 그리고 디자이너의 관점과 작업과정을 주목해보세요. 거기서 얻은 여러분의 생각이 근사한 디자인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먼저 ‘우리 자신으로부터의 이야기’라는 슬로건이 인상적인데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이감각이 디자인하고 싶은 한국스러움은 무엇인지 궁금해요.
이감각의 작업은 ‘전통의 현대화’나 ‘전통이 무엇인가?’를 다루기보다는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모든 것은 우리안에 있다’였죠. 디자인에 우리 자신에 대한 적극적인 탐색 의지를 담습니다. 우리가 가진 특색이 보다 일상에 가깝고 편하게 존재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시작했어요.
그렇다면 이감각에게 전통은 어떤 의미인가요?
나에게 계속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나를 인식하는 일입니다. 전통은 할머니의 오래된 가구를 엄마가 쓰고 엄마의 젊은 시절 원피스를 내가 입는 것과 아주 다르지 않아요. 누군가 아꼈던 물건들을 통해서. 그걸 물려주는 마음을 통해서. 그들을 헤아리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자신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인식하는 것은 외부를 통해서가 아니죠. 한국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 또한 입에서 입, 손에서 손, 그리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져 왔다 생각해요. 우리만의 히스토리가 있는 오브제들을 통해서 한국적인 해학, 소박, 흥을 전하고 싶어요. 더불어 세상에 유일한 나를 사랑하고 즐기는 경험을 전하고 싶습니다.
요즘 한국의 전통에서 디자인 언어를 얻으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적인 멋’을 탐구 중인 창작자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까요?
한국 고유의 디자인 언어를 딱 하나로 좁혀서 말하긴 힘들지만! 저희가 가장 흥미롭게 보는 요소는 ‘해학’입니다. 유머라고 하죠. 주어진 현실을 과장하거나 비꼬는 게 우리게에 있어요.
유튜브 댓글 창 같은 거 보면 한국 사람들은 말을 되게 웃기게 하잖아요.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꼬인 걸 풀려고 하고. 풀린 건 꼬면서 놀고.
이런 해학적인 태도가 한국만의 위트인 것 같아요.
해학이 디자인 언어가 된 사례는 어떤 게 있을까요?
도자기에 그린 그림이나 표현 방식이 그래요. 그릇에 점 하나 탁 찍어서 마무리하는 기법 같은 게 그렇죠.
또 하나는 호랑이 그림인데요. 다른 나라는 무섭게 그려요. 두려운 존재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맹수를 귀엽게 묘사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표현햐요.
호랑이를 친근하게 그리는 건 호랑이와 친한 관계를 원했던 게 아닐까요?
호랑이처럼 무서운 대상을 좀 더 쉽게 다룰 수 있는 존재 혹은 허물어진 존재로 여기는 거죠.
이건 한국인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관계성일 텐데요. 우리는 남을 포용하고 함께 섞인 채 노는 상태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미감도 그런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서양처럼 자연과 나를 독립시키려는 태도와는 달라요. 지금까지 얘기했던 점들이 이감각의 제품이나 디자인 스타일에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감각이 요즘 푹빠진 한국의 디자인 언어는 무엇인가요?
‘매듭’입니다. 저희는 한국적인 디자인의 맥락이 해학이라 보는데요. 해학을 떠올리면, 농담을 거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얽히는 모습이 떠올라요. 그것을 실을 써서 조형적으로 풀면 실과 실이 꼬인 매듭이 나옵니다.
매듭 자체가 한국문화 특유의 관계성이 반영된 조형 디자인이라고 생각해요. 서양에서는 그냥 도구 내지는 수단이거든요. 끈을 묶어서 뭔가 물건을 만들고 고정을 하는 목적 그 자체만 남는 건데 우리나라는 달라요. 매듭 자료도 많이 남아있고 한국인이라면 매듭의 의미적인 맥락을 볼 수 있지요.
ⓒ이감각
매듭은 재밌어요. 2d인데 3d고 2d가 3d가 된 거라서. 묘한 해학이 생기죠. 완전 평면인데 접으면 입체니까. 이감각이 하고 싶은 디자인. 이감각이니까 할 수 있는 디자인 이야기가 생기는 거죠. 평면인데 자수를 넣고 엮고 접고 하면서 얘기가 생기고. 그 면과 면 사이에 또 다른 관계성이 생기는 것. 그런 게 좋습니다. 실 뿐만 아니라 흙이나 실리콘 등 다양한 소재로 매듭 디자인을 만드는데 도전하고 있어요!
특히 패브릭 소재 매듭은 사람손을 타는 디테일인데요. 공임 과정에서 매듭을 전담해주실 협업파트너의 존재가 정말 소중합니다. 저희가 그동안 매듭에 매달리면서 이걸 전담해주실 수 있는 장인분을 만나고 있고, 앞으로도 그 덕을 많이 볼 거 같아요. 원하는 디테일을 만들기 위한 파트너를 만나는 건 정말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