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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부상의 눈으로 얻어낸 로컬 굿즈 디자인

마더그라운드 보부스토어의 보부상 아트워크
디자이너 이근백의 프로필. 이근백 @rootdraw 디자인 / 패션 마더그라운드 대표. 자연, 환경, 우리 주변의 이야기를 제품에 담고 한국의 인상적인 장면을 아트워크로 재해석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국 사람인 내가, 나다움을 찾아 무언가 모으고 만들어요. 그 과정에서 한국적인 소재가 브랜드에 모였습니다."
인터뷰 콘텐츠 DM그라운드의 인트로 다이얼로그. 안녕하세요 frice입니다. 프라이스는 한국의 전통에서 디자인 언어를 탐구하는 디자이너가 궁금해요! 한국을 돌며 로컬을 주제로 다양한 제품을 만들고 계신데요. 여기에 어떤 이야기가 실려 있을지 궁금해서 연락드려요. 안녕하셍! 마더그라운드의 디자인에 대해서 저도 생각을 한 번 정리하고 말씀 드릴게요.

마더그라운드는 디자인에 자연환경이나 도시의 풍경을 반영합니다. 특히 지역색을 반영한 아트워크 일러스트를 활용한 제품들이 인상적인데요.

마더그라운드는 전국을 돌며 보부스토어라는 이름으로 팝업스토어를 열고 있어요.

50th 보부스토어 기념 스몰백(2024)

조선시대 보부상에게 영감을 얻은 기획이죠. 주력 제품은 스니커즈, 티셔츠, 양말인데요. 팝업스토어 출장 일정에 맞춰 한정판을 만듭니다.

마더그라운드의 로컬 테마 아트워크 포스터(2024)

예컨대 대전에서는 ’93 엑스포’, 그 중에서도 ‘한빛탑’ 대구는 ‘섬유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떠올려요. 울산 팝업스토어는 ‘수출의 도시’라는 로컬 스토리에서 아트워크를 시작했어요. 공업도시 울산의 이미지를 표현했습니다.

“우리 지역의 핵심을 잘 표현했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애 많이 썼구나!”

디자인에서 그런 인상을 받을 때 그 지역 분들도, 지역을 방문하는 소비자분들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연남동 보보스토어에 전시된 목업 시제품

누룩, 밤, 된장. 한글 이름도 흥미로웠어요. 다른 패션 브랜드와 비교해 보면 디자인에 한국적인 소재를 즐겨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사람인 내가, 나다움을 찾아서 무언가 만들고 브랜드를 위해 무언가를 모으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소재가 자연스럽게 디자인으로 모였습니다.

콘셉트가 아니라 익숙한 것을 연상하며서 정해요. 귤이 떠오르면 귤. 색이 누룩처럼 보이면 누룩이라 이름 짓는 식이죠. 의도라기 보다는 무의식에 가까운 디자인 요소입니다.

마더그라운드, T007 ULSAN(GREEN), 수출의울산

대표 디자이너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로컬 굿즈 디자인 사례 4가지

36th 보부스토어, 울산광역시

울산은 조선업이나 자동차업계 종사자가 많아요. 그 분들이 주인공인 울산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자동차가 큰 선박에 실려 해외로 나가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걸 귀여운 일러스트로 그려 티셔츠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트워크를 재밌게 보시고 구매해주셨어요. 울산시민분들이 ‘수출의 도시’라는 이미지에 자긍심을 느끼신다는 인상입니다.

마더그라운드, 제 1 회 도보마포 페스티벌, 서울 신수동

45th, 49th 보부스토어, 도보마포 페스티벌

학창 시절부터 머물렀던 서울 마포구! 로컬 큐레이터 ‘도보마포’와 작은 지역 축제를 열었었어요. 가볼 만한 곳을 수집하고 그곳의 인상적인 풍경을 주제로 아트워크를 그려 지도, 티셔츠, 양말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마포의 특별한 공간을 주제로 매달 양말을 만들려 해요! 최근 연남동에 ‘보보스토어’라는 이름으로 상설 매장을 열었거든요. 방 한 켠에 여태까지 만든 아트워크를 전시중이니 언제든 편히 방문해 주세요!

마더그라운드, S001 JU(WHITE/ORANGE)귤, FEI (WHITE/GREEN)비자림

19th 보부스토어, 제주 서귀포

제주하면 생각나는 ‘감귤’, 그리고 제주 동쪽의 자랑 ‘비자림’의 컬러를 담았습니다. 스티커즈와 티셔츠, 모자, 반바지 등으로 단일한 컬렉션을 구성했습니다. ‘플레이스 캠프’라는 호텔 겸 스토어에서 연 팝업인데요. 관광객은 제주를 추억하기 위한 기념품으로, 제주도민분들은 내가 사는 지역을 잘 표현했기 때문에 구매했다 말씀하셨어요. 제주 컬렉션을 각자 다른 이유로 소장하는 게 인상적입니다.

마더그라운드, SX001(WHITE)

40th, 53th 보부스토어, 경기도 고양~일산

고양~일산에서만 팝업스토어를 3번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랜드마크인 호스공원을 아트워크로 만들었는데요. 최신 굿즈는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어요. 고양에서 고양이를, 일산은 1과 山(뫼 산)을 더하는 식인데 호응이 좋았습니다. 상품과 아트워크로 던진 유머였는데, 제작의도를 설명하다보면 고객과의 거리가 부쩍 좁혀지는 느낌이 들어요.

한지 위에 저 소나무

수묵화가 수록의 조명장치
수묵화가 수록의 프로필. 수록 @sue1og 회화 / 공예 수묵화가. 좋아하는 사물과 작업하며 떠올린 생각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시끄러운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지길 원해서 그립니다."
인터뷰 콘텐츠 DM그라운드의 인트로 다이얼로그. 안녕하세요 frice입니다. 프라이스는 한국의 전통에서 디자인 언어를 탐구하는 디자이너가 궁금해요!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리신 수묵화 작품 인상깊게 잘 봤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본업은 따로 있고 취미이자 자아실현의 매개체로 수묵화를 그리고 있어요.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소나무 그림을 일관성 있게 창작하시는 게 인상적인데요. 여기에 어떤 이야기가 실려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본명의 중간 글자인 ‘수(受)’와 기록할 ‘록(錄)’을 따서 ‘수록’이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그냥 좋아서 그려요. 그 중 소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른 침엽수여서 특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소나무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했었어요.

이사무 노구치가 만든 아카리(AKARI) 조명을 좋아하는데요, 한옥 전시 공간에 조명장치가 필요해서 그 제품을 찾았는데 아쉽게도 원하는 디자인을 찾을 수 없었어요. 대체품을 들여놓고 고민했는데 내친김에 종이 위에 직접 수묵화를 그렸어요. 만들고 보니 참 아름다웠죠.

수묵화가 노수연님의 조명장치

상업적인 작품은 지양하는 입장이라 직접 디자인 제품을 만들 생각은 크게 없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한지로 조명을 만드는 분과 협업을 해보고 싶어요.

작가님은 수묵화의 매력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무게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먹과 종이라는 재료만으로도 소박하면서 정적인 멋을 표현할 수 있죠. 그리고 저는 옛것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수묵화가 노수연님의 조명장치를 확대한 모습

요즘에는 동양화 물감인 안채를 써서 유색 회화를 그려보는데요. 여기서도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풀을 쑤고 화판에 배접을 하고 수묵화를 그리는 일 전체가 저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이기도 해서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시끄러운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지길 원해서 그립니다.

세상 모든 지식을 시각화 한다는 것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의 쇼룸

frice 사무실(마포구 상수동)에는 주변의 카페에서 가져온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홍대앞 지도가 붙어있다. <스트리트 H>는 홍대앞의 다양한 변화와 문화예술 활동, 홍대앞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동네문화 잡지로, 매월 다른 주제의 색다른 그래픽과 유용한 정보를 담은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함께 무료 배포한다. 최근 는 창간 15주년(2009년 6월 창간)을 맞이했고, 인포그래픽 포스터도 2024년 현재 100종 이상 발행하였다. 왜? 누가? 이러한 수고를 15년 동안이나 하고 있을까?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최근 발행된 데스크 램프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실제 조명, 그에 담긴 스토리를 한번에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최근 발행된 데스크 램프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실제 조명, 그에 담긴 스토리를 한번에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frice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대표이자 <스트리트H> 공동 발행인입니다. 2003년 창업할 때 회사명은 ‘디자인 스튜디오 이공삼’이었어요. 규모를 키우지 않고 하고 싶은 일 위주로 하고 싶어 ‘디자인 스튜디오(한 칸짜리 작은 공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한국의 현실에서 디자인이라는 용어의 쓰임이 너무 오염되어 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추구하려는 활동, 작업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더이상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16년 회사 명칭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란 단어를 과감히 빼고, ‘이공삼(203)’ 만 남겼습니다. 지금은 ‘인포그래픽 연구소’라는 부분을 더 부각하고 있어요.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입구의 쇼룸 공간
인포그래픽 관련 해외 서적들과 북큐레이션이 전시되어 있다. 이공삼의 특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입구의 쇼룸 공간. 인포그래픽 관련 해외 서적들과 북큐레이션이 전시되어 있다. 이공삼의 특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공삼, frice

이공삼 인포그래픽연구소의 모토는 ‘직관적 이해 만들기’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 모든 지식의 시각적 지혜화’입니다. 저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열심히 외웠다가 시험 보고 나서 잊어버려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것이 ‘지식’. 살아가는데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지혜’. 불은 뜨겁다, 날카로운 것엔 베인다, 생명체는 존중해야 한다. 같은 것이죠.

요즘은 우리 회사, 또는 나 개인의 브랜딩은 어떤 걸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007 영화 속에서 악당이 페르시아고양이를 품에 안고 세계 정복을 읊조리는 것처럼, 저도 우리 사무실 고양이 ‘모모 부장’을 끌어안고 재미나게 저희의 야망을 피력합니다.

이공삼의 실세인 고양이, 모모부장과 눈싸움 한 판을 벌이는 장성환 대표
이공삼의 실세인 고양이, 모모부장과 눈싸움 한 판을 벌이는 장성환 대표 ⓒ이공삼

TALK THEME 1.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K’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포스터 중에서 한국 문화를 주제로 한 내용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국 문화를 다루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한국’이란 주제는 포스터 주제들 전체로 보면 일부분이에요. 지금까지 만들었던 한국 문화 관련 인포그래픽들은 비빔밥, 소주, 김밥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문화적으로 유니크한 걸 제작하려다 보니, 그중에 한국적인 소재가 자연스럽게 포함된 거죠.

2015년 8월,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맛 MAT – 한국의 멋과 맛”이라는 전시회를 했었어요. 그때 저희가 김치, 막걸리, 소주 등 대형 인포그래픽 설치 작업으로 참여했는데요. 주최 측에서 비빔밥도 추가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스터디를 해보니 ‘비빔밥’이 아니라 ‘섞어 먹는 밥’에 더 가까운 거예요. 예를 들면 국밥, 그리고 삼겹살 구워 먹고 남은 재료 다 넣고 섞어 먹는 것, 찬물에 밥 말아서 섞어 먹는 것 등등. 일본에도 오차즈케가 있긴 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섞는 것을 싫어해요. ‘그렇게 예쁘게 해놓은 걸 왜 섞느냐. 미적으로 추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한국은 달라요. 한국 대표 비빔밥의 전형은 전주비빔밥이겠지만, 일상 속 서민의 식탁에서는 아무거나 넣어도 되잖아요. 자기 기호대로 찬밥에 열무김치를 비비거나, 치즈 좋아하면 치즈를 넣는 식이죠. 김밥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의 이런 뒤섞이는 문화가 재밌는 포인트라고 생각해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맛 MAT - 한국의 멋과 맛" 전시에서 공개된 한국 음식문화 인포그래픽 디자인_섞어먹는 밥 디자인
“맛 MAT – 한국의 멋과 맛” 전시에서 공개된 한국 음식문화 인포그래픽 디자인_섞어먹는 밥 디자인 ⓒ 이공삼

한국 문화 외에도 다양한 주제를 다루시는데요. 포스터의 주제는 매달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저는 ‘그냥’이라는 단어를 싫어해요. 매사에 ‘그냥’ 하지 말자고 강조합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그냥은 금기어였습니다. 그냥은 부모 자식 사이나 연인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단어라고 말해 줍니다. 모든 게 원인과 결과인데, 특히 디자인 프로젝트는 매우 공적인데 클라이언트에게 ‘그냥’ 디자인했다는 말을 쓸 수는 없지 않나요?

그리고 ‘나열’했다는 것도 말이 안 돼요. 공깃돌 5개를 던질 때도 모여있게 할지, 떨어뜨려 놓을지, 의도를 갖고 던지잖아요. 그런데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그냥 나열했다’고 하는 건 사전에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자백과 다름없는 거죠. (웃음)

그래서 저희는 포스터 주제 결정을 위해 구글 시트로 시의성, 정보성, 심미성 등 기준들을 세팅해 놓고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모읍니다. 개인의 취향은 중요하지만, 이런 걸 생산하는 데는 개인의 취향에만 치우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기준들이 더 중요해요.

아이디어는 인턴부터 대표까지 함께 생각을 모읍니다. 그러고 나서 합계를 내보기도 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검토합니다. 때로 어떤 주제는 합계 총점보다 시의성이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포스터 주제 스프레드시트. 주제 선정과 같은 개념적 의사결정도 분석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주제 선정과 같은 개념적 의사결정도 분석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이공삼

시의성이 중요했던 작업은 어떤 것이 있나요?

2019년에 작업했던 1919년 ‘3.1 만세운동 100주년’과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 인포그래픽 포스터입니다. 누리호 발사에 관한 것도 시의성을 고려한 경우고요. 이런 경우는 시의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눈앞의 이익보다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무’를 더 고려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민 판다 푸바오 포스터는 후이바오, 루이바오가 갓 태어날 무렵에 발행했는데 벌써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네요.

3.1운동 인포그래픽 포스터. 역사적 시의성을 고려한 인포그래픽 포스터 주제 선택 사례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 기념 인포그래픽 포스터 ⓒ이공삼
역사적 시의성을 고려한 주제 선택 사례. 1919년 일어난 3.1운동과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 기념 인포그래픽 ⓒ이공삼

그리고 의도적으로 쌓아가는 것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2016년에 상수동의 ‘PACTORY’라는 공간은 두성종이 출신 동업자와 제가 만들었어요.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종이를 만져보고 수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인데요. 그곳에서 진행될 워크숍의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오픈 전 몇 달에 걸쳐 미리 실크스크린, 리소그래피, 레터프레스 등 수작업으로 하는 디자인 제작 시리즈를 만들었죠.

장성환 대표와 두성종이 출신 동업자가 함께했던 공간. 상수동 PACTORY. 홍대앞 출판관계자 및 디자이너, 그리고 전국의 디자인 전공 대학생의 성지가 되었다
장성환 대표와 두성종이 출신 동업자가 함께했던 공간. 상수동 PACTORY. 홍대앞 출판관계자 및 디자이너, 그리고 전국의 디자인 전공 대학생의 성지가 되었다 ⓒfrice
입구로 들어가는 계단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포그래픽 포스터 PACTORY가 오픈하기 전부터 이 공간에서 개최될 수작업 워크숍을 위한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제작했다
입구로 들어가는 계단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포그래픽 포스터 PACTORY가 오픈하기 전부터 이 공간에서 개최될 수작업 워크숍을 위한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제작했다 ⓒfrice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포스터 디자인 프로세스가 궁금합니다.

‘기획개요 마인드맵’을 저희만의 프레임으로 만들어 놓고 그걸 가장 먼저 채웁니다. 저희는 이걸 나침판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여기에는,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대신해서’, ‘타겟 누구에게’, ‘왜 저들이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등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겉보기에는 너무 간단한 방법이라서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정말 효과적이고 중요한 단계입니다.

교과서 같이 텍스트의 단락들로 계속 이어지는 정보를 이공삼에서는 ‘리스트형 정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정보는 눈에 잘 안들어오기도 하고 빠른 이해가 어려워요. 그래서 우리는 리스트형 정보를 반드시 마인드맵으로 정리합니다. 정리할 때 유의 사항은 문장을 *‘개조식’으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정보의 **’하이어라키’와 카테고리가 잘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이후, 본격적으로 메인 마인드맵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자료를 모으다 보면 팀원들끼리도 이게 우선인지, 저게 우선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나침판으로 다시 돌아가서 함께 살펴봅니다. 그러면 누가 타겟이고 왜 이 정보를 만드는지 환기가 되고 합리적인 의견일치가 가능해 집니다.

인포그래픽 제작 과정의 첫 번째. 기획개요 마인드맵
인포그래픽 제작 과정의 첫 번째. 기획개요 마인드맵 ⓒ이공삼

인포그래픽 포스터 한 장에 많은 정보와 그래픽 작업이 필요한데요. 작업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아요.

<스트리트H>의 인포그래픽 포스터는 2015년 6월부터 한 달에 한 종씩 제작하고 있어요. 매달 디자인 팀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담당자가 됩니다. 때로는 서로 두레처럼 도와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전체 진행(주제 선정부터 마인드맵, 자료조사,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은 담당자가 메인이 되어서 진행해요. 특이한 점은 주제 기획, 조사, 디자인까지 디자이너가 완결한다는 것입니다. 인포그래픽에서 편집팀의 역할은 교정, 교열과 추가 의견 정도입니다. 텍스트 콘텐츠 가공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디자이너들을 위해 마인드맵을 활용하게 된 것이죠.

텍스트를 구조화하는 마인드맵 단계를 거치면 ‘내러티브 다이어그램’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시각화한 인포그래픽. 많은 표절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시각화한 인포그래픽. 많은 표절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공삼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은 뭔가요?

‘서술적인 정보 관계 구조를 표현하는 다이어그램’이란 의미입니다. ‘내러티브 다이어그램(Narrative Diagram)’이라고 표현한 건 일반적인 다이어그램과 구별하고 싶어서였어요. 해외 컨퍼런스 발표 때도 영어로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이라고 표현합니다. 나중에 물어보면 그런 용어를 처음 듣지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제가 만든 이 용어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웃음) 우리가 만든 단계가 인정된 느낌이라서요.

아이콘을 활용해 직관적으로 정리한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디자인 프로세스
아이콘을 활용해 직관적으로 정리한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디자인 프로세스 ⓒ이공삼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일상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기획개요 마인드맵 작성 -> 텍스트 정보 구조화 -> 시각적 정보 구조화

이 중 ‘텍스트 정보 구조화’가 중요합니다. 잘 구조화된 텍스트 정보를 시각적으로 발전시키면 기억에 오래 남는 정보 패키지가 됩니다. 그러니 학생들의 책 읽기 등에 활용하면 아주 효과적이지요.

초등학생 대상 워크숍의 결과물. 초등 3학년 남학생이 정리한 삼국지 인물 관계도 마인드맵
초등학생 대상 워크숍의 결과물. 초등 3학년 남학생이 정리한 삼국지 인물 관계도 마인드맵 ⓒ이공삼

올해 초, 선유도서관과 함께 초등 3, 4학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내용은 마인드맵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막연하게 좋아하는 이야기를 고르고 좋아하는 이유, 스토리라인, 등장인물들의 관계,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 등을 마인드맵을 통해 정리하게 했어요. 몇 주 동안 계속 질문과 대답을 하며 마인드맵으로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물을 보면 정말 초등학생의 것이 맞을까 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냥 읽는 책은 쉽게 잊혀집니다. 저는 이것을 텍스트의 휘발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마인드맵으로 구조화하는 과정 동안, 그리고 완성된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들여다 보면 기억 속에 아주 오래 남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게 되는 셈이니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포그래픽 디자인을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저는 좋은 인포그래픽을 삼각형으로 비유해서 얘기합니다. 정보가 잘 전달되기 위해서는 ‘유익한 정보’ ‘이해하기 쉬운 정보’ ‘매력적인 정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야 해요.

예를 들어 교과서는 유익한 정보이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죠. 그래서 참고서가 이해하기 쉽게 해주려고 밑줄, 형광펜, 다이어그램들을 사용하면서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도 매력은 없어요. 참고서 재밌다고 하는 학생들은 드물지 않을까요?

그런데 학습 만화는 읽지 말라고 해도 식탁 앞에서도 손에서 놓지 않잖아요. 이유가 뭘까요. 내용은 같지만 이해하기 쉽게, 시각적으로도 재미있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매력이고 전달의 핵심입니다.

좋은 인포그래픽의 3가지 조건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좋은 인포그래픽의 3가지 조건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이공삼

매력적인 정보에 인포그래픽의 일러스트 스타일이나 인터랙티브 방식 같은 것도 중요할까요?

모든 스타일이나 형식은 기획개요 마인드맵을 통해 설정됩니다. 누가 어떤 타겟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 내용에는 어떤 방식이 적합할까? 인쇄물도 팜플렛, 포스터 등 형식이 다양하고 때로는 *모션 인포그래픽,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이 적절할 때가 있어요. 즉흥적인 판단이 아니라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2018년 7월 경향신문과 함께 작업했던 “평양냉면”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신문의 큰 지면을 활용해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와 신흥 두 갈래를 한 면에 보여주었다
신문의 큰 지면을 활용해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와 신흥 두 갈래를 한 면에 보여주었다. ⓒ이공삼

평양냉면 인터랙티브 아티클 작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언론재단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언론 종사자들이 묻습니다. 종이 신문의 미래가 어둡고 뉴미디어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큰 신문을 어떻게 조그마한 스마트폰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많았어요.

그런데 왜 꼭 그래야만 할까요? 종이 신문은 신문대로 지상 최대의 판형이에요. 손으로 만지고 넘겨 보는 경험과 물성이 있죠. 그에 반면 스마트폰은 종이가 갖지 못하는 모바일, 인터랙티브함이 있는데 왜 굳이 종이신문을 스마트폰 안에 넣어야 하냐는 거죠. 미디어의 특성에 따라 다른 형식의 콘텐츠를 담아내는 것이 필요한거죠.

그래서 경향신문에 평양냉면 지면 인포그래픽과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을 동시에 제안했어요. 같은 주제지만 지면에서는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와 신흥, 두 갈래로 큰 지면에서 보여주고 인터랙티브 쪽에서는 스마트폰을 통해 재료 하나하나를 직접 선택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냉면집을 찾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평양냉면에 맨스플레인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중년 아저씨들의 잔소리죠.(웃음) 그러나 인터랙티브를 통해 누구나 마음 편하게 자신의 취향에 맞는 평양냉면을 고를 수 있게 한 거죠. 인포그래픽이 수직적인 문화와 정보를 수평적으로 개선했다고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랭면의 취향 알아보기 👉>

사용자는 질문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평양냉면 취향을 알아볼 수 있다.
디지털 디바이스에서 상호 작용하며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 콘텐츠
사용자는 질문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평양냉면 취향을 알아볼 수 있다.
디지털 디바이스에서 상호 작용하며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 콘텐츠 ⓒ이공삼, 경향신문

지금까지 작업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작업은 무엇인가요?

역시나 3.1운동 100주년 기념 프로젝트예요. 자체적으로 제작한 이 3.1운동 인포그래픽을 가지고 임시정부기념관 설립위원회에 접촉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인포그래픽도 제작했어요. 임시정부가 3.1운동 이후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설득한 거죠.

3.1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3.1절 전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인과관계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역사를 점(點, dot)으로 암기하고, 시험으로 접하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3.1절을 단순한 숫자나 하나의 인물이 아닌 ‘인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사건들이 영향을 미쳐 3.1운동이 준비되었나. 준비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선언문의 작성, 선언문의 의미 등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국내외적 변화까지 담아냈습니다. 눈으로 흐름을 따라가면 책 1권 이상의 정보를 쉽고 흥미롭게 이해하고 기억에 담을 수 있습니다. 이 포스터는 역사교사 모임에도 배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저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 중심의 직업인 것 같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책무를 가지고 눈앞의 이익과 상관없이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TALK THEME 2. 인포그래픽 디자이너의 세계

해외에서 디자인 어워드 수상과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요. 해외와 한국 인포그래픽 디자인의 차이를 느끼시나요?

그래픽 디자인의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수신자가 누구고 발신자가 누구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거겠죠. 뉴스 미디어인가, 흥미 위주 콘텐츠 미디어인가, 출판사인가 이런 차이겠죠. 그리고 회사의 규모, 예산이 미치는 부분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 어워드는 “자기 증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클라이언트들이 인포그래픽 분야가 낯설다 보니 이공삼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신뢰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국내외 인포그래픽과 디자인 공모전에 응모했고 다수의 좋은 성과를 내었습니다. 그랬더니 클라이언트들의 시선이 바뀌더군요. 물론 우리 내부의 스탭들에게도 좋은 격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공삼 사무실에 진열된 디자인 어워드 트로피
이공삼 사무실에 진열된 디자인 어워드 트로피 ⓒ이공삼
2019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 디자인 교육 컨퍼런스. 장 베누아 레비(Jean-Benoit Levy, 프랑스 출신으로 미국 산호세에서 활동)와 보리스 코헨(Boris Kochan, 독일 뮌헨 활동)
2019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 디자인 교육 컨퍼런스. 장 베누아 레비(Jean-Benoit Levy, 프랑스 출신으로 미국 산호세에서 활동)와 보리스 코헨(Boris Kochan, 독일 뮌헨 활동) ⓒ이공삼
2020년 1월 홍콩에서 만난 마르셀로 두할데(Marcelo Duhalde, SCMP_가운데)와 마르셀로 카세레스 아빌라(Marcelo Cáceres Avila, 칠레_왼쪽)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는 해외 디자이너와 교류하며 주목하게 된 곳으로 해외 미디어 SCMP(South China Morning Post)를 꼽았다.
2020년 1월 홍콩에서 만난 마르셀로 두할데(Marcelo Duhalde, SCMP_가운데)와 마르셀로 카세레스 아빌라(Marcelo Cáceres Avila, 칠레_왼쪽)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는 해외 디자이너와 교류하며 주목하게 된 곳으로 해외 미디어 SCMP(South China Morning Post)를 꼽았다. ⓒ이공삼

또 한 가지는 해외 공모전 수상을 통해 해외에서 이공삼의 인포그래픽이 알려지게 되었고 워크숍 또는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초대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요즘도 디자인 컨퍼런스나 어워드에서 만난 해외 인포그래픽 디자이너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도 관심을 갖고 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인포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 비해 적어서 그런지 만나면 따듯한 형제애 같은 게 있어요.

수많은 인포그래픽이 있지만 핀터레스트에서 인포그래픽을 검색해 보면, 이공삼을 비껴갈 수가 없어요. 우리처럼 100개 이상 일관된 형식으로 만들고 있는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표절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공삼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이런 작업을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지식을 소비하고 있어요. 사람이 지식을 교환하는 첫 번째 방식은 입말과 글말일 텐데요. 인간의 언어는 기차처럼 선형적이어서, 처음과 끝을 다 연결해야 메시지를 온전히 전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 논리가 복잡한 정보일수록 정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워지죠.

이공삼은 문자언어의 한계를 인포그래픽 디자인으로 극복해 왔습니다. 수십년 동안 인포그래픽을 연구해온 디자이너가 알려주는 ‘복잡한 지식을 척 보면 딱 알아보도록 만드는 방법’ 어떠셨나요?

디자인의 힘으로 문자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분들에게 이번 인터뷰가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관점에 관여하다

뷰티 브랜드 팝업의 VMD를 손보는 유인성 디자이너
뷰티 브랜드 팝업 쇼룸 설치현장에서 만난 유인성 디자이너
뷰티 브랜드 팝업 쇼룸 설치현장에서 만난 유인성 디자이너 ⓒfrice

안녕하세요 인성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디자인 업계에서 일을 시작한지 16년 차인 브랜드 디자이너입니다. 그래픽, 패션, 리조트, 브랜드 에이전시, 건설, 부동산 개발 회사 등을 거쳤는데요. 창작과 라이프 스타일에 관여된 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간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프로젝트를 열심히 했죠. 지금은 공간 디자인을 포함한 브랜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 맡았던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네이버에서 UXDP라는 채용 프로그램을 열었어요. 2010년대 전후 디자이너 지망생 사이에서 인기였던 인턴십으로 기억해요. 연수원에 인턴을 11일 정도 합숙시키고 경쟁형 도전과제를 내요.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죠. 저는 UXDP 참여를 마치고 브랜드팀에 배치됐어요. 그 당시 네이버는 디자인 조직을 크게 ‘브랜드/BX/UX’로 나눴죠. 브랜드팀은 네이버의 브랜드 전략과 각종 서비스를 관리했습니다. 저는 일부 서비스의 선행 개발에 참여했어요.

‘브랜드 경험Brand Experience’도 디자인하시는데요.
지금은 상식처럼 여겨지는 일이지만, 당시 한국에선 낯선 개념이었어요.

제가 입사했던 2000년대 후반, 디자이너 사이에 본격적으로 언급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이직하며 맡았던 실무가 브랜드 경험(BX) 디자인이어서 적응하며 조금씩 눈 떴던 거 같아요. 네이버를 떠나고 JOH.를 6년 정도 다녔습니다. 동료들이 이미 BX나 브랜딩이라는 개념을 실무에 접목시켜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리더들이기도 했어요. 덕분에 빨리 깨우쳤죠.

유인성 디자이너의 디자인 노트. 아이디어 구상은 빈 종이에 간단한 썸네일을 그리는데서 출발한다
유인성 디자이너의 디자인 노트. 아이디어 구상은 빈 종이에 간단한 썸네일을 그리는데서 출발한다. ⓒfrice

브랜드 경험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이론서에 따르면

‘브랜드 경험은 정체성, 시각요소, 세계관 같은 걸 따로 설계하고
그것을 사용자가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끔 연결하는 디자인 작업이다.’

라고 정리됩니다. 설명 자체가 너무 추상적입니다.(웃음)

실무를 잡더라도 딱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라 생각해요.(웃음) 브랜드 경험 디자인은 단순한 비주얼 디자인이 아닙니다. 상품이나 서비스가 가진 장점을 살리고, 그것을 좋아 보이게 만드는 일이죠. 이왕이면 브랜드에 얽힌 사람들이 서로 좋은 자극을 받고, 상호 유익한 도움이 이뤄지도록 판을 설계하는 게 핵심입니다. 저는 고객이 브랜드와 서비스를 만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해요. 브랜드를 만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반응하는 지점이 궁금해서 계속 브랜드 디자인에 ‘관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관여’라는 단어가 인상적입니다. 브랜드에 어떤식으로 관여하게 되나요?

먼저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에 관여합니다. 브랜드와 클라이언트가 우리를 찾는 이유를 알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죠. 페이퍼워크를 통해 의뢰인에게 프리젠테이션을 꾸준히 펼치는 식으로 방향성을 정하는 단계가 선행됩니다. 그다음에 시각화visualization 단계를 거치는데요. 디자이너는 이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온갖 업무에 관여되는 듯 합니다.

앞서 말한 업무를 끝내고 본격적인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면 종이나 컴퓨터 화면 같은 2D 표면에 컬러와 도형을 조합해 그래픽과 더불어 다양한 콘텐츠를 구현합니다.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분석하고, 시각요소를 위한 기획이나 전략을 만들어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디자인 요소들을 배치하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인테리어 프로젝트에서 가구가 키 요소라면 적합한 가구를 찾고, 영상 제작이 필요하면 영상전문가를 찾아내 일정을 주도적으로 짜요. 인력섭외와 일정관리는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시각요소에 개입하는 디자이너의 업무를 설명하기 위해 아카이브 노트를 펼친 유인성 디자이너
시각요소에 개입하는 디자이너의 업무를 설명하기 위해 아카이브 노트를 펼친 유인성 디자이너 ⓒfrice

또한 브랜드를 경험할 고객을 위한 공간에 관여합니다. 만약 오프라인 이벤트가 열린다면, 고객이 방문하는 공간에 세부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설계해야 합니다. 이건 디자이너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와 팀을 이루고, 목표달성을 위해 프로젝트를 발전시켜요. 자신감과 책임감을 갖고 건축 전문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세부사항을 조정하는 거죠.


직무를 브랜드 디자이너라고 소개하셨는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다양한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시작은 그래픽에 관여하는 것이었지만, 언제 어디서 일하더라도 브랜드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계속 깔려있었어요. 대림처럼 부동산 개발과 얽힌 조직에서 근무했을 땐 디벨로퍼의 관점을 익혔어요. 공간을 기획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런 공간이 도시 안에서 어떤 기능과 콘텐츠를 가진 플랫폼이 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두 번째 직장이었던 JOH.의 조직문화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JOH.는 대외적으로 『매거진 B』를 만드는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건축부터 F&B까지 각 분야별 전문팀이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움직여요.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주받으면 팀 별로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업무를 수행해요. 하나의 프로젝트도 다양한 카테고리에 걸쳐져 종합적으로 전개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저도 여러 업무에 관여했습니다.

본업인 디자인 에이전시 업무 외에도 『매거진 B』의 콘텐츠 제작에 일부 관여했다는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본업인 디자인 에이전시 업무 외에도 『매거진 B』의 콘텐츠 제작에 일부 관여했다는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frice
유인성 디자이너는 당시 협업이 브랜드 경험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시각 콘텐츠로 바꿔보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유인성 디자이너는 당시 협업이 브랜드 경험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시각 콘텐츠로 바꿔보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frice
B's Cut의 촬영 시안. 각 호마다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할 제품을 골라 스튜디오에서 촬영한다. 디자이너는 사진작가에게 요청할 연출법을 시각화해서 전달한다
B’s Cut의 촬영 시안. 각 호마다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할 제품을 골라 스튜디오에서 촬영한다. 디자이너는 사진작가에게 요청할 연출법을 시각화해서 전달한다. ⓒfrice

브랜드 디자이너의 일은 장기간에 걸쳐 있는데다, 비가시적인 성과가 더 많습니다.
디자이너의 업무능력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관점’과 ‘방향성’이 브랜드 디자이너의 무기라고 생각해요. 두 가지가 참 중요해요.

좋은 ‘관점’과 ‘방향성’을 잡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하시나요?

극초반 아이디어 구상은 메모로 하는 편입니다. 레퍼런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인데요. 브랜드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워낙 레퍼런스를 많이 쥐고 있어요. “A브랜드가 B콘셉트로 팝업스토어 연다더라.” “C는 D에서 F를 시도했는데 흥행했다더라.” 온갖 정보가 귀에 들어와요.

그런 레퍼런스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핵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메모에 담은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요.

개인적으로는 핀터레스트를 주의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AI까지 가세했어요. 트렌드를 스타일로 구분하고 순위를 매기는 서비스가 등장했고 유저가 필요로 하는 맞춤형 오픈소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죠. ‘이런 데이터 분석의 결과값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건가?’ 유행에 몸을 맡기는 현대 디자인 트렌드에도 조금은 경계심을 갖고 있어요.

지금 한국에서 전문 조직이 브랜드를 설계하는 경우, 데이터 기반 오픈소스툴 활용사례가 빈번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디자인 업무를 수월하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어요. 좋은 툴입니다. 좋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하라는 거죠. 정서적인 심상과 문제 해결을 위한 직관, 그리고 리서치 데이터를 접목시키는 건 디자이너의 역량이니까요. 이 세상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하고 더 시끄러운 곳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데이터 분석에 의한 알고리즘이 알게 모르게 실무에 반영된다는 걸 의식하고, 좀 더 순간을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거죠.

레퍼런스를 떠나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그 안에 담긴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레퍼런스를 떠나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그 안에 담긴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frice

브랜드에 관여하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관점을 좋은 방향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관점 하나로는 결국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디자인은 결국 추상과 실제를 연결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모순적인 가치를 양립시키며 진전되는 사례도 빈번하죠. 브랜드가 추구하는 사업적인 가치를 따지려면 이성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테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남기 위해서는 동시에 정서적인 관점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유인성 디자이너가 기록한 토론 자료.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1~2주 간격으로 클라이언트 미팅에 필요한 PT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유인성 디자이너가 기록한 토론 자료.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1~2주 간격으로 클라이언트 미팅에 필요한 PT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frice

그래서 저는 프로젝트 초반에 클라이언트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좀 더 많이 듣고,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러고 나서 어떤 직감이나 심상 같은 걸 놓치지 않고 디자인 솔루션과 연결을 합니다. 이건 직관 내지는 본능. 정서적인 측면이죠.

이게 경영전략같은 이성적인 측면과 결합이 잘 되면 좋은 브랜드 디자인이 태어나는 건데요.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기능과 정서의 연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연결에서 나온다고 봐요.

전문가로 활약하려면 디자인 솔루션을 여러가지 패턴으로 쥐고 있어야겠네요.

‘깃발 세우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예쁜 것과 좋은 것을 분류하고, 그것을 남들보다 먼저 얘기해서 명분을 선점하는 방법을 써요. 현상을 분석하고 거기서 얻어낸 직관을 연결하면서 실천가능한 디자인 프로젝트로 개발시킵니다.

저는 ‘경청’을 선호합니다. 가능하다면 일단 남들보다 더 많이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일단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다 듣고, 레퍼런스를 검토하며 아는 게 많아질수록 관점이 다양해져요. 관점이 다양해지면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도 다양해집니다. a와 b만 만족시키지 않는 솔루션, 이질적인 c, d, e가 있어도 추진이 가능한 솔루션이 등장하는 거죠. 만약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완전히 틀어지더라도 나중에 계속 디자인을 이어나갈 수 있는 근거와 독특한 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브랜드 디자인의 초기작업은 기획/전략 구상이여서 실무자와 충분한 토론 과정을 거친다는 설명을 보탰다
브랜드 디자인의 초기작업은 기획/전략 구상이여서 실무자와 충분한 토론 과정을 거친다는 설명을 보탰다.ⓒfrice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가장 희열을 느낀 순간은 언제입니까?

열심히 고민한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수용됐을 때입니다. 이제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된 거 같아요.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은 생각보다 힘이 세거든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이미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어요. 이미 누군가가 설계해둔 디자인에 의해서 말이죠.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디자인은 이미 스며들었다. 당신의 선택지는 사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결정됐다.」

이런 정의를 내릴 수 있을만큼요.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 이론을 이해하고 실제 사례를 접하다보면 남들이 만든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와 대중 모두가 브랜드 디자인을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브랜드의 무언가를 관여하며 디자인할 텐데요. 쉽게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는 건강한 취향이 제게도 필요하고, 브랜드 디자인에 영향을 받을 분들에게도 이런 능동적인 태도가 중요할 겁니다. 누군가의 브랜드 디자인을 거스르려는 안간 힘이! 제가 여태까지 했거나, 앞으로 할 디자인에 반영됐으면 합니다.

2부로 이어집니다.
to be continued…😎

😈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비슷한 일을 하는 업계동료와 직업의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경험을 전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하우가 담긴 기획 노트를 볼 수 있는 건 커다란 행운이었어요. 1부는 브랜드 디자이너의 관점을 살펴봤는데요. 이어지는 2부에서는 관점이 실제로 구현된 공간을 소개합니다. 보다 깊은 디자인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2부에서 만나요!

나는 상업예술을 긍정한다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쓸 유리를 고르는 박진영 디자이너
진영글라스의 스테인드글라스 아트워크

둥근 스테인드글라스를 <라이언킹>의 갓 태어난 아기 사자처럼 번쩍 드니, 비스듬히 기울어진 색유리에 햇볕이 쏟아진다. 울퉁불퉁한 판유리에서 신비로운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한낮의 햇살이 빳빳한 코튼 셔츠 위에 드리웠다. 셔츠에 비친 색이 알록달록 곱다. 독특한 질감을 지닌 유리를 골라 선과 경계를 만드는 사람. 유리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끄집어내는 사람.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이너를 만나러 서울 합정동 유리공방을 방문했다.


스테인드 글라스 디자이너 박진영
ⓒfrice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진영글라스 @jyglass 대표 박진영입니다. 서울 합정동에서 5인조 유리공방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요사업은 색유리를 잘라 붙이는 스테인드글라스 외주요청작업인데요. 저는 제작일정조정과 도면설계를 담당합니다. 개인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의 대중화에 관심이 많아요. 최근 종교건축시설 뿐만 아니라 상업공간에서 제작의뢰가 늘어서 기쁜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스테인드글라스가 요즘 국내 레스토랑이나 패션브랜드 쇼룸에서 대유행입니다.

최근 상업공간을 운영하는 분들이 공간 디테일에 완벽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건축/실내 인테리어 투자도 늘어나고 있어요.

패션 브랜드 새터에 납품될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제작중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설계도면에 맞춰 유리를 자르고 땜질을 진행한다
ⓒfrice

지금 작업은 어떤 의뢰인가요?

가로 3m, 세로 1m 사이즈의 창문입니다. 패션 브랜드 ‘새터SATUR’가 의뢰했어요. 꽃병이나 아트포스터가 진열된 성수동 쇼룸에 설치되는데요. 창이 크게 난 건물이라 작품 스케일도 웅장합니다(웃음) 햇볕이 초록 유리와 노란 유리를 통과하면 실내에 빛이 은은하게 퍼질 텐데, 볕이 워낙 잘 드는 곳이라 설치를 기대하고 있어요.

클라이언트마다 요구하는 게 다를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어떤가요?

개인적인 의견이라 조심스럽지만, 이전에는 해외 스테인드글라스를 재현하는데 그쳤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내가 이번 업장을 A브랜드처럼 만들고 싶으니까. 설치작품을 A와 비슷하게 하자.”라는 식입니다.

지금은 “내가 A현장을 B라는 콘셉트를 담아 디자인하고 싶으니까 스테인드글라스는 C기법을 쓰자.”라는 구체적인 의견이 나와요.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수행하는 메이커 입장에선 반가운 변화입니다. 창의적인 디자인을 구상하는 게 수월해졌어요.

박진영 디자이너는 제작과정에서 '도안설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박진영 디자이너는 제작과정에서 ‘도안설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frice 

구체적인 디자인 프로세스가 궁금하네요.

공방마다 방식은 다르겠지만, 저는 도안설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0순위 작업이죠.

1단계는 백지에 선을 그려요. 어떤 유리를 어떤 크기로 자를지 미리 결정하는 작업이죠. 15년 동안 수 천장의 도면을 직접 그렸습니다. 많이 그릴 땐 1년에 200장 쯤 그렸네요. 같은 시안을 규모만 다르게 해서 그리기도 하는데, 틈날때 마다 계속 도안을 짜는 편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한국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하면, 의뢰주가 완성을 재촉하는 경우가 많아요. 제작자 입장에서 납품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박한 시한이 주어지거든요.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웃음) 덕분에 노하우가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시간 절약’과 ‘퀄리티 준수는 서로 대립하는 가치잖아요. 음식에 비유하면 저의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은 냉동음식이죠. 적합한 때를 골라 해동시켜 요리하는 셈일텐데요. 미리 디자인에 신경 쓰면 두 가지를 어떻게든 잡을 수 있어요.

도안설계는 드로잉과 그래픽 프로그램 작업을 병행하며 완성시킨다.
도안설계는 드로잉과 그래픽 프로그램 작업을 병행하며 완성시킨다. ⓒfrice

가장 중요한 작업은 무엇입니까?

도안설계가 50%. 유리를 자르고 붙이는 작업이 나머지 40%. 설치가 10%를 차지합니다. 이건 업체마다 다를 겁니다.

설계가 중요한 이유는 작업특성 때문이에요. 유리는 자르는 순간 다시 되돌릴 수 없잖아요. 이유 없이 잘리는 유리는 단 하나도 없어야 해요. 도안에 따른 사전설계는 절대적입니다. 제가 색유리 공예를 견습으로 도울 때만 해도 아무 생각 없었어요. ‘되는 대로 그냥’ 했죠. 선도 마구잡이로 썼었죠.(웃음)

지금은 선을 쓸 때 머릿속에 구상이 이미 그려져 있어요. 작품 구상을 각오하고 백지를 보면, 희미한 점선 같은 게 보이는데요. 그걸 따라 그리는 느낌이죠. 교차한 선이 도형이 되고, 그것이 모여 스테인드글라스 특유의 입체적인 회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도형 안에 어떤 유리를 써서 연출할지 결정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임무죠.


박진영 디자이너는 가업을 물려받았다.
박진영 디자이너는 가업을 물려받았다. ⓒfrice

어머니 박옥경님은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1.5세대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디자이너님과 같은 공방에서 근무하는 동료이기도 하죠.

사실 스테인드글라스는 비주얼 자체가 사람들을 매료시킵니다. 입문하기 좋은 공예 콘텐츠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영향인지 사람들은 제가 어머니의 유산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았고 생각하는데요. 실제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이자 한국 1.5세대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인 박옥경 작가에게 유리 디자인을 배웠다
어머니이자 한국 1.5세대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자인 박옥경 작가에게 유리 디자인을 배웠다. ⓒfrice

가업은 언제 물려받기로 결심했나요?

대학을 다녔던 2010년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중고등학교를 다녔을 때만 해도 건설경기가 좋았어요. 2010년대 전후로 가파르게 꺾였는데 특히 종교건축의 타격이 컸어요. 시공이 줄어드니 건설시공사와 나란히 움직이는 스테인드글라스같은 인테리어 사업은 씨가 마르는 거죠. 당시 업체가 10곳이 있으면 8곳이 사라졌습니다. 불황을 견딜 수 있는 자금력을 갖고 있거나, 사업 모델을 전면 재검토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어요.

신비로운 색감을 지닌 색유리판
신비로운 색감을 지닌 색유리판 ⓒfrice

우리 공방도 위기였어요. 하필 유리를 많이 수입해둔 상태였는데 쓸 일이 없으니 몽땅 악성재고가 됐습니다. 빚은 가파르게 늘었고 직원도 내보내야 했어요. 결국 유리공방과 어머니와 나. 셋밖에 안 남았어요. 지금은 웃으며 회상하지만, 분명 스테인드글라스 메이커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작품명 Together. 2019년도 작품으로 수강생과 첫 전시전을 연 기념으로 제작했다. 공방에서 서로 협업하는 모습을 숲속 요정에 빗댔다.
작품명 Together. 2019년도 작품으로 수강생과 첫 전시전을 연 기념으로 제작했다. 공방에서 서로 협업하는 모습을 숲속 요정에 빗댔다. ⓒfrice

부활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흩어진 동료부터 다시 모았어요. 그래서 ‘클래스 운영’에 힘썼어요. 수강생을 모아 그들에게 색유리 자르기나 선긋기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공예씬이 넓어졌으니 상황이 좀 낫지만, 당시엔 이 일을 맡을 사람 자체가 적었어요. 기본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 교육은 도제식 전수죠. 예술대학에 전공학과가 생긴 건 최근의 일입니다. 제가 보기에 공예디자인에서 동료를 모으는 건 단순한 인력난이 아니라, 업계의 근본적인 문제였어요. 크루로 영입해 손발을 맞출 수준의 전문가를 만나려면, 제 생각에 교육 이외의 답은 없었습니다.

초기엔 당시 사장님이셨던 어머니와 의견차가 엇갈렸습니다. 기존 업무인 건축현장 창유리 제작에 시간을 더 투자하길 바라시는 거죠. 외주제작집중이 재무개선에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인데요. 더 멀리 내다보면 고생길이 훤했습니다. 업무를 따내도 결국 인력난에 허덕인다며 반대했죠.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외주의뢰를 무리해서 받느니, 교육사업과 크루육성에 투자하자고 설득했습니다.

2023년 상반기 진영글라스 소속 크루
2023년 상반기 진영글라스 소속 크루. ⓒfrice

클래스 운영하다 보면 재능 있는 사람은 확실히 눈에 띕니다. 유리공예를 직업으로 삼아도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요. 같이 일하자고요.(웃음) 지금은 5~6인조 크루로 활동하는데요. 개인적으로 5인 팀플레이가 가장 스테인드글라스 제작에 적합한 인력 구성이라 봅니다.

팀플레이가 중요하다면 다섯 명을 똘똘 뭉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요?

‘개인의 고유한 재능’입니다. 역설적인 말일 수도 있지만요. 예컨대 제가 가장 신뢰하는 협업 파트너인 남한울 작가는 공방교육사업의 첫 수강생이었습니다. 남 작가는 원래 회화를 전공했어요. 색유리 앞에서 발휘하는 상상력이 뛰어납니다. 평면을 입체로 뒤트는 솜씨도 대단하죠. 그래서 공방의 3D 공예품 디자인 생산은 남 작가의 덕을 크게 봅니다.

남한울 작가가 디자인 한 스테인드글라스 조명. 남 작가는 식물의 조형을 주제로 다양한 공예 디자인 MD를 선보이고 있다
남한울 작가가 디자인 한 스테인드글라스 조명. 남 작가는 식물의 조형을 주제로 다양한 공예 디자인 MD를 선보이고 있다.  ⓒfrice

저희 공방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스테인드글라스 교육사업이 한창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창의력이나 미적 판단이 중요한 직업을 갖고 계시다면 경험 삼아 원데이 클래스를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재밌으니까 일단 해보셨으면 해요. 특히 공예를 직접 배우면서 터득하는 디자인 의식이나 미적 영감은 엄청나거든요.

도려낸 유리에 동테이프를 감는 모습. 색유리의 투명한 물성이 인상적이다
도려낸 유리에 동테이프를 감는 모습. 색유리의 투명한 물성이 인상적이다. ⓒfrice

오직 스테인드글라스에서만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무엇입니까?

빛과 색입니다.

특히 창을 투과한 빛이 간직한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걸 온전히 전하는 예술은 스테인드글라스뿐이라 생각해요. 대부분의 예술작품이 빛 때문에 상해요. 아크릴도 시트지도 강한 빛에 노출되면 5년을 넘기기 힘든데요. 반면 색유리는 빛을 온전히 수용하면서도 사물의 속성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카멜커피 12호점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창. 전국매장위치를 보물지도로 표현했다. 클라이언트가 제공한 아트워크를 반영한 디자인 사례
카멜커피 12호점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창. 전국매장위치를 보물지도로 표현했다. 클라이언트가 제공한 아트워크를 반영한 디자인 사례. ⓒ진영글라스 

여기에 ‘설치’라는 변수가 아름다움을 더해요. 다른 유리공예는 그릇이나 컵처럼 생활소품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작품을 사용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스테인드글라스는 보통 건축과 조화를 이루는 인테리어로 기능하니까 본질적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요.

개인적으로 실내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편이거든요.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자체가 인테리어 욕구를 다 해소시키네요.

합정동 공방에 전시된 다양한 디자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합정동 공방에 전시된 다양한 디자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frice

카타르시스일까요?

작품을 공방 바깥으로 옮기는 건 늘 고생스러워요. 그래도 예정된 장소에 설치를 끝내면 쾌감이 쏟아집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창은 갤러리에 전시되는 것보다 건축물의 창문으로 기능했을 때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하늘 아래 똑같은 작품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재밌습니다. 작품 A와 B를 나란히 놨을 때 두 작품의 도형배치가 비슷한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색유리 배치나 세척 여부를 따지면 디테일이 달라요. 그래서 작품마다 고유한 가치를 지녀요. 타인이 조형적인 디자인을 카피할 순 있어도 창작자의 에센스를 훔칠 순 없죠.

디자이너로서 끝까지 지키고 싶은 신념 내지는 소신이 듣고 싶어집니다.

「상업 예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한다」 이 생각을 지키고 싶어요.

종교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외한 일반 건축 스테인드글라스 공예는 본질적으로 순수예술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단 타인이 얽혀요. 건물에 들어갈 창유리만 해도 그렇죠. 건축가, 건축주, 인테리어 시공자, 디자이너 등 여러 사람이 얽힙니다. 작품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의 미적 판단이 일치했을 때, 작품이 제 자리에 걸리는 건데요. 다른 예술 분야를 살펴도 이런 경우가 드물어요. 건축과 접목시킨 인테리어 아트의 특징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의 다양한 디자인 툴
ⓒfrice

상업적인 의도를 지닌 작품에 디자이너로서의 소신을 발휘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클라이언트가 메이커가 추구했던 공통의 예술가치가 이뤄진다는 점이죠. 작품의뢰와 기획초안은 클라이언트의 몫이지만, 그들에게 디자인과 실체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크루의 몫입니다. 작가로서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충분히 반영된다고 봐요. 작업 한복판에 있으면 오히려 내가 추구하는 예술성이 이루어지는 셈이죠.

스테인드글라스는 이제 교회나 고급 아파트에서 감상하는 값비싼 사치품이 아닙니다. 특히 한국에서 점점 대중화되고 있음을 실감해요. 취향이나 개성을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하려는 사람이 많이 늘었습니다. 저희는 이 흐름을 기쁘게 생각하고 부지런히 작업하려 합니다. 예쁜 거 많이 만들고,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의 하루를 살피며 공예와 디자인의 차이를 생각해 봅니다. 편견이 깨졌어요. 여태껏 스테인드글라스가 순수 예술이라 생각했거든요. 듣고 보니 설치 환경에 따른 제약이 많습니다.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는 힘이 필요해 보였어요.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작업하되, 자신을 잃지 않고 최선의 작업물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국의 창작자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