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벽지를 수집하다
고사테 강동수

[서울마이소울 & 프라이스] 정상석 클리커 탄생기
국내 최고참 등산전문기자가 알려주는 '한국의 정상석' 이야기. 풍수, 염원, 그리고 K-등산 문화까지.
정상석 앞 인증샷, 한 장쯤은 다 있잖아요. 힘들게 올라왔으니까, 증거는 남겨야 하니까. 이유야 어떻든 우리는 늘 그 돌 앞에 멈추게 되더라고요. 숨을 고르고, 사진을 찍고, 복을 빌고. 그런데 가만 보면 정상석, 다 다르게 생겼어요. 크기도, 모양도, 느낌도 제각각. 우리는 언제부터, 왜 정상에 돌을 세우기 시작한 걸까? frice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30년 넘게 산을 기록해온 베테랑 산악전문기자를 만났어요.

국내 최고참 현역 등산기자님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월간 <산> 기자이자 취재팀장을 맡은 신준범입니다. 2005년부터 등산 전문기자로 움직이고 있어요. 저는 주로 워킹산행, 백패킹, 산악인 인터뷰, 산줄기 종주, 등산 기초 강좌를 맡아왔어요.
30년 넘게 등산하면서 수많은 정상석을 만나셨겠어요.
쉬운 산은 없고, 그런 점에서 모든 정상석은 특별합니다.(웃음)
요즘 등산 문화는 당일산행이 일반적이지만, 과거에는 1박 2일부터 최대 3박4일까지 야영 짐을 메고 산줄기를 종주하는 일이 많았어요. 그러다 정상석을 만나는 순간, 길을 잃지 않고 잘 찾아왔음에 안도하고, 성취감을 느껴요. 최소 일주일은 아무도 오지 않았을 묵은 산줄기에서 만나는 정상석은 한없이 외로워 보이고,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무척 반겨주는 기분이예요.

정상석이 하이커의 친구이자, 기쁨이자, 안전이자,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상징이 되는 셈이죠. 사실 산에서 계속 걷노라면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손과 발이 저절로 안전한 곳으로 뻗어요. 긴 산행 끝에 몸과 마음의 힘이 빠지고 결국 무아지경에 이르는 거죠. 이 순간 가장 질 좋은 엔돌핀이 뿜어져 나오게 되고, 감동, 환희같은 것에 휩싸이는데요. 이걸 ‘하이킹 하이’라고 불러요. 정상석이 하이킹 하이의 부산물처럼 느껴지곤 해요.
요즘 정상석을 향해 기받고 복받으러 가는 관악산 하이킹이 화제를 모았어요.
제가 관악산 열풍에 관해 기사를 썼어요. 관악산이 풍수지리적으로 ‘화기’가 많고, 불 기운이 산 타는 사람들의 액운을 태운다는 원리인데, 실제로 많은 이들이 액운 해소를 목적으로 관악산을 찾고 있었죠. 가파른 바윗길에서 내쉰 거친 숨은 잡념을 태워버리고, 정상에서 마주하는 탁 트인 경치는 일상에 찌든 마음을 치유하기에 충분하거든요. 어떤 식으로든 산행은 몸과 마음에, 그리고 운과 복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운이 바뀌지는 않는다는 관점도 있어요. 취재를 위해 풍수지리학자 김두규 교수*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풍수지리학적으로 ‘화기’를 가진 산 정상에 오르는 행위로 사람의 운이 바뀐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액운 해소를 위한 관악산 등반을 “현대인의 불안이 만들어낸 지나친 주술”이라 진단했죠.
* 김두규 교수 우석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풍수지리학자. 저서로 《조선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우리 풍수 이야기》, 《풍수학사전》, 《풍수강의》, 《조선풍수, 일본을 논하다》, 《국운풍수》 등이 있다
<👉 연주대 인증샷에 한 시간…관악산에 무슨 일이? 보러 가기 >

하지만 저는 운이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건강이 좋아지고, 우울했던 기분이 밝아지는 효과가 있으니까요. 관악산이 아니라도 집에서 가까운 쉬운 산부터, 조금씩 높고 먼 산까지 난이도를 높여가면! 운이 조금씩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싶네요. (웃음)
한국의 산에는 정상에 큼지막한 비석이 많아요. 정상석은 어떤 의도로 세워진 돌인가요?
정상석은 풍수지리적 의미와 지리학적 의미를 담고 있어요. 예로부터 한국인에게 산은 단순한 곳이 아니었어요. 신령이 머무는 곳이자, 정기가 흐르는 통로로 여겨졌죠. 나라와 지역을 지키는 기운이 흐르는 정점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상징적인 조형물을 만드는 경우가 많았어요.

서울의 주요 명산에도 규모나 조형면에서 인상적인 정상석이 많아요.
북한산 백운대 정상, 태극기 아래 놓인 바위에는 한자로 ‘白雲臺 836m’라고 새긴 글자를 볼 수 있어요. 백운대의 것은 자연 너럭바위에 직접 글자를 새긴 ‘석각(石刻)’ 형태라 독특하죠.
20세기 이후에 세워진 정상석은 지리정보 제공이 최우선이에요. 산 정상임을 증명하고 해발고도를 표시하니, 등산객에게 객관적인 성취감을 주는 존재인 셈이죠. 지리산 정상석을 보더라도 앞면에는 해발고도와 산 이름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기상발원’,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같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누가 언제 처음 새겼는지 모를 정상석도 많은 듯 해요.
많은 경우 정상석은 근대 등산 문화가 정착되던 시기 혹은 특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정비되는 과정에서 새겨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악산의 정상석은 자연석으로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2000년대에 과천시에서 글자를 새겨 넣어 정상석이 되었다고 해요.
북한산 백운대 근처에는 의미있는 표지석이 더 있어요. 중요한 순간을 영원히 남기고 싶었던 이들의 마음이 산 정상에 글귀로 남아있는 거죠.
신 기자님이 수십 년 동안 <월간 산> 마감을 하며 가장 인상깊게 마주한 정상석이 궁금합니다.
문경 ‘산들모임산악회’ 가 세운 정상석이 기억나요.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30여년 간 정상석을 세운 산악회인데요. 문경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곳이고 산의 고장이라 할 정도로 산지 비율이 높아요. 이 산악회원들이 1990년대부터 2010년대 후반까지 30여 년간 문경 지역 산 20여 곳에 정상석을 세웠어요.


회원들이 십시일반하여 헬기의 지원 없이, 100kg이 넘는 정상석을 지게로 지고, 줄을 묶어 끌고, 그야말로 엄청난 노력을 들여 문경의 산 꼭대기에 정상석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여간한 문경의 산 정상석에는 ‘문경 산들모임산악회’라고 적혀 있습니다.


정상석을 올린 뒤에는 시멘트로 돌을 고정하는 작업을 하고, 산악회 사람들이 고사를 지냅니다. 제사 때입는 고유의 한복을 입고 머리에 관을 쓰고, 돼지머리를 비롯한 제사음식을 제대로 갖춰 의식을 치뤄요. 단일 산악회에서 30여 년간 상당한 노력과 정성을 들였으니, 정말 박수 칠 만 하죠.
<👉 월간 산에서 취재한 ‘산들모임산악회 이야기’ 보러 가기 >
그러고 보니 국내 산의 정상석은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만드는 경우도 많았는데, 점점 지자체가 디자인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 듯 해요.
1990년대 이후에 세워진 정상석을 보면 지자체에서 치적을 세우기 위해 올린 것이 많아서, 지자체 경계의 산에는 두 개의 정상석이 있거나, 서로 다른 산 이름을 적은 경우도 있어요. 산 이름은 국토지리정보원 지명 위원회를 거쳐서 결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정상석 제작이나 교체에는 긴 시간이 필요해요. 한 번 세운 표지석은 많은 비용이 들고, 철거도 어려워서, 지역 이기심만 앞세우기 보다는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죠.
2010년 이전까지는 지자체들이 경쟁하듯 정상석을 ‘더 크게’ 만드려는 경향이 있었어요. 산의 위상에 걸맞게 압도적인 크기로 세워야 지자체도 위신이 선다는 식의 발상이었는데, 점점 산림보호를 위한 친환경 의식이 중요해지면서 인위적인 디자인을 멀리하고, 자연과 어우러지는 자연친화적인 정상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근래에는 작고 귀여운 정상석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한국의 정상석이 지닌 독특한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실용성이라고 봐요. 산 정상은 혹독한 자연 조건인 만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소재를 쓰는 정상석의 실용성이 특징입니다.
해외 산의 등정 표시물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서양은 종교적인 이유로 정상에 십자가가 있는 곳이 많아요. 나무나 철제를 활용한 표시물도 자주 보이고, 돌보다는 돌탑으로 정상을 알리는 경우가 많죠. 반면 우리나라 산에는 화강암처럼 단단한 돌이 많고, 돌을 가공하는 능력도 뛰어나서 돌로 만든 정상석이 많아요.

정상석 만큼이나 독특한 한국만의 등산문화는 또 어떤게 있을까요?
‘정상까지 최단거리로 오르기’ ‘인증샷 남기고 빠른 하산’ 두 가지가 떠오르네요. 한국사람들 특유의 도파민 추구형 산행이라 생각해요.(웃음) 부정적으로만 보는 건 아니고요. 한국인의 ‘빨리 빨리’ 문화와 진취적인 성향이 산에서도 그대로 옮겨온 거라 생각해요. 목표를 세우고 나만의 기록을 달성하는, 결국에는 성취감을 이룬다는 점에서 즐거운 산행이죠.


정상석을 목표로 건강과 복을 찾으러 갈 등산객들에게 응원이나 하이킹 꿀팁을 남겨주시겠어요?
자연에서 내 안으로 침전하는 시간을 보내길 응원해요. 바람과 향기, 햇살, 나뭇잎과 꽃을 감상하는 산행을 즐겨보세요!
유럽 알프스를 가더라도 정상 위주의 코스에서는 유럽 사람들도 정상에 집착합니다. 다만 SNS 인증과 타인에게 보여지는 면을 우리처럼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둘레길 같은 우회적인 하이킹 코스도 많이 즐겨요. 속도감 있는 산행의 스릴도 좋지만! 조금 느리더라도 산 속에서 자연을 음미하고, 내 마음의 건강을 돌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 우리는 스스로 끝을 만들 수 있을 때, 비로소 특별한 감각을 얻는 것 같아요. 어떤 길을 골랐든, 누구와 함께였든, 마지막 한 걸음을 내 힘으로 옮겨 닿는 순간이 있잖아요. 그 도착의 순간은 크나큰 성취와 기쁨으로 마음속에 남아요. 그리고 우리는 그때의 감각을 간직할 무언가를 찾게됩니다. 높은 산 정상에 이르렀을 때 이곳의 이름이 새겨진 돌 앞에서 잠시 멈추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오늘 하루를 끝낸 자리, 어떤 일을 마무리한 순간, 혹은 아무 일도 없던 날의 끝에서 어떤 마음을 느끼셨나요? 우리는 생각보다 자주, 스스로 매듭지은 ‘정상’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정리 김정년
사진 프라이스, 월간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