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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고기구이의 아슬아슬한 중재자, K-불판

여럿이 모여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 구워먹는 한국식 구이요리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난로회 풍경을 담은 19세기 민화

조선식 야외취식

다섯 명의 남자가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남자들의 모습은 제각기 조금씩 다르다. 고기가 뜨거운 듯 입으로 부는 남자, 구운 고기를 담은 접시를 들고 있는 남자, 술을 쭉 들이키려는 남자도 있다. 한 명이 쓴 남바위로 보아 날씨가 추운 모양이다. 그렇다면 불은 고기도 구워주고 따뜻함도 안겨주니 일석이조로 귀하다.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난로회 풍경을 담은 19세기 민화를 확대한 모습
19세기 민화. <성협 풍속화첩> ‘야연’ ⓒ국립중앙박물관

고기를 즐기는 남자들의 모습이 다채로운 가운데, 그림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가운데의 불판이다. 제법 잘 타오르는 불길 위에 둥글게 올라 앉아 중심을 잡아준다. 가운데가 옴폭 파여 있는 형국까지 감안하면 모양새가 갓과 흡사해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갓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대하드라마에서 비슷한 설정을 본 기억이 난다. 선비가 철로 쓴 갓을 쓰고 여행을 다닌다. 평소에는 품위를 지켜주고 햇볕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해주다가 식사 때는 만능 취사도구로 변한다. 철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닐 수 있다고? 요즘은 아라미드 섬유로 만들지만 삼십 년 전에는 진짜 철모를 쓰고 훈련을 받았다. 한국전쟁 때 취사에도 쓰였다는 철모였으니 철제 갓 쓰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어쨌든 불판은 그렇게 중심을 잡아준다.

이미 19세기에 민화로 그려졌을 만큼 우리는 고기구이를 좋아한다.

서울 후암동 도로 변에 놓인 숯불화로
서울 후암동 도로 변에 놓인 숯불화로. ⓒfrice

하지만 늘, 두 주인공인 고기와 불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관심을 독점해왔다. 생각해 보자. 고기라면 우리는 소냐 돼지냐 양이나 등등 동물을 따지고, 갈비냐 등심이냐 항정살이냐 등등 부위를 고민한다.

불도 사정은 비슷해서 편리함의 가스와 정통성의 숯불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처럼 고기와 불이 각광 받는 가운데, 정작 둘 사이를 중재해주는 불판의 존재는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불판으로 고깃집을 선택하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없을 것이다. 불판이 없거나 제 역할을 못하면 귀한 고기를 망칠 수 있고, 따라서 각 고깃집마다 고심 끝에 불판을 선택하지만 각광은 받지 못한다.

뿌리깊은나무 일천구백칠십구년 십이월호 - 서울, 한국의 진열장 中
뿌리깊은나무 일천구백칠십구년 십이월호 – 서울, 한국의 진열장 中 ⓒ에드워드 김

구이요리의 중재자, 불판

그렇다, 중재라고 했다. 한식에서 구이는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식탁 한가운데에 불을 놓고 직접 조리를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말해주듯 인간은 언제나 불을 갈망한다. 조리는 불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인류는 익힌 음식을 먹고 뇌를 발달시켰다. 그런 불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고 (예외는 있지만) 먹는 이가 직접 익혀 먹는다. 식사가 의식도, 유희도 될 수 있다.

그러한 특성이 생생함과 맞물려 한국의 고기구이는 해외에서도 K-푸드의 대표이자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스테이크, 아르헨티나의 아사도 등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조리 문법은 많다. 하지만 열원(섭씨 1000~2000도의 숯불 혹은 가스불)과 재료(주로 양념을 하지 않은 생고기)가 식탁에서 맞물려 자아내는 한식 고기구이의 생생함에는 나름의 독창성이 있다.


K-불판의 역할

한식 고기구이의 성격을 궁극적으로 불판이 결정하니 불판도 ‘K-불판’으로 격상된 느낌이다. K-불판의 중재는 두 갈래로 이루어진다.

불 위로 판이 깔리면 온갖 '구워먹을 것'을 올린다.
불 위로 판이 깔리면 온갖 ‘구워먹을 것’을 올린다. ⓒfrice

첫째, 공간적 중재자 역할을 한다.

이름처럼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수분을 품은 동물의 근육과 지방의 집합체인 고기는 부들부들하고 늘어지는 성질을 가졌다. 열원에 올렸을 때 고르게 익지 않기 때문에 판을 깔아야 평평하고 균일한 조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열에너지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고기구이는 크게 복사열과 전도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자는 전자파에 의한 직접 전달, 후자는 다른 매개체를 통해 간접 전달 되는 열이다. 이 두 열이 어우러져 고기의 수분을 증발시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익히는 한편, 고기 표면의 마이야르 반응을 유도해 복잡한 맛과 바삭한 질감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두 종류의 열에너지를 우리는 불판으로 편하게 통제한다. 복사열과 전도열의 노출 비율부터 세기까지 모두 불판이 좌우한다.


21세기 K-고기불판

1) 개방형

숯불을 피운 개방형 불판
고기를 올린 개방형 불판
ⓒfrice

완전 개방형 불판, 석쇠 일족을 예로 들어보자. 철사가 형성하는 면은 ‘판을 깔아주는’ 공간적 중재 역할에 치중하는 한편 고기를 직화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따라서 조리는 복사열에 의해 이루지니 ‘복사열 의존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형태와 면적을 규정하는 테두리에 철사만 걸쳐주면 된다. 그게 그거 같지만 복사열 의존형도 의외로 다양하다. 야외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에는 모기장도 불판으로 쓰이곤 했다. 그렇게 눈이 고운 것과 철근을 붙여 만든 과격한 것이 양 극단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굵기의 철사와 눈의 크기로 이루어져 판을 깔아준다. 주로 고기와 직접 접촉이 미덕이라 여기는 숯불과 짝을 이룬다.

2) 폐쇄형

솥뚜껑을 담은 폐쇄형 불판
폐쇄형 불판에 올라간 음식재료
ⓒfrice

다음으로는 ‘전도열 의존형’이 있다. 눈 혹은 구멍이 전혀 없는, 폐쇄형 불판으로 구이가 전도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작한 국물에 끓여 먹는 서울식 불고기의 불판과 삼겹살용 불판의 상당수가 여기에 속한다. 특히 돼지기름의 원활한 배출을 위해 경사가 지다 못해 곡선으로 진화한 후자가 흥미롭다. 복사열 의존형과 정반대로 열에너지의 고른 분배가 강점이라 가스불과 주로 짝을 짓는다.

3) 절충형

절충형 불판 위에 올린 고기
절충형 불판 위에 올라간 음식재료
ⓒfrice

세 번째로는 둘이 절충된 ‘야망형’이 있다. 복사열과 전도열을 모두 최선으로 활용하겠다는 야망에 젖어 다채로운 양태 및 빈도로 구멍이 뚫려 있다. 심지어 석쇠의 눈이 커지다 못해 야망형으로 발달한 경우도 있다. 전도열의 극대화를 위해 최대한 확보된 면에 복사열의 개입 및 환기를 위해 구멍을 낸 형국이다. 거의 모든 고기를 올려 구울 해법이 마련되어 있을 만큼 종류가 다양하다.

4) 욕심형

음식재료를 굽는 칸이 선명하게 분리된 욕심형 불판
욕심형 불판에 올린 음식재료

마지막으로는 ‘욕심형’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조리할 수 있는’ 불판이다. 핵심은 고기를 굽기 위한 ‘야망형’ 불판이다. 이것이 판 위에서 중심을 이루고 계란 등을 익히기 위한 ‘전도열 의존형’이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다. 심지어 중심에 찌개 뚝배기를 위한 공간을 낸 제품마저 있다. 직화구이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합치면 초월적인 불판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종합적인 효율은 따로 쓰는 것보다 더 떨어진다.

따라서 욕심형 불판은 ‘뇌절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뇌절’이란 적당한 선에서 끊지 못하고 계속 말이나 행동 등을 하다가 기어이 추한 꼴을 보이는 형국을 뜻하는 은어이다. 특히 계란을 위한 테두리가 문제이다. 계란이 눌어 붙을 가능성도 매우 높을 뿐더러 모양새가 좁고 수세미가 잘 안 들어가니 구석을 깨끗하게 닦기 어렵다. 공간이 나뉜 프라이팬의 태생적 한계인데 생각 없이 제품을 개발해 뇌절형이 되었다.

미국의 크리스 오 셰프가 개발한 K-BBQ 캠핑카
미국의 크리스 오 셰프가 개발한 K-BBQ 캠핑카. ⓒkbbqcar
가변형 식탁에 다목적성 가열조리를 위한 불판을 채택한 게 눈길을 끈다
가변형 식탁에 다목적성 가열조리를 위한 불판을 채택한 게 눈길을 끈다. ⓒkbbqcar

다만 이 ‘욕심형’이 맨 앞에서 언급한 19세기 민화의 불판의 직계 후예일 가능성만은 무시할 수 없다. 민화의 불판은 갓을 닮아 가장자리가 평평하고 가운데는 움푹 파여 있다. 따라서 고기를 굽는 한편 마늘이든 찌개든 무엇이든 가운데에 익힐 수 있다. 다목적성이 뇌절형 불판의 목표이자 미완성의 미덕임을 감안하면 둘 사이의 관계를 간과하지 않는 게 좋겠다.


오늘은 저 불판에 어떤 고기가 올라갈까?
오늘은 저 불판에 어떤 고기가 올라갈까? ⓒfrice

K-고기불판의 오늘과 내일

나름 조리의 즐거움과 효율을 좇아 불철주야 애를 쓰며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지만 사실 K-불판에는 개선의 여지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고기가 들러 붙는데 대한 대책이 미약하고 얇아 열효율이 좋지 않다. 사실 전도열 의존형이 아니더라도 K-불판은 상당 부분 공간적 중재 역할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K-불판의 단점이 잦은 교체를 촉발하니 설거지 등 유지 관리로 자원 또한 너무 많이 잡아 먹는다. 과연 대안이 있을까? 무쇠를 고려해볼 수 있다. 열전도율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머금은 열을 오래 머금는다. 게다가 고깃집 같은 곳에서 빠르게 반복해서 쓴다면 표면에 폴리머의 막이 생성돼 고기가 들러 붙는 것을 막아준다.

불판의 형태와 고기의 종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맛이 느껴지는 느낌
불판의 형태와 고기의 종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맛이 느껴지는 느낌. ⓒfrice

실제로 무쇠 불판은 이미 한식 구이의 환경에 도입이 되어 있는데, 우려가 조금 따르기는 한다. 무거운데다 열을 오래 머금으므로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체 상황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훨씬 더 높다. 관습처럼 당연시 여기기는 하지만 식탁에서 벌어지는 불 및 불판의 도입 및 교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가벼워 무쇠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지닌 탄소강 불판도 등장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사실 한식 구이에는 장점 만큼 단점도 많다. 고기를 잘게 썰면 너무 빨리 익고, 요즘 유행을 따라 스테이크처럼 두툼하게 썰면 잘 안 익는다. 이런 단점에 K-불판이 한몫 거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떠한 여건에서도 고기와 불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달구다 못해 태워가며 아슬아슬하게 중재하고 있는 K-불판의 노고에 대해서는 한 번쯤 되새겨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실제로 무쇠 불판은 이미 한식 구이의 환경에 도입이 되어 있는데, 우려가 조금 따르기는 한다. 무거운데다 열을 오래 머금으므로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체 상황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훨씬 더 높다. 관습처럼 당연시 여기기는 하지만 식탁에서 벌어지는 불 및 불판의 도입 및 교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가벼워 무쇠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지닌 탄소강 불판도 등장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 오늘날 한식에서 즐겨 쓰는 구이용 불판을 이렇게 살펴보니 고기 종류보다 더 다양한 불판들이 있네요. 식탁의 한가운데에서 식사의 리듬을 조율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되기도 하는 고기 불판. 한식 고기구이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 형성에 K-불판이 한몫했다는 점에 동의하시나요? 오늘도 맛있는 고기를 위해 계속 진화하고 있는 K-불판! 그 존재를 되새기고 더 나은 한식을 즐겨보아요. 😀

한 그릇에 담긴 실용과 전통

20세기의 스테인리스 식기 선물세트

2010년 동아리 식당 선반에 백반에 나갈 반찬을 담을 멜라민 식기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2010년 동아리 식당 선반에 백반에 나갈 반찬을 담을 멜라민 식기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자기’ 주장이 확실한 편, 멜라민 식기

15년 전쯤의 일이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해외 학생들 10여 명과 한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식탁 위에 음식이 차려지자 폴란드에서 온 학생이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릇이 온통 ‘자기’라서 놀랐다는 것이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이 집의 식기는 ‘자기’가 아니라 멜라민 수지(melamine resin)로 ‘자기’ 흉내를 낸 그릇이었다.

대성집의 선반. 김치, 깍두기, 고기 소스 등을 음식의 크기에 맞는 식기에 담는다
대성집의 선반. 김치, 깍두기, 고기 소스 등을 음식의 크기에 맞는 식기에 담는다. ⓒ서울역사박물관

멜라민 수지로 만든 식기가 국내 식당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들어서다. 멜라민 수지란 쉽게 말해 플라스틱의 일종인데, 열을 가했을 때 녹는 점이 높아서 놋그릇이나 도자기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 덕에 제품으로 나오자마자 소비자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식당 주인의 입장에서 봐도 멜라민 수지 식기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식기다. 일단 무게가 가벼워서 손님상에 나를 때 좋고, 떨어뜨려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설거지할 때 뜨거운 물에 넣어도 모양이 뒤틀리지 않으며 행주로 닦기만 하면 바로 쓸 수 있다는 점도 그렇다. 얼핏 보면 백자로 만든 듯 보이는데 가격까지 저렴하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편리성과 효율성에 ‘전통성’마저 갖춘 멜라민 수지 식기를 식당에서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1970년 초반 이후 멜라민 수지 식기는 대표적인 한식당용 식기로 자리 잡았다.

세운상가 일대 식당의 점심상. 똑같이 생긴 멜라민 그릇에 이날 제공될 반찬이 일정하게 담겨있다
세운상가 일대 식당의 점심상. 똑같이 생긴 멜라민 그릇에 이날 제공될 반찬이 일정하게 담겨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그 즈음 그 학생이 또 한번 물었다. 그렇다면 왜 밥그릇과 국그릇은 멜라민 수지가 아닌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이냐는 것이었다. 작고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이후 ‘스텐’) 밥공기가 상대적으로 앙증맞아 보인다고까지 했다.


스테인리스 식기에 담긴 궁중음식
스테인리스 식기에 담긴 궁중음식 ⓒ국립민속박물관

공기밥을 흔들어 먹는 이유, 스테인리스 식기

앙증맞은 밥공기의 탄생 비화를 이야기하자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양반들은 놋그릇을 좋아했다. 1940년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쓸 병기를 만들기 위해 일반 가정에서까지 놋그릇을 강탈해가자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릇들을 땅에 묻었을 정도였다.

한국인들이 20여 년 후 새롭게 등장한 스텐 그릇 때문에 놋그릇을 버렸다. 사용 전에 얼룩을 지우고 광을 내야 하는 놋그릇에 비하면 스텐 그릇은 관리의 어려움이 적었기 때문이다.

연탄 가스도 또다른 이유였다. 그 즈음 도시에서는 가정 취사용 연료가 나무 땔감에서 연탄으로 바뀌었는데, 연탄에서 나온 가스는 걸핏하면 놋그릇의 광택과 색을 망치곤 했다. 반면 스텐 그릇은 연탄 가스에도 변함이 없었다.

왼쪽부터 5첩 유기 반상기, 5첩 스테인리스 반상기
왼쪽부터 5첩 유기 반상기, 5첩 스테인리스 반상기. ⓒ국립민속박물관(좌), (우)
스텐 그릇 선물세트. 보자기에 정성들여 포장한 상자구성이 흥미롭다
스텐 그릇 선물세트. 보자기에 정성들여 포장한 상자구성이 흥미롭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인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스텐 밥공기는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식당에서도 필수품이 되었다. 마침 식량 수급이 불안정했던 시기였고, 쌀 소비를 줄일 방안을 찾던 정부 관료들은 바로 여기에 주목했다. 1973년 1월 10일,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스텐 밥공기를 지름 11.5cm, 높이 7.5cm로 만들어 공급하라는 서울 시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1973년 표준식단제를 실시하는 종로의 한 표준식당의 모습
1973년 표준식단제를 실시하는 종로의 한 표준식당의 모습. ⓒ서울기록원
1973년, 서울시는 대중음식점을 대상으로 한 표준식단제를 실시했다
1973년, 서울시는 대중음식점을 대상으로 한 표준식단제를 실시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조선뉴스라이브러리

‘밥심’으로 살았던 시민들이 이 조치를 따를 리 없었다. 그러자 서울시는 1976년 6월 음식점 운영자의 모임인 요식업협회를 압박했다. 스텐 밥공기의 규격을 지름 10.5cm, 높이 6cm로 또 한번 줄였고, 밥을 이 그릇의 5분의 4 정도만 담도록 강제하면서 ‘만약 서울시 소재 음식점에서 해당 규정을 위반하면 1회 위반에 1개월 영업 정지, 2회 위반에 영업허가 취소 처분을 내리겠다’고 한 것이다. 이 행정 조치는 통했다.

(좌)1960년대 후반부터 흔히 볼 수 있었던 뚜껑이 둥근 스테인리스 그릇. (우) 오늘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뚜껑이 평평한 스테인리스 그릇
(좌)1960년대 후반부터 흔히 볼 수 있었던 뚜껑이 둥근 스테인리스 그릇. (우) 오늘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뚜껑이 평평한 스테인리스 그릇. ⓒ국립민속박물관(좌), (우)

2000년대 이후 스텐 밥공기는 더욱 작아졌다. 탄수화물 덩어리인 밥을 적게 먹어야 다이어트를 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주장 때문이었다. 2012년부터는 내면 지름 9.5cm, 높이 5.5cm의 스텐 밥공기가 한식당에 보급되었다.

스텐 밥공기의 뚜껑이 평평해진 것도 이 즈음이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에도 빨리 음식을 낼 수 있도록 미리 밥을 지어서 담아두었는데, 뚜껑이 평평하면 온장고에 차곡차곡 쌓아 둘 수 있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오래 둘수록 수분이 말라서 밥이 딱딱해진다는 점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딱딱한 밥을 맛있게 먹을 방법까지 찾아냈다.

바로 밥공기를 받으면 두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바닥에 남은 수분이 위로 올라오면서 딱딱한 밥에 고루 퍼졌다. 폴란드 학생의 눈에 ‘앙증맞게’ 보였던 납작한 스텐 밥공기에는 이토록 유구한 역사가 숨어 있었다.


양은 냄비에 끓인 해물라면
양은 냄비에 끓인 해물라면. ⓒfrice

막걸리와 라면의 영원한 친구, 양은 식기

강의 아닌 강의를 하고 나니 목이 말라 막걸리를 주문했다. 양은 주전자가 등장하자 이번에는 이 그릇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양은 그릇은 알마이트(almite)로 만든 식기를 가리키는데, 알마이트란 순도 99.7%의 알루미늄을 전기 처리하여 산화 피막을 형성시킨 다음 노란색 코팅으로 방수 처리한 금속이다.

부뚜막 위의 선반 살강과 가스버너에 양은 냄비와 솥이 가득하다
부뚜막 위의 선반 살강과 가스버너에 양은 냄비와 솥이 가득하다. ⓒ국립민속박물관

알마이트 그릇은 1950년대 중후반 한국의 가정과 음식점에서 가장 많이 쓰인 식기였다. 당시 밥통부터 냄비, 주전자, 찬합, 수저통, 국자 등이 모두 알마이트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이토록 널리 사용된 이유는 알루미늄의 대표적인 원료인 명반석이 한반도 곳곳에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값도 그리 비싸지 않고 잘 깨지지도 않으며 놋그릇처럼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 알마이트 그릇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국,찌개,라면 조리 용도로 사랑받는 양은 냄비
국,찌개,라면 조리 용도로 사랑받는 양은 냄비 ⓒ국립민속박물관

특히 알마이트 냄비 세트는 당시 신혼 가정 집들이 선물로 가장 인기가 좋았다. 주물 냄비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열 전도율이 높아서였다. 하지만 코팅이 벗겨지면 인체에 해로운 알루미늄에 곧바로 노출된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스텐 냄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지금도 라면은 양은 냄비에, 막걸리는 양은 주전자에 담아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장터좌판에 깔린 생활식기
장터좌판에 깔린 생활식기 ⓒ국립민속박물관

미학과 실용성 사이에 숨겨진 역사

이처럼 각각의 식기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특징은 크게 산업화를 기준으로 나뉜다. 산업화 이전에는 한 문화권 속 사회문화적 체계 등에 따라 식기의 종류와 형태와 재질 등이 결정되었다면, 대량 생산이 시작한 후부터는 효율성과 경제성, 편리성이 우선이었다.

우리 생활 속에 다양하게 머물러온 그릇들
우리 생활 속에 다양하게 머물러온 그릇들. ⓒ국립민속박물관(상), (좌), (우)

오늘날 우리의 식탁 위에는 다양한 식기가 마구 뒤섞여 있다. 자기 그릇과 놋그릇부터 스텐 밥공기, 멜라민 수지 찬그릇, 양은 주전자까지. 이런 ‘잡종적 식기’에는 식민 시대, 한국 전쟁과 피난, 급속한 도시화 과정 등 우리의 모든 역사가 녹아 있다. 미학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개선해야 할 여지가 많은 식탁 앞에서 고민이 되는 이유다. 그 속에 담긴 역사마저 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 오늘날 우리 일상에는 한국 반상 문화를 함께 했던 플라스틱(멜라민 수지), 스테인리스, 양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의 식기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 실용성을 기반에 둔 멜라민 그릇, 스테인리스 그릇은 탄생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의 식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디자인과 사용성을 더욱 개선해나가면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어요. 인체에 해롭다지만 손 맛 입 맛 좋은 양은 그릇은 낯선 그리움과 추억을 담아 끝까지 우리 생활에 함께합니다. 이번 컬럼에서 우리 주변에 보이는 대표적인 식기의 탄생비화를 엿볼 수 있었는데요. 그릇에는 음식만 담기는 게 아니라 당시 사회상이 담겨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식탁에는 요즘 어떤 그릇이 올라가 있나요? 그리고 여러분은 거기에 무엇을 담고 계신가요?

얼죽아 비긴즈! 한국인은 언제부터 아이스 커피에 열광했을까?

유리잔에 담긴 아이스 커피

(2) 얼죽아의 기원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아아’나 이를 즐기는 ‘얼죽아’의 전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찬물을 지극히도 좋아한 오래된 문화의 결과물이다.

아이스 커피
ⓒfrice

찬물을 즐겨 마시는 나라는 이 세상에 몇 나라 되지 않는다. 그중에 얼음 가득 벌컥벌컥 잘 마시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러니 아이스 아메리카노조차 생소한 외신에서 혹한에 두꺼운 패딩 잠바를 입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는 한국 사람을 보고 놀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름이면 ‘열은 열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로 음식을 먹었는가 하면, ‘이냉치냉(以冷治冷)’으로 약재를 달여 만든 음료를 식혀서 마시거나 차갑게 마셨다. 음식 온도에 대한 개념도 더 차갑고 뜨거운 걸 좋아하다 보니 서로 연결이 되어 차가운 걸 먹거나 뜨거운 걸 먹어도 ‘시원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시원하다’는 말은 온도의 높낮이가 아니다. 차가운 걸 먹든 뜨거운 걸 먹든 몸에 변화가 생겨나 기운이 잘 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뜨거운 걸 먹어도 시원하고 차가운 걸 먹어도 시원하다고 알며 자라다 보니 평소에도 찬물을 즐겨 마시는 습관은 자연스러워졌다. 한겨울에 얼음 동동 동치미를 자연스레 즐겨온 음식 문화도 한몫했다.

얼음을 채취해 저장하는 일은 오래되었다. 《삼국사기》에도 신라 지증왕 6년(505년) 얼음 저장을 담당하는 기관인 빙고전(氷庫典) 이야기가 등장하고, 조선시대 《승정원일기》에도 영조 14년(1738년)에 석빙고(石氷庫)를 축조해 겨울에 채집한 얼음을 여름철에 사용할 수 있도록 장기간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 이후에도 현대까지 냉장고가 나오기 전에는 한강의 얼음을 잘라 식용으로 쓰기도 했다.

화려하게 장식한 크림 커피 메뉴
ⓒfrice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냉커피는 모든 나라에서 즐기는 음료가 아니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에는 에스프레소에 얼음 3~4개 정도를 잘게 부숴 넣은 카페 프레도(Cafe Freddo)가 있고, 에스프레소에 부순 얼음을 채워 넣고 아이스크림을 얹은 후 휘핑크림과 초콜릿 가루로 마무리하는 카페 플라페(Cafe Flappe)도 있다.

중남미에는 얼음에 커피 음료를 갈아 만든 커피 프로스티(Coffee Frostie)도 있지만 얼음 덩어리를 가득 채우는 커피는 아니다.“사람 떠나고 차가 식었다(人走茶凉)”는 속어 때문인지 중국 사람들은 항상 따뜻한 차나 커피를 마신다.

유리잔에 얼음이 동동 뜬 커피가 담겨있다
ⓒfrice

외신이 주목한 한국인의 ‘얼죽아’ 사랑은 어릴 때부터 찬물이나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게 습관이 된 데서 비롯된다. 그 습관에 날개를 달다 보니 열은 열로, 냉은 냉으로 통하는 법을 몸에 익혔기 때문이다. 국민 음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한편 아이스 커피의 유행은 ‘대가리를 부비대며’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전통적, 봉건적 관습과 풍속에 저항하며 새로운 맛을 탐닉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있어 가능했다.

『여성조선』, 신년호, 여성조선사 1933.1 / 최계복, 『두 여인(수원)』, 1933-1944
『여성조선』, 신년호, 여성조선사 1933.1 / 최계복, 『두 여인(수원)』, 1933-1944 ⓒ국립현대미술관

‘얼죽아’의 기원, 모던 보이와 모던 걸

일제 강점기 모던의 상징이었던 다방은 ‘아이스커피’라는 새로운 커피를 선보였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겨울. 외신에서 맹추위에 추워서 얼어 죽을지언정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포기하지 않는 한국인의 커피 문화로 집중 조명을 한 것도 아이스커피 ‘얼죽아(Eoljukah)’였다.

K-팝 인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외국에 알려진 ‘아아(Ah-Ah)’도 실은 일제 강점기 경성 시내에 다방과 카페가 들어서고 이를 즐기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등장하면서부터 생겨난 핫한 메뉴였다. 1930년 7월 16일자 〈조선일보〉에는 서구식 용모와 옷차림으로 꾸민 청춘 남녀가 자유연애와 낭만을 만끽하며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풍자하는 글이 실렸다.

조선일보 1930년 7월 16일자 신문기사. 아이스 커피가 언급된 당대 커피 문화를 묘사하고 있다.
ⓒ조선일보

칼피스, 파피스도 조커니와 잠 오지 안케하는 컵피에도 ‘아이스컵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하여다가는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먹는다. 사랑의 아이스컵피-이집에서 아이스컵피-저집에서 아이스컵피-그래도 모자라서 일인들 뻔으로 혀끗을 빳빳치펴서 ‘아다시! 아이스고히가, 다이스키, 다이스키요!(전 아이스커피가 좋아요, 좋아)’, ‘와시모네-?(나도 그래) 혼부라당 백의(白衣)껄이 아니라 제 밋천 드리고 다니는 마네킹껄이 이것이라면 머릿속은 텡비여도 자존심 만흐신 그들은 필작 노할 게로군.

– 조선일보, 1930년 7월 16일자 中

‘모던’의 성지와도 같은 경성 진고개(오늘날 충무로, 명동) 일대를 거닐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소비하는 모던 커플에게 아이스커피는 인기 메뉴였다. 그러나 을사늑약과 한일강제합병 전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들이 무슨 짓을 해도 눈에 잔뜩 거슬릴 뿐이다.

심지어는 둘이 머리를 맞대고 다정하게 아이스커피 한잔을 즐기는 모습조차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먹는다”고 비꼬았다. 일본어를 쓰며 새로운 유행인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기성세대는 꼴사납게 본 것이다. 당시 갑자기 등장한 모던 풍속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다.

조선호텔에서 티타임을 가지는 사람들
ⓒ진용선

그런데도 신세대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소비하고 그것을 즐기는 변화의 물결은 막지 못했다. “이집에서 아이스컵피-저집에서 아이스컵피”라는 표현처럼 아이스커피는 당시 다방이나 카페에서 인기 메뉴 가운데 하나였다. 자유연애를 꿈꾸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에게는 ‘사랑의 아이스커피’였다. 아이스커피는 이렇게 기성세대의 근심 어린 시선 속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일본식 영어표현인 ‘아이스 커피’가 정착했다. ‘iced coffee’라는 표현을 뒤로 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