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그라운드는 디자인에 자연환경이나 도시의 풍경을 반영합니다. 특히 지역색을 반영한 아트워크 일러스트를 활용한 제품들이 인상적인데요.
마더그라운드는 전국을 돌며 보부스토어라는 이름으로 팝업스토어를 열고 있어요.
조선시대 보부상에게 영감을 얻은 기획이죠. 주력 제품은 스니커즈, 티셔츠, 양말인데요. 팝업스토어 출장 일정에 맞춰 한정판을 만듭니다.
예컨대 대전에서는 ’93 엑스포’, 그 중에서도 ‘한빛탑’ 대구는 ‘섬유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떠올려요. 울산 팝업스토어는 ‘수출의 도시’라는 로컬 스토리에서 아트워크를 시작했어요. 공업도시 울산의 이미지를 표현했습니다.
“우리 지역의 핵심을 잘 표현했나?” 맥락을 파악하기 위해 애 많이 썼구나!”
디자인에서 그런 인상을 받을 때 그 지역 분들도, 지역을 방문하는 소비자분들도 더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누룩, 밤, 된장. 한글 이름도 흥미로웠어요. 다른 패션 브랜드와 비교해 보면 디자인에 한국적인 소재를 즐겨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 사람인 내가, 나다움을 찾아서 무언가 만들고 브랜드를 위해 무언가를 모으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소재가 자연스럽게 디자인으로 모였습니다.
콘셉트가 아니라 익숙한 것을 연상하며서 정해요. 귤이 떠오르면 귤. 색이 누룩처럼 보이면 누룩이라 이름 짓는 식이죠. 의도라기 보다는 무의식에 가까운 디자인 요소입니다.
대표 디자이너가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로컬 굿즈 디자인 사례 4가지
36th 보부스토어, 울산광역시
울산은 조선업이나 자동차업계 종사자가 많아요. 그 분들이 주인공인 울산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자동차가 큰 선박에 실려 해외로 나가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걸 귀여운 일러스트로 그려 티셔츠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트워크를 재밌게 보시고 구매해주셨어요. 울산시민분들이 ‘수출의 도시’라는 이미지에 자긍심을 느끼신다는 인상입니다.
45th, 49th 보부스토어, 도보마포 페스티벌
학창 시절부터 머물렀던 서울 마포구! 로컬 큐레이터 ‘도보마포’와 작은 지역 축제를 열었었어요. 가볼 만한 곳을 수집하고 그곳의 인상적인 풍경을 주제로 아트워크를 그려 지도, 티셔츠, 양말을 만들었습니다. 앞으로 마포의 특별한 공간을 주제로 매달 양말을 만들려 해요! 최근 연남동에 ‘보보스토어’라는 이름으로 상설 매장을 열었거든요. 방 한 켠에 여태까지 만든 아트워크를 전시중이니 언제든 편히 방문해 주세요!
19th 보부스토어, 제주 서귀포
제주하면 생각나는 ‘감귤’, 그리고 제주 동쪽의 자랑 ‘비자림’의 컬러를 담았습니다. 스티커즈와 티셔츠, 모자, 반바지 등으로 단일한 컬렉션을 구성했습니다. ‘플레이스 캠프’라는 호텔 겸 스토어에서 연 팝업인데요. 관광객은 제주를 추억하기 위한 기념품으로, 제주도민분들은 내가 사는 지역을 잘 표현했기 때문에 구매했다 말씀하셨어요. 제주 컬렉션을 각자 다른 이유로 소장하는 게 인상적입니다.
40th, 53th 보부스토어, 경기도 고양~일산
고양~일산에서만 팝업스토어를 3번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역 랜드마크인 호스공원을 아트워크로 만들었는데요. 최신 굿즈는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했어요. 고양에서 고양이를, 일산은 1과 山(뫼 산)을 더하는 식인데 호응이 좋았습니다. 상품과 아트워크로 던진 유머였는데, 제작의도를 설명하다보면 고객과의 거리가 부쩍 좁혀지는 느낌이 들어요.
서울 창덕궁 담벼락 옆 작은 마을, 원서동. 볕이 잘 드는 한옥 안에서 새까만 쇳덩어리가 움직인다. 납작한 활판을 새하얀 종이 위로 꾹 눌러 멋진 그래픽이 새기는 곳. 인쇄소 ‘긷’은 백 년 묵은 기계식 활판인쇄기와 한지를 조합하는 인쇄디자인 스튜디오다. 최민영 대표 디자이너를 만나 근대적 인쇄기술을 시각 디자인에 응용하게 된 이유를 물었다.
ⓒfrice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인쇄 디자이너 최민영입니다. 한지와 활판인쇄기를 활용하는 인쇄물 작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원서동 빨래터 근처 한옥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어요.
저는 사진을 전공했고 2000년대 후반까지 영화 스틸 작업을 했습니다. 디자이너 업무는 2011년에 종로 물나무사진관에 입사하며 맡게 됐어요. 재직 중에는 사진 인화용 한지를 개발하는데 참여하거나 문화 재단과 협업하는 디자인 프로젝트를 맡았었죠.
공간 내부에서 바라본 활판인쇄기. 총 2대가 설치됐고 실제로 운용하는 기기는 1대. ⓒfrice
‘긷’이라는 스튜디오 이름이 독특합니다.
긷은 ‘기둥’을 일컫던 옛말입니다. 나무가 자랄 때 대지에서 출발하잖아요. 중력을 거스르면서 생명력 있게 자라나는 모습들을 보면서 기둥을 떠올렸어요. 우리가 생활을 의식주로 구분할 때, 저는 주(宙)가 제일 마지막에 발현된 문화라고 생각하는데요. 기둥이야말로 집의 기본이자, 지붕을 떠받들며 사는 사람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긷 같은 인쇄물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TALK1. 활판인쇄술과 계절력
챈들러 앤 프라이스 활판인쇄기. 미국에서 19세기 후반 제작된 기기로 추정된다. ⓒfrice
2018년에 독립해서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렸어요. 한지를 이용해서 한국적인 멋을 가진 인쇄물을 만들어보고 싶었거든요. 백 년 넘은 미국산 활판인쇄기도 그때 만났습니다. 청담동 앤티크 숍에서 발견했는데 수리와 개조를 마치니 멀쩡했어요. 활판인쇄기에 한지를 끼워 넣으니 그 위에 담기는 아트워크가 참 예뻤어요. 활판의 양각으로 한지를 꾹 누르면, 납작 눌린 자리에 남은 글씨나 그림이 묵직한 분위기를 내죠.
한지와 활판인쇄기를 활용한 긷의 대표 디자인 상품 ‘계절력’. 24절기와 달의 변화를 표기했다. ⓒfrice
인쇄소 긷의 대표 디자인은 ‘계절력’입니다. 왜 만들기 시작하셨나요?
계절력은 2017년부터 만들기 시작했어요. 기존 달력처럼 날짜를 세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계절을 감각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태양력은 현대 사회의 기본 약속이잖아요. 원래 태음력으로 일 년을 바라봤던 우리가 절기와 풍속을 잊지 않길 바라며 만들어봤어요.
계절을 표기한 글자를 확대한 모습. 활판 양각에 한지가 꾹 눌리며 종이 위로 독특한 입체감이 드리운다. ⓒfrice
계절을 기준으로 시간의 시작과 끝맺음을 이야기하는 것도 중요했어요. 계절을 기준으로 시간을 나누다 보니까 24절기가 자연스럽게 들어왔네요. 물나무 사진관 시절부터 만들었는데, 독립하고 나서도 꾸준히 만들고 있어요.
절기나 계절은 자연을 구분하는 개념일 텐데요. 「자연은 계속 흐른다. 그 속에서 우리 같이 어우러져서 잘 살아보자!」 라는 생각으로 달력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잘 살고 싶은 마음은 우리에게 언제든 있다고 봐요. 2024년은 먹색 잉크로 날짜 표현을 하면서 ‘달의 변화’, ’24절기’, ‘대표 공휴일 표시’에 집중했어요.
해마다 조금씩 다른 디자인을 시도하고 계시죠?
네. 한때 공휴일을 붉은색으로 새기는 작업을 시도했는데 그건 딱 한 해만 했어요. 지금은 공휴일 숫자 위에 점을 찍는 것으로 디자인을 바꿨습니다.(웃음) 활판인쇄기에서 만든 인쇄물은 기계 특성에서 오는 한계가 있어요. 가장 많이 쓸 색을 먼저 깔고 그 위에 새로운 색을 덧발라야 합니다. 기계 특성상 종이에 여러 색을 동시에 새길 수 없어서 작업을 따로 진행해요.
원판 위에 잉크를 바르고 롤러를 굴리면 색이 판 위에 고르게 퍼지는 구조다. 색 사용에 제약이 걸리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frice
여러 색채를 쓰려면, 일단 먹색 부분을 한 번 다 찍어내고 나서야 다른 색을 덧바를 수 있어요. 만약 평일 표시는 먹색, 공휴일을 표시는 붉은색을 쓴다면. 우선 먹색 인쇄작업을 미리 마쳐야 해요. 붉은색 전용 활판과 붉은색 잉크를 갈아 끼워서 동일한 인쇄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반복합니다. 색을 여러 개 쓰려면 수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죠.
먹색과 붉은색을 동시에 찍어냈을 때, 종이 위에서 의도와 다르게 인쇄물이 틀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작업을 하는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고요. 만들면서 잃는 부분이 너무 많이 생기다 보니 지금은 달력에 먹색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컬러는 달력을 거는 실이나 포장지처럼 부속품에 따로 쓰고 있어요.
종이는 대부분 한지를 쓰고 계시죠. 이유가 궁금합니다.
흰색과 여백이 가장 잘 표현되는 종이여서 씁니다. 한지는 언뜻 보기에 비어 있지만, 무언가 차 있는 느낌이 들어요. 그게 참 좋습니다. 제가 하는 디자인 작업들이 제일 잘 표현될 수 있는 게 ‘한지’라는 물성을 살릴 때인듯해요. ‘활판 인쇄’라는 표현법이 한지와 제법 잘 어울리고요. 활판인쇄뿐만 아니라 한지를 활용한 디지털 인쇄작업도 맡고 있습니다.
‘긷’의 디지털 인쇄물. 대형 프린트기에 급지가 가능한 특수한지와 피그먼트 프린트로 한국적인 미감을 연출한 인쇄물 작업을 확인할 수 있었다. ⓒfrice
다른 종이는 어떤 식으로 쓰시나요?
한지가 아닌 종이로는 문켄디자인 종이를 제일 많이 써요. 러프하면서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것 같습니다. 양피지 질감이 나는 쉽스킨도 가끔 즐겨 써요. 기본 세팅은 까끌까끌한 느낌이 드는 종이를 많이 채택하는 편인데, 디자인 주제에 맞춰 응용하는 편입니다.
한지가 디자인의 기준이다 보니, 한지와 잘 어우러질 종이를 선택해서 쓰고 있습니다.
활판인쇄 작업에 필요한 도구가 담긴 진열장 ⓒfrice
혹시 새롭게 준비 중인 디자인 상품이 있나요?
수 년째 구상만 했지,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가 않네요.(웃음)
불규칙한 텍스처를 갖고 있는 한지로 캐주얼한 봉투를 만들어 쓰임새를 주고 싶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했어요. 편지를 담거나 용돈을 담는 봉투라면, 선물 교환할 때 쓰지 않을까 싶어요.
계절력을 조금 더 작은 사이즈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월(月)력으로 바뀔 듯하고. 탁상용 캘린더가 된다면, 한지에 직접 펜을 들고 메모를 하는 경험을 디자인하고 싶어요. 요즘 들어 사람들이 한지에 글을 써보는 경험이 많이 없어서. 잘 연출한다면 색다를 것 같아요.
TALK2. 한국적인 미감을 새기는 일
디자인 견본을 전시해둔 접객 공간 ⓒfrice
종이 위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새기는 ‘긷’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미감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한국 사람들이 오늘날 서양식 문화를 소비해도, 사유하는 방법은 동양의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어요.
거기서 한국적인 사유를 발견해서 응용한다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더라도 굉장히 다른 관점의 해석을 낳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적인 미감이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오늘’에 고착되는 개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 달라질 때마다 다른 형태로 발현되는거죠.
저는 자연이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뉘어 바뀌는 걸 아름답다 느끼는 사람이고, 한국의 아름다움은 담백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생각을 하나 하나를 모으면, 한국적인 디자인이라는 게 어느새 자연스럽게 배어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저는 ‘미감(美感)’이라는 한자어가 디자인이라는 외래어의 번역으로써 부분적으로 적합하다고 봐요.
ⓒfrice
그리고 저는 한국적인 미감이 시각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고 봅니다. 예컨대 한지는 그 자체로 예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학습을 통해 한지가 수준 높은 종이라는 걸 알고 아름답다 말해요.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가 인쇄 종주국이라는 맥락을 알아요. 그런 분들이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더 예민하게 느끼실 듯합니다.
디자인이라는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을 남들한테 특별하게 인식시키려는 의지가 생겨요. 혹은 대상을 특별하게 인식해야 될 거라 믿게 됩니다. 사물이나 생활양식을 이데올로기화시키는 셈이죠.
스튜디오 안 창가에 매달린 입춘첩. ⓒfrice
민영님으로부터 가장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한국적인 미감은 무엇인가요?
가느다란 줄에 무언가를 매달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제게 있어요. 무언가를 프레임에 딱 가둬놓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는 걸 좋아하나 봐요. 종이 한 장 그 자체는 바람에 흔들리고 약해 보여도. 그 한 장이 바람도 타고 살랑살랑 움직이며 버티는 모습이 예쁘거든요. 줄에 매달린 한지를 바라보면 거기에 빛도 배어들어요. 날씨에 따라 빛에 따라 같은 게 다르게 보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스튜디오에 전시된 활판인쇄물 샘플 ⓒfrice
「나는 이번 작업물을 진짜 한국적으로 꾸며야지!」 라는 결심을 갖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만드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다고 봐요. 살아오면서 본 것, 사적인 취향 같은 게 어쩔 수 없이 한 방향으로 기우는 게 아닐까요? 저는 전통의 이해와 현대 생활 양식의 파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려 거기에 현대적인 쓰임새를 만드는 일. 제가 안고 있는 고민입니다. 같은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반가울 거 같네요.(웃음)
TALK3. 활판인쇄물 디자인 프로세스
전시행사를 위한 활판인쇄작업. 최민영 디자이너가 명함 사이즈 인쇄물 200여장을 직접 인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frice
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니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작업이 예상됩니다. 실제로는 어떠신가요?
근대적인 활판인쇄술만 고집하진 않아요. 만약 전통적인 방식을 따른다면, 납판에 직접 글자 조판까지 해낼 텐데요. 저는 납이 아니라 아연 판을 쓰고 있고, 컴퓨터 일러스트 작업을 곁들여 따로 활판을 만들고 있어요.
근대 활판인쇄술은 보통 납판을 썼는데, 납은 잘 알려져 있듯 인체에 해로운 금속이라 아연으로 대체했어요. 납판과 비교하면 아연판의 물성이 상대적으로 무르긴 합니다. 활판을 인쇄기에 끼우면, 잉크가 돌아가는 롤러와 판의 양각이 닿는 면 사이가 미세하게 오차가 나요. 잉크와 종이가 효과적으로 맞물리는 세팅을 찾아내면서 아연판의 높이를 조정하기도 합니다.
활판을 쌓아놓고 측면에서 확대했다. 도톰한 양각에 묻은 마른 잉크가 인상적. ⓒfrice
인쇄용 활판은 어떻게 제작하시나요?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프로그램으로 아트워크를 만들고, 충무로에 있는 금형업체에 이미지 파일을 전달드려요. 아트워크 모양대로 필름을 떠주시는데요. 그걸 아연판 위에 부식을 시켜서 원하는 활판을 얻어내요. 현대적인 활판 생산법이죠.
근대 이전 활판인쇄는 같은 글자를 크기 별로 다 따로 만들어야 했어요. 결국 수만에서 수 십만 개의 활자들이 만들어집니다. 활자를 판에 따로 모으는 걸 ‘집자’라고 하는데요. 집자를 마친 활판을 기계 위에 올려서 찍어내는 방식이죠.
지금은 전통방식으로 활판을 제작하는 곳은 많지는 않아요. 파주의 ‘활판 공방’ 이라는 곳과 한 두군데 정도예요.
‘긷’에서 제작한 다양한 활판 ⓒfrice
활판을 쭉 모아보니 명함이나 엽서가 눈에 띄네요. 주로 어떤 분들이 활판인쇄물을 찾으시나요?
명함, 청첩장, 레스토랑 메뉴판 같은 의뢰가 많이 들어옵니다. 명함은 스튜디오 진열장에 있는 걸 보고 개인정보만 바꿔 달라는 분도 계신데, 제가 다시 설득을 하죠. 템플릿을 만들고 내용만 바꾸는 게 개인적으로는 용납이 안되네요.(웃음) 활판 디자인은 능동적으로 제안하는 편입니다. 레이아웃, 테마, 서체 … 어떻게든 조금씩 변화시키려고 애써요.
손으로 뭔가 만들어내는 분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활판인쇄가 핸드메이드와 같은 결을 지녔다고 보시는 듯해요. 한국적인 미감을 추구하는 회사나 공예품을 다루는 업체도 많이 찾아주세요. 자연을 소재로 활동하는 창작자, 분재 만드는 분이나 식물을 가꾸는 분도 자주 오시죠.
인쇄 목적은 주로 ‘정보 편집’이나 ‘소식 안내’입니다. 명함이나 엽서처럼 브랜딩을 위한 인쇄물 시안의뢰도 흔하고요. 공통적으로 자기자신이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려는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세요.
손이나 자연이라는 키워드에서 교집합이 모이네요. 종이를 활용한 패키지 인쇄 의뢰 같은 것도 들어오나요?
라벨지 작업은 해봤어요. 박스 작업은 개인적으로 권하고 싶은 작업은 아닙니다. 박스 패키지는 내용물을 보호하고 견고해야 하니까요. 패키지 속 소품 포장이나 박스를 덮는 슬리브(띠지)는 테스트해 봤어요. 슬리브나 봉투를 만드는 건 흥미로운 디자인이 될 듯합니다.
술이 담기는 유리병을 감싸는 한지 인쇄물과 활판. 긷은 전통주 브랜드 ‘일엽편주’의 패키지 라벨지 작업을 맡고 있다. ⓒfrice
가장 많이 사용한 활판이 궁금합니다.
일엽편주라는 전통주 브랜드가 오랜 고객사입니다. 저희가 술병을 두르는 띠지를 만들었는데요. 한지를 쓴 활판인쇄물로 띠지 디자인을 부탁하셨어요. 일엽편주 활판을 2019년도부터 쓰고 있거든요. 여태까지 패키지 라벨지를 만 개 이상 찍어냈는데요. 아직까지도 문제없이 쓰고 있습니다.(웃음)
긷의 활판인쇄기에서 찍을 수 있는 인쇄물의 최대 사이즈는 얼마인가요?
가로 25cm, 세로 15cm 폭입니다. 보통 이 사이즈보다 작은 활판을 만들어서 종이에 인쇄하고 있어요.
카페 오너가 의뢰한 엽서 디자인. 종이에 그린 스케치를 활판으로 이식했다. 잉크와 연필의 물성이 공존하는 인쇄물로 재탄생. ⓒfrice
‘긷’에서 제작한 스튜디오 오픈 기념 파티초대장. 한옥 천장을 올려다볼 때 드러난 기둥을 사진으로 찍고 그것을 활판으로 만들어 직접 인쇄했다. ⓒfrice
종이에 촘촘하게 새겨진 점이 디지털 사진의 픽셀처럼 기능한다. ⓒfrice
앞으로의 긷은 어떤 활동을 하시려고 합니까?
제가 커리어를 시작했던 사진과 관련한 디자인 작업들, 자연적인 스토리를 가진 작가나 브랜드와의 협업 프로젝트들을 해보려고 해요.
많이 하고 있는 작업은 디지털 사진 작업을 활판으로 만들어서 흑백사진을 인쇄하는 건데요. 사진을 전부 *망점으로 바꾸고 판을 만든 거라 찍고 나면 종이에 아주 작은 도트가 보입니다. 「활판 인쇄로는 정보를 전달하는 텍스트만 표현되지 않을까?」 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요. 도전해 보니 이미지 표현의 가능성이 보이고 있어서 훗날 인쇄 디자인에 반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망점 : 연속계조가 있는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을 인쇄물로 재현하기 위해 만드는 미세한 점
😈 흘러간 문화를 주목하고 옛 도구를 복원시켜 디자인에 활용하는 방식 어떻게 보셨나요? 디자인을 하는 도구의 구조를 이해하고 소재의 물성을 탐구하는 게 나만의 디자인을 만드는 지름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특정 도구나 사물의 물성에 강한 흥미를 느끼는 편인가요? 그렇다면 스크롤을 올려 인터뷰를 다시 읽어보세요. 그리고 디자이너의 관점과 작업과정을 주목해보세요. 거기서 얻은 여러분의 생각이 근사한 디자인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장성환 디자이너의 부캐는 <스트리트 H>라는 로컬 매거진의 발행인이다. 홍대앞을 둘러싼 문화와 홍대앞의 다양한 지리정보를 기록중인 <스트리트 H> . 그들은 최근 홍대앞 사람들을 만나 ‘홍대다움’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frice도 그것이 궁금하다. 가 생각하는 ‘홍대다움’을 물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는 홍대앞 로컬 매거진 <스트리트 H>를 15년 넘게 발행하셨죠. 잡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스트리트 H>는 홍익대학교 앞에서 시작한 다양한 문화와 변화. 홍대앞을 홍대앞스럽게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담아내는 동네문화 잡지입니다. 맞춤법 규칙 상 ‘홍대 앞’으로 띄어쓰기해야 되는 걸 알지만, 홍익대학교 앞 문화권이 일종의 고유명사이길 원해요. <스트리트 H>는 그래서 일부러 ‘홍대앞’* 이라고 붙여쓰기를 합니다.
*이하 언급되는 홍대앞은 전부 붙여쓰기 함.
<스트리트 H> 소개자료. ‘동네잡지는 다소 거칠고 아마추어적이다’ 라는 편견을 깨는 뺀질한 잡지라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스트리트 H
TALK1. ‘홍대다움’이란 무엇인가?
창간 15주년 기념호 주제가 ‘홍대다움’입니다. 이 주제에 응답한 홍대앞 사람들 생각이 흥미로웠어요. 발행인이 정의하는 ‘홍대다움’이 궁금하네요.
<👉 스트리트 H 창간 15주년 기념호 보러가기 >
제가 생각하는 홍대다움은 ‘똘끼_비정형’입니다. 다른 과 출신들이 들으면 섭섭해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가 생각하는 홍대의 DNA의 시작은 건축학과와 미술대학이라고 생각해요.
학력고사 성적은 낮아도 그림만큼은 아주 열심히 그린 친구, 미술학원조차 없는 동네에서 독학으로 미대 입시를 준비했던 친구, 이렇게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이 뒤섞이면서 홍대앞에 재밌는 일이 많이 벌어졌거든요. 그야말로 ‘재미난 작당’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홍익대학교 정문 (1996) ⓒ스트리트 H
홍익대학교 정문 (2024) ⓒfrice
특히 미술과 건축을 전공하면 작업실이 필요합니다. 컴퓨터 이전, 수작업 시절에는 과제 결과물이 꽤 크기 때문에 더 필요했죠. 대형 상권 형성으로 홍대앞 작업실이 다른 곳으로 많이 밀려나게 됐지만 그전에는 재학생 4명 중 1명은 홍대앞에 작업실을 했을 겁니다. 제가 볼 땐 어림잡아 홍대앞에 500여 개의 학생들 작업실이 있었을 것으로 봐요. 밤마다 500여 개의 반딧불이가 깜박이는 동네가 바로 홍대앞이었어요.
여기에 예술, 문화, 출판 종사자들도 홍대앞으로 모였습니다. 한국의 출판사 밀집 지역은 원래 종로 관훈동이었어요. 그러다 당시 출판사들이 젠트리피케이션에 밀려서 온 동네가 서울의 변두리인 홍대앞이었죠.
홍대앞 공동작업실 내부 ⓒ서울역사박물관
홍대앞 카페에서 볼 수 있는 커뮤니티 테이블.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원격근무하는 예술/문화 종사자를 흔히 만날 수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그때의 ‘홍대앞’은 어떤 분위기였나요?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이 84년에 생겼어요. 그전까지는 그 아래로 내려갈 일이 없었어요. 그야말로 홍대앞은 홍대 교문 앞 정도의 좁은 의미였습니다. 지금의 호미화방이 있는 서교 오피스텔 앞길이 당인리 발전소(현 한국중부발전 서울발전본부)로 무연탄을 나르던 철도였어요.
발전 연료가 석유로 바뀌며 철도가 폐기되자 무허가 건물들이 무단 점거하게 되었고 일정 기간 지나면서 점유권이 생기게 된 거죠. 지금은 핸드폰 가게나 액세서리 가게들이 있지만 오래전에는 기록에 남을 만한 멋진 사람들이 그 공간에서 작업실과 다양한 활동을 했었어요.
호미화방과 앞골목. 20세기에는 기차가 운행했던 철길이었다. ⓒfrice(위), 스트리트 H(아래)
한참 선배들 말씀에 따르면, 홍대앞은 눈비가 내리면 길이 진흙 바닥으로 바뀌던 변두리 동네였다고 해요. 오늘날 같은 동네의 인프라도 없었고요. 화장실도 없고 상수도만 있는 차고, 반지하에서 살면서도 마냥 좋았던 사람들이 아지트 같은 걸 만들고, 개성 넘치는 친구들이 모여서 이상한 작당을 하니까. 모든 게 재밌었던 거죠.
홍대앞 철길자리 무허가건물. 시장으로 기능했던 서교동 골목길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스트리트 H
서교365전경. 365번지 건물을 둘러싼 인근 건물에 상업공간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오늘날 홍대앞 골목길에 길게 이어진 건물과 공원시설은 당인리 발전소로 이어지던 철길의 흔적이다. ⓒ서울역사박물관(좌), 서울특별시 아카이브(우)
일부는 졸업하고 나서도 홍대앞을 떠나지 않고 근처에서 미술학원을 하거나 술집, 카페를 차렸어요. 디자이너, 예술가, 문인, 출판사, 이런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뒤섞였고 거기에 인디 음악이 또 들어오게 돼요. 제가 생각하는 ‘홍대앞 DNA’는 그런 비정형의 열정들이 모이면서 만들어졌습니다.
홍대앞 일대 야경. 서울 변두리 동네가 도시 서북부 최대 규모 거점지역으로 성장했다. ⓒ서울역사박물관
홍대앞 라이브 음악 공연장. 정해진 테마 없이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포스터와 스티커들이 마음대로 모여 홍대앞 공연장 특유의 분위기를 만든다. ⓒfrice
그랬던 홍대앞이 젠트리피케이션을 맞이하며 많은 게 변했습니다.
상권이 형성되고 자본이 밀려들어 오면서 작업실이나 소규모 원주민 가게들이 밀려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홍대앞’이 팽창하면서 <스트리트 H>도 문화적인 의미를 기준으로 ‘홍대앞’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따지면 홍대앞의 의미를 잘 볼 수가 없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 합정, 망원, 연남도 홍대앞으로 규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창간호부터 홍대앞 지도도 매달 발품 팔아 조사하고 꾸준히 수정해서 내고 있는데요. 그 지도에는 아직도 편의점, 스타벅스 이런 건 넣지 않고 있어요. 프랜차이즈는 홍대앞 문화가 아니라는 고집이죠.
2024년 홍대앞 지도. 오늘날 홍대앞의 개념적 범주는 연남동과 서교동까지 넓게 확장된다. ⓒ스트리트 H
홍대앞 지도지만, 길 찾기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는 지도라고 볼 수 있겠네요.
단순한 위치 정보는 스마트폰으로 찾아도 되는 정보지, 우리의 역할이 아니라는 거죠. 새로 생겼다고 무조건 넣는 게 아니라 홍대앞다움이 있어야 지도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위치” 정보는 자연스레 “존재” 정보로 승화됩니다.
더 이상 길 찾기가 아니라 존재의 역사가 기록되는 것이죠. 조선시대 한양 고(古)지도의 용도가 위치정보를 넘어 당시 사회상을 짐작하게 해주는 소중한 정보이듯이 말입니다. 예전에는 홍대앞에 이런 의미있는 공간이 있었구나! 하는 기록이죠.
2009년 홍대앞 지도. 오늘날 자취를 감춘 홍대앞 공간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다. 2024년 지도와 비교하면 연남동, 동교동, 상수동, 합정동 방면 공간정보가 적다는 점이 눈에 띈다. ⓒ스트리트 H
1988년 홍익대학교 입구 지도. 홍익대학교 정문을 기준으로 ‘T’자 형으로 뻗어나가는 문화지형을 확인할 수 있다. ⓒ스트리트 H
홍대앞에는 다양한 동기의 창업이 많아요. 생계형, 낭만형, 문화공간으로서의 자기 선언 등. 옛날에는 새로운 곳이 생기면 다 가 봤는데 지금은 홍대앞이 너무 넓어져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 다른 곳은 딱 알겠어요. 그런 곳에 가서 손님으로서 쥔장에게 슬쩍 물어봅니다. 뭐 하시던 분이세요? 그러면 “얼마 전까지 방송국 PD 했었는데 20대 때는 홍대앞에서 좀 놀았어요. 그때 참 재밌었던 기억입니다. 그러다 이제는 벌 만큼 벌었으니 이 동네에서 뭔가 재밌는 거 해보고 싶어 왔어요.”라는 답이 나와요.
전직이 수상한 사장님이 많은 곳, 이게 홍대앞이었죠.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지금도 홍대앞뿐이라 봅니다.
‘홍대앞’의 범위가 크게 넓어졌습니다. ‘홍대앞’은 어디까지일까요? 최근 주목하고 계신 곳은 어디인가요?
지금은 합정, 망원까지도 이어졌고, 망원 쪽에서 더 가면 상암동 DMC가 있는데, 상암은 그쪽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놀 만한 곳은 없어요. 그러니 망원, 합정을 거쳐 홍대앞까지 나오게 되는 거죠. 홍대앞이 아직 유지되는 것은 이렇게 밀려 나갈 지역이 있는 지리적 특수성이 한몫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수동, 용강동까지는 잘 모르겠고요. 광흥창 쪽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상수역에서 한 정거장이기도 하고 걸어가다 보면 신촌 방면으로도 이어질 수도 있고요.
TALK2. 아카이브
성환님이 애정하는 ‘홍대앞 스팟’이 궁금합니다. 홍대앞을 가장 오래 관찰하신 분은 어떤 장소를 가장 좋아하시나요?
서교플라자 호미화방 있는 365번지 골목의 ‘bar 다’입니다. ‘bar 다’는 초대 사장이 운영하던 시절에 아르바이트하던 점원이었던 분이 가게를 물려받았다고 해요. 현존하는 ‘홍대앞’ 바 중 가장 오래됐을 겁니다.
지난달에 생긴 가게가 다음 달에 문을 닫는 홍대앞 상권에서 아직도 영업하는 게 대단하죠. 이곳을 만든 초대 사장은 얼마 전 광흥창에서 ‘오후 네 시’라는 바를 만들었고 그분의 아드님은 상수역에서 ‘상수리 bar’를 아버지에게 비용 지불하고 인수하여 독립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트리트 H는 이런 서사와 스토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젊고 잘생기고 돈 있는 사람이 와서 “저희가 홍대앞 F&B 씬을 바꿔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곳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요. 자본은 언제든 이익을 위해 빠져나갈 가능성이 큽니다. 이태원 경리단길 같은 경우가 아주 대표적인 사례죠.
주차장길 쪽에서 바라본 ‘bar 다’ ⓒ서울역사박물관
2024년 8월, 같은 곳에서 바라본 ‘bar 다’ ⓒ스트리트H
‘bar 다’ 내부(좌), 2013년 3월 ‘Bar다’ 벽에 남긴 낙서(우) ⓒ서울역사박물관, 스트리트 H
광흥창 ‘오후 네 시’ 오너 김명렬님. 그는 여전히 홍대앞 어딘가에서 바를 지키고 있다 ⓒfrice
사라진 ‘홍대앞 스팟’중 우리가 기억해야 할 곳을 전해주세요.
1988년 지금의 상상마당 대각선 건너편 약국 자리에 한국 최초의 전자 카페가 있었습니다. “일렉트로닉 카페”. 30대의 안상수 디자이너와 그의 친구 금누리 교수가 함께 만든 공간입니다. 아주 재미난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료, 사진도 남아있지 않아서 많이 당혹스러웠습니다. 미국과의 팩스 교류 아트전, 희귀했던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가 항상 틀어져 있던 TV. 전화 모뎀이 연결된 AT 컴퓨터 등. 기억이 생생한데도 기록 사진이 없었습니다. 홍대앞의 역동적이고 실험적인 활동, 공간의 기록이 없는 것에 놀랐어요. 그것이 <스트리트H>를 만드는데 일정 부분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국내 최초의 전자카페 일렉트로닉 카페. 1988년 지금의 상상마당 대각선 맞은편에 수상한 곳이 생겼다. 쇼윈도우에는 기울어진 철제 캐비넷이 놓여 있던 이곳은 안상수, 금누리 두 사람이 의기 투합해 만든 공간이었다. LA와의 FAX통신을 이용한 전시회가 시도됐던 곳. 일렉트로닉스가 있던 자리는 시간이 흘러 2014년에는 부동산이 들어섰고 2024년 8월에는 약국이 됐다. ⓒ스트리트 H
별책부록 스트리트 H 발행인이 추천하는 ‘홍대앞 스팟’ 5
✔비하인드 (2001~)
홍대앞 카페 문화를 이끈 장수 카페. 다양한 직업의 4인 공동 사장이 삼거리 포차 뒷 골목에서 시작. 현재는 주차장길로 이전. 손님들 요청으로 카페의 선곡 리스트를 담은 컴필레이션 앨범도 발매했었던 곳.
ⓒfrice
✔ 곱창전골 (2002~) 음악주점. 호미화방 근처 골목에서 시작한 홍대앞 대표 LP바. 먼저 입주한 지하의 호프집 사장님이 업종충돌을 염려하자 곱창전골집을 하겠다며 시작했다고. 내한공연을 오는 해외 뮤지션들이 밤에는 여기에 모인다.
ⓒfrice
✔ 클럽 빵 (2004~) 1994년 이대 후문에서 시작해 홍대앞으로 옮겨온 라이브 클럽. ‘모던록의 산실’이라고 불리며 포크록, 싱어송라이터에 대한 편애 아닌 편애가 있는 곳. 그런가 하면 신인밴드들에게도 기회를 주는 홍대앞 대표적 무대.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본 모습. 홍대앞 창작자들이 상권 내 지하건물을 이용해 소극장 운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frice(위), 서울역사박물관(아래)
✔ 이리카페 (2004~) 허클베리핀 드러머 출신 쥔장이 서교동 무과수마트 지하에서 시작해서 2009년 10월 상수동으로 이전. 상수동의 동네사랑방. 다양한 인물들이 이 공간에서 공연과 발표, 인터뷰를 한 것도 매력.
ⓒfrice
✔ 앤트러사이트 (2010~) 신발 만들던 공장을 로스터리 카페로 만든 곳. 크레인, 바닥, 벽돌벽 등 예전 건물의 요소들을 최대한 유지한 인테리어가 새롭다.
ⓒfrice
😈 장수 로컬 매거진 <스트리트 H>. 홍대앞을 오랜 기간 관찰하며 단순한 지리 정보나 뻔한 공간 정보가 아닌, 역사, 문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화하는 ‘홍대앞다움’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
서브컬처를 향유하는 사람들의 숨겨진 성지, 무언가에 푹 빠진 사람들이 연 독특한 가게가 끊임없이 홍대앞을 둘러싸는 이유를 엿볼 수 있었는데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홍대앞을 규정하는 기준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지만, ‘내 것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의지 혹은 자본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자유분방함’ 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앞으로의 홍대앞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까요? 지금의 우리가 기억하는 홍대앞 그 모습으로 계속 남아있을까요?
frice 사무실(마포구 상수동)에는 주변의 카페에서 가져온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홍대앞 지도가 붙어있다. <스트리트 H>는 홍대앞의 다양한 변화와 문화예술 활동, 홍대앞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동네문화 잡지로, 매월 다른 주제의 색다른 그래픽과 유용한 정보를 담은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함께 무료 배포한다. 최근 는 창간 15주년(2009년 6월 창간)을 맞이했고, 인포그래픽 포스터도 2024년 현재 100종 이상 발행하였다. 왜? 누가? 이러한 수고를 15년 동안이나 하고 있을까?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최근 발행된 데스크 램프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실제 조명, 그에 담긴 스토리를 한번에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frice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대표이자 <스트리트H> 공동 발행인입니다. 2003년 창업할 때 회사명은 ‘디자인 스튜디오 이공삼’이었어요. 규모를 키우지 않고 하고 싶은 일 위주로 하고 싶어 ‘디자인 스튜디오(한 칸짜리 작은 공간)’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한국의 현실에서 디자인이라는 용어의 쓰임이 너무 오염되어 버렸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추구하려는 활동, 작업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더이상은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16년 회사 명칭에서 ‘디자인 스튜디오’란 단어를 과감히 빼고, ‘이공삼(203)’ 만 남겼습니다. 지금은 ‘인포그래픽 연구소’라는 부분을 더 부각하고 있어요.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 입구의 쇼룸 공간. 인포그래픽 관련 해외 서적들과 북큐레이션이 전시되어 있다. 이공삼의 특징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이공삼, frice
이공삼 인포그래픽연구소의 모토는 ‘직관적 이해 만들기’입니다. 또 하나는 ‘세상 모든 지식의 시각적 지혜화’입니다. 저는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열심히 외웠다가 시험 보고 나서 잊어버려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것이 ‘지식’. 살아가는데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지혜’. 불은 뜨겁다, 날카로운 것엔 베인다, 생명체는 존중해야 한다. 같은 것이죠.
요즘은 우리 회사, 또는 나 개인의 브랜딩은 어떤 걸까 고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007 영화 속에서 악당이 페르시아고양이를 품에 안고 세계 정복을 읊조리는 것처럼, 저도 우리 사무실 고양이 ‘모모 부장’을 끌어안고 재미나게 저희의 야망을 피력합니다.
이공삼의 실세인 고양이, 모모부장과 눈싸움 한 판을 벌이는 장성환 대표 ⓒ이공삼
TALK THEME 1. 인포그래픽 포스터와 ‘K’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포스터 중에서 한국 문화를 주제로 한 내용이 눈에 띄었습니다. 한국 문화를 다루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한국’이란 주제는 포스터 주제들 전체로 보면 일부분이에요. 지금까지 만들었던 한국 문화 관련 인포그래픽들은 비빔밥, 소주, 김밥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문화적으로 유니크한 걸 제작하려다 보니, 그중에 한국적인 소재가 자연스럽게 포함된 거죠.
2015년 8월, ‘한국국제교류재단’ 주최로 “맛 MAT – 한국의 멋과 맛”이라는 전시회를 했었어요. 그때 저희가 김치, 막걸리, 소주 등 대형 인포그래픽 설치 작업으로 참여했는데요. 주최 측에서 비빔밥도 추가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래서 스터디를 해보니 ‘비빔밥’이 아니라 ‘섞어 먹는 밥’에 더 가까운 거예요. 예를 들면 국밥, 그리고 삼겹살 구워 먹고 남은 재료 다 넣고 섞어 먹는 것, 찬물에 밥 말아서 섞어 먹는 것 등등. 일본에도 오차즈케가 있긴 하지만, 일본은 기본적으로 섞는 것을 싫어해요. ‘그렇게 예쁘게 해놓은 걸 왜 섞느냐. 미적으로 추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한국은 달라요. 한국 대표 비빔밥의 전형은 전주비빔밥이겠지만, 일상 속 서민의 식탁에서는 아무거나 넣어도 되잖아요. 자기 기호대로 찬밥에 열무김치를 비비거나, 치즈 좋아하면 치즈를 넣는 식이죠. 김밥도 마찬가지예요. 한국의 이런 뒤섞이는 문화가 재밌는 포인트라고 생각해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맛 MAT – 한국의 멋과 맛” 전시에서 공개된 한국 음식문화 인포그래픽 디자인_섞어먹는 밥 디자인 ⓒ 이공삼
한국 문화 외에도 다양한 주제를 다루시는데요. 포스터의 주제는 매달 어떻게 선정하시나요?
저는 ‘그냥’이라는 단어를 싫어해요. 매사에 ‘그냥’ 하지 말자고 강조합니다. 제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칠 때 ‘그냥은 금기어였습니다. 그냥은 부모 자식 사이나 연인 사이에서만 쓸 수 있는 단어라고 말해 줍니다. 모든 게 원인과 결과인데, 특히 디자인 프로젝트는 매우 공적인데 클라이언트에게 ‘그냥’ 디자인했다는 말을 쓸 수는 없지 않나요?
그리고 ‘나열’했다는 것도 말이 안 돼요. 공깃돌 5개를 던질 때도 모여있게 할지, 떨어뜨려 놓을지, 의도를 갖고 던지잖아요. 그런데 자신의 디자인에 대해 ‘그냥 나열했다’고 하는 건 사전에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는 자백과 다름없는 거죠. (웃음)
그래서 저희는 포스터 주제 결정을 위해 구글 시트로 시의성, 정보성, 심미성 등 기준들을 세팅해 놓고 아이디어를 다양하게 모읍니다. 개인의 취향은 중요하지만, 이런 걸 생산하는 데는 개인의 취향에만 치우치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기준들이 더 중요해요.
아이디어는 인턴부터 대표까지 함께 생각을 모읍니다. 그러고 나서 합계를 내보기도 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검토합니다. 때로 어떤 주제는 합계 총점보다 시의성이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주제 선정과 같은 개념적 의사결정도 분석적으로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이공삼
시의성이 중요했던 작업은 어떤 것이 있나요?
2019년에 작업했던 1919년 ‘3.1 만세운동 100주년’과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 인포그래픽 포스터입니다. 누리호 발사에 관한 것도 시의성을 고려한 경우고요. 이런 경우는 시의성도 염두에 두었지만, 눈앞의 이익보다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무’를 더 고려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민 판다 푸바오 포스터는 후이바오, 루이바오가 갓 태어날 무렵에 발행했는데 벌써 중국으로 돌아가 버렸네요.
역사적 시의성을 고려한 주제 선택 사례. 1919년 일어난 3.1운동과 바우하우스 설립 100주년 기념 인포그래픽 ⓒ이공삼
그리고 의도적으로 쌓아가는 것들도 있어요.
예를 들면 2016년에 상수동의 ‘PACTORY’라는 공간은 두성종이 출신 동업자와 제가 만들었어요. 디자이너들이 다양한 종이를 만져보고 수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인데요. 그곳에서 진행될 워크숍의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오픈 전 몇 달에 걸쳐 미리 실크스크린, 리소그래피, 레터프레스 등 수작업으로 하는 디자인 제작 시리즈를 만들었죠.
장성환 대표와 두성종이 출신 동업자가 함께했던 공간. 상수동 PACTORY. 홍대앞 출판관계자 및 디자이너, 그리고 전국의 디자인 전공 대학생의 성지가 되었다 ⓒfrice
입구로 들어가는 계단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인포그래픽 포스터 PACTORY가 오픈하기 전부터 이 공간에서 개최될 수작업 워크숍을 위한 인포그래픽 포스터를 제작했다 ⓒfrice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포스터 디자인 프로세스가 궁금합니다.
‘기획개요 마인드맵’을 저희만의 프레임으로 만들어 놓고 그걸 가장 먼저 채웁니다. 저희는 이걸 나침판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여기에는, 우리는 ‘무엇을’, ‘누구를 대신해서’, ‘타겟 누구에게’, ‘왜 저들이 이걸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등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어요. 겉보기에는 너무 간단한 방법이라서 사람들이 의구심을 가지기도 하는데, 정말 효과적이고 중요한 단계입니다.
교과서 같이 텍스트의 단락들로 계속 이어지는 정보를 이공삼에서는 ‘리스트형 정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런 형식의 정보는 눈에 잘 안들어오기도 하고 빠른 이해가 어려워요. 그래서 우리는 리스트형 정보를 반드시 마인드맵으로 정리합니다. 정리할 때 유의 사항은 문장을 *‘개조식’으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정보의 **’하이어라키’와 카테고리가 잘 보이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죠.
이후, 본격적으로 메인 마인드맵을 진행하면서 수많은 자료를 모으다 보면 팀원들끼리도 이게 우선인지, 저게 우선인지 헷갈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 나침판으로 다시 돌아가서 함께 살펴봅니다. 그러면 누가 타겟이고 왜 이 정보를 만드는지 환기가 되고 합리적인 의견일치가 가능해 집니다.
*개조식: 부호(또는 번호)와 들여쓰기를 활용해 문서의 구조를 시각화한 형식. 글을 쓸 때, 글 앞에 부호나 번호를 붙여가며 중요한 요점을 정리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보고서나 기획서는 서술식보다 개조식으로 쓰는 것이 이해가 빠르다.
**하이어라키: 정보의 위계/계층. 마인드 맵에서 정보의 중요도를 시각적으로 정리할 때 중요한 기준. 이와 함께 정보의 갈래를 정리하는 카테고리제이션도 중요하다.
인포그래픽 제작 과정의 첫 번째. 기획개요 마인드맵 ⓒ이공삼
인포그래픽 포스터 한 장에 많은 정보와 그래픽 작업이 필요한데요. 작업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아요.
<스트리트H>의 인포그래픽 포스터는 2015년 6월부터 한 달에 한 종씩 제작하고 있어요. 매달 디자인 팀에서 한 명씩 돌아가면서 담당자가 됩니다. 때로는 서로 두레처럼 도와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인 전체 진행(주제 선정부터 마인드맵, 자료조사,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은 담당자가 메인이 되어서 진행해요. 특이한 점은 주제 기획, 조사, 디자인까지 디자이너가 완결한다는 것입니다. 인포그래픽에서 편집팀의 역할은 교정, 교열과 추가 의견 정도입니다. 텍스트 콘텐츠 가공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디자이너들을 위해 마인드맵을 활용하게 된 것이죠.
텍스트를 구조화하는 마인드맵 단계를 거치면 ‘내러티브 다이어그램’ 단계로 넘어갑니다.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시각화한 인포그래픽. 많은 표절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공삼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은 뭔가요?
‘서술적인 정보 관계 구조를 표현하는 다이어그램’이란 의미입니다. ‘내러티브 다이어그램(Narrative Diagram)’이라고 표현한 건 일반적인 다이어그램과 구별하고 싶어서였어요. 해외 컨퍼런스 발표 때도 영어로 ‘내러티브 다이어그램’이라고 표현합니다. 나중에 물어보면 그런 용어를 처음 듣지만,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제가 만든 이 용어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웃음) 우리가 만든 단계가 인정된 느낌이라서요.
아이콘을 활용해 직관적으로 정리한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디자인 프로세스 ⓒ이공삼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일상생활에서도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이공삼의 인포그래픽 프로세스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기획개요 마인드맵 작성 -> 텍스트 정보 구조화 -> 시각적 정보 구조화
이 중 ‘텍스트 정보 구조화’가 중요합니다. 잘 구조화된 텍스트 정보를 시각적으로 발전시키면 기억에 오래 남는 정보 패키지가 됩니다. 그러니 학생들의 책 읽기 등에 활용하면 아주 효과적이지요.
초등학생 대상 워크숍의 결과물. 초등 3학년 남학생이 정리한 삼국지 인물 관계도 마인드맵 ⓒ이공삼
올해 초, 선유도서관과 함께 초등 3, 4학년 대상으로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내용은 마인드맵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구조화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막연하게 좋아하는 이야기를 고르고 좋아하는 이유, 스토리라인, 등장인물들의 관계, 이야기의 공간적 배경 등을 마인드맵을 통해 정리하게 했어요. 몇 주 동안 계속 질문과 대답을 하며 마인드맵으로 정리했습니다. 그 결과물을 보면 정말 초등학생의 것이 맞을까 할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냥 읽는 책은 쉽게 잊혀집니다. 저는 이것을 텍스트의 휘발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마인드맵으로 구조화하는 과정 동안, 그리고 완성된 것을 몇 번 반복해서 들여다 보면 기억 속에 아주 오래 남게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게 되는 셈이니 다양한 분야에서 도움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인포그래픽 디자인을 진행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저는 좋은 인포그래픽을 삼각형으로 비유해서 얘기합니다. 정보가 잘 전달되기 위해서는 ‘유익한 정보’ ‘이해하기 쉬운 정보’ ‘매력적인 정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야 해요.
예를 들어 교과서는 유익한 정보이지만 이해하기 쉽지 않죠. 그래서 참고서가 이해하기 쉽게 해주려고 밑줄, 형광펜, 다이어그램들을 사용하면서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에도 매력은 없어요. 참고서 재밌다고 하는 학생들은 드물지 않을까요?
그런데 학습 만화는 읽지 말라고 해도 식탁 앞에서도 손에서 놓지 않잖아요. 이유가 뭘까요. 내용은 같지만 이해하기 쉽게, 시각적으로도 재미있게 보여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매력이고 전달의 핵심입니다.
좋은 인포그래픽의 3가지 조건을 보여주는 다이어그램 ⓒ이공삼
매력적인 정보에 인포그래픽의 일러스트 스타일이나 인터랙티브 방식 같은 것도 중요할까요?
모든 스타일이나 형식은 기획개요 마인드맵을 통해 설정됩니다. 누가 어떤 타겟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그 내용에는 어떤 방식이 적합할까? 인쇄물도 팜플렛, 포스터 등 형식이 다양하고 때로는 *모션 인포그래픽,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이 적절할 때가 있어요. 즉흥적인 판단이 아니라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2018년 7월 경향신문과 함께 작업했던 “평양냉면”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모션 인포그래픽 : 정보를 영상화 하여 제공하는 인포그래픽. 정보의 스토리화, 다양한 강조점 사용, 사운드 효과 등의 장점이 있다.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 : 인터랙션을 이용하여 정보를 제공하는 인포그래픽. 모션 인포그래픽의 장점을 포함하면서 수용자의 정보 수용을 능동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
신문의 큰 지면을 활용해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와 신흥 두 갈래를 한 면에 보여주었다. ⓒ이공삼
평양냉면 인터랙티브 아티클 작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언론재단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언론 종사자들이 묻습니다. 종이 신문의 미래가 어둡고 뉴미디어 시대에 적응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큰 신문을 어떻게 조그마한 스마트폰에 집어넣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 많았어요.
그런데 왜 꼭 그래야만 할까요? 종이 신문은 신문대로 지상 최대의 판형이에요. 손으로 만지고 넘겨 보는 경험과 물성이 있죠. 그에 반면 스마트폰은 종이가 갖지 못하는 모바일, 인터랙티브함이 있는데 왜 굳이 종이신문을 스마트폰 안에 넣어야 하냐는 거죠. 미디어의 특성에 따라 다른 형식의 콘텐츠를 담아내는 것이 필요한거죠.
그래서 경향신문에 평양냉면 지면 인포그래픽과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을 동시에 제안했어요. 같은 주제지만 지면에서는 서울의 평양냉면 노포와 신흥, 두 갈래로 큰 지면에서 보여주고 인터랙티브 쪽에서는 스마트폰을 통해 재료 하나하나를 직접 선택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냉면집을 찾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평양냉면에 맨스플레인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중년 아저씨들의 잔소리죠.(웃음) 그러나 인터랙티브를 통해 누구나 마음 편하게 자신의 취향에 맞는 평양냉면을 고를 수 있게 한 거죠. 인포그래픽이 수직적인 문화와 정보를 수평적으로 개선했다고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사용자는 질문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평양냉면 취향을 알아볼 수 있다. 디지털 디바이스에서 상호 작용하며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인터랙티브 인포그래픽 콘텐츠 ⓒ이공삼, 경향신문
지금까지 작업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작업은 무엇인가요?
역시나 3.1운동 100주년 기념 프로젝트예요. 자체적으로 제작한 이 3.1운동 인포그래픽을 가지고 임시정부기념관 설립위원회에 접촉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인포그래픽도 제작했어요. 임시정부가 3.1운동 이후 영향을 받아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가지고 설득한 거죠.
3.1절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3.1절 전후에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인과관계로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정확히 대답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요. 역사를 점(點, dot)으로 암기하고, 시험으로 접하며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3.1절을 단순한 숫자나 하나의 인물이 아닌 ‘인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떤 사건들이 영향을 미쳐 3.1운동이 준비되었나. 준비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선언문의 작성, 선언문의 의미 등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국내외적 변화까지 담아냈습니다. 눈으로 흐름을 따라가면 책 1권 이상의 정보를 쉽고 흥미롭게 이해하고 기억에 담을 수 있습니다. 이 포스터는 역사교사 모임에도 배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저는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 중심의 직업인 것 같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회적 책무를 가지고 눈앞의 이익과 상관없이도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공삼 자체프로젝트 3.1운동 ⓒ이공삼임시정부수립기념사업회 협업 프로젝트 ⓒ이공삼
TALK THEME 2. 인포그래픽 디자이너의 세계
해외에서 디자인 어워드 수상과 다양한 활동을 많이 하고 계시는데요. 해외와 한국 인포그래픽 디자인의 차이를 느끼시나요?
그래픽 디자인의 차이는 없다고 봅니다. 수신자가 누구고 발신자가 누구냐에 따라 차이가 있는 거겠죠. 뉴스 미디어인가, 흥미 위주 콘텐츠 미디어인가, 출판사인가 이런 차이겠죠. 그리고 회사의 규모, 예산이 미치는 부분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해외 어워드는 “자기 증명”이 필요했기 때문에 시작했습니다.
클라이언트들이 인포그래픽 분야가 낯설다 보니 이공삼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신뢰할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국내외 인포그래픽과 디자인 공모전에 응모했고 다수의 좋은 성과를 내었습니다. 그랬더니 클라이언트들의 시선이 바뀌더군요. 물론 우리 내부의 스탭들에게도 좋은 격려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공삼 사무실에 진열된 디자인 어워드 트로피 ⓒ이공삼
2019년 8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호세 디자인 교육 컨퍼런스. 장 베누아 레비(Jean-Benoit Levy, 프랑스 출신으로 미국 산호세에서 활동)와 보리스 코헨(Boris Kochan, 독일 뮌헨 활동) ⓒ이공삼
2020년 1월 홍콩에서 만난 마르셀로 두할데(Marcelo Duhalde, SCMP_가운데)와 마르셀로 카세레스 아빌라(Marcelo Cáceres Avila, 칠레_왼쪽) 이공삼 인포그래픽 연구소는 해외 디자이너와 교류하며 주목하게 된 곳으로 해외 미디어 SCMP(South China Morning Post)를 꼽았다. ⓒ이공삼
또 한 가지는 해외 공모전 수상을 통해 해외에서 이공삼의 인포그래픽이 알려지게 되었고 워크숍 또는 컨퍼런스에 발표자로 초대되는 경우가 생겼습니다. 요즘도 디자인 컨퍼런스나 어워드에서 만난 해외 인포그래픽 디자이너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그들의 작업도 관심을 갖고 보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인포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 비해 적어서 그런지 만나면 따듯한 형제애 같은 게 있어요.
수많은 인포그래픽이 있지만 핀터레스트에서 인포그래픽을 검색해 보면, 이공삼을 비껴갈 수가 없어요. 우리처럼 100개 이상 일관된 형식으로 만들고 있는 곳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표절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공삼은 상관하지 않고 계속 이런 작업을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 지식을 소비하고 있어요. 사람이 지식을 교환하는 첫 번째 방식은 입말과 글말일 텐데요. 인간의 언어는 기차처럼 선형적이어서, 처음과 끝을 다 연결해야 메시지를 온전히 전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인 개념, 논리가 복잡한 정보일수록 정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워지죠.
이공삼은 문자언어의 한계를 인포그래픽 디자인으로 극복해 왔습니다. 수십년 동안 인포그래픽을 연구해온 디자이너가 알려주는 ‘복잡한 지식을 척 보면 딱 알아보도록 만드는 방법’ 어떠셨나요?
디자인의 힘으로 문자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분들에게 이번 인터뷰가 많은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왼쪽 이종희 님, 오른쪽 이병수 님. 부부가 47년 동안 이태원에서 자수 가게를 운영중이다. ⓒfrice
서로를 소개해주시겠어요?
이종희 이병수는 국일사 사장님인데요. 이름 자수 전문가입니다. 손글씨를 잘 쓰고요. 영문 필기체를 아름답게 새깁니다. 미국대통령이 한국에 오면 맞춤양복을 만든다는 거. 혹시 알고 계세요? 이웃가게인 썬양복점이 미국대통령 양복맞춤을 자주 했는데요. 양복에 이름 새기는 건 꼭 국일사로 오더가 와요. 레이건부터 바이든까지 이병수가 새겼습니다.
이병수 이종희는 아내이자 동료입니다. 사람들이 들고 오는 그래픽 자수 시안을 직접 새깁니다. 이병수가 그래픽 시안의 테두리를 그려서 본을 뜨면, 이종희가 그림을 쓱 보고 옷 위에 그림을 척 새겨요. 한 번 쓱 본 그림을 손자수로 만드는 건 제 생각에 우리나라에서 이종희 밖에 못해요.
01. “흑백사진으로 본 7080 이태원 전성기”
이병수 옛날 얘기하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사진을 꺼내봤어요. 한 번 볼래요? 당시 테일러 샵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이런 모습 기억하는 사람은 진짜 이태원 토박이죠.
현재의 우리는 모르는 옛날의 이태원. ⓒfrice
두 분은 언제 이곳에 터잡으셨나요?
이병수 우리 둘 다 1974년. 나이는 각자 20대 초중반 일 때네요. 저는 동두천에서 군부대 앞 자수가게에서 배웠어요. ‘국일사’라는 이름은 제가 일 배웠던 가게명을 딴 겁니다. 내 옆에 계신 분은 용산역 근처 미싱자수학원에서 미싱을 배웠지요. 아내는 이태원 오기 전에 다니던 미싱학원에서 수업을 맡았던 자수 선생님이었어요. 실력은 전국기능올림픽에 나갈 정도였고요. 그렇게 전국 각지에서 각자 배워온 걸로 이태원 시장에 자리 잡았던 기술자가 많아요. 그때 미싱 기술자를 고용한 사업체가 10곳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대부분 은퇴하거나 그만뒀지만요.
이종희 우린 이웃 가게 친구였어요. 그러다 어느 날. 옆에 있는 이병수 씨가 날 쫓아다니기 시작했어요(웃음). 우리 남편이 젊었을 땐 훤했거든요. 미소도 맑고 선했어요. 만나다 보니 79년 11월에 결혼했네요.
7080 이태원 분위기가 궁금합니다.
이종희 80년대부터는 이태원에서 재봉틀로 할 수 있는 사업을 여러 방면으로 시도했었어요. 킹샵이라고 직원을 서너 명 뽑아다 시장건물에서 손자수 전문샵을 하기도 했는데, 2009년부터 하던 사업 다 접고 국일사만 집중하고 있어요. 우리 둘이서만 일한 지는 이제 20년 조금 넘었어요.
ⓒfrice
이병수 이건 용산구청에서 녹사평역 넘어가는 로터리인데요. 여기에 콜트 장군 동상이란 게 있었던 시절이에요. 6.25전쟁 때 미군 사령관인데 이태원 랜드마크였죠.
사진 보면 이태원이 서울이 아니라 미국 도시 같아요!
이종희 지금 평택으로 미군 기지를 옮겨서 뜸한데, 당시 이태원은 정말 미국 사람이 많았어요. 주한미군 가족도 많이 머물렀죠. 시장에서도 한국생활잡화보다 미군이나 미군 가족이 살 법한 물건을 많이 팔았지. 진짜 밍크는 아닌데, 밍크털처럼 부들부들한 담요가 그때 많이 팔렸어요. 양복점이나 빅사이즈 옷가게도 그런 영향이란 말이죠.
우리는 주한 미8군 계급장 같은 걸 직접 해줬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정겨웠던 시절이에요. 어느 미군이 양말 가게 단골이면 ‘헤이~싹쓰맨~’하면서 놀러 와요. 7월 미국 독립기념일에는 이태원 사람들이 용산 미군기지에 초청받아서 가족끼리 파티도 하고 그랬지. 칠면조도 먹고 케이크 떠서 나눠먹었던 시절이 있었어요.
주변의 기물들은 이야기와 함께 과거를 상상하게 한다. ⓒfrice
기억에 남는 당시 단골손님이 있나요?
이종희 1984년쯤 일인데 이태원 양복점 단골손님이던 장교가 퇴역 앞두고 단골가게 사장님들을 싹 다 모았어요. 덕분에 한국에서 즐거웠다고. 송탄에 같이 가자고. 기념으로 경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그래서 이웃 가게 사람들이랑 미군 비행장 들어가서 아산만 바다 위를 40분쯤 비행했죠. 옛 이태원 시장 단골 손님이 우리에게 전했던 커다란 감사인사 였어요.
낭만이 있었네요. 영화 <탑건 : 매버릭> 엔딩 같습니다.
이종희 이태원이 미군이 다녔던 클럽이 있어서 그런지 거친 이방인이 많을 거란 오해가 있어요. 물론 그런 사람도 있죠. 오히려 이태원에서 만났던 미군은 대부분 겸손했어요. 군인이니까 기본적으로 듬직하지. 성격이 대체로 정직하고 가정적이라고 해야 하나? 특히 가족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런 젠틀한 사람을 손님으로 많이 만났던 거 같고. 영어도 덕분에 쉽게 배웠던 거 같아요. 복무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한테 우리가 양복 셔츠에 이름자수 많이 해줬어요.
이병수 70년대 이태원은 양복점이 유명했죠. 기술자를 고용해서 의류사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동대문이 도매시장이라면, 이태원은 까탈스러운 오더를 맞춰주는 소매시장이었어요. 특히 연예인 무대의상을 잘 만들었죠.
우리가 지금은 핸드메이드 자수 작업을 하지만, 양복점에서 맡긴 옷에 부속품이나 특별 오더 디테일을 달아주는 작업도 많이 했어요. 창고나 서랍장 열면 테일러샵에서 쓰던 금장 단추나 옛날 실같은 게 아직도 있어요. 여기 보세요.
가림막 뒤에 잠들어있던 부자재 진열장. 함에 들어있는 부속품이 반짝거린다.ⓒfrice
세상에! 이건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하셔야 하는 유물인데요!
이병수 이거 다 가져가셔도 될 거 같아요.(웃음)
이종희 의류는 집단 제작이에요. 양복을 테일러샵 한곳이 다 만드는 게 아니거든요. 단추나 실같은 부속품을 팔거나 자수 집처럼 보조 작업을 해주는 가게가 나란히 움직여요. 그러다 보니 자수하는 사람은 별일을 다 맡아요. 우리는 매번 다른 자수를 놔야 하잖아요. 해봤던 자수는 더 잘해야 하고, 못 해본 작업은 하면서 느는 거죠.
ⓒfrice
이병수 우리 월급이 1970년대 당시 45,000원입니다. 당시 말단 공무원 월급이 25,000원이고 하숙비나 월세가 5,000~6,000원 했을 거예요. 재능 있고 기술이 있으면 일한 만큼 보상은 받는 거죠. 지금은 의류사업이 크게 줄긴 했는데, 우린 미싱 기술이 있으니까 시대에 맞춰서 할 일을 해요.
02. “커스터마이징 서비스를 시작하다.”
ⓒfrice
한때 이태원 패션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시장에는 지금도 미국 워싱턴 상원 의원이 양복을 주문하는 테일러샵이 있더군요.
이병수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연예계에서 들어오는 창작 의류 제작도 이태원이 잘했어요. 그러다 강남 개발 끝나고 패션으로 청담이 뜨면서 완전 흐름이 넘어갔어요. 우리도 변해야 했지. 어쨌거나 유행이 변하고 상권이 변해도 자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이종희 대단했죠. 88 서울 올림픽 개최준비 때부터 한 풀 꺾였어요. 상표 도용 단속이 있었는데, 이후로 조금씩 상권 활기가 떨어졌지요.
지금은 디자인이나 저작권을 귀하게 다루는 게 상식이지만, 80년대 만해도 그런 인식이 희미했어요. 셔츠에 나이키 스우시 로고 그려달라면 그려주고, 체육복에 줄 세 개 그어서 아디다스처럼 만드는 게 대수롭지 않았던 거였죠. 올림픽 맞이하면서 외국인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들어오니까. 도시미관이나 미풍양속 점검한다는 이유로 짝퉁 의류 생산 단속이 심해졌어요. 문 닫아야 하는 가게도 많았어요.
가게 벽면 가득히 각종 네임태그, 자수 패치들이 빼곡하다 ⓒfrice
이종희 그래서인지 90년대에는 비보이팀이나 풋볼팀에서 단체 유니폼 손자수해달라는 요청이 많았어요. 당장 어제만 해도 오랜 단골 손님이 구멍 난 데님 재킷을 가지고 왔죠. 거기에 꽃자수를 넣어달라네요.
이제 우리는 상표 걱정 없는 자수를 하는 거죠. 손님들의 사적인 커스터마이징 서비스를 맡는 게 즐거워요. 국일사는 그래서 개인이나 팀을 위한 자수 작업을 전문으로 합니다.
어쩐지 가게 안에 가방이나 여행용 캐리어에 매는 네임태그가 많습니다.
이종희 항공사 직원이 국일사를 많이 찾아와요. 항공사 직원들은 동료랑 똑같은 액세서리 맞추는 게 문화인가 봐요.
이병수 얼마 전 ‘뽀빠이’라는 일본 잡지에서 취재하러 왔는데 국일사가 서울여행 추천장소로 소개됐어요. 서울 놀러왔다가 기념품으로 러기지 네임태그 하나 만들어 가는 곳으로요. 요즘엔 일본인 관광객이 크게 늘었어요.
ⓒfrice
이병수 종종 어학당 같은 곳에서 외국인 유학생들 네이밍 자수해달라고 가방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와요. 그 친구들은 말 배우러 온 거니까 사교적인 활동을 많이 하잖아요. 농구나 축구하면서 친해지고. 여행도 많이 다닐 테고. 뒤죽박죽 어울리다 자기 물건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거지. 거기에다 한글도 열심히 배우고 있잖아요. 자기가 원하는 글씨체로 메시지를 새기니까 너무 좋아하는 거야. 한국에서 뭔가 하고 있다는 실감이 나나 봐.(웃음)
이종희 한국에서는 물건 잃어버려도 비교적 잘 찾을 수 있잖아요. 외국에선 잃어버린 물건을 도로 찾기 힘들대요. 그래서 네임태그 아이템이 꼭 필요한 거죠. 문화 차이 때문에 생긴 수요라 재밌는 오더예요.
손자수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뭘까요?
이종희 일단 그라데이션. 컴퓨터 자수는 깔끔하죠. 그래픽도 정교하고. 그런데 그라데이션 구현은 컴퓨터로는 어려워요. 실 위에 실을 덧대는 자수가 아닌 거죠. 예시로 제가 예전에 작업한 스카잔 재킷을 보여드릴게요.
ⓒfrice
강아지 얼굴을 큼지막하게 등판에 새긴 건데요. 색을 유심히 보면 실 사이에 그림자 같은 게 져요. 컴퓨터로는 이런 음영을 낼 수 없어요. 엇비슷한 색으로 실을 바꿔 넣으면 입체감을 살릴 수 있거든요. ”검은 실을 수놓은 부분에 살짝 연한 파랑을 끼워볼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작업하는 거죠.
이병수 기술만 있으면 컴퓨터보다 빠르게 작업하는 경우도 있어요. 로고면 로고, 욕이면 욕.(웃음) 주문자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표현할 수 있고요. 뭐든 다 되니까 예뻐요. 가끔은 “맙소사… 굳이 이런 걸 꼭 새겨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요. 가게에 걸린 샘플 자수 패치는 컴퓨터 자수가 대부분이지만, 원한다면 손님이 원하는 방향에 맞춰서 따로 재현할 수 있어요.
ⓒfrice
이종희 다들 사연을 갖고 만들어 달라는 거니까. 예술작품이라 여기고 열심히 해요. 가끔 만드는 나도 깜짝 놀랄 디자인이 나오는 경우도 있어요. 다 만들고 나서 주인한테 연락하지만, 너무 잘 만든 작품은 가끔 되돌려주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요즘은 작업 마치면 조금씩 사진을 찍어서 기록을 남기고 있어요. 우리 가게에서 자수 작업하신 분들 따로 연락주시면 많이 반가울 거 같아.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쓰이고 있을지 궁금해요. 막내사위가 운영하는 국일사 인스타그램에 올려드릴 테니까 많이 연락 주세요.
자수 작업을 맡기는 비용이 궁금합니다.
이병수 러기지 태그에 들어가는 네이밍 자수는 보통 6,000원에서 12,000원까지. 의류에 새기는 그래픽 자수는 10,000원 부터 시작해요. 스카잔 재킷처럼 등판에 넓은 면적을 한 땀 한 땀 복잡하게 따는 작업은 직접 보고 견적을 내드리고 있습니다.
ⓒfrice
이종희 우리는 작업하느라 바빠서 SNS할 여력은 없어요. 대신 막내사위가 작품 기록과 대외소통을 맡고 있죠. 우리더러 “장모님 장인어른 가격 좀 더 올려 받으셔라!”라고 하는데…(웃음)
우리는 일단 열린 마음으로 손님이 맡긴 시안을 봐드려요. 가게가 좁기도 하고 사람이 몰리면 난감할 수도 있는데. 직접 와서 언제든 궁금한 거 물어보세요. 우리가 가게에 있을 때, 시간만 나면 다 직접 안내해드려요.
03. “내가 자수 디자인을 사랑하는 이유”
ⓒfrice
40년 넘게 하셨는데 혹시 일이 질리진 않으세요?
이종희 전혀! 실밥 잘 끊고 싶어서 손톱도 늘 예리하게 깎아요.(웃음)
일을 질리지 않게 만드는 의뢰가 종종 있어요. 예전에 제가 정조대왕 화성능행도를 본떠서 옷에 자수를 새겼었어요. 해마다 패션디자인과 사람이나 의류 공부하는 학생들이 공수가 많이 드는 시안을 들고 와요. 기억에 남는 졸업작품 중 하나였죠.
ⓒ국일사
조선 풍속화 보면 그림 속에 사람이 엄청 많잖아요. 인물 하나하나를 의류에 새겨서 그래픽 디테일로 새기는 작업이니까. 돈도 한두 푼 드는 게 아니거든요.
그때 나한테 졸업작품 맡긴 학생한테 당부했어요. 이런 자수는 완전히 똑같이 재현하는 게 아니라고. 너무 기대하면 곤란하다고. 나도 감각을 발휘해서 툭툭 건드리는 거라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100%에 도달하는 거군요.
이종희 맞아요. 손끝 감각에 집중하면 100%를 넘기도 해요. 중요한 건 우리가 신나는 거죠. 실은 뭘 쓸지. 색의 음영은 어디서 강조할지. 신나서 생각하다 보면 완성도가 100%에 가까워져요.
ⓒfrice
컴퓨터 자수 완성도를 100%라 치면, 손자수는 처음부터 100%를 할 수 없어요.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실밥을 뜯어서 다시 새긴다거나. 미리 연습하면서 감을 잡아본다거나 하면서 100%에 닿으려는 거죠.
90%에 그칠 걸 98~99%까지 만들면, 거기서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어요. 단박에 100%를 훌쩍 넘는 결과가 나오면 그 나름대로 예쁘고요. 같은 시안을 새겨도 아주 미세하게 달라요. 그게 사람이 다루는 재봉틀 자수의 매력이고 국일사 자수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해요.
국일사 전성기는 언제입니까?
이병수 벌이는 옛날이 더 나을 순 있는데, 지금도 좋아요. 50년 묵은 기계와 이제 한 몸이 된 느낌이에요. 우리는 각자 작업하는 자리는 서로 바꿔 앉지도 않아요. 20년 동안 길들인 작업환경 안에서 우리는 기술자로서 하고 싶은 걸 하는 거죠. 평면 안에 실을 새겨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내는 건 이제 자유자재입니다.
세상이 변하는 걸 느껴요. 이태원 옆 보광동에 폴리텍대학이 있잖아요. 기술 가르치는 학교에 사람이 제법 늘었더라고요. 우리가 수십 년 했던 손자수의 가치도 높아지는 거죠.
ⓒfrice
이종희 우리가 디자인한 결과를 손님이 마주했을 때, 그분들이 리액션을 한단 말이죠. 기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맡긴 자수가 자기한테 어떤 의미인지. 우리한테 신나서 말해줘요. 사람이 뭘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짜릿하잖아요. 소통하는 재미도 있고요. 아날로그의 매력이라 생각해요. 손님은 원하는 걸 내게 가져오고. 나는 디자인을 완성하고. 손님은 행복하고. 그뿐이죠.
기술 전수를 진지하게 고민하실 거 같아요.
이병수 저희가 이 일 배울 때만 해도 자수 기술자가 천대받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이젠 기술 가진 보람이 있고 자부심도 있어요. 자식들도 다 손자수 하나로 키웠고요. 올해 자수 배우고 싶다는 젊은 사람이 국일사를 찾아왔어요. 반갑긴 한데 일단 셋이 쓰긴 좁은 곳이잖아요. 그리고 우리 머신을 내 줄 순 없어서 일단 돌려보냈어요. 배우겠다는 사람도 재봉틀을 구해야하고, 우리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죠.
이종희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우리한테 용기를 줘요. 우리는 그냥 만날 하는 일인데 백화점에서 팝업스토어를 해보라고 하거나 지역축제에 초대해서 재봉틀로 공개 자수 작업을 해달라고 불러요. 속는 셈 치고 따라가면, 대부분 우리를 존중하고 즐거워하거든요. 여태까지 너무 이태원에서만 우물 안 개구리처럼 지냈나 싶네.(웃음)
이제 다들 남들과는 다른, ‘나만의 가치’를 추구하고 살아요. 그래서 우리 손자수 기술이 지금 세상에 더 어울리는 기술이 아닐까 싶어요. 배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환영해요. 잘 가르치고 싶어요.
😈 이 날, 이미지로만 보여드린 프라이스 로고를 보시고 이종희님은 즉석에서 펜으로 슥슥 밑그림을 그리고 자수를 놓아주셨어요.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옮기는 일은 많은 집중력과 관찰력을 요하는 작업입니다. 보고 그린 러프 스케치 위에 자수를 직접 놓는 장면은 좀처럼 볼 기회가 없었는데 정말 정교하고 빠르시더라고요!
국일사의 사장님들은 본인들을 기술자라고 하셨지만, 일평생 재봉틀과 한몸이 되어 작업을 해오신 모습이 장인의 경지라고 느껴졌어요. 요즘은 일도, 머무는 곳도 자주 옮기는 것이 당연한 시대가 되었는데요.
여러분은 일평생 하나의 직업을 가져야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세요? 그 일을 수십년 동안 같은 동네에서 하게 된다면 어떤 감정이 들 것 같나요?
디자인 업계에서 일을 시작한지 16년 차인 브랜드 디자이너입니다. 그래픽, 패션, 리조트, 브랜드 에이전시, 건설, 부동산 개발 회사 등을 거쳤는데요. 창작과 라이프 스타일에 관여된 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간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프로젝트를 열심히 했죠. 지금은 공간 디자인을 포함한 브랜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 맡았던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네이버에서 UXDP라는 채용 프로그램을 열었어요. 2010년대 전후 디자이너 지망생 사이에서 인기였던 인턴십으로 기억해요. 연수원에 인턴을 11일 정도 합숙시키고 경쟁형 도전과제를 내요.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죠. 저는 UXDP 참여를 마치고 브랜드팀에 배치됐어요. 그 당시 네이버는 디자인 조직을 크게 ‘브랜드/BX/UX’로 나눴죠. 브랜드팀은 네이버의 브랜드 전략과 각종 서비스를 관리했습니다. 저는 일부 서비스의 선행 개발에 참여했어요.
‘브랜드 경험Brand Experience’도 디자인하시는데요. 지금은 상식처럼 여겨지는 일이지만, 당시 한국에선 낯선 개념이었어요.
제가 입사했던 2000년대 후반, 디자이너 사이에 본격적으로 언급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이직하며 맡았던 실무가 브랜드 경험(BX) 디자인이어서 적응하며 조금씩 눈 떴던 거 같아요. 네이버를 떠나고 JOH.를 6년 정도 다녔습니다. 동료들이 이미 BX나 브랜딩이라는 개념을 실무에 접목시켜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리더들이기도 했어요. 덕분에 빨리 깨우쳤죠.
유인성 디자이너의 디자인 노트. 아이디어 구상은 빈 종이에 간단한 썸네일을 그리는데서 출발한다. ⓒfrice
브랜드 경험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이론서에 따르면
‘브랜드 경험은 정체성, 시각요소, 세계관 같은 걸 따로 설계하고 그것을 사용자가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끔 연결하는 디자인 작업이다.’
라고 정리됩니다. 설명 자체가 너무 추상적입니다.(웃음)
실무를 잡더라도 딱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라 생각해요.(웃음) 브랜드 경험 디자인은 단순한 비주얼 디자인이 아닙니다. 상품이나 서비스가 가진 장점을 살리고, 그것을 좋아 보이게 만드는 일이죠. 이왕이면 브랜드에 얽힌 사람들이 서로 좋은 자극을 받고, 상호 유익한 도움이 이뤄지도록 판을 설계하는 게 핵심입니다. 저는 고객이 브랜드와 서비스를 만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해요. 브랜드를 만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반응하는 지점이 궁금해서 계속 브랜드 디자인에 ‘관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관여’라는 단어가 인상적입니다. 브랜드에 어떤식으로 관여하게 되나요?
먼저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에 관여합니다. 브랜드와 클라이언트가 우리를 찾는 이유를 알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죠. 페이퍼워크를 통해 의뢰인에게 프리젠테이션을 꾸준히 펼치는 식으로 방향성을 정하는 단계가 선행됩니다. 그다음에 시각화visualization 단계를 거치는데요. 디자이너는 이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온갖 업무에 관여되는 듯 합니다.
앞서 말한 업무를 끝내고 본격적인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면 종이나 컴퓨터 화면 같은 2D 표면에 컬러와 도형을 조합해 그래픽과 더불어 다양한 콘텐츠를 구현합니다.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분석하고, 시각요소를 위한 기획이나 전략을 만들어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디자인 요소들을 배치하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인테리어 프로젝트에서 가구가 키 요소라면 적합한 가구를 찾고, 영상 제작이 필요하면 영상전문가를 찾아내 일정을 주도적으로 짜요. 인력섭외와 일정관리는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시각요소에 개입하는 디자이너의 업무를 설명하기 위해 아카이브 노트를 펼친 유인성 디자이너 ⓒfrice
또한 브랜드를 경험할 고객을 위한 공간에 관여합니다. 만약 오프라인 이벤트가 열린다면, 고객이 방문하는 공간에 세부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설계해야 합니다. 이건 디자이너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와 팀을 이루고, 목표달성을 위해 프로젝트를 발전시켜요. 자신감과 책임감을 갖고 건축 전문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세부사항을 조정하는 거죠.
직무를 브랜드 디자이너라고 소개하셨는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다양한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시작은 그래픽에 관여하는 것이었지만, 언제 어디서 일하더라도 브랜드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계속 깔려있었어요. 대림처럼 부동산 개발과 얽힌 조직에서 근무했을 땐 디벨로퍼의 관점을 익혔어요. 공간을 기획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런 공간이 도시 안에서 어떤 기능과 콘텐츠를 가진 플랫폼이 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두 번째 직장이었던 JOH.의 조직문화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JOH.는 대외적으로 『매거진 B』를 만드는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건축부터 F&B까지 각 분야별 전문팀이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움직여요.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주받으면 팀 별로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업무를 수행해요. 하나의 프로젝트도 다양한 카테고리에 걸쳐져 종합적으로 전개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저도 여러 업무에 관여했습니다.
본업인 디자인 에이전시 업무 외에도 『매거진 B』의 콘텐츠 제작에 일부 관여했다는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frice
유인성 디자이너는 당시 협업이 브랜드 경험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시각 콘텐츠로 바꿔보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frice
B’s Cut의 촬영 시안. 각 호마다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할 제품을 골라 스튜디오에서 촬영한다. 디자이너는 사진작가에게 요청할 연출법을 시각화해서 전달한다. ⓒfrice
브랜드 디자이너의 일은 장기간에 걸쳐 있는데다, 비가시적인 성과가 더 많습니다. 디자이너의 업무능력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관점’과 ‘방향성’이 브랜드 디자이너의 무기라고 생각해요. 두 가지가 참 중요해요.
좋은 ‘관점’과 ‘방향성’을 잡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하시나요?
극초반 아이디어 구상은 메모로 하는 편입니다. 레퍼런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인데요. 브랜드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워낙 레퍼런스를 많이 쥐고 있어요. “A브랜드가 B콘셉트로 팝업스토어 연다더라.” “C는 D에서 F를 시도했는데 흥행했다더라.” 온갖 정보가 귀에 들어와요.
그런 레퍼런스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핵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메모에 담은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요.
개인적으로는 핀터레스트를 주의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AI까지 가세했어요. 트렌드를 스타일로 구분하고 순위를 매기는 서비스가 등장했고 유저가 필요로 하는 맞춤형 오픈소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죠. ‘이런 데이터 분석의 결과값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건가?’ 유행에 몸을 맡기는 현대 디자인 트렌드에도 조금은 경계심을 갖고 있어요.
지금 한국에서 전문 조직이 브랜드를 설계하는 경우, 데이터 기반 오픈소스툴 활용사례가 빈번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디자인 업무를 수월하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어요. 좋은 툴입니다. 좋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하라는 거죠. 정서적인 심상과 문제 해결을 위한 직관, 그리고 리서치 데이터를 접목시키는 건 디자이너의 역량이니까요. 이 세상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하고 더 시끄러운 곳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데이터 분석에 의한 알고리즘이 알게 모르게 실무에 반영된다는 걸 의식하고, 좀 더 순간을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거죠.
레퍼런스를 떠나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그 안에 담긴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frice
브랜드에 관여하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관점을 좋은 방향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관점 하나로는 결국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디자인은 결국 추상과 실제를 연결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모순적인 가치를 양립시키며 진전되는 사례도 빈번하죠. 브랜드가 추구하는 사업적인 가치를 따지려면 이성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테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남기 위해서는 동시에 정서적인 관점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유인성 디자이너가 기록한 토론 자료.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1~2주 간격으로 클라이언트 미팅에 필요한 PT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frice
그래서 저는 프로젝트 초반에 클라이언트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좀 더 많이 듣고,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러고 나서 어떤 직감이나 심상 같은 걸 놓치지 않고 디자인 솔루션과 연결을 합니다. 이건 직관 내지는 본능. 정서적인 측면이죠.
이게 경영전략같은 이성적인 측면과 결합이 잘 되면 좋은 브랜드 디자인이 태어나는 건데요.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기능과 정서의 연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연결에서 나온다고 봐요.
전문가로 활약하려면 디자인 솔루션을 여러가지 패턴으로 쥐고 있어야겠네요.
‘깃발 세우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예쁜 것과 좋은 것을 분류하고, 그것을 남들보다 먼저 얘기해서 명분을 선점하는 방법을 써요. 현상을 분석하고 거기서 얻어낸 직관을 연결하면서 실천가능한 디자인 프로젝트로 개발시킵니다.
저는 ‘경청’을 선호합니다. 가능하다면 일단 남들보다 더 많이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일단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다 듣고, 레퍼런스를 검토하며 아는 게 많아질수록 관점이 다양해져요. 관점이 다양해지면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도 다양해집니다. a와 b만 만족시키지 않는 솔루션, 이질적인 c, d, e가 있어도 추진이 가능한 솔루션이 등장하는 거죠. 만약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완전히 틀어지더라도 나중에 계속 디자인을 이어나갈 수 있는 근거와 독특한 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브랜드 디자인의 초기작업은 기획/전략 구상이여서 실무자와 충분한 토론 과정을 거친다는 설명을 보탰다.ⓒfrice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가장 희열을 느낀 순간은 언제입니까?
열심히 고민한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수용됐을 때입니다. 이제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된 거 같아요.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은 생각보다 힘이 세거든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이미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어요. 이미 누군가가 설계해둔 디자인에 의해서 말이죠.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디자인은 이미 스며들었다. 당신의 선택지는 사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결정됐다.」
이런 정의를 내릴 수 있을만큼요.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 이론을 이해하고 실제 사례를 접하다보면 남들이 만든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와 대중 모두가 브랜드 디자인을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브랜드의 무언가를 관여하며 디자인할 텐데요. 쉽게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는 건강한 취향이 제게도 필요하고, 브랜드 디자인에 영향을 받을 분들에게도 이런 능동적인 태도가 중요할 겁니다. 누군가의 브랜드 디자인을 거스르려는 안간 힘이! 제가 여태까지 했거나, 앞으로 할 디자인에 반영됐으면 합니다.
😈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비슷한 일을 하는 업계동료와 직업의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경험을 전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하우가 담긴 기획 노트를 볼 수 있는 건 커다란 행운이었어요. 1부는 브랜드 디자이너의 관점을 살펴봤는데요. 이어지는 2부에서는 관점이 실제로 구현된 공간을 소개합니다. 보다 깊은 디자인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2부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