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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뿌리깊은나무를 수집하다

수집가는 frice를 서울 청량리로 초대했습니다. 경동시장 뒷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한옥 다실 ‘희섬정’.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뿌리깊은나무> 잡지가 발행되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오래된 풍경이 이어졌어요. 골목을 따라 걸으니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 하는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골목 끝에서 한국의 전설적인 매거진과 그것을 소중히 모아온 수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문화 기획자 김선문입니다. 서울 성북동에서 11주년을 맞이한 ‘문화공간 17717’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디자인 기획을 가르치고 있고, 지역과 공간을 넘나들며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김선문님이 수집한 <뿌리깊은나무> 전권과 부록. 커버 이미지로 만든 콜라주 포스터. 이미지=김선문 제공 ⓒ뿌리깊은나무

🧐뿌리깊은나무(1976.03~1980.08)

‘한국적인 것’을 탐구한 월간 교양지. 창간호 발행 후, 혁신적인 편집 디자인과 수준 높은 지식정보 콘텐츠를 선보이며 당대 큰 사랑을 받았다.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1980년에 강제 폐간됐다. <뿌리깊은나무>를 이끈 故 한창기 발행인의 친필원고는 국가유산청의 국가예비문화유산 등록을 앞두고 있다.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 전시된 1970년대 기자증.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한 故한창기 발행인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겨있다. ⓒfrice

🧐 한창기 (1936~1997)

‘한국적인 것’을 탐구한 20세기 문화 기획자. 대학 졸업 후, 출판업계에 발을 내딛는다.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 들어가 대표를 역임하며 월간지<배움나무>,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를 발행했다. 이들은 20세기 중후반 한국인의 의식주를 기록한 역사적인 기록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엮은 단행본 시리즈도 유명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구술을 글로 옮긴 <민중자서전>과 80명의 필자와 31명의 사진작가가 2년 동안 전국을 돌며 1980년대 한국 지리를 기록한 <한국의 발견>을 발간했다. 그는 출판 사업뿐만 아니라 디자인 상품 개발도 나섰다. 전통문화 사업부를 따로 만들어 유기, 백자 반상기, 잎 차, 판소리 전집 등 다양한 상품을 대중 앞에 선보였다.

TALK1. 나는 왜 <뿌리깊은나무>를 수집하는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교양지 <뿌리깊은나무> 전권과 부록을 수집하셨는데요. 수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 이 잡지를 접한 것은 파주 출판도시 열화당 사옥의 로터스 갤러리에서 열린 근현대 잡지 전시에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출판사 일을 돕고 있었는데, 전시가 끝난 후 책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낡은 책 몇 권을 펼쳐 읽었어요. 그때 제호와 표지 사진이 인상적인 <뿌리깊은나무> 잡지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특집! 한창기>를 펼치는 김선문님. 수집가의 수집을 결심하게 만든 메시지가 담겨있다. ⓒfrice

열화당 서가에서도 <뿌리깊은나무>의 또 다른 흔적을 발견했어요. 2008년 창비에서 <특집! 한창기>라는 책이었죠. <뿌리깊은나무> 발행인 故 한창기 선생님을 기리는 추모집이었는데요. 책머리에 적힌 한 문장이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인상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당시 저는 20대 중반, 꿈을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고 있던 평범한 청년이었어요. 특히 스승을 만나고 싶었던 시절이었죠. 그러다 책 서문에서 본 ‘똘똘한 젊은이’ 그 한문장이 제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깊은나무>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창간호부터 순서대로 놓은 수집품. 낡아서 뜯겨나간 책등과 만지면 곧바로 바스라질 듯한 묵은 종이로부터, 오래된 물건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전해진다. ⓒfrice

수집 난이도는 어땠나요?

수집 자체는 수월했어요. 지금은 <뿌리깊은나무>의 상품을 수집하는 분들이 크게 늘어서 값도 많이 뛰었지만, 당시에는 리셀이 거의 없었어요. 헌책방과 개인 셀러를 찾아다니며 수년 동안 차근차근 모으니, 수집품이 소장용과 열람용으로 나뉠 정도로 모였어요. 비교적 수집이 어려웠던 건 잡지 부록과 판소리나 산조가 녹음된 음반입니다.

‘그는 이렇게 산다’는 <뿌리깊은나무>를 대표하는 인터뷰 코너이다. 매호 인터뷰어의 집이나 직업현장의 모습이 사진으로 담겨있는 게 특징이다. 현장의 생생함을 보여주는 사진 배치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frice
수집가 김선문님은 인상깊게 본 커버 디자인으로 <뿌리깊은나무>1976년 9월호를 뽑았다. 표지 사진 해설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해뜰 무렵의 아침 바닷가에서 백로를 보는 일도 이제는 어렵게 되었다.’ ⓒfrice

수집하고 기록한 것 중에서 의미 있는 것을 골라 따로 소개해 주시겠어요?

4년 5개월 치 권별 목차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수집하면서 창간호부터 마지막 호까지의 커버 이미지와 목차를 웹에 아카이브 했어요. 어딘가에서 이 책을 만나, 책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분들이 분명히 계실 텐데요. 지금은 헌책을 직접 구하거나, 국립 중앙도서관 같은 곳을 따로 찾아가서 봐야 합니다. 제가 따로 추린 인덱스가 지금 당장 <뿌리깊은나무>를 열람하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1970년대 당시 이 책이 누구에게나 읽기 쉬운 잡지였듯이, 지금 시대에 맞게 온라인을 활용하여 <뿌리깊은나무>를 찾는 이라면 누구나 살필 수 있길 원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목차만큼은 포털사이트에서 대중적으로 검색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뿌리깊은나무>는 제가 알기로 저작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2020년대에도 재출간이 어려운 것으로 알아요. 저작권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공익을 목표로 표지와 목차까지만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 김선문님의 뿌리깊은나무 전권 목차 온라인 아카이브 보러 가기 >

TALK2. <뿌리깊은나무>를 기록하는 방식

수집품을 분류하고 보관하는 방식이 궁금합니다.

다른 책들과 함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판형이 같은 책끼리 묶어서 두고 있을 뿐, 특별한 분류체계가 있지는 않아요. 다만, <뿌리깊은나무> 잡지는 책의 형태가 변형될 여지가 있어서, 소장용 판본은 10권 이상을 겹쳐 눕혀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보관 장소는 본가에 있는 책장인데요. 다른 수집가분들처럼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체계적으로 분류해 두지는 않았어요.

김선문님의 <뿌리깊은나무> 공개용 컬렉션. 수집가는 수집품을 공개용과 소장용으로 나눠 보관중이다. 희섬정에서 공개한 판본은 수집가가 전시행사를 할 때 쓰고 있다. ⓒfrice
2024년에 열린 <뿌리깊은나무>읽기 모임 안내 포스터. 김선문님은 복합문화공간 희섬정 대표 ‘송나’님과 힘을 합쳐 독서모임과 전시행사를 열였다. ⓒ김선문

수집품을 활용한 문화 기획 활동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읽기 모임을 통해 <뿌리깊은나무>를 대중에게 더 가깝게 소개하셨는데요. 공개 열람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연결’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뿌리깊은나무>를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연결하고 싶었어요. 저 역시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고요. 사실 이 책을 수집하는 분들은 저 말고도 많지만, 제가 조금 더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연결고리’가 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 훌륭한 책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수집을 계속하게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2016년, ‘좋은 것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열어보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수집품을 공개 열람하는 전시 행사를 열었습니다. 1970년대에 <뿌리깊은나무>를 만들었던 선생님들도 방문하셨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특별한 경험도 했어요. 그분들에게는 아득히 먼 옛날의 사소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가슴 뛰는 순간이었죠.

<뿌리깊은나무> 수집과 읽기 모임은 삶의 방향을 고민하던 청년이었던 제게 인생의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주었고, 올바른 생각 위에서 작은 일들에 꿈을 품고 행동할 때 예상치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뿌리깊은나무>가 널리 읽히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매력적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거의 50년 된 책을 모으는 제가, 수십 년 뒤에 태어날 누군가에게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요.

<뿌리깊은나무> 표지. 1970년대 한국의 인상적인 풍경과 당시 시각 디자이너의 안목이 한눈에 들어온다 ⓒfrice

TALK3. <뿌리깊은나무>를 모으며 배운 것

수집한 책들을 10여 년간 타인과 공유하다 보면, 수집가에게도 이런저런 변화가 생길 것 같아요.

맞아요. <뿌리깊은나무>를 수집하며 겪은 경험들은 문화 기획자로서 제 직업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책에 담긴 글과 사진을 통해 한 시대의 문화를 익혔고, 그 고민이 한 세대의 것만이 아니라 다른 세대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모임을 통해서 세대와 세대가 연결될 수 있는 장(場)과 활동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심미적인 사진을 크롭 해 그리드 안에 담아내는 편집 디자인은 40여 년 뒤에 등장한 인스타그램 피드 디자인을 연상케 한다. ⓒfrice

솔직히 <뿌리깊은나무> 출판물을 수집하게 된 동기는 하나를 콕 짚어서 말씀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이에요. 어떤 물건을 꾸준히 모으는 것으로 세상에 나를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심에, 단순한 호기심과 순수한 즐거움 같은 게 더해졌던 것 같아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가 20대에 열화당 출판사에서 <뿌리깊은나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 frice를 만나는 일도 없을 뿐더러 어쩌면 성북동에서 문화 기획자로 공간을 운영하는 일도 없었을지도 몰라요.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죠.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수집인 건 맞습니다. (웃음)

뿌리깊은나무 조선 소리 선집. 가야금 산조 연주가 담긴 음반이다. 뿌리깊은나무는 故 한창기 발행인을 중심으로 출판 활동 뿐만 아니라, 토박이 문화 계승을 위한 다양한 디자인 활동을 펼쳤다. ⓒseona

<뿌리깊은나무>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닐까요?

「토박이 문화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뿌리깊은나무>를 만들었던 분들은 우리 문화를 한복이나 한옥 같은 특정한 틀에 가두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한국적인 것’이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이었어요. 한국 땅에 본래 있던 것을 추적하고 그 가치를 잘 담아냈죠.

책은 물성이 있기 때문에 의도와 관계없이 보존됩니다. 결과적으로 <뿌리깊은나무>는 우리 고유의 문화를 기록하고 지켜내는 역할을 했어요. 종이 잡지라는 형식 덕분에 누구나 부담 없이 ‘우리 것’이 무엇인지 쉽고 편하게 만나볼 수 있어요. 역사를 알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모르더라도 한국 문화의 흐름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뿌리깊은나무>에서 출간한 다양한 단행본 도서 표지. 수십 년 전, 토박이 문화를 다뤘던 <뿌리깊은나무>의 노력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가치있는 시간을 선사한다. 잡지를 비롯한 <뿌리깊은나무>의 활동은 한국인도 미처 몰랐던 우리 문화를 재발견하는 계기를 만든다. 이미지=김선문 제공 ⓒ뿌리깊은나무

<뿌리깊은나무>가 전설적인 잡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1970년대에 만들었기 때문이란 생각도 듭니다. 한국 사회가 그 시기 즈음에서야 ‘내 나라, 내 문화’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일제강점기 동안 전통이 말살되었고,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상황이 연속된 거죠. 가지고 있던 것이 사라지고, 해외 문물이 급격히 쏟아지던 시대였기에, 원래 우리 곁에 있던 것이 눈에 잘 들어왔을 거예요.

그렇게 눈에 들어온 토박이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그런 마음에서 한창기 선생님을 비롯한 선구자들이 한국적인 것을 사유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뿌리깊은나무>는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결과물이었죠.

<뿌리깊은나무>처럼 한국 근현대사를 잘 보여주는 시각자료를 더 추천해 주시겠어요?

대원사에서 출판한 <빛깔 있는 책들> 시리즈를 추천합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역사, 자연 등을 다룬 대표적인 교양서입니다. 저도 이 시리즈를 <뿌리깊은나무> 잡지와 함께 소장하고 있어요. 1980년대부터 출간된 시리즈인데, 각 권이 한 가지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책이고,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편집과 북디자인을 갖추고 있습니다.

2025년 2월, 교보문고 광화문점 매대에 전시된 <빛깔있는 책들> 시리즈. ⓒfrice

<뿌리깊은나무>가 시대의 기록을 남긴 잡지라면, <빛깔 있는 책들>은 한국의 유산을 한 권씩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제에 맞춰 통일된 표지와 감각적인 레이아웃이 돋보이며, 지금도 한국 문화 연구와 디자인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 대원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빛깔있는 책들 바로 보기 >

😈 50여 년 전,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와 편집자들이 모여 수준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이 엮어낸 우리 문화를 내 방 한구석, 그리고 마음 한편에 두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자신을 매료시킨 수집 대상에서 배움을 얻고, 이를 공유하며 소통의 가치를 발견하는 수집가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오래된 책을 모으며 알게 된 것은 이 땅 위에 존재해 온 토박이 문화, 그리고 수집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뿌리깊은나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분들은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방문을 추천드립니다. <뿌리깊은나무>를 이끌었던 故 한창기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모은 수집품이 공개된 곳으로, 그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이 멋진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 오감으로 느낄 수 있으실거예요. 😊

<👉 월간 디자인 인터뷰 ‘이상철이 말하다 1976년의 한국 잡지 vs. 2012년의 한국 잡지’ 보러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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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한국을 수집할까?’ 프라이스가 발견한 한국의 수집가들. #K-ollectors #수집가들

한국의 벽지를 수집하다

고사테 강동수님이 수집한 한국의 벽지들

프라이스는 한국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습니다. 살펴보니 자신의 관점으로 한국의 모습을 수집하는 다양한 수집가가 있었어요. 그중 한옥 리모델링 일기를 쓰는 수집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눈길을 끈 건 한옥 리모델링 과정에서 나오는 벽지를 아카이빙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프라이스는 곧장 첫 수집가를 만나기 위해 광주광역시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의 벽지를 수집하는 강동수님을 만났어요. 광주 구도심의 2층 창고에 들어가 깊은 세월이 묻어있는 종이 냄새를 맡으며 수집가의 아카이브를 살펴보았습니다. 서랍 안에는 제각각의 이름과 사연으로 수집된 벽지가 있었고 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는데요. 벽지의 사연을 들으니, 문화가 보였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한옥 목수 강동수입니다. 한옥에서 발견한 벽지를 수집합니다. 수집품으로 고사테(GOSATE)라는 벽지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고사테는 ‘골목길에’라는 뜻이고, 순우리말 ‘골목’을 의미하는 ‘고샅’에서 가져온 이름입니다.

1946년작 강진 한옥 사랑방 내부. 다양한 패턴 벽지들이 온전히 남아있었다. ⓒgosate

한국의 벽지를 모은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수집 계기가 궁금해요.

제가 2022년에 전라남도 보성에서 고택 한옥을 리모델링했어요. 당시 사랑방 철거하면서 프랑스풍 벽지를 발견했는데, 철거할 때만 해도 옛날 벽지를 별생각 없이 갖고 있었죠. 한옥 수리 현장에서 나온 땔감으로 캠프파이어를 하는데, 종이 무더기에서 특이한 벽지들이 떨어져 나오더라고요.

아내가 프랑스인인데 종이를 유심히 보더니, “사랑방에서 나온 벽지가 단순한 땔감은 아닌 것 같다.”라고 해서 불을 끄고 다시 살폈어요. 타고 남은 걸 모아 내용물을 확인해 보니, 다 사연 있고 가치 있는 종이들이었습니다. 그 뒤로 한옥 리모델링 현장에서 나온 벽지는 따로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인천 강화군 교동도에서 발견된 원본 벽지와 복원 벽지. 러시아 동방정교식 십자가 패턴과 만주-중국 영향을 받은 모란 패턴은 전형적인 러시아-만주 영향권에서 탄생한 벽지 패턴이다. 고사테는 ‘러시아-만주-조선 3문화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설명한다. 이 패턴 디자인에 강동수님은 재호(jaeho)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대에 있을 법한 사람의 이름을 붙이는 게 고사테의 패턴 벽지 작명법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frice

TALK1. 나는 왜 벽지를 수집하는가

수집할 때 어떤 걸 가장 신경 쓰시는지 궁금합니다.

역사적 맥락을 가장 신경 씁니다. 한국은 서양과 달리 벽지를 덧바르는데요. 덧바른 벽지 레이어에 역사적 맥락이 그대로 담겨 있어요.

벽지를 덧바른 이유는 건축 구조에서 찾을 수 있어요. 서양식 건축에서는 단단한 벽에 벽지를 붙이기 때문에 종이를 덧붙이지 않고 떼는 것이 쉬운 편입니다. 한옥에는 기둥 사이에 ‘인방(引枋)*’이라는 틀이 있는데, 이 틀과 기둥 사이가 벽이 되고, 여기에 대나무 등살을 댄 후 흙과 마감재로 미장을 하여 벽을 완성합니다. 벽지를 떼면 흙더미도 함께 벗겨지기 때문에 벽지를 제거하지 않고 덧발랐어요. 또한, 벽지를 덧바르면 단열 효과가 있어 실용적인 이유도 함께 작용했습니다.

* 인방(引枋) 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르는 가로재를 말한다. 즉 기둥을 상중하에서 잡아주는 역할을 하며 여러 기둥을 일체화시켜 횡력을 견디게 하는 구조적인 역할을 한다. (참고 : 전통문화포털)

토벽(土壁)을 짓는 모습. 토벽은 우리나라 전통 주택 가운데 가장 널리 사용된 벽체 방식이다. 토벽 기둥 중간에 ‘인방(引枋)’이라 부르는 가로재를 끼워 넣는다. ⓒ한옥학교
리모델링을 마친 광주의 도시형 한옥 모습. 새하얀 벽면을 받치는 인방과 기둥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frice

그래서 한국 전통 가옥에서 발견되는 벽지는 집의 역사나 시간의 흐름을 증언하는 거죠. 벽지를 걷어내면 그 뒤에 신문지, 그림을 그렸던 종이, 서예를 연습한 종이가 레이어로 남아있어요. 말 그대로 짬뽕이고 벽지 아카이빙이 흥미로운 이유입니다. 한옥에서 나온 벽지를 수집하다 보면 문헌학적 가치가 많은 사료들이 나와요.

서울 원서동 한옥 기둥에 남아있는 패턴 벽지와 초배지. TV프로그램 방영표가 적힌 신문지는 집의 역사를 짐작하게 만든다. ⓒfrice

우리는 종이를 벽에만 발랐던 게 아닙니다. 가구에도 종이를 발랐고. 함에도 종이를 발라 썼습니다. 예쁘게 싸 발라야 하는 물건에는 패턴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어요. 함은 조선시대에 보통 오색지를 오려 붙여 문양을 내곤 했는데요. 인쇄 기술 발전으로 근대 이후로는 벽지처럼 잉크로 찍어낸, 문양이 있는 종이를 바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맥락을 해치지 않고, 최대한 발굴된 모습을 보존하면서 한국 전통 가옥의 벽지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강동수님이 한옥 철거 현장에서 발굴한 1950년대식 지함(紙函). 조선식 오색지함 전통을 따르는 공산품이다. 당시 프린팅 기술과 잉크 퀄리티, 디자인 양식을 짐작할 수 있다.  ⓒfrice
함을 열면 패턴 벽지가 덧발려 있다. 귀중품을 보관하는 상자에도 종이를 덧발랐던 한국인의 관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frice

수집하고 기록한 것 중에서 디자인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골라 소개해 주시겠어요?

고사테에서 ‘점순’이라는 이름을 붙인 1950년대 디자인 벽지입니다. 1945년에 지은 강화도 흥왕리의 근대 한옥에서 발견했어요.

강동수님이 직접 도배한 ‘점순’ 패턴 벽지. 복합문화공간인 강화도 흥왕리 마니산방에서 만날 수 있다. ⓒfrice

패턴 벽지에 보라색이 도는데 이건 우리가 예전에 썼던 만년필 잉크색과 비슷합니다. 약간 보랏빛이 번지는 검은색인데요, 원본 벽지는 재현 벽지보다 색이 좀 더 쨍한 편입니다. 당시 시대상에 맞춰 디자인한 패턴 벽지입니다.

1950년대는 해방과 전쟁이 이어지며 물자가 부족했던 시기인 데다 국제 교류가 꽤 오래 단절되면서 수입됐던 물자를 우리나라에서 직접 생산해야 하는 시절이었어요. 본보기가 되는 패턴 벽지는 이미 있으니까 따라 만들면 되는데 벽지 만드는 데 쓸 잉크 같은 소모품이 많이 모자랐던 거죠.

1950년대 한국산 벽지는 전반적으로 색채가 옅고 색 사용 자체가 적다는 게 특징입니다. 패턴 모양도 다른 시대에 비하면 단순하고 간결한 편이에요.

디자인 패턴 벽지와 함께 발굴된 <농민주보> 신문지 일부. ‘우리 말을 배우자’는 기사 제목과 글 내용을 근거로 해방 이후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다.  ⓒfrice

패턴 벽지 뒤 초배지로 쓰인 신문지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어요. <농민주보>는 해방 후 첫 겨울, 미군정에서 발행한 책이었어요. 심지어 <농민주보>는 창간호였고, 창간호는 국내 최초로 발견된 자료입니다. 함께 발굴된 <황민일보>는 일제가 식민지 사람을 전쟁으로 내모는 프로파간다 신문이었죠.

둘 다 혼란한 시대상을 증언해 줄 역사적 사료인데 이 종이들이 어떤 사연으로 이 집 벽지가 됐는지 궁금해집니다. 서로 다른 시기가 해방 이후에 한 집에 잠들게 됐다는 게 굉장히 강력해서 저는 강화도 흥왕리 한옥에서 발굴된 벽지에 마음이 많이 가네요.

한옥 건물 벽에 고이 잠들어있던 초배지. 종이에 담긴 사연이 많아 보인다. 제일 앞의 일장기에 태극무늬를 그려넣은 흔적이 선명하다. ⓒfrice

시대상을 보여주는 수집품이 많습니다. 다른 것도 소개해 주시겠어요?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꾼 거 보이시죠? 이건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교과서입니다. 초배지로 쓰였어요. 전시에 발행된 식민지 시대 학습자료죠. 앞으로 일본이 한국 벽지 문화에 미친 영향을 더 연구하고 싶어요.

당시 일제 재벌기업인 미쓰비시에 벽지 사업부가 있었더라고요. 제 추측입니다만, 그 당시에 벽지를 바르는 일은 일본에서는 대중적인 인테리어는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벽지는 소위 말하는 화식(和式), 혹은 고위층 서양식 건축물에나 적용되었죠. 일본은 전통 목조가옥에 우리나라처럼 벽지를 바르는 경우는 드물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한옥 방에 서양식 패턴 벽지를 바르는 우리나라가 어떤 면에서는 개방적인 거죠.

벽지를 미쓰비시 같은 대기업에서 따로 조선에 유통할 정도였고, 벽지의 일본 직수입도 있었습니다. 일본 직수입은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에게 팔기 위해 만든 것, 조선인 소비자를 고려하고 만든 것이라는 게 벽지를 수집하면서 얻은 저의 가설입니다. 돈 내는 사람 있으면 디자인은 다 그쪽으로 따라가니까요.

TALK2. 벽지를 기록하는 방식

한옥에서 발굴한 패턴 벽지를 수집하는 공간 ⓒfrice

이런 소중한 수집품을 어디에 어떻게 보관하는지 궁금합니다.

거주지인 광주에 아카이브 공간을 마련하고, 수집한 벽지는 전용 선반에 따로 보관합니다. 선반에 발굴 현장 지역명을 붙여두고, 박리를 마친 원본 벽지를 다시 레이어로 구분 지어 보관합니다.

수집된 벽지는 캐비닛에 라벨을 붙여 지역 별로 구분 짓는다ⓒfrice

처음에는 레이어 구분을 마친 벽지 위에 또 다른 벽지를 얹는 식으로 보관했어요. 점점 꺼내 쓰기 불편해져서 가로 2,440mm, 세로 1,220mm 나무 합판으로 장을 따로 짰습니다. 시중에는 마땅한 게 없어서 제가 직접 만들었어요. 슬라이드 선반을 15층으로 구성했고 트레이 2개 조가 양옆으로 열리는 구조입니다.

발굴된 벽지를 순서대로 포갠 뒤 넓게 펼친 모습 ⓒfrice

중요한 건 초배지와 벽지를 한 몸으로 여긴다는 점인데요. 발굴 현장에서 종이가 벽에 붙어있던 시간 순서대로 묶어 세트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초배지랑 패턴 벽지를 따로 분류하지 않아요. 초배지와 벽지에 담긴 역사적 맥락이나 시대적 배경이 중요해서 이를 하나로 보고 보관하는 거죠.

초배지로 사용된 주한미군의 한국건축물 관리대장. 해방 직후에는 중요한 서류였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공문서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그 이후 도배용 종이로 사용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frice

예컨대 이 초배지는 1950년대 미군정에서 발행한 건축물대장입니다. 한국식 건물인지 서양식 건물인지 타입을 구분하려는 내용이 담겨있어요. 일본식 집인지 한국식 집인지. 방은 몇 개인지. 공간을 뭐라고 불러서 구분했는지. 집을 보는 개념이나 분류 기준까지 담겨있어요.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는 거죠.

이런 걸 나란히 발견된 패턴 벽지랑 같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패턴 벽지는 가끔 제조사가 확인되는 경우가 있어요. 국산인지 수입산인지, 국산이라면 무궁화표인지 백조표 벽지인지 구분 지어주는 단서입니다. 단서를 쫓아가면서 벽지의 제작 시기를 알아내곤 합니다.

스캔을 마친 원본 벽지를 확대해 패턴을 따는 모습. 디자인 툴은 아이패드와 애플 펜슬을 주로 이용한다는 설명. ⓒgosate

현장에서 발굴한 벽지 뭉텅이는 보관실 창고 구석에 둡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박리 작업을 진행하고, 박리를 마치면 디지털 스캔과 동영상 촬영을 진행합니다. 아카이빙을 무사히 마친 원본 벽지는 다시 보관용 나무 장에 넣어둡니다.

TALK3. 벽지를 모으며 배운 것

동수님이 수집한 한국의 벽지는 오늘날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살았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저는 한국의 벽지 문화가 한국적인 생활양식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한국 사람들은 해외에서 유입된 새로운 디자인은 빠르게 흡수하지만, 규격이나 쓰임새는 관습을 따라가는 편인 것 같아요.

송학도가 그려진 패턴 벽지. 왼쪽은 고사테에서 복원한 벽지 샘플. 오른쪽은 한옥 철거 현장에서 발굴한 원본 벽지. ⓒfrice

벽지로 보자면, ‘종이 규격’이 적절한 예시입니다. 한옥에서 발굴된 서양식 패턴을 지닌 벽지의 규격이 한지 규격을 따라가요. 서양식 패턴 벽지가 직수입됐다고 상상해 보면, 아마 50cm 간격의 롤 벽지였을 거예요. 그런데 옛 한옥에 붙인 서양식 벽지는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 종이의 규격으로 잘랐던 흔적이 있어요. 아마 당시 건축 기술자들이 벽지를 하나하나 직사각형으로 잘라서 썼던 거 같아요.

이건 영상기록으로 확인이 가능해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1941년에 발표한 기록 영상이 있습니다. 제목은 ‘온돌’인데요. 서울 북촌이나 서촌으로 짐작되는 한옥에서 방을 꾸미는 장면이 나와요. 거기서 문양이 새겨진 패턴 벽지와 네모난 벽지 모습이 확인됩니다. 제가 한옥 철거하면서 확인한 바로는 네모난 벽지를 나름대로 규격에 맞춰 재단하고, 방 크기에 맞춰 바둑판처럼 이어서 붙였던 거 같아요. 철사로 종이 끝을 꼬집거나 얇은 각목에 대어가며 조금씩 이어붙이는데. 그게 벽 전체에 그리드(grid)를 만드는 식이죠.

고사테 강동수 대표가 복원한 벽지를 설치한 강화도 마니산방. 이 방에 바른 벽지는 이 집에서 발굴된 것이다. ⓒfrice
20세기의 벽지를 복원해 바르고, 그 원본을 보관해놓은 자리가 인상적이다. ⓒfrice

그리고 벽지 문화는 온돌 문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벽지는 방 단위로 난방하는 우리 주거생활과 연관되거든요. 한국 전통 가옥은 서양식 집과 비교했을 때, 층고가 낮은 편이에요. 여기에 온돌로 달궈진 방에 벽지를 여러 겹 발라 단열효과를 최대한으로 높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벽지를 쓰는 건 거의 우리나라가 유일한 거죠.

이런 식으로 한국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에서 종이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맥락을 추적해 보면 한국 주거 환경의 특수성까지 볼 수 있어요. 벽지라는 디자인 결과뿐만 아니라 벽지가 그 건물 벽에 부착된 과정,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배경. 저는 이런 것들이 대단히 한국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 집 벽에 붙어 있던 건 어쩌면 ‘한국인의 무의식’ 아니었을까요? 실내 장식을 위한 종이에서 우리의 오래된 관습을 발견하고, 수집품의 제작 배경이나 당시 쓰임새를 추적하려는 수집가의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강동수님이 모은 20세기 패턴 벽지는 단순한 수집에 그치지 않고, 실내 인테리어 벽지라는 새로운 디자인 프로젝트로 나아가고 있는데요. 문화적 맥락을 복원하려는 디자이너의 의지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고사테는 복원을 마친 벽지로 샘플 북을 만들었어요. 원한다면 수집가의 수집품을 전시 도록처럼 소장할 수 있습니다. 샘플 북은 열람도 가능한데요! 추천장소는 서울 합정동 콩크(CONCSEOUL). 디자이너를 위한 메트리얼 라이브러리에서 콩크의 벽지 도록을 직접 감상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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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한국을 수집할까?’ 프라이스가 발견한 한국의 수집가들. #K-ollectors #수집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