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가는 frice를 서울 청량리로 초대했습니다. 경동시장 뒷골목 끝자락에 자리한 한옥 다실 ‘희섬정’.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뿌리깊은나무> 잡지가 발행되던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오래된 풍경이 이어졌어요. 골목을 따라 걸으니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 하는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골목 끝에서 한국의 전설적인 매거진과 그것을 소중히 모아온 수집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문화 기획자 김선문입니다. 서울 성북동에서 11주년을 맞이한 ‘문화공간 17717’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디자인 기획을 가르치고 있고, 지역과 공간을 넘나들며 여러 세대를 아우르는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뿌리깊은나무(1976.03~1980.08)
‘한국적인 것’을 탐구한 월간 교양지. 창간호 발행 후, 혁신적인 편집 디자인과 수준 높은 지식정보 콘텐츠를 선보이며 당대 큰 사랑을 받았다.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1980년에 강제 폐간됐다. <뿌리깊은나무>를 이끈 故 한창기 발행인의 친필원고는 국가유산청의 국가예비문화유산 등록을 앞두고 있다.

🧐 한창기 (1936~1997)
‘한국적인 것’을 탐구한 20세기 문화 기획자. 대학 졸업 후, 출판업계에 발을 내딛는다. 한국 브리태니커 회사에 들어가 대표를 역임하며 월간지<배움나무>, <뿌리깊은나무>, <샘이깊은물>를 발행했다. 이들은 20세기 중후반 한국인의 의식주를 기록한 역사적인 기록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엮은 단행본 시리즈도 유명하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구술을 글로 옮긴 <민중자서전>과 80명의 필자와 31명의 사진작가가 2년 동안 전국을 돌며 1980년대 한국 지리를 기록한 <한국의 발견>을 발간했다. 그는 출판 사업뿐만 아니라 디자인 상품 개발도 나섰다. 전통문화 사업부를 따로 만들어 유기, 백자 반상기, 잎 차, 판소리 전집 등 다양한 상품을 대중 앞에 선보였다.
TALK1. 나는 왜 <뿌리깊은나무>를 수집하는가
1970년대를 대표하는 교양지 <뿌리깊은나무> 전권과 부록을 수집하셨는데요. 수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 이 잡지를 접한 것은 파주 출판도시 열화당 사옥의 로터스 갤러리에서 열린 근현대 잡지 전시에서였습니다. 당시 저는 출판사 일을 돕고 있었는데, 전시가 끝난 후 책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낡은 책 몇 권을 펼쳐 읽었어요. 그때 제호와 표지 사진이 인상적인 <뿌리깊은나무> 잡지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열화당 서가에서도 <뿌리깊은나무>의 또 다른 흔적을 발견했어요. 2008년 창비에서 <특집! 한창기>라는 책이었죠. <뿌리깊은나무> 발행인 故 한창기 선생님을 기리는 추모집이었는데요. 책머리에 적힌 한 문장이 저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전략)…
새로운 세대 중에 어느 똘똘한 젊은이의 눈에 걸려 탐독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며 만들었다. 요컨대, 20세기 후반의 독창적인 언론인이자 문화 비평가인 한창기의 생각과 ‘젊은 그들’의 생각이 이 책을 통해 조우하여 사랑을 나누기를 바랐다. 그것이 폭발적인 사랑이어서 장차 소생을 낳기까지 한다면 경사스러운 일이다.
<특집! 한창기> 서문 中
인상적인 메시지였습니다. 당시 저는 20대 중반, 꿈을 고민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고 있던 평범한 청년이었어요. 특히 스승을 만나고 싶었던 시절이었죠. 그러다 책 서문에서 본 ‘똘똘한 젊은이’ 그 한문장이 제 마음을 강하게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깊은나무>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수집 난이도는 어땠나요?
수집 자체는 수월했어요. 지금은 <뿌리깊은나무>의 상품을 수집하는 분들이 크게 늘어서 값도 많이 뛰었지만, 당시에는 리셀이 거의 없었어요. 헌책방과 개인 셀러를 찾아다니며 수년 동안 차근차근 모으니, 수집품이 소장용과 열람용으로 나뉠 정도로 모였어요. 비교적 수집이 어려웠던 건 잡지 부록과 판소리나 산조가 녹음된 음반입니다.


수집하고 기록한 것 중에서 의미 있는 것을 골라 따로 소개해 주시겠어요?
4년 5개월 치 권별 목차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수집하면서 창간호부터 마지막 호까지의 커버 이미지와 목차를 웹에 아카이브 했어요. 어딘가에서 이 책을 만나, 책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분들이 분명히 계실 텐데요. 지금은 헌책을 직접 구하거나, 국립 중앙도서관 같은 곳을 따로 찾아가서 봐야 합니다. 제가 따로 추린 인덱스가 지금 당장 <뿌리깊은나무>를 열람하고 싶은 분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1970년대 당시 이 책이 누구에게나 읽기 쉬운 잡지였듯이, 지금 시대에 맞게 온라인을 활용하여 <뿌리깊은나무>를 찾는 이라면 누구나 살필 수 있길 원했어요. 다른 건 몰라도 목차만큼은 포털사이트에서 대중적으로 검색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뿌리깊은나무>는 제가 알기로 저작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2020년대에도 재출간이 어려운 것으로 알아요. 저작권을 위반하지 않는 선에서 공익을 목표로 표지와 목차까지만 공유하게 되었습니다.
<👉 김선문님의 뿌리깊은나무 전권 목차 온라인 아카이브 보러 가기 >
TALK2. <뿌리깊은나무>를 기록하는 방식
수집품을 분류하고 보관하는 방식이 궁금합니다.
다른 책들과 함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판형이 같은 책끼리 묶어서 두고 있을 뿐, 특별한 분류체계가 있지는 않아요. 다만, <뿌리깊은나무> 잡지는 책의 형태가 변형될 여지가 있어서, 소장용 판본은 10권 이상을 겹쳐 눕혀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보관 장소는 본가에 있는 책장인데요. 다른 수집가분들처럼 별도의 공간을 마련해 체계적으로 분류해 두지는 않았어요.


수집품을 활용한 문화 기획 활동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읽기 모임을 통해 <뿌리깊은나무>를 대중에게 더 가깝게 소개하셨는데요. 공개 열람을 결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연결’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뿌리깊은나무>를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을 연결하고 싶었어요. 저 역시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고요. 사실 이 책을 수집하는 분들은 저 말고도 많지만, 제가 조금 더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연결고리’가 되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 훌륭한 책을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수집을 계속하게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2016년, ‘좋은 것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열어보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수집품을 공개 열람하는 전시 행사를 열었습니다. 1970년대에 <뿌리깊은나무>를 만들었던 선생님들도 방문하셨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특별한 경험도 했어요. 그분들에게는 아득히 먼 옛날의 사소한 이야기일지 몰라도, 이 책을 처음 접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가슴 뛰는 순간이었죠.
<뿌리깊은나무> 수집과 읽기 모임은 삶의 방향을 고민하던 청년이었던 제게 인생의 중요한 나침반이 되어주었고, 올바른 생각 위에서 작은 일들에 꿈을 품고 행동할 때 예상치 못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뿌리깊은나무>가 널리 읽히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매력적인 방식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주지 않을까요? 거의 50년 된 책을 모으는 제가, 수십 년 뒤에 태어날 누군가에게 ‘연결고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워요.

TALK3. <뿌리깊은나무>를 모으며 배운 것
수집한 책들을 10여 년간 타인과 공유하다 보면, 수집가에게도 이런저런 변화가 생길 것 같아요.
맞아요. <뿌리깊은나무>를 수집하며 겪은 경험들은 문화 기획자로서 제 직업 정체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책에 담긴 글과 사진을 통해 한 시대의 문화를 익혔고, 그 고민이 한 세대의 것만이 아니라 다른 세대를 넘어서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리고 모임을 통해서 세대와 세대가 연결될 수 있는 장(場)과 활동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솔직히 <뿌리깊은나무> 출판물을 수집하게 된 동기는 하나를 콕 짚어서 말씀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이에요. 어떤 물건을 꾸준히 모으는 것으로 세상에 나를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심에, 단순한 호기심과 순수한 즐거움 같은 게 더해졌던 것 같아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가 20대에 열화당 출판사에서 <뿌리깊은나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오늘 frice를 만나는 일도 없을 뿐더러 어쩌면 성북동에서 문화 기획자로 공간을 운영하는 일도 없었을지도 몰라요. 어디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는 그건 정말 모르는 일이죠.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수집인 건 맞습니다. (웃음)

<뿌리깊은나무>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닐까요?
「토박이 문화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뿌리깊은나무>를 만들었던 분들은 우리 문화를 한복이나 한옥 같은 특정한 틀에 가두지 않았어요. 그들에게 ‘한국적인 것’이란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삶의 방식이었어요. 한국 땅에 본래 있던 것을 추적하고 그 가치를 잘 담아냈죠.
책은 물성이 있기 때문에 의도와 관계없이 보존됩니다. 결과적으로 <뿌리깊은나무>는 우리 고유의 문화를 기록하고 지켜내는 역할을 했어요. 종이 잡지라는 형식 덕분에 누구나 부담 없이 ‘우리 것’이 무엇인지 쉽고 편하게 만나볼 수 있어요. 역사를 알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지만, 모르더라도 한국 문화의 흐름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됩니다.

<뿌리깊은나무>가 전설적인 잡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1970년대에 만들었기 때문이란 생각도 듭니다. 한국 사회가 그 시기 즈음에서야 ‘내 나라, 내 문화’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일제강점기 동안 전통이 말살되었고,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상황이 연속된 거죠. 가지고 있던 것이 사라지고, 해외 문물이 급격히 쏟아지던 시대였기에, 원래 우리 곁에 있던 것이 눈에 잘 들어왔을 거예요.
그렇게 눈에 들어온 토박이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그런 마음에서 한창기 선생님을 비롯한 선구자들이 한국적인 것을 사유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해요. <뿌리깊은나무>는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 있는 결과물이었죠.
<뿌리깊은나무>처럼 한국 근현대사를 잘 보여주는 시각자료를 더 추천해 주시겠어요?
대원사에서 출판한 <빛깔 있는 책들> 시리즈를 추천합니다. 한국의 문화, 예술, 역사, 자연 등을 다룬 대표적인 교양서입니다. 저도 이 시리즈를 <뿌리깊은나무> 잡지와 함께 소장하고 있어요. 1980년대부터 출간된 시리즈인데, 각 권이 한 가지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책이고, 시각적으로도 아름다운 편집과 북디자인을 갖추고 있습니다.

<뿌리깊은나무>가 시대의 기록을 남긴 잡지라면, <빛깔 있는 책들>은 한국의 유산을 한 권씩 체계적으로 정리한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제에 맞춰 통일된 표지와 감각적인 레이아웃이 돋보이며, 지금도 한국 문화 연구와 디자인 자료로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 대원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빛깔있는 책들 바로 보기 >
😈 50여 년 전,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와 편집자들이 모여 수준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이 엮어낸 우리 문화를 내 방 한구석, 그리고 마음 한편에 두는 것은 참 근사한 일이 아닐까 싶어요.
자신을 매료시킨 수집 대상에서 배움을 얻고, 이를 공유하며 소통의 가치를 발견하는 수집가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오래된 책을 모으며 알게 된 것은 이 땅 위에 존재해 온 토박이 문화, 그리고 수집가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뿌리깊은나무>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진 분들은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 방문을 추천드립니다. <뿌리깊은나무>를 이끌었던 故 한창기 선생님이 평생에 걸쳐 모은 수집품이 공개된 곳으로, 그가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이 멋진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 오감으로 느낄 수 있으실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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