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 합정동 소금구이집에서 사용하는 불판이 포개진 모습

한식 고기구이의 아슬아슬한 중재자, K-불판

  • 어쩔K

한식 고기구이의 아슬아슬한 중재자, K-불판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난로회 풍경을 담은 19세기 민화

조선식 야외취식

다섯 명의 남자가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남자들의 모습은 제각기 조금씩 다르다. 고기가 뜨거운 듯 입으로 부는 남자, 구운 고기를 담은 접시를 들고 있는 남자, 술을 쭉 들이키려는 남자도 있다. 한 명이 쓴 남바위로 보아 날씨가 추운 모양이다. 그렇다면 불은 고기도 구워주고 따뜻함도 안겨주니 일석이조로 귀하다.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난로회 풍경을 담은 19세기 민화를 확대한 모습
19세기 민화. <성협 풍속화첩> ‘야연’ ⓒ국립중앙박물관

고기를 즐기는 남자들의 모습이 다채로운 가운데, 그림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가운데의 불판이다. 제법 잘 타오르는 불길 위에 둥글게 올라 앉아 중심을 잡아준다. 가운데가 옴폭 파여 있는 형국까지 감안하면 모양새가 갓과 흡사해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갓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대하드라마에서 비슷한 설정을 본 기억이 난다. 선비가 철로 쓴 갓을 쓰고 여행을 다닌다. 평소에는 품위를 지켜주고 햇볕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해주다가 식사 때는 만능 취사도구로 변한다. 철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닐 수 있다고? 요즘은 아라미드 섬유로 만들지만 삼십 년 전에는 진짜 철모를 쓰고 훈련을 받았다. 한국전쟁 때 취사에도 쓰였다는 철모였으니 철제 갓 쓰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어쨌든 불판은 그렇게 중심을 잡아준다.

이미 19세기에 민화로 그려졌을 만큼 우리는 고기구이를 좋아한다.

서울 후암동 도로 변에 놓인 숯불화로
서울 후암동 도로 변에 놓인 숯불화로. ⓒfrice

하지만 늘, 두 주인공인 고기와 불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관심을 독점해왔다. 생각해 보자. 고기라면 우리는 소냐 돼지냐 양이나 등등 동물을 따지고, 갈비냐 등심이냐 항정살이냐 등등 부위를 고민한다.

불도 사정은 비슷해서 편리함의 가스와 정통성의 숯불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처럼 고기와 불이 각광 받는 가운데, 정작 둘 사이를 중재해주는 불판의 존재는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불판으로 고깃집을 선택하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없을 것이다. 불판이 없거나 제 역할을 못하면 귀한 고기를 망칠 수 있고, 따라서 각 고깃집마다 고심 끝에 불판을 선택하지만 각광은 받지 못한다.

뿌리깊은나무 일천구백칠십구년 십이월호 - 서울, 한국의 진열장 中
뿌리깊은나무 일천구백칠십구년 십이월호 – 서울, 한국의 진열장 中 ⓒ에드워드 김

구이요리의 중재자, 불판

그렇다, 중재라고 했다. 한식에서 구이는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식탁 한가운데에 불을 놓고 직접 조리를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말해주듯 인간은 언제나 불을 갈망한다. 조리는 불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인류는 익힌 음식을 먹고 뇌를 발달시켰다. 그런 불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고 (예외는 있지만) 먹는 이가 직접 익혀 먹는다. 식사가 의식도, 유희도 될 수 있다.

그러한 특성이 생생함과 맞물려 한국의 고기구이는 해외에서도 K-푸드의 대표이자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스테이크, 아르헨티나의 아사도 등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조리 문법은 많다. 하지만 열원(섭씨 1000~2000도의 숯불 혹은 가스불)과 재료(주로 양념을 하지 않은 생고기)가 식탁에서 맞물려 자아내는 한식 고기구이의 생생함에는 나름의 독창성이 있다.


K-불판의 역할

한식 고기구이의 성격을 궁극적으로 불판이 결정하니 불판도 ‘K-불판’으로 격상된 느낌이다. K-불판의 중재는 두 갈래로 이루어진다.

불 위로 판이 깔리면 온갖 '구워먹을 것'을 올린다.
불 위로 판이 깔리면 온갖 ‘구워먹을 것’을 올린다. ⓒfrice

첫째, 공간적 중재자 역할을 한다.

이름처럼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수분을 품은 동물의 근육과 지방의 집합체인 고기는 부들부들하고 늘어지는 성질을 가졌다. 열원에 올렸을 때 고르게 익지 않기 때문에 판을 깔아야 평평하고 균일한 조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열에너지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고기구이는 크게 복사열과 전도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자는 전자파에 의한 직접 전달, 후자는 다른 매개체를 통해 간접 전달 되는 열이다. 이 두 열이 어우러져 고기의 수분을 증발시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익히는 한편, 고기 표면의 마이야르 반응을 유도해 복잡한 맛과 바삭한 질감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두 종류의 열에너지를 우리는 불판으로 편하게 통제한다. 복사열과 전도열의 노출 비율부터 세기까지 모두 불판이 좌우한다.


21세기 K-고기불판

1) 개방형

숯불을 피운 개방형 불판
고기를 올린 개방형 불판
ⓒfrice

완전 개방형 불판, 석쇠 일족을 예로 들어보자. 철사가 형성하는 면은 ‘판을 깔아주는’ 공간적 중재 역할에 치중하는 한편 고기를 직화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따라서 조리는 복사열에 의해 이루지니 ‘복사열 의존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형태와 면적을 규정하는 테두리에 철사만 걸쳐주면 된다. 그게 그거 같지만 복사열 의존형도 의외로 다양하다. 야외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에는 모기장도 불판으로 쓰이곤 했다. 그렇게 눈이 고운 것과 철근을 붙여 만든 과격한 것이 양 극단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굵기의 철사와 눈의 크기로 이루어져 판을 깔아준다. 주로 고기와 직접 접촉이 미덕이라 여기는 숯불과 짝을 이룬다.

2) 폐쇄형

솥뚜껑을 담은 폐쇄형 불판
폐쇄형 불판에 올라간 음식재료
ⓒfrice

다음으로는 ‘전도열 의존형’이 있다. 눈 혹은 구멍이 전혀 없는, 폐쇄형 불판으로 구이가 전도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작한 국물에 끓여 먹는 서울식 불고기의 불판과 삼겹살용 불판의 상당수가 여기에 속한다. 특히 돼지기름의 원활한 배출을 위해 경사가 지다 못해 곡선으로 진화한 후자가 흥미롭다. 복사열 의존형과 정반대로 열에너지의 고른 분배가 강점이라 가스불과 주로 짝을 짓는다.

3) 절충형

절충형 불판 위에 올린 고기
절충형 불판 위에 올라간 음식재료
ⓒfrice

세 번째로는 둘이 절충된 ‘야망형’이 있다. 복사열과 전도열을 모두 최선으로 활용하겠다는 야망에 젖어 다채로운 양태 및 빈도로 구멍이 뚫려 있다. 심지어 석쇠의 눈이 커지다 못해 야망형으로 발달한 경우도 있다. 전도열의 극대화를 위해 최대한 확보된 면에 복사열의 개입 및 환기를 위해 구멍을 낸 형국이다. 거의 모든 고기를 올려 구울 해법이 마련되어 있을 만큼 종류가 다양하다.

4) 욕심형

음식재료를 굽는 칸이 선명하게 분리된 욕심형 불판
욕심형 불판에 올린 음식재료

마지막으로는 ‘욕심형’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조리할 수 있는’ 불판이다. 핵심은 고기를 굽기 위한 ‘야망형’ 불판이다. 이것이 판 위에서 중심을 이루고 계란 등을 익히기 위한 ‘전도열 의존형’이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다. 심지어 중심에 찌개 뚝배기를 위한 공간을 낸 제품마저 있다. 직화구이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합치면 초월적인 불판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종합적인 효율은 따로 쓰는 것보다 더 떨어진다.

따라서 욕심형 불판은 ‘뇌절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뇌절’이란 적당한 선에서 끊지 못하고 계속 말이나 행동 등을 하다가 기어이 추한 꼴을 보이는 형국을 뜻하는 은어이다. 특히 계란을 위한 테두리가 문제이다. 계란이 눌어 붙을 가능성도 매우 높을 뿐더러 모양새가 좁고 수세미가 잘 안 들어가니 구석을 깨끗하게 닦기 어렵다. 공간이 나뉜 프라이팬의 태생적 한계인데 생각 없이 제품을 개발해 뇌절형이 되었다.

미국의 크리스 오 셰프가 개발한 K-BBQ 캠핑카
미국의 크리스 오 셰프가 개발한 K-BBQ 캠핑카. ⓒkbbqcar
가변형 식탁에 다목적성 가열조리를 위한 불판을 채택한 게 눈길을 끈다
가변형 식탁에 다목적성 가열조리를 위한 불판을 채택한 게 눈길을 끈다. ⓒkbbqcar

다만 이 ‘욕심형’이 맨 앞에서 언급한 19세기 민화의 불판의 직계 후예일 가능성만은 무시할 수 없다. 민화의 불판은 갓을 닮아 가장자리가 평평하고 가운데는 움푹 파여 있다. 따라서 고기를 굽는 한편 마늘이든 찌개든 무엇이든 가운데에 익힐 수 있다. 다목적성이 뇌절형 불판의 목표이자 미완성의 미덕임을 감안하면 둘 사이의 관계를 간과하지 않는 게 좋겠다.


오늘은 저 불판에 어떤 고기가 올라갈까?
오늘은 저 불판에 어떤 고기가 올라갈까? ⓒfrice

K-고기불판의 오늘과 내일

나름 조리의 즐거움과 효율을 좇아 불철주야 애를 쓰며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지만 사실 K-불판에는 개선의 여지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고기가 들러 붙는데 대한 대책이 미약하고 얇아 열효율이 좋지 않다. 사실 전도열 의존형이 아니더라도 K-불판은 상당 부분 공간적 중재 역할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K-불판의 단점이 잦은 교체를 촉발하니 설거지 등 유지 관리로 자원 또한 너무 많이 잡아 먹는다. 과연 대안이 있을까? 무쇠를 고려해볼 수 있다. 열전도율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머금은 열을 오래 머금는다. 게다가 고깃집 같은 곳에서 빠르게 반복해서 쓴다면 표면에 폴리머의 막이 생성돼 고기가 들러 붙는 것을 막아준다.

불판의 형태와 고기의 종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맛이 느껴지는 느낌
불판의 형태와 고기의 종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맛이 느껴지는 느낌. ⓒfrice

실제로 무쇠 불판은 이미 한식 구이의 환경에 도입이 되어 있는데, 우려가 조금 따르기는 한다. 무거운데다 열을 오래 머금으므로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체 상황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훨씬 더 높다. 관습처럼 당연시 여기기는 하지만 식탁에서 벌어지는 불 및 불판의 도입 및 교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가벼워 무쇠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지닌 탄소강 불판도 등장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사실 한식 구이에는 장점 만큼 단점도 많다. 고기를 잘게 썰면 너무 빨리 익고, 요즘 유행을 따라 스테이크처럼 두툼하게 썰면 잘 안 익는다. 이런 단점에 K-불판이 한몫 거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떠한 여건에서도 고기와 불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달구다 못해 태워가며 아슬아슬하게 중재하고 있는 K-불판의 노고에 대해서는 한 번쯤 되새겨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실제로 무쇠 불판은 이미 한식 구이의 환경에 도입이 되어 있는데, 우려가 조금 따르기는 한다. 무거운데다 열을 오래 머금으므로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체 상황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훨씬 더 높다. 관습처럼 당연시 여기기는 하지만 식탁에서 벌어지는 불 및 불판의 도입 및 교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가벼워 무쇠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지닌 탄소강 불판도 등장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 오늘날 한식에서 즐겨 쓰는 구이용 불판을 이렇게 살펴보니 고기 종류보다 더 다양한 불판들이 있네요. 식탁의 한가운데에서 식사의 리듬을 조율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되기도 하는 고기 불판. 한식 고기구이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 형성에 K-불판이 한몫했다는 점에 동의하시나요? 오늘도 맛있는 고기를 위해 계속 진화하고 있는 K-불판! 그 존재를 되새기고 더 나은 한식을 즐겨보아요. 😀

정리 프라이스
이용재

음식 평론가이자 번역가.
한국 음식 문화 비평 연작으로 『한식의 품격』과 『외식의 품격』을 집필했으며
『뉴욕의 맛 모모푸쿠』 『모든 것을 먹어본 남자』 등의 요리 도서도 우리말로 옮겼다.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