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이라는 세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장순
강원도 양구 조령요
달항아리를 굿즈로 만들어 사고 파는 시대. 이런 시대에도 전통적인 가마를 지어 그릇을 굽는 이들은 어떤 가치를 이어가고 있는 걸까?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가마터는 1,350여 기. 고려-조선의 융성한 도자기 문화는 일제 강점기, 전쟁과 근대화를 거치며 자취를 감추었고, 그중에서도 나무토막을 태워 그릇을 얻는 전통적인 가마는 기술 발전과 제작 비용 증가를 이유로 현재 수십 여 곳만 남아있다. 프라이스는 강원도 양구의 도자기 작업장을 다녀왔다. 가마에 온종일 불 때는 날이었다.
전선을 간다
경춘국도 주말 교통체증을 빠져나오자 소양강이었다. 차는 강변 꼬부랑길을 누비며 태백산맥 터널을 가로지른다. 도로에서만 세 시간. 오전 6시에 출발한 차가 강원도 양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먼 길 달려 도착한 취재처는 휴전선 옆 가마터. 그릇을 굽는 부자(父子) 도예가의 작업장이다. 높게 치솟은 산이 가마터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었다. 외딴곳이었다.
어떤 흙에는 특별한 돌이 섞여 있다. 새하얀 흙이 강원도 양구의 지역특산물이다. ‘양구 백토’는 조선 후기에 인근 도요지로 흘러가 백자 제작에 쓰였고, 양구 백토로 만든 백자는 조선 왕실에서 따로 챙겨 쓸 정도였다. 양구 백토는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숙종 27년, 국영 가마인 사옹원 분원 사기장들이 상소를 올렸다. 양구 백토가 아니면 백자 품질이 떨어진다며 양구 백토를 다시 공급해달라는 요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내용이다.
오늘날 양구 백토는 환경보전을 이유로 채취가 제한되고 있어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는다. 양구 백토는 지자체 주도로 1년에 300kg씩 지역 내 작가에게 분배된다. 몇몇 도자 공예가들이 터를 옮겨 양구에 정착하는 이유다. 카올린(kaolin, 고령토)이라 부르는 점토와 양구 백토를 섞어 그릇을 만들면,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백자가 탄생한다.
도착했을 때, 기물은 이미 가마에 들어간 상태였다. 작업자들은 동료와 함께 불 때기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마에서 전해지는 열기는 캠핑장 화롯불과는 차원이 다른 화력이다.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마 주변을 천천히 살필 수 있었다. 쉬고 있던 작업자들은 먼 길을 달려 온 손님에게 따뜻한 차와 군고구마를 대접했다. 따뜻한 환대였다.
불멍하며 생각한 것
가로 3M 세로 20M 폭의 커다란 도자 가마. 온도는 1,300℃ 이상 올라간다. 쇠도 거뜬히 녹일 만큼 뜨겁다. 이런 걸 통제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도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일단 부동산이 필요하다. 그릇 굽기 좋은 입지를 골라, 인적이 드문 곳에 가마를 지어야 한다. 운영비도 많이 든다. 야적장에 쌓인 땔감 구입비와 운송비용이 만만찮아 보였다. 인력수급도 골칫거리일 것이다. 더울 때 덥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땀 흘려 일할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귀하니까.
그럼에도 도전하는 이유는 경제 논리가 아니라 오직 예술 논리에서 나올 것이다. 왜 그릇을 굳이 전통적인 가마에 굽나? 이런 가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런 게 정말 있긴 한가? 의문이 생겼다.
먼저 나무 장작을 태우는 가마터 입지가 따로 정해진 건지 물었다. 프라이스를 이곳에 초대한 신현민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첫째, 좋은 흙이 나는가. 둘째, 주변에 민가가 없는가.” 작업하면 연기가 피는데, 사람 사는 동네가 가까우면 결국 민원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도공이 마음 편하게 일할 곳을 찾았고, 그런 곳을 찾다 보니 휴전선 인근 깊은 산골짜기에 가마터를 잡게 됐다.
조선시대 도자가마처럼
양구 조령요는 조선시대 백자 도요지를 본뜬 계단식 가마터로, 20° 이상 경사면에 기물 넣는 방을 다섯으로 나눈 흙가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도자 가마’ 내용에 따르면, 조령요식 가마 구조는 16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고려-조선 초기엔 봉통(아궁이)부터 굴뚝까지 길게 연결된 가마를 지었는데, 조선 중후기부터 일정 간격마다 격벽을 설치해 가마 내부가 작은 방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이를 ‘지상식 연실 등요’라 부르는데, 이는 17세기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도예 이론에 밝은 전문가들은 도자기 굽는 가마를 형태, 구조, 사용 연료 등에 따라 좀 더 섬세하게 분류한다. 예컨대 양구 조령요는 경사면을 따라 길게 놓인 구조를 감안하면 ‘오름가마’ 혹은 ‘너구리가마’, 진흙으로 지었기에 ‘토축요’. 그릇 굽는 공간을 구분했기에 ‘칸가마’로도 부를 수 있다. 현장에서 만난 작가들은 ‘장작가마’라 불렀다.
“가마 안에서 불은 기운이 약한 곳으로 빠집니다. 불이 가마 안에서 골고루 퍼지게 사람이 도와요. 불이 빠지는데 나무를 제대로 못 넣으면 그릇을 망쳐요. 유약 같은 게 제대로 안 녹는 거죠.”
통나무를 쪼개고 나면, 이제 불과 씨름해야 한다. 불길을 원하는 대로 이끄는 게 도예가의 역할이자 작가역량이다. 작가들은 땔감이 잿더미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자리에 다시 다른 땔감을 채운다. 가마 앞 온도는 이미 신발 밑창이 녹을 정도로 뜨겁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감하게 원하는 위치에 나무토막을 채워 넣었다. 가마 속 불길이 다시 치우침 없이 고르게 퍼져 일렁였다.
가문의 영광
도자공예는 신현민 작가의 가업이다. 신씨 집안 남자들은 대대로 가마를 지어 한국 전통 도자를 연구한다. 가마의 이름은 왜 조령요일까? 조령은 경상북도 문경의 고갯길로, 신현민 작가의 할아버지 신정희 사기장이 첫 개인 가마를 지은 곳이다.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손자가 선대의 작업 정신을 잇겠다는 다짐을 담아 이름 붙였다.
아버지 신경균 작가는 3세대 작가의 재능에 경험을 더한다. 신경균 작가는 대학 시절엔 조선시대 지방 도요지를 연구했고, ‘세종실록지리지’ 같은 고문서에 기록된 도요지 수백 여 곳을 직접 답사했다. 한국 전통 도자기를 들고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인전을 펼친 아버지는 2022년 5월, 아들 신현민과 일곱 번째 가마를 지었다.
신경균 작가가 오랜 세월 연구한 주제는 달항아리(백자 대호). 백토를 구할 수 있는 양구에서 백자 생산에 적합한 가마를 지어 아들과 함께 도요지를 경영하는 이유다. 세상에는 직접 해봐야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있다. 공예가의 실전 노하우가 가마터에서 전수되고 있었다.
가마는 숨을 쉰다
불 때는 봉통에서 사람 숨소리 같은 게 들린다. 소리는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현장 작업자들은 “가마 예열이 순조롭다는 징조.”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가마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졌다.
가마 불을 때기 전, 도예가들은 가마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경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릇의 안녕과 무사를 기원했다. 가마를 만든 건 사람의 일이나, 거기서 기막힌 예술작품이 나오는 건 하늘의 몫이라는 태도였다.
“꺼내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못 참고 꺼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현장에서 만난 작가들은 가마에서 완성된 기물을 꺼내는 순간이 도예 활동의 커다란 낙이라 말했다. 재벌구이를 마친 그릇을 마주하는 순간이 가장 들뜬다는 것이다. 그들은 “버리는 그릇도 만만찮게 많지만, 양품을 건졌을 때의 희열은 고된 노동을 창작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작업자들은 양품 도자를 상상하며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숨 쉬는 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마 속 불길을 조율한다. 불침번처럼 교대근무를 서기도 한다. 봉통에 꾸준히 소나무를 던져 불기운을 보살피는 시간은 대략 20시간. 그 후론 그릇을 식히는 시간을 1주일 정도 갖는다. 흙문을 허물어 기물을 조심스럽게 꺼내, 검수를 마치면 가마터에서의 작업이 끝난다.
MADE IN 장작가마
“장작가마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 있어요. 그게 그릇에 독보적인 멋을 만들어요.”
3세대 도예가 신현민은 가마의 속사정을 전했다. 가마 밖 환경은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지만, 안에서 불이 휘는 건 당시 날씨나 지역별 기후의 변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모습으로 빚은 그릇이 각자 다른 개성을 부여받는 이유다. 신 작가는 전통식 도자가마의 특장점을 고기 굽기에 빗댔다. 전기가마가 가정집 전자레인지라면, 장작가마는 캠핑장 숯불 그릴이라는 것이다. 고기가 익는 건 매한가지지만, 조리 환경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그릇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연은 작품 조형에도 영향을 미친다. 불을 너무 많이 쫴서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수축했는데, 결과적으로 실루엣이 더 자연스러운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신현민 작가는 이런 설명을 보탰다.
“그릇을 입에 댔을 때 닿는 느낌. 그릇을 손에 쥐었을 때 느끼는 실감. 그런 걸 미세하게 조정하면서 만족하는 포인트를 찾아내요. 도자기 만드는 사람들은 이제 여기서부터 들뜨기 시작해요. ‘이런 걸 불에 구워내면 어떤 모습일까?’ ‘그릇이 어떻게 나올지 너무 궁금해!’ 생각한 대로 결과물이 나오면 그만한 희열이 없어요.”
가마터 구경을 마치고 1주일 후. 그릇 사진이 도착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각병이었다.
과정이 특별하면 사고 싶다
그릇처럼 일상에서 실질적인 쓸모를 갖는 공예품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자기는 어떤 기준으로 사야 할까?
그런 걸 알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신현민 작가의 양구 가마터 초대는 그런 점에서 특별했다. 덕분에 잘 몰랐던 것을 잘 알게 됐다. 소나무 장작 냄새가 몸에 밴 불멍도 특별했지만 말이다. 강원도 양구에서 배운 것은 도자기의 품격이었다. 제작 과정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으뜸이다. 나는 앞으로도 공예가의 손끝을 바라볼 것 같다.
😈 전통 도자는 제작이 수고스럽지만, 과정을 향유하는 기쁨이 큰 것 같아요. 사람들이 도자 공예품에 높은 가치를 매겨 거래하는 이유는 성실한 창작자의 ‘역량’과 오름가마 특유의 ‘우연성’이 아닐까요.
전통이나 예술 같은 추상적인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는 어떤 도자기들이 있나요? 어떤 가치와 감성을 곁에 두고 있나요?
정리 프라이스
글 김정년
사진 한희석 김정년
장소 강원도 양구 조령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