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뿌리깊은 나무를 수집하다
문화 기획자 김선문
디자이너 최다운
오래된 이발소를 직접 찾아가며 겪은 경험을 ‘이발일기’라는 이름으로 인스타그램에 기록한다. 어르신들이 느슨하게 나누는 대화, 시대의 흔적이 남은 도구들에서 발견하는 풍경은 그에게 디자인적 영감이자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프라이스는 ‘한국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있어요. 그러다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이발 일기’ 계정을 발견했죠. 오래된 이발소 사진과 짧은 글들이 눈길을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 이야기를 쓰고 있을지 궁금해졌고, 더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립문 근처의 오래된 건물 2층에 자리한 최전선 디자인 사무소로 찾아갔습니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최전선 디자인 사무소를 운영하는 디자이너 최다운입니다. 한국의 이발소(혹은 이발관)를 ‘이발 일기’라는 이름으로 인스타그램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발소의 풍경, 간판, 도구, 그리고 그 안에서의 경험을 사진과 글로 풀어내고 있어요.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거주하면서 근처 이발소는 거의 다 가본 것 같아요. 여행 중에도 이발할 시기가 맞으면 현지 이발소를 일부러 찾아가고 있습니다.
TALK 1. 나는 왜 이발소를 수집하는가
이발소를 수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이발소를 방문했어요. 이발소를 바깥에서 보면 대부분 불투명 시트로 가려져 있어 안이 잘 보이지 않거든요. 막연한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졌고 괜히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제주도의 이발소에 갔어요.
이발사님이 민소매 차림으로 부채질을 하고 계셨는데요. 이발하겠다 말씀드리니 곧바로 말끔하게 가운을 차려입고 제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셨어요. 머리를 자르며 근처 맛있는 횟집을 여쭤봤는데, “비싼 데가 제일 맛있는 곳”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툭툭 던지시는 말씀이 재밌고 정겨웠어요.
이발소의 이런 모습을 나만 알고 있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이발소 경험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발 일기’는 2021년부터 시작했어요. 스포츠머리를 유지하다 보니 2~3주마다 이발을 하는데, 그 경험을 자연스럽게 기록하게 된 거죠. 지금까지 기록한 이발소는 40여 곳쯤 됩니다. 방문한 걸 모두 다 기록했으면 100여 곳쯤 될 거예요.
저는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곳에 끌리는 편이에요. 대부분 이발사님들은 연배가 있으신데, 그분들과 같이 시간을 보낸 물건들이나 인테리어 요소도 시각적으로 흥미로웠어요. 이발소를 방문하는 일은 제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문화 경험 중 하나입니다.
미용실과 이발소의 커트는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이발소 커트는 미용실과는 접근 방식이 달라요. 이발은 미(美)를 위한 스타일링이라기보다, 단정함을 만드는 기술이라는 인상이 강해요. 이발사님들은 예쁘게 자르는 것보다 사람마다 다른 두상을 보고 어디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실용적으로 판단하시는 것 같아요.
단순해 보이는 헤어커트인데, 어떤 분은 가위를 치시면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정리하고, 또 어떤 분은 가르마 라인을 보려고 흰색 분을 살짝 칠하시기도 해요. 각자의 방식과 기술이 달라서 재밌어요. 다만 이발소에서 스타일에 대한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즐기시는 게 좋습니다. (웃음)
이발소를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있나요?
최대한 오래되어 보이는 곳으로 갑니다. 오래될수록 내부가 흥미로운 모습일 확률이 높아요. 그리고 지도 앱에 등록되지 않은 이발소를 일부러 찾아가 보기도 합니다. IT 플랫폼에 등록이 안 됐을 뿐이지, 실제로는 성업 중인 이발소가 있거든요. 겉보기에 개성이 있어 보이거나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발소가 있으면, 그런 곳은 위치를 저장해두고 따로 찾아가요.
이발소에서 기록한 것 중, 디자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인가요?
디자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단연 ‘이발 의자’입니다. ‘바론 상사’ 로고가 박힌 이발 의자인데, 내부 인테리어는 다 바꿔도, 의자는 안 바꾸고 계속 쓰는 분을 많이 봤어요. 스테인리스 프레임에 가죽시트를 썼는데 1950~60년대 북유럽 빈티지 고급 의자 같은 느낌이거든요.
미용실에서도 기능성 고급 의자를 볼 수 있지만, 이발소 의자에는 안마기, 재떨이, 각종 버튼과 스위치 등 조작 인터페이스가 잔뜩 달려 있어요. 측면엔 110v 전기 콘센트도 있는데, 예전엔 거기에 헤어드라이어를 꽂아 썼다고 해요. 한마디로 온갖 게 다 붙은 20세기식 하이테크죠. 이런 물건이 이제는 화석처럼 낡고 있어요. 오래된 물건들이라 제 기능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인두’도 인상적입니다. 예전엔 파마를 인두로 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이발소 인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데기가 아닙니다. 드라마에서 본 고문 도구처럼 생긴 투박한 금속 도구예요. 여전히 그걸로 파마를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리고 이발소에 걸린 ‘달력’은 은행에서 나눠주는 달력이나 탁상용 달력이랑 비교해 보면 뭔가 다른 감성이 있어요. 이발소 전용으로 달력을 나눠주는 커뮤니티가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전기밥솥’도 기억에 남네요. 이발소에서 전기밥솥은 밥 짓는 용도가 아니라 면도용 수건을 데우는 데 사용해요. 수건이나 천을 깨끗한 물에 적셔 밥솥에 넣어 두었다가 면도 전에 써내서 따뜻한 스팀 타월로 활용합니다.
이런 물건 하나하나가 이발소만의 특유의 분위기를 구성하고 있어요.
TALK 2. 이발소를 기록하는 방식
다운님만의 특별한 수집 방식이 있나요?
사실 이발 일기는 계획적으로 기록하는 아카이브는 아니에요. 저는 물건을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수집한다고 생각해요. 경험을 수집하는 방식은 ‘사진’과 ‘글’입니다.
우선 사진을 남겨요. 이발 경험하면서 담아낸 이발소의 모습이나 여러 모습을 자연스럽게 사진으로 찍어두고 떠납니다. 내부를 찍을 때, 되도록 사방의 면을 한 장씩 찍으려고 합니다. 그래야 인스타그램에서 게시물을 넘겨볼 때 공간의 구조가 자연스럽게 눈에 잘 보이거든요. 그리고 오래된 물건이나 세월이 느껴지는 디테일 위주로 사진을 찍어둡니다.
글은 바로 쓰진 않고, 일단 머릿속에 남겨두고 일하다 시간이 남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글로 옮겨요.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서 당시 기억을 다시 되살리면서 쓰는 편입니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휘발되잖아요. 이발을하면서 어떤 단어에 대해서 설명해 주셔서 이건 꼭 써야지 했는데, 막상 글을 쓸 땐 기억 나지 않을 때도 많아요. (웃음)
이발소 안에서의 분위기나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들도 흥미롭게 기록하시는 것 같아요.
이발소에 계신 어르신끼리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너무 정겨워요. 말이 빠르지도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잘 이어져요. 한 분이 던진 질문에 다른 분이 대신 답하고, 누가 누구에게 말한 건지 헷갈리는데도 대화가 끊기지 않아요. ‘소통’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요즘 세대는 말을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잖아요. 간결하고 빠르고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기준도 있고. 근데 이발소에서 듣는 말들은 그런 틀에서 벗어나 있어요. 효율적이지도 않고 심지어 생산적인 내용도 딱히 없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느슨하게 이어지는 말들 속에서 관계가 유지되고, 그 안에서 나름의 활기가 오가요. 이런 풍경을 보고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런 걸 보면서 저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너무 효율적으로만 소통하려고 하지 않게 됐어요. 어떤 공간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피로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잖아요. 어르신들에게 이발소가 그런 곳인 것 같아요.
TALK 3. 이발 문화를 기록하며 배운 것
다운님이 생각하시기에 이발소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이발소는 머리 자르는 공간 그 이상이에요. 일상 속 작은 공동체로서 역할하고 있어요.
미용실에 오전 일찍 가보면 파마를 하거나 기다리는 분들을 자주 볼 수 있잖아요. 이발소도 마찬가지예요. 아침 일찍 가보면 할아버지들이 많이 계셔서 바로 이발을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 단골 손님들이시죠. 이발하면서 오가는 대화를 듣다 보면 한 동네에서 서로 십 년, 이십 년 넘게 관계를 맺어온 사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어요. 머리를 자르러 온 게 아니라 사람들을 만나고 일상을 나누는 소통의 장소인 거죠.
하지만 이발소라는 문화가 머지않아 사라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발소 문화가 사라져간다는 인식은 일종의 착각일 수도 있어요. 젊은 세대가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낯설고 사라지는 문화처럼 느껴지는 것뿐, 실제로 방문해 보면 여전히 운영 중인 이발소가 많아요.
물론 앞으로는 점점 줄어들긴 하겠죠. 현역 이발사님들이 은퇴를 시작하는 시점인 10~20년 뒤쯤일 것 같아요. 하지만 문화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도 하고, 새롭게 생겨나기 때문에 없어진다고 아쉬워하기보다는 그 문화에 대한 기록을 잘 해두고 이 공백을 메울 다른 문화를 잘 받아들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발소와 이발 문화를 기록하면서 배운 점은 무엇인가요?
세대 차이라는 게 결국 서로에 대한 오해나 거리감에서 오는 거라는 걸 알게 됐어요. 이발소에서 만난 분들과 대화하면서, 겉모습은 달라도 결국 사람 사는 건 비슷하다는 걸 많이 느껴요.
요즘은 온라인에서 세대 갈등을 부추기는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퍼지면서,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마치 자신이 겪은 것처럼 여기거나 특정 세대를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잖아요. 하지만 제가 이발소를 다니며 깨달은 건, 세대 차이보다 개인의 성격과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점이에요.
‘세대에 대한 편견은 왜 생길까?’ 생각해 보면, 젊은 세대가 두 세대 이상 차이 나는 분들이랑 만나서 대화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모든 이야기에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각자 생각과 다르다고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죠.
모르는 것은 낯설게 느껴지고, 낯선 것은 이상하게 보여 배척하기 쉽지만,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우리 모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세대 차이가 소통을 가로막는 벽이 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서로를 이해하려는 작은 노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어요. 이발소는 그런 소통의 장을 자연스럽게 제공해 주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디자이너로서 본 이발소는 어떤 공간인가요?
이발소를 사용자 경험(UX) 디자인의 관점으로 봤을 때는 불편한 요소들이 분명 많아요. 젊은 손님을 손주처럼 대하신다고 조금 무례하다거나, 여름에 갔는데 냉방이 잘 안되고 있다거나, 카드 결제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불편함’이 오히려 이발소만의 독특한 경험을 만들어내기도 해요. 겉으로 보기에 고집스러워 보이는 것도 대화해보면 나름의 이유가 있을 수도 있어요. 카드기가 정말 고장 났거나, 당장 현금이 필요한 현실적인 사정이 있는 경우도 많았거든요.
결국 이발소 경험은 무엇을 가치 있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 공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 사람, 말투, 도구 같은 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경험이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것들을 소중히 수집하고 있습니다.
😈 오래된 이발소의 문턱을 넘어서면 그곳에는 20세기 한국의 시간이 멈춰 있습니다. 바론 상사 로고가 박힌 이발 의자, 스팀 타월을 데우는 전기밥솥, 벽에 걸린 독특한 달력까지. 기능성보다 관계성이 중요한 이 공간에서 디자이너 최다운님은 단순한 머리 손질 너머 세대를 뛰어넘는 진정한 관계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기록된 ‘이발 일기’를 통해 각 이발소만의 고유한 분위기와 오랜 시간 축적된 문화적 가치가 드러납니다. 그가 수집하는 경험은 물리적 공간 너머 그 안에 담긴 따뜻한 인간적 교류와 세대를 초월한 소통의 기록입니다.
이 글을 읽고 동네 이발소가 궁금해지셨나요? 가끔은 오래된 이발소, 미용실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그곳에서 찾게 될 경험은 단정한 헤어스타일 이상의 특별한 가치를 선물할지도 모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