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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 위에 저 소나무

수묵화가 수록의 조명장치
수묵화가 수록의 프로필. 수록 @sue1og 회화 / 공예 수묵화가. 좋아하는 사물과 작업하며 떠올린 생각을 그림으로 기록한다. "시끄러운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지길 원해서 그립니다."
인터뷰 콘텐츠 DM그라운드의 인트로 다이얼로그. 안녕하세요 frice입니다. 프라이스는 한국의 전통에서 디자인 언어를 탐구하는 디자이너가 궁금해요! 인스타그램 피드에 올리신 수묵화 작품 인상깊게 잘 봤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본업은 따로 있고 취미이자 자아실현의 매개체로 수묵화를 그리고 있어요.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소나무 그림을 일관성 있게 창작하시는 게 인상적인데요. 여기에 어떤 이야기가 실려있을지 궁금합니다

저는 본명의 중간 글자인 ‘수(受)’와 기록할 ‘록(錄)’을 따서 ‘수록’이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그냥 좋아서 그려요. 그 중 소나무는 사계절 내내 푸른 침엽수여서 특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소나무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했었어요.

이사무 노구치가 만든 아카리(AKARI) 조명을 좋아하는데요, 한옥 전시 공간에 조명장치가 필요해서 그 제품을 찾았는데 아쉽게도 원하는 디자인을 찾을 수 없었어요. 대체품을 들여놓고 고민했는데 내친김에 종이 위에 직접 수묵화를 그렸어요. 만들고 보니 참 아름다웠죠.

수묵화가 노수연님의 조명장치

상업적인 작품은 지양하는 입장이라 직접 디자인 제품을 만들 생각은 크게 없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한지로 조명을 만드는 분과 협업을 해보고 싶어요.

작가님은 수묵화의 매력이 무엇이라 생각하세요?

무게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먹과 종이라는 재료만으로도 소박하면서 정적인 멋을 표현할 수 있죠. 그리고 저는 옛것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수묵화가 노수연님의 조명장치를 확대한 모습

요즘에는 동양화 물감인 안채를 써서 유색 회화를 그려보는데요. 여기서도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풀을 쑤고 화판에 배접을 하고 수묵화를 그리는 일 전체가 저 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이기도 해서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시끄러운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지길 원해서 그립니다.

한지, 어디까지 쓸 수 있어요?

햇빛이 드리운 미색 한지

<1부에서 이어집니다>

둥글게 말린 색한지
ⓒfrice

한지, 이전에는 어떤 곳에 많이 쓰였었나요?

1980년대 이전에 한지가 가장 많이 사용된 분야는 건축 자재 분야였어요. 장판지, 벽지 수요가 많았죠. 병풍이나 족자처럼 표구 분야 수요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건축 자재는 기계로 만든 종이와 PVC 장판으로 대체되고, 표구는 액자로 대체됐죠. 한지의 역할이 대체되니, 쓰임새 역시 점점 줄고 있습니다.

노란 한지장판이 깔린 한옥 내부.
그렇다. PVC 노란 장판의 원조는 한지 장판. 한지 장판 색이 누리끼리했던 이유는 장판용 미색 한지에 여러 번 기름을 칠하고 경년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PVC 노란 장판의 원조는 한지 장판. 한지 장판 색이 누리끼리했던 이유는 장판용 미색 한지에 여러 번 기름을 칠하고 경년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오늘날 생산 중인 장판용 한지. 한지장판은 여러 장의 한지를 붙이고, 천연 콩기름을 침투시킨 뒤 옻칠을 더한다
오늘날 생산 중인 장판용 한지. 한지장판은 여러 장의 한지를 붙이고, 천연 콩기름을 침투시킨 뒤 옻칠을 더한다. ⓒ천양피앤비

03. 연구, 디자인, 도전

혹시 뜻밖의 산업 군에서 한지를 써보겠다는 제안이 있나요?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 연구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지를 차량 내부 인테리어에 사용하고 싶은데, 같이 고민해달라는 의뢰였죠. 자동차에 종이를 쓰는 것이 자칫 불가능해 보였지만 한지라면 다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 오늘날 한지를 새롭게 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협업에 나섰습니다.

동양한지에서 차량 인테리어용으로 개발한 샘플 종이. 국내 완성차 그룹 계열사에서 의뢰했다. 직접 만져보니 다른 한지보다 질기고 튼튼하다
동양한지에서 차량 인테리어용으로 개발한 샘플 종이. 국내 완성차 그룹 계열사에서 의뢰했다. 직접 만져보니 다른 한지보다 질기고 튼튼하다. ⓒfrice

자동차 업계에서 요구하는 스펙에 맞출 수 있었나요? 한지는 수공예품이라 제작이 까다로웠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차량 인테리어용 한지는 실패했어요. 양산(대량 생산)이 어렵습니다. 튼튼한 한지를 만들더라도 균일한 품질을 내기 힘들었어요. 그리고 높은 열을 가하거나 200톤에 달하는 압착기로 한지를 누르는 실험을 거쳤는데, 양산용 자동차에 적용되는 극한 테스트는 한지도 견딜 수 없었어요.

지금은 공예가 선생님이 모터쇼에 출품할 콘셉트카에 직접 설치하는 수준이 최선이죠. 그래도 이런 시도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지의 현대적인 쓸모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산업 군에 있다는 것을 더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기억나는 다른 한지 연구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종로 물나무 사진관과 손잡고 ‘사진 인화용 한지’ 개발을 마쳤습니다. 저희는 ‘인쇄용 도침 한지’라 부르는데요. 성분은 국산닥 100%. 종이 분류 기준으로는 *2합 순지입니다. 한지에 디지털 사진을 인화하려는 디자인 프로젝트였습니다. 기존 한지를 프린트기에 걸면 종이 섬유질이 굵은 탓인지 한지가 기계에 걸리거나 구겨지는 문제가 있었어요.

인쇄용 도침 한지에 인화한 인물초상사진
인쇄용 도침 한지에 인화한 인물초상사진. ⓒfrice

‘도침’이라는 한지 제작 공정이 있어요. 종이를 두드려서 표면을 고르게 만드는 일인데, 도침을 강화하며 문제를 해결했죠. 이 종이는 미색 한지의 색감을 깊이 있게 유지하는 방향으로 개선을 시도 중입니다.

한지도 샘플북이 있을까요? 디자이너에게 종이 샘플북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있습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산하 홍보관에서 만든 ‘한지 미리보기 책’이 대표적입니다. 몇몇 종이 업체도 생산 가능한 한지들을 묶어 샘플북을 내고, 색이 들어간 색한지를 모아 색깔을 구분하기 위해 샘플북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기계지 샘플북과는 다릅니다. 훗날 샘플북에 있는 한지가 다 떨어져, 그 종이를 비슷하게 만들더라도 결과적으로 비슷하지 않은 종이가 나오거든요. 컬러 팔레트를 찍어 오차 없이 디자인을 보려는 기계지 샘플북과 다릅니다. 제 생각에 한지 샘플북은 역사적인 기록물에 가깝다 봐요.

북촌 한지가헌에서 제작한 ‘한지 미리보기 책’. 
국내 18개 공방의 400여 종 한지를 소개하는 책자. 문화재용, 인쇄용, 공예용, 서화용, 인테리어용 등 용도별로 한지를 분류해, 종이에 얽힌 정보를 제공한다
북촌 한지가헌에서 제작한 ‘한지 미리보기 책’. 국내 18개 공방의 400여 종 한지를 소개하는 책자. 문화재용, 인쇄용, 공예용, 서화용, 인테리어용 등 용도별로 한지를 분류해, 종이에 얽힌 정보를 제공한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04. 한지의 내일은?

한지가 요즘 위기라 들었습니다. 한지 업계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유통자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한지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한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줄고, 종이 수요 자체도 줄어서 생산도 나란히 줄어드는 상황이죠. 예컨대 색한지(色韓紙)는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읍니다. 지역별 한지는 염료의 숙성과 건조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나는데요. 이것은 전통한지의 특색이기도 해서 일부러 가게에 질 좋은 물건을 모아두려 해요.

세가지 색한지를 둥글게 말아 촬영한 사진
ⓒfrice

전국 각지의 장인들이 꾸준히 생산을 하셔야 다양한 색을 지닌 한지가 나오는데 그렇지 못해서 큰 고민입니다. 인기 있는 색은 계속 만들어지더라도, 중간을 받쳐줄 색이 줄어드니 결과적으로 한지의 컬러 스펙트럼이 줄어드는 거죠.

또 다른 문제는 수입 한지들을 선별하는 일인데요. 수입 한지의 재료 원산지나 생산지역을 추적하기 쉽지 않은 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지 품질 관리는 앞서 언급한 다양성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내에서 만든 것도 표준을 만드는 게 어려웠는데, 해외에서 만든 것은 관리가 더 어렵죠.

한지의 표준이나 품질관리 기준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한지 품질 표시제’라는 게 있습니다. 한지 생산자, 제조 방식, 재료 원산지 등의 제반 사항을 표기하는데요. 한지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된 제도입니다. 한지를 사용하는 구매자에게 한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전통한지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었어요.

취지는 좋은데,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모자랍니다. 만약 한지 생산처에서 사정이 생겨 표기된 정보를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한지는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공정을 거치는데, 이 중 한 부분만 헐거워도 품질 격차가 나타나요. 사람이 만드는 종이라서 결국 편차가 나타납니다. 아쉽지만 유명무실한 제도가 됐지요.

한지 디자인 현황을 설명하는 박창완
ⓒfrice

‘한지를 외국에서 싸게 들여오는 건 어떨까?’ ‘한국 전통과 한지의 우수성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자!’ 이런 고민으로는 한지가 점점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한지는 지금 실제로 위태롭습니다. 특히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진 전통한지가 지금은 후계자가 없어서, 각 지역의 장인이 돌아가시면서, 지역의 전통한지 생산이 끊어지는 곳이 많습니다.

전통이 단절되는 것도 큰 문제군요.

한국은 ‘전통’이라는 화두가 ‘옛 것의 계승’과 연관됩니다. 그 어느 나라보다 변화가 빠르지만, 전통이나 전통의 순서를 건드리는 일만큼은 변화가 더디죠. 제 생각에 한국에서 ‘전통’과 ‘보존’이라는 개념을, 많은 분들이 같은 맥락으로 인식합니다. 저는 두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요.

동양한지에서 자체 개발한 염색 옻칠 한지
동양한지에서 자체 개발한 염색 옻칠 한지 ⓒfrice

전통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되는 것입니다. 한지의 전통은 ‘닥나무 섬유로 만든 종이’라는 범주 안에서 시대의 요구에 맞춰 변화합니다. 보존은 문화재 보존용 한지나 전통한지 제작 기법처럼 ‘지켜야 할 옛 것’에 필요한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계승된 옛 것이 보존을 벗어나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다’라며 배척 받는 게 현실입니다. 보존이라는 명분이 전통을 막는 셈이죠.

“옛 것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건 계승이지 전통이 아니다.” 라는, 예전에 들었던 어느 지식인의 말씀이 기억나네요.

해외 사례 중 참고할 만한 게 있을까요?

해외 출장 때 만난 화지(일본 전통 종이) 관계자의 말씀입니다.

“원료가 국산인지 수입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시대에 사용될 수 있는 종이를 만들어 잊히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하죠. 옛날 방식으로 자국 전통 종이를 만드는 것은 계승되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현대에도 사용될 수 있는 종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옻칠한지를 포갠 모습
옻칠한지를 포갠 모습 ⓒfrice
옻칠한지는 종이 표면에 가죽을 보는 듯한 거친 질감이 드리운다
옻칠한지는 종이 표면에 가죽을 보는 듯한 거친 질감이 드리운다. ⓒfrice

저는 이 말씀이 한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도 부합한다고 봐요. 혁신적인 제작시도나 제조공정의 현대화 같은 건 존중받아야겠지요. 해외 전통 종이 관계자분들은 저에게 “한지에 옻칠을 하는 건 좋은데, 왜 피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성분을 빼지 않느냐?”는 피드백을 전해주셨어요. 옻칠한지에 쓰는 원료는 옻나무에서 추출한 걸 그대로 칠하거든요. 실제로 한국에서 전통 옻을 다루는 분들은 팔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 있어요. 옻의 독한 성분 때문이죠.

‘옻의 특정 성분을 분리하면 그것은 정말로 전통에서 멀어지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대화 과정에서 전통의 개념이나 전통을 규정하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뒤섞이는 것 같아요.

밝은 조명 아래에서 한지의 질감은 도욱 도드라진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한지의 질감은 도욱 도드라진다.ⓒfrice

한지의 대중화를 위해 어떤 것을 해볼 수 있을까요?

유통자 입장에서 퍼포먼스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일종의 쇼 엔터테인먼트를 제안하고 싶네요.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니면, 서예나 악기 연주하는 분이 계시죠. 꿀타래 가게 사장님도 타래를 두 배 네 배 늘어뜨리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볼거리를 만드시거든요. 한지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퍼포먼스가 거의 없었어요. 한지에 사람들의 감각을 사로잡는 특별한 물성이 없진 않거든요. 앞으로는 한지를 이용한 예능적인 퍼포먼스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인사동에서 한지를 뜨고 그걸 대중 앞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30여 년 전, 동양한지가 종로 견지동에 있을 때 매장 안에서 한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국에서도 촬영을 왔었고. 거리를 다니시던 분들이 한지에 관심이 생겨 문의도 많이 주셨어요. 한지가 건조될 때까지 기다리다 종이를 사 가셨던 손님들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컬러와 기법이 적용된 한지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다양한 컬러와 기법이 적용된 한지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frice

생산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관광지에 체험형 전시공간을 따로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지를 좀 더 대중적인 곳에서 재미있게 퍼포먼스를 하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자체나 공공기관에서 한지산업을 위한 지원사업을 추진하신다면! 생산자나 유통자가 문화 진흥 프로젝트를 직접 만들 수 있게 지원을 하거나, 대중적인 공간에서 감각적인 퍼포먼스를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개선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동양한지는 국산 한지를 지키고 싶어요. 1968년부터 대대로 인사동을 지킨 전문가로서, 앞으로도 국내 생산 업체와 상생하려고 합니다. 한지를 디자인에 활용하는 분들도 국산 한지를 위주로 사용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2부 인터뷰는 한지의 오늘을 업계 전문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간이었어요. 한지를 만드는 사람, 한지를 쓰려는 사람 모두 고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한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자동차 인테리어 소재 연구나 사진 인화용 한지개발은 디자이너의 의지가 느껴지는 시도여서 눈길을 끄네요. 여러분은 한지의 내일을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오늘의 한지를 말하다

동양한지 박창완님이 한지를 꺼내는 모습
동양한지 박창완님을 담아낸 커버 이미지
동양한지 박창완님 ⓒfrice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한지를 연구하고 만들고 판매하는 박창완입니다. 경기도 김포에 한지 소재연구소를 만들었는데요. 염색이나 후가공을 거친 특수한지를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어요. 저는 한지의 현대적인 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작업한 한지들은 인사동 동양한지에서 판매하고 있어요. 부친을 도와 남동생과 한지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01. 왜 인사동에 한지 가게가 몰려있을까?

부친께서 인사동 한지 전문가로 유명한 박성만 선생님이시죠.

맞습니다. 저는 교육학을 공부했어요. 대학원에서는 한지가 아니라 학생 인권을 공부했었죠.(웃음) 인사동에서 한지 가게를 운영하시던 부친께서 한지 업계로 들어오라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한지의 가치를 높이고 맥을 이을 사람이 절실하다고요.

동양한지에 전시된 한지공예품 샘플과 판매중인 종이들
동양한지에 전시된 한지공예품 샘플과 판매중인 종이들 ⓒfrice

2009년부터 한지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를 위해 미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국내 한지 장인을 만나 사례 분석과 제작 기법을 정리할 수 있었죠. 대학원에서 했던 학술 연구는 큰 힘이 됐습니다. 지금은 문화재 복원용 한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사동 동양한지는 50년 넘게 운영중입니다.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요?

전주에서 할아버님이 일제강점기 때 한지를 만들어 파셨고, 부친께서는 유통에 힘쓰셨어요. 부친은 1968년에 서울 인사동으로 들어와 1972년부터 한지 가게를 여셨죠. 동양한지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인사동이 명동 예술거리의 배후지역이라고 해요. 전성기에는 인사동에 종이를 다루는 지업사만 40여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1982년생인데 인사동 한지 가게 아들이다 보니 이 동네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계동에서 남산을 향해 바라본 도심(1982).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옛날 인사동 풍경이 보인다
계동에서 남산을 향해 바라본 도심(1982).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옛날 인사동 풍경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80년대 후반, 동양한지는 조계사 옆에 있었어요. 매장도 지금의 2배쯤 됐죠. 한지를 배송하는 차량만 8대였어요. 한지 뜨는 장인을 따로 모셔 매장에서 한지를 생산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사동 거리에서 바라본 동양한지
인사동 거리에서 바라본 동양한지 ⓒfrice

옛날 인사동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나요?

부친 말씀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인사동은 안국동에서부터 인사동으로 내려오는 길 가운데에 실개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골동품 매장이 있었죠. 아침이 되면 골동품을 수집한 리어카가 다녔다고 전해져요. 병풍을 수리하거나 족자를 꾸미는 표구사가 늘어나면서 부자재를 취급하는 필방, 지업사가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상권이 만들어지면서 ‘전통문화의 거리’가 된 거죠.

창완님의 기억에서 인사동은 어떤 풍경입니까?

제가 기억하는 건 ‘1990년대 인사동’입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에도, 종로 골목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리어카에 실려있는 건 북촌이나 서촌의 한옥집에서 나온 물건들이었어요. 당시 토박이 주민이 집터를 허물고 새 집을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집에서 벽지로 썼던 종이라거나 집 어딘가에 방치된 족자 같은 게 리어카에 실린 채 인사동을 떠도는 거죠.

1975년 8월 서울 명동 서울은행 본점 앞을 지나는 리어카 꾼들
1975년 8월 서울 명동 서울은행 본점 앞을 지나는 리어카 꾼들 ⓒ공유마당

리어카꾼이 “XX동에서 철거하다 나온 물건인데 필요하면 살래요?”라고 말을 붙이면서 인사동 가게를 돌아다녔어요. 그런 물건이 임자를 만나면 미술품이 되는 거였죠. 안목이 있는 분들은 거기서 문화재급 생활 도구를 건지기도 하셨어요.

“고서나 고미술품을 구하려면 인사동에 가야 한다”라는 소문 같은 게 생기고 실제로 인사동에서 그런 물건을 쥐고 계신 분들이 머무르는 거죠.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사동의 이미지는 당시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임대료 문제도 있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 상권이 되면서 떠나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말씀대로 인사동 거리를 걷다 보면, 예술거리보다는 관광지로 동네 역할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는 거죠. 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에 기반한 문화는 실생활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고, 전통기술이 쓰이는 곳도 점점 사라지고 있거든요. 한지 가게도 많이 줄었어요.


동양한지에서 보관중인 한지들 닥나무 섬유가 인상적이다
ⓒfrice

02. 한지란 무엇인가?

한지는 정확히 어떤 종이입니까?

한지는 ‘닥나무 섬유를 떠서 손으로 만든 종이’를 통칭합니다. 한지[韓紙]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건 1958년 ‘대한민국 통계연감’인데요. 그전에는 닥나무 저[楮]에 종이 지[紙]를 써서 ‘저지’라 불렀어요. 전통한지는 닥나무를 비롯한 종이용 나무가 자라면 따로 수확을 해요. 나무결을 손으로 벗겨내 잿물에 삶고, 섬유를 모아 그것을 방망이로 두들겼죠.

미색 한지를 포개 접사용 특수렌즈로 촬영했다
ⓒfrice

화학적으로 보면 닥나무 섬유를 ‘수소 결합’해서 만든 종이입니다. 산도가 적은 중성지고요. 중성지는 산성과 알칼리성을 띄는 일반 종이보다 수명이 길어요. 그래서 천년을 간다는 거죠. 원료인 닥나무의 생장 환경, 한지를 만드는 그 날의 날씨, 장인의 컨디션, 원료의 처리 과정 등의 조합을 거쳐 한 장의 한지가 태어납니다.

한지를 한국에서 만들어야만 한지인가요?

원칙적으로는 「한국에서 자란 닥나무 섬유를 원료로, 한국 고유의 초지 기법인 외발뜨기 기법을 사용하여, 장인이 만든 수제 종이」를 얘기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한지의 범위를 「사람이 닥나무 섬유를 초지 기법으로 만든 종이」로 보는 게 옳다고 봅니다. 지금은 기계로 만들거나 손으로 만든 한지의 구분이 없어져 있어서 고민이네요.

최근 2~3년 사이에 닥나무 재배와 수확이 어려워지고, 인력난이나 비용 증가로 전통방식이나 제작 환경을 지키기 힘들어졌죠. 현실적인 이유로 한지의 범위는 느슨해졌습니다. 오늘날 한지 업계에서는 수입산 닥나무를 사용해 한국에서 만드는 것도, 한국에서 만들지는 않아도 닥나무 섬유로 만든 종이도, 기계로 만드는 것도 다 한지라 부르고 있어요.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로 범위가 넓어진 거죠.

참고로 해외에서도 한지와 비슷한 물성을 지닌 전통 종이를 생산합니다. 일본에서는 화지(和紙), 중국은 선지(宣紙)라고 부르죠.

전통한지 제작을 위해 닥나무 겉껍질을 벗겨 건조하는 모습
전통한지 제작을 위해 닥나무 겉껍질을 벗겨 건조하는 모습 ⓒ동양한지

특히 한. 중. 일 3국이 공통적으로 닥나무 섬유질로 종이를 만들어요. 종이 만드는 기술은 각 나라별 지역, 환경적 차이로 기법이 나뉘게 됐습니다. 제작 기법의 차이는 닥나무 섬유질 배열에 영향을 주는데요. 이것이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에 질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한국 전통한지의 경우, 발틀에 턱을 없애고 닥나무 섬유가 사방으로 자유롭게 배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박창완님이 한국 전통 외발뜨기하는 모습. 발틀에 턱이 없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박창완님이 한국 전통 외발뜨기하는 모습. 발틀에 턱이 없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동양한지

전통방식을 고증한 한지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전통한지는 제작 공정을 현대화시킨 한지와 비교하면 광택, 질감, 냄새 같은 게 더 좋아요. 한지 장인의 공방 같은 곳을 가면 그 집에서만 나는 나무냄새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자연스러움이 전통한지에 깃들어있어요. 한지 특유의 옅은 풀냄새는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종이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일 텐데요. 종이를 다루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을 줍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한지가 ‘쉼을 주는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한지에서 인상적인 질감이 드러난다
ⓒfrice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우수한 한지는 무엇인가요?

제 기준으로는 ‘미색 외발지’입니다. 오늘날 한지는 여러 가지 색을 지니고 있지만, 한지 속 섬유질이 파괴되지 않은 상태로, 닥나무가 지닌 색감을 드러내는 건 ‘미색’이라 생각합니다. ’외발지’는 외발뜨기라는 기법으로 만든 한지를 뜻해요. 종이를 뜰 때 닥나무 섬유를 넓게 펼치는 판을 ‘발’이라고 하는데요. 천장에 줄 하나만 매달아서 전후좌우로 흔들고, 풀려 있는 닥나무 섬유를 물에서 거르는 기법을 ‘외발뜨기’라 부릅니다.

미색 외발지를 쌓아 측면에서 바라봤다. 종이 모서리의 섬유질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다
미색 외발지를 쌓아 측면에서 바라봤다. 종이 모서리의 섬유질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다. ⓒfrice

많은 분들이 「하얀색 한지가 좋은 한지냐?」라고 물어보세요. 표면이 깨끗하니 좋은 물건이라고 여기시는 거죠. 오히려 하얀색 한지는 약품 처리를 강하게 해야 하거든요. 결과적으로 닥나무 섬유질이 상하기 때문에 질 자체는 미색 한지보다 조금 떨어집니다.


동양한지에서 온 손님이 회화용 한지를 문의하는 모습. 어떤 목적으로 방문했는지 물었다.
“저희는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부원인데요. 동양화 그리기에 적합한 한지를 구하러 왔어요.”
동양한지에서 온 손님이 회화용 한지를 문의하는 모습. 어떤 목적으로 방문했는지 물었다.
“저희는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부원인데요. 동양화 그리기에 적합한 한지를 구하러 왔어요.” ⓒfrice

오늘날 한지는 ‘누가, 왜’ 쓰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회화 분야에서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지는 기계로 만든 종이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한지만의 발색이 있기에 수요가 있습니다.

서양화가 류영신의 추상화 연작. 한지의 닥나무 섬유를 소재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서양화가 류영신의 추상화 연작. 한지의 닥나무 섬유를 소재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ADAGP

한지의 물성을 디자인에 활용하려는 수요도 있어요. 한지는 원료인 닥나무의 섬유를 *고해하는 시간에 따라, **물질을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질감이 나타납니다.

2023년 북촌한지문화센터에 전시된 한지조명장치
2023년 북촌한지문화센터에 전시된 한지조명장치 ⓒstudio.sunnykim
닥나무 섬유가 구름 위를 떠다니는 용을 닮아서 '운용지雲龍紙'라 부른다. 동양한지는 운용지를 조명장치에 쓰기에 적합한 한지로 추천한다
닥나무 섬유가 구름 위를 떠다니는 용을 닮아서 ‘운용지雲龍紙’라 부른다. 동양한지는 운용지를 조명장치에 쓰기에 적합한 한지로 추천한다. ⓒfrice

조명 연출에 적합한 소재로는 ‘운용지(雲龍紙)’가 있어요. 섬유를 덜 갈아서 종이 속에 실타래 같은 게 떠있는 한지인데요. 종이를 빛에 비추었을 때 닥나무 섬유로 표현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유리창에 붙이면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적합한 한지도 있어요. 텍스처감이 몽글몽글한 ‘구름지’같은 한지를 고를 수 있겠습니다.

측면에서 내려다 본 한지 뭉치
ⓒfrice

한지 테두리는 데클 엣지(Deckle edge)라 부르는 자연스러운 보풀이 있어요. 이처럼 한지의 물성을 다양한 목적을 갖고 활용하려는 분들이 한지를 들고 가서 실험하고 계십니다. 업계에 몸담으며 점점 한지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디자인적 실험이 참 소중한 흐름이라 생각해요.

(…2부에서 계속…)

😈 동양한지는 취재하러 갔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추천받아서 알게 됐어요. 한지가 필요하면 동양한지를 간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죠. 인사동의 수많은 종이 가게 중 디자이너가 관심을 갖고 들르는 곳이라면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란 짐작이 들었습니다.

인사동의 옛 모습부터 한지에 대한 전문가 지식까지 유익한 정보를 채집할 수 있었는데요. ‘한국의 종이’ 한지,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양구에서 만난 흙과 불과 나무의 예술

강원도 양구의 장작가마터에서 도자기를 굽는 모습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가마터는 1,350여 기. 고려-조선의 융성한 도자기 문화는 일제 강점기, 전쟁과 근대화를 거치며 자취를 감추었고, 그중에서도 나무토막을 태워 그릇을 얻는 전통적인 가마는 기술 발전과 제작 비용 증가를 이유로 현재 수십 여 곳만 남아있다. 프라이스는 강원도 양구의 도자기 작업장을 다녀왔다. 가마에 온종일 불 때는 날이었다.


가마를 보는 도예가들. 그들은 하루 종일 불상태를 보고 마른 소나무 장작을 가마에 집어넣는다
가마를 보는 도예가들. 그들은 하루 종일 불상태를 보고 마른 소나무 장작을 가마에 집어넣는다. ⓒfrice

전선을 간다

경춘국도 주말 교통체증을 빠져나오자 소양강이었다. 차는 강변 꼬부랑길을 누비며 태백산맥 터널을 가로지른다. 도로에서만 세 시간. 오전 6시에 출발한 차가 강원도 양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였다. 먼 길 달려 도착한 취재처는 휴전선 옆 가마터. 그릇을 굽는 부자(父子) 도예가의 작업장이다. 높게 치솟은 산이 가마터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었다. 외딴곳이었다.

가마의 이름은 조령요. 나무를 태워 그릇을 굽는 곳이다. 도착하니 굴뚝에서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마의 이름은 조령요. 나무를 태워 그릇을 굽는 곳이다. 도착하니 굴뚝에서 새카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frice

어떤 흙에는 특별한 돌이 섞여 있다. 새하얀 흙이 강원도 양구의 지역특산물이다. ‘양구 백토’는 조선 후기에 인근 도요지로 흘러가 백자 제작에 쓰였고, 양구 백토로 만든 백자는 조선 왕실에서 따로 챙겨 쓸 정도였다. 양구 백토는 인기가 좋았던 모양이다. 숙종 27년, 국영 가마인 사옹원 분원 사기장들이 상소를 올렸다. 양구 백토가 아니면 백자 품질이 떨어진다며 양구 백토를 다시 공급해달라는 요구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적힌 내용이다.

오늘날 양구 백토는 환경보전을 이유로 채취가 제한되고 있어 여전히 귀한 대접을 받는다. 양구 백토는 지자체 주도로 1년에 300kg씩 지역 내 작가에게 분배된다. 몇몇 도자 공예가들이 터를 옮겨 양구에 정착하는 이유다. 카올린(kaolin, 고령토)이라 부르는 점토와 양구 백토를 섞어 그릇을 만들면,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백자가 탄생한다.

11월 초 가을인데, 양구는 벌써 영하권 추위였다. 불기운 덕인지 가마터 분위기는 어쩐지 따뜻했다
11월 초 가을인데, 양구는 벌써 영하권 추위였다. 불기운 덕인지 가마터 분위기는 어쩐지 따뜻했다. ⓒfrice

도착했을 때, 기물은 이미 가마에 들어간 상태였다. 작업자들은 동료와 함께 불 때기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마에서 전해지는 열기는 캠핑장 화롯불과는 차원이 다른 화력이다.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마 주변을 천천히 살필 수 있었다. 쉬고 있던 작업자들은 먼 길을 달려 온 손님에게 따뜻한 차와 군고구마를 대접했다. 따뜻한 환대였다.

작가들은 가마 입구를 봉통(아궁이)라 부른다. 그릇 굽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작가들은 가마 입구를 봉통(아궁이)라 부른다. 그릇 굽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frice

불멍하며 생각한 것

가로 3M 세로 20M 폭의 커다란 도자 가마. 온도는 1,300℃ 이상 올라간다. 쇠도 거뜬히 녹일 만큼 뜨겁다. 이런 걸 통제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언뜻 보기에도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었다. 일단 부동산이 필요하다. 그릇 굽기 좋은 입지를 골라, 인적이 드문 곳에 가마를 지어야 한다. 운영비도 많이 든다. 야적장에 쌓인 땔감 구입비와 운송비용이 만만찮아 보였다. 인력수급도 골칫거리일 것이다. 더울 때 덥고, 추울 때 추운 곳에서 땀 흘려 일할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귀하니까.

가마의 모든 면을 둘러보았다
봉긋하게 줄지어 있는 가마의 측면 그리고 뒤에서 바라본 가마의 모습. 갈라진 흙벽이 인상적이다
가마의 모든 면을 둘러보았다. 봉긋하게 줄지어 있는 가마의 측면 그리고 뒤에서 바라본 가마의 모습. 갈라진 흙벽이 인상적이다. ⓒfrice

그럼에도 도전하는 이유는 경제 논리가 아니라 오직 예술 논리에서 나올 것이다. 왜 그릇을 굳이 전통적인 가마에 굽나? 이런 가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그런 게 정말 있긴 한가? 의문이 생겼다.

먼저 나무 장작을 태우는 가마터 입지가 따로 정해진 건지 물었다. 프라이스를 이곳에 초대한 신현민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첫째, 좋은 흙이 나는가. 둘째, 주변에 민가가 없는가.” 작업하면 연기가 피는데, 사람 사는 동네가 가까우면 결국 민원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는 도공이 마음 편하게 일할 곳을 찾았고, 그런 곳을 찾다 보니 휴전선 인근 깊은 산골짜기에 가마터를 잡게 됐다.

기물이 들어간 가마는 진흙으로 문을 단단히 막는다
기물을 방에 채우면 진흙으로 문을 막는 벽을 만들어 웃풍을 차단한다
기물을 방에 채우면 진흙으로 문을 막는 벽을 만들어 웃풍을 차단한다. ⓒfrice

조선시대 도자가마처럼

양구 조령요는 조선시대 백자 도요지를 본뜬 계단식 가마터로, 20° 이상 경사면에 기물 넣는 방을 다섯으로 나눈 흙가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도자 가마’ 내용에 따르면, 조령요식 가마 구조는 16세기 이후에 등장한다. 고려-조선 초기엔 봉통(아궁이)부터 굴뚝까지 길게 연결된 가마를 지었는데, 조선 중후기부터 일정 간격마다 격벽을 설치해 가마 내부가 작은 방으로 분리되는 것이다. 이를 ‘지상식 연실 등요’라 부르는데, 이는 17세기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기에 이른다.

도예 이론에 밝은 전문가들은 도자기 굽는 가마를 형태, 구조, 사용 연료 등에 따라 좀 더 섬세하게 분류한다. 예컨대 양구 조령요는 경사면을 따라 길게 놓인 구조를 감안하면 ‘오름가마’ 혹은 ‘너구리가마’, 진흙으로 지었기에 ‘토축요’. 그릇 굽는 공간을 구분했기에 ‘칸가마’로도 부를 수 있다. 현장에서 만난 작가들은 ‘장작가마’라 불렀다.

육송이 양지바른 곳에서 건조중이다. 나무토막의 세계에도 나름 질서가 있다. 가마터의 모든 장작은 건축적인 계산을 마친 상태로 보관된다
육송이 양지바른 곳에서 건조중이다. 나무토막의 세계에도 나름 질서가 있다. 가마터의 모든 장작은 건축적인 계산을 마친 상태로 보관된다. ⓒfrice
소나무 껍질은 불에 닿는 순간 튀고, 가마 안 기물에 닿으면 그릇에 잡티로 남는다. 육송을 3년 간 야적하면 소나무 껍질이 저절로 벗겨진다. 잘 마른 소나무를 쓰는 이유
소나무 껍질은 불에 닿는 순간 튀고, 가마 안 기물에 닿으면 그릇에 잡티로 남는다. 육송을 3년 간 야적하면 소나무 껍질이 저절로 벗겨진다. 잘 마른 소나무를 쓰는 이유. ⓒfrice
조령요는 소나무를 태우는 도자가마다. 3년 말린 육송을 태우면 재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 깨끗하게 탄 땔감은 가마화력상승에 기여한다
조령요는 소나무를 태우는 도자가마다. 3년 말린 육송을 태우면 재를 거의 남기지 않는다. 깨끗하게 탄 땔감은 가마화력상승에 기여한다. ⓒfrice

“가마 안에서 불은 기운이 약한 곳으로 빠집니다. 불이 가마 안에서 골고루 퍼지게 사람이 도와요. 불이 빠지는데 나무를 제대로 못 넣으면 그릇을 망쳐요. 유약 같은 게 제대로 안 녹는 거죠.”

통나무를 쪼개고 나면, 이제 불과 씨름해야 한다. 불길을 원하는 대로 이끄는 게 도예가의 역할이자 작가역량이다. 작가들은 땔감이 잿더미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자리에 다시 다른 땔감을 채운다. 가마 앞 온도는 이미 신발 밑창이 녹을 정도로 뜨겁다. 그럼에도 그들은 용감하게 원하는 위치에 나무토막을 채워 넣었다. 가마 속 불길이 다시 치우침 없이 고르게 퍼져 일렁였다.

가마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XX요'라 짓는다. 한자는 기와 굽는 가마 '요窯'를 쓴다
가마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XX요’라 짓는다. 한자는 기와 굽는 가마 ‘요窯’를 쓴다. ⓒfrice

가문의 영광

도자공예는 신현민 작가의 가업이다. 신씨 집안 남자들은 대대로 가마를 지어 한국 전통 도자를 연구한다. 가마의 이름은 왜 조령요일까? 조령은 경상북도 문경의 고갯길로, 신현민 작가의 할아버지 신정희 사기장이 첫 개인 가마를 지은 곳이다. 할아버지를 존경하는 손자가 선대의 작업 정신을 잇겠다는 다짐을 담아 이름 붙였다.

신경균 도예가(오른쪽)가 가마터 작가들에게 주의사항을 안내하고 있다. 그는 신정희 사기장의 셋째 아들로, 2세대 작가다. 사기장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도자기를 만든다. 3세대 신현민 도예가(왼쪽)는 아버지의 전담 조수로 움직인다. 장작 패기부터 가마 불 감시까지, 수고로운 일을 모두 감당하는 작업반장 역할이다
신경균 도예가(오른쪽)가 가마터 작가들에게 주의사항을 안내하고 있다. 그는 신정희 사기장의 셋째 아들로, 2세대 작가다. 사기장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도자기를 만든다. 3세대 신현민 도예가(왼쪽)는 아버지의 전담 조수로 움직인다. 장작 패기부터 가마 불 감시까지, 수고로운 일을 모두 감당하는 작업반장 역할이다. ⓒfrice

아버지 신경균 작가는 3세대 작가의 재능에 경험을 더한다. 신경균 작가는 대학 시절엔 조선시대 지방 도요지를 연구했고, ‘세종실록지리지’ 같은 고문서에 기록된 도요지 수백 여 곳을 직접 답사했다. 한국 전통 도자기를 들고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인전을 펼친 아버지는 2022년 5월, 아들 신현민과 일곱 번째 가마를 지었다.

신경균 작가가 오랜 세월 연구한 주제는 달항아리(백자 대호). 백토를 구할 수 있는 양구에서 백자 생산에 적합한 가마를 지어 아들과 함께 도요지를 경영하는 이유다. 세상에는 직접 해봐야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있다. 공예가의 실전 노하우가 가마터에서 전수되고 있었다.


가마를 떠받치는 주춧돌
가마 근처는 어딜 가더라도 카메라를 대는 순간 얼굴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뜨거웠다
가마를 떠받치는 주춧돌. 가마 근처는 어딜 가더라도 카메라를 대는 순간 얼굴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뜨거웠다. ⓒfrice

가마는 숨을 쉰다

불 때는 봉통에서 사람 숨소리 같은 게 들린다. 소리는 규칙적으로 반복됐다. 현장 작업자들은 “가마 예열이 순조롭다는 징조.”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가마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느껴졌다.

가마 불을 때기 전, 도예가들은 가마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경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릇의 안녕과 무사를 기원했다. 가마를 만든 건 사람의 일이나, 거기서 기막힌 예술작품이 나오는 건 하늘의 몫이라는 태도였다.

봉통 위에 올라간 물그릇
봉통 위에 올라간 물그릇. ⓒfrice
깨끗한 물을 띄운 이유는 가마신에게 예를 갖추기 위함이다
깨끗한 물을 띄운 이유는 가마신에게 예를 갖추기 위함이다. ⓒfrice

“꺼내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못 참고 꺼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현장에서 만난 작가들은 가마에서 완성된 기물을 꺼내는 순간이 도예 활동의 커다란 낙이라 말했다. 재벌구이를 마친 그릇을 마주하는 순간이 가장 들뜬다는 것이다. 그들은 “버리는 그릇도 만만찮게 많지만, 양품을 건졌을 때의 희열은 고된 노동을 창작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작업자들은 양품 도자를 상상하며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숨 쉬는 가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마 속 불길을 조율한다. 불침번처럼 교대근무를 서기도 한다. 봉통에 꾸준히 소나무를 던져 불기운을 보살피는 시간은 대략 20시간. 그 후론 그릇을 식히는 시간을 1주일 정도 갖는다. 흙문을 허물어 기물을 조심스럽게 꺼내, 검수를 마치면 가마터에서의 작업이 끝난다.

신현민 작가가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준 사진. 봉인된 흙문을 허물자, 시선의 끝에 아름다운 백자 대호가 나타났다. 잘 구운 달항아리는 정말 달처럼 생겼다
신현민 작가가 스마트폰을 꺼내 보여준 사진. 봉인된 흙문을 허물자, 시선의 끝에 아름다운 백자 대호가 나타났다. 잘 구운 달항아리는 정말 달처럼 생겼다. ⓒ김잔듸

MADE IN 장작가마

“장작가마에서만 나타나는 특별한 현상이 있어요. 그게 그릇에 독보적인 멋을 만들어요.”

3세대 도예가 신현민은 가마의 속사정을 전했다. 가마 밖 환경은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지만, 안에서 불이 휘는 건 당시 날씨나 지역별 기후의 변수도 있다는 것이다. 같은 모습으로 빚은 그릇이 각자 다른 개성을 부여받는 이유다. 신 작가는 전통식 도자가마의 특장점을 고기 굽기에 빗댔다. 전기가마가 가정집 전자레인지라면, 장작가마는 캠핑장 숯불 그릴이라는 것이다. 고기가 익는 건 매한가지지만, 조리 환경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진다. 그릇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성형을 마친 그릇을 날붙이로 깎는다
성형을 마친 그릇을 날붙이로 깎는다.
성형을 마친 그릇을 날붙이로 깎는다. 신현민 작가는 요즘 '면치기'라는 기법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찾고 있다
신현민 작가는 요즘 ‘면치기’라는 기법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찾고 있다. ⓒfrice

우연은 작품 조형에도 영향을 미친다. 불을 너무 많이 쫴서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수축했는데, 결과적으로 실루엣이 더 자연스러운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신현민 작가는 이런 설명을 보탰다.

“그릇을 입에 댔을 때 닿는 느낌. 그릇을 손에 쥐었을 때 느끼는 실감. 그런 걸 미세하게 조정하면서 만족하는 포인트를 찾아내요. 도자기 만드는 사람들은 이제 여기서부터 들뜨기 시작해요. ‘이런 걸 불에 구워내면 어떤 모습일까?’ ‘그릇이 어떻게 나올지 너무 궁금해!’ 생각한 대로 결과물이 나오면 그만한 희열이 없어요.”

가마터 구경을 마치고 1주일 후. 그릇 사진이 도착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각병이었다.

신현민 작가는 기대했던 것보다 비례가 아쉽지만, 봐줄 만한 작품이라 평가했다. 그는 아마 마음에 드는 작품을 얻을 때까지 계속 같은 과정을 반복할 듯싶다
신현민 작가는 기대했던 것보다 비례가 아쉽지만, 봐줄 만한 작품이라 평가했다. 그는 아마 마음에 드는 작품을 얻을 때까지 계속 같은 과정을 반복할 듯싶다. ⓒ김잔듸

가마터 주변에 흩어진 그릇 조각들. 초벌 과정에서 깨진 파편이 흩어져 있다
가마터 주변에 흩어진 그릇 조각들. 초벌 과정에서 깨진 파편이 흩어져 있다. ⓒfrice
기대를 밑도는 작품은 가차 없이 깨지기도 한다. 예술작품으로서 납득 가능한 경지에 오른 그릇이 공예시장에 등장할 기회를 얻는다
기대를 밑도는 작품은 가차 없이 깨지기도 한다. 예술작품으로서 납득 가능한 경지에 오른 그릇이 공예시장에 등장할 기회를 얻는다. ⓒfrice

과정이 특별하면 사고 싶다

그릇처럼 일상에서 실질적인 쓸모를 갖는 공예품은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자기는 어떤 기준으로 사야 할까?

그런 걸 알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신현민 작가의 양구 가마터 초대는 그런 점에서 특별했다. 덕분에 잘 몰랐던 것을 잘 알게 됐다. 소나무 장작 냄새가 몸에 밴 불멍도 특별했지만 말이다. 강원도 양구에서 배운 것은 도자기의 품격이었다. 제작 과정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으뜸이다. 나는 앞으로도 공예가의 손끝을 바라볼 것 같다.

😈 전통 도자는 제작이 수고스럽지만, 과정을 향유하는 기쁨이 큰 것 같아요. 사람들이 도자 공예품에 높은 가치를 매겨 거래하는 이유는 성실한 창작자의 ‘역량’과 오름가마 특유의 ‘우연성’이 아닐까요.

전통이나 예술 같은 추상적인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작가의 생활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는 어떤 도자기들이 있나요? 어떤 가치와 감성을 곁에 두고 있나요?

나홀로 시대에 ‘분업’이 필요한 이유

2023년 2월에 문을 열어서 공방이름은 '이월(二月)'.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복층 양옥집 1층을 공방으로 개조했다

‘분업’으로 ‘협동’하다
– 수제그릇을 합리적으로 생산하기


2023년 여름, 프라이스는 부산 문현동을 방문했다. 도예가들이 팀을 이뤄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도자 공방에서 지켜본 것은 전통공예와 산업디자인의 융합이다. 이들은 개인 창작과 외주의뢰를 병행한다. 숙박업계나 유통업계에서 제작을 맡긴 수제그릇은 공예품이지만 공장 못지않은 생산량이 요구된다. 그들은 산업 디자이너처럼 생산 최적화를 고민했다. 젊은 한국 도자공예가들의 분업을 바라보며 알게 된 것을 정리했다.


2023년 2월에 문을 열어서 공방이름은 '이월(二月)'.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복층 양옥집 1층을 공방으로 개조했다
2023년 2월에 문을 열어서 공방이름은 ‘이월(二月)’.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복층 양옥집 1층을 공방으로 개조했다. ⓒfrice

노동이 아니라 협동

흙투성이 사내가 맨발로 프라이스를 맞이한다. 이름은 신현민. 부산-경남지역에서 활동 중인 도예가로 경성대학교 공예 디자인학과 졸업생을 부산 문현동에 모은 장본인이다.

그는 ‘n인조 분업’을 시도한다. 팀리더의 고민이 반영된 도자 제작 시스템이며, 도제식 도자 공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부산 기장군에서 전통 도자를 연구하는 아버지에게 가업을 물려받고 있다. 아버지는 달항아리 연구로 유명한 신경균 작가. 미대에서 학습한 공예이론과 부친과 함께 장작가마를 운영하며 얻은 실전경험이 든든한 자산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자산을 동료 작가와 공유하길 원한다.

# 빚기
홍성주 작가와 최한슬 작가가 토련기를 만져 흙덩어리를 뽑아낸다
이 흙을 빚으면 그릇성형이 시작된다
홍성주 작가와 최한슬 작가가 토련기를 만져 흙덩어리를 뽑아낸다. 이 흙을 빚으면 그릇성형이 시작된다. ⓒfrice
작가들은 분업 중 특정 업무를 전담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소부터 그릇을 버리는 일까지 모두 경험한다. 분업역할을 반복 수행하며 책임감과 실전감각을 얻는다. 이는 아카데미에서 학습하기 힘든 도자 제작 경험이다
작가들은 분업 중 특정 업무를 전담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소부터 그릇을 버리는 일까지 모두 경험한다. 분업역할을 반복 수행하며 책임감과 실전감각을 얻는다. 이는 아카데미에서 학습하기 힘든 도자 제작 경험이다. ⓒfrice

신현민 작가는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교훈 중 ‘분업’을 힘써 이식하려 한다. 이유가 있다. 그가 직접 보고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따라 가마터에 가면 일하는 어른들이 많았고, 그릇 제작에는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사람이 적게는 20명, 많게는 30명 정도 참여했다고. 작가뿐만 아니라 장작 패는 사람, 불 때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이 모여 각자 자기 몫을 했다는 것이다. 신 작가 자신도 어려서부터 작업을 도우며 실전경험을 쌓았다.

#말리고, 굽기
가지런히 포개진 그릇들. 선반에는 온도 조절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환경에 알맞게 건조할 수 있다. 잘 마른 그릇은 가마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
가지런히 포개진 그릇들. 선반에는 온도 조절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환경에 알맞게 건조할 수 있다. 잘 마른 그릇은 가마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 ⓒfrice
인천 남동공단 제조업체에서 특수제작한 전기가마. 작품이 가마에 들어간다. 불은 가마 안에서 제멋대로 휜다.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 수제그릇에 고유한 멋과 감성을 부여한다.
인천 남동공단 제조업체에서 특수제작한 전기가마. 작품이 가마에 들어간다. 불은 가마 안에서 제멋대로 휜다.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 수제그릇에 고유한 멋과 감성을 부여한다. ⓒfrice
# 완성된 그릇
불을 쬔 그릇은 저마다 다른 흔적을 품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운명처럼 주인을 만나 고유한 존재감을 뽐낼 것이다
불을 쬔 그릇은 저마다 다른 흔적을 품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운명처럼 주인을 만나 고유한 존재감을 뽐낼 것이다. ⓒfrice

길쭉한 병을 다듬고 있는 신현민 작가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작품의 샘플이다
길쭉한 병을 다듬고 있는 신현민 작가.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작품의 샘플이다. ⓒfrice

디자인 호텔에 도자공예품 채우기

이들의 분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건 라이프스타일 산업군의 공예품 수요다. 고급 뷰티 제품이나 희귀 건강식품처럼 격식과 예우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선물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최근 들어 주목받는 물건이 바로 수공예품이다. 특히 제작 목적이 뚜렷하고 만듦새가 빼어난 공예가의 도자 그릇은 쓸모도 인기도 많다.

귀얄기법을 시연하는 신현민 작가. 전통 귀얄붓은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을 묶어 만드는데, 작가는 수수빗자루를 쓴다
귀얄기법을 시연하는 신현민 작가. 전통 귀얄붓은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을 묶어 만드는데, 작가는 수수빗자루를 쓴다. ⓒfrice
귀얄기법이란 분청사기 장식기법 중 하나. 넓고 굵은 붓으로 그릇 위에 백토를 발라 비정형 무늬를 새긴다.
귀얄기법이란 분청사기 장식기법 중 하나. 넓고 굵은 붓으로 그릇 위에 백토를 발라 비정형 무늬를 새긴다. ⓒfrice

숙박업계도 도자공예를 주목하는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 중 하나다. 취향의 세분화, 소비 양극화 등의 영향으로 대중의 소비 기준이 높아졌다. 대중이 상업 공간에 기대하는 경험은 ‘특별함’이다. 업계 실무자는 ‘특별함’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고민한다. 그중 ‘미적 체험’은 숙박업계 실무자가 채택하는 전략 중 하나. ‘공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객실과 로비에 예술성이 깃든 오브제를 배치하고 있다. 부산 문현동 도자 공방은 이런 대중적인 공예작품 수요를 공략하고 있었다.

귀얄 기법을 활용한 화병. 무심하게 덧칠한 유약의 모양새와 산화철이 타며 검게 그을린 비정형 무늬가 인상적이다
귀얄 기법을 활용한 화병. 무심하게 덧칠한 유약의 모양새와 산화철이 타며 검게 그을린 비정형 무늬가 인상적이다. ⓒ더블유디자인그룹

2023년 상반기, 호텔사업을 전개하는 더블유디자인그룹이 한옥을 주제로 공예적 미감을 표현하는 객실을 기획했다. 클라이언트는 전통적이면서 모던한 도자기를 원했다. 도예가 크루는 호텔사업 실무자에게 전통기법을 응용한 꽃병, 인센스 홀더, 컵 등의 도자그릇을 해답으로 제시했다. 손발을 맞춰 본 도자공예가의 분업은 성공적인 납품을 가능케 한다.

거친 원토를 1250℃ 장작가마에서 구워낸 까만 도자컵. 호텔 객실로 퍼져 한국적 미감의 경험을 전달할 예정이다
거친 원토를 1250℃ 장작가마에서 구워낸 까만 도자컵. 호텔 객실로 퍼져 한국적 미감의 경험을 전달할 예정이다. ⓒ더블유디자인그룹

작가는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얻고, 의뢰주는 만족스런 품질의 수공예품을 대량으로 획득한다. 실무자의 의지와 기업의 여러가지 속사정이 반영된 끝에 탄생한 릇이 결과적으로 도자공예의 대중화에 기여한 셈이다. 공예가가 디자이너로서 라이프스타일 산업군의 수요를 받아 창작에 나서는 건 비단 부산 문현동 공방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의뢰인의 제작예산에 맞춰 공예가의 미감을 발휘한 그릇은 레스토랑이나 라이프 스타일 편집샵 등, 한국의 상업공간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린 끌로 굽을 파는 신현민 작가
새롭게 만들어 보려는 항아리의 조형을 테스트하고 있다. 최소 주 2회 공방에 들른다는 신 작가는 분업이 없어도, 각자 공방에서 도전과제에 몰입한다고 말했다
날카롭게 벼린 끌로 굽을 파는 신현민 작가. 새롭게 만들어 보려는 항아리의 조형을 테스트하고 있다. 최소 주 2회 공방에 들른다는 신 작가는 분업이 없어도, 각자 공방에서 도전과제에 몰입한다고 말했다. ⓒfrice

물리적인 실감과 성장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공예판에서 도예가를 육성하는 방식은 크게 바뀌었다. 오늘날 도예가는 대부분 대학에서 배출된다. 장인의 공방에서 숙식하며 도자기를 배우겠다는 낭만은 이제 없다. 보따리짐 매고 찾아와 제자로 받아달라는 예비 작가는 자취를 감췄다.

신현민 작가는 운좋게 가족을 통해 도제식 공예교육을 받았으나, 모두가 그런 기회를 누리진 못한다는 걸 주목한다. 경험과 실력을 따르는 위계서열, 책임지는 리더십, 리더의 하향식 업무 분배, 작업능률 향상. 신 작가는 도제식 교육의 효과를 점검하고 팀리더로서 장점을 이식하는데 집중한다.

분업이 끝나고 이뤄지는 공방에서의 집단 창작연구는 젊은 도예가가 쉬지 않고 실력을 쌓을 수 있는 힘이다. 각자 관심사에 맞춰 연구주제를 정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다. 팀리더 신현민 작가에게 동료작가의 연구작 소개를 부탁했다.

연구하기
왼쪽부터 이홍준, 최한슬, 홍성주 作
왼쪽부터 이홍준, 최한슬, 홍성주 作

이홍준 작가의 ‘도자 에어조던 1’ ‘ 스니커즈를 흙으로 만들어도 원작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가?’라는 주제의식으로 만들었다고. 이 작가는 요즘 한국산 도자기를 외국인에게 파는 일에 관심이 많다.

최한슬 작가는 의례용 항아리를 연구한다. 연구주제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항아리. 망자와 함께 땅에 묻히는 부장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용적인 쓰임새보다는 문화적 맥락을 고민하는 실험작이다.

홍성주 작가는 도자 조형물을 탐구한다. 조각칼로 흙덩이를 깎아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 인센스홀더를 만들었다.

신현민 작가는 미대 졸업이 요리학원 자격증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자격증을 딴다고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한다는 보장이 없듯, 미대 졸업했다고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틀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문득 박물관에서 본 ‘조선시대 가마터’가 떠오른다. 수백 년 전 도공은 평소엔 왕실이나 관아에 납품할 그릇을 만들고, 여유가 될 때 만들고 싶은 그릇을 빚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업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도예가는 생계를 책임지고 나면, 나만 만들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몸과 정신을 연결해 손기술을 발휘하고 그릇에 특별한 감성을 부여하는 삶. 그런 삶이 담긴 그릇은 오늘도 내일도 귀하게 대접받을 것이다.

😈 효율화 된 분업은 두 가지 장점이 있네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작가 활동의 기초를 닦게 만듭니다. 혼자서 서너 시간 걸릴 작업을 여럿이서 한 두시간 안에 끝내는 것은 가성비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의 지향점과도 닿아있습니다. 분업과 협동으로 ‘책임감’과 ‘실력’을 쌓는 것. “나만 아니면 돼!”라는 유행어가 밈처럼 도는 세상이라 더욱 귀한 마음씨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 일하고 계신가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과 어떤 시스템을 갖춰 성장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백자에서 한지를 발견하다

경기도 이천에서 백자 시리즈를 만드는 박성극 작가
대표 작품 한지 시리즈 찻잔(좌). 박성극 작가(우)
박성극 작가는 재일교포 3세로 일본 시마네현에서 자랐다. 26살, 한국 여행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도자기에 매료되어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됐다.
박성극 작가는 재일교포 3세로 일본 시마네현에서 자랐다. 26살, 한국 여행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도자기에 매료되어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됐다. ⓒfrice

한지 시리즈 hanji series (2018)
한지(韓紙)의 질감을 간직한 백자 식기. 얇지만 단단하다. 방망이로 백자토를 두들겨 밀도를 높이고, 높은 온도(1280~1300℃)에서 환원소성하여 강도가 세다. 건조-소성 과정에서 생긴 변수는 한지 백자에 ‘자연스러운 선(line)’과 멋을 더한다.

박성극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 작업을 한다. 요즘엔 차(茶)도구 제작 실험에 푹 빠져있다.

SNS @parksongkuk
판매처 CHAPTER 1, 리움스토어

2023년 여름 한남동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챕터 원'에서 열린 테이블웨어 판매전시. 새로운 조형을 지닌 백자 식기를 만날 수 있었다.
2023년 여름 한남동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챕터 원’에서 열린 테이블웨어 판매전시. 새로운 조형을 지닌 백자 식기를 만날 수 있었다. ⓒfrice

흙에서 한지의 물성을 찾게 된 순간이 궁금한데요!

한지 백자는 2018년에 ‘자연스러운 선(line)’이라는 주제로 그릇을 만들 때 얻었어요. 한 달에 한 번. 스스로에게 새로운 주제를 던져서 도전적인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지는 인공적인 사물이지만, 찢어진 테두리나 주름 같은 건 보기에 자연스러워서 그 느낌을 흉내 내고 싶었어요. 알갱이가 굵고 거친 흙을 섞어본 거죠. 여러 가지 모습을 만들다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릇이 얇으면서도 단단합니다.

닥나무 종이가 지닌 자연스러움, 나무껍질로 짠 종이의 물성을 흙으로 표현했어요. 흙으로 한지를 표현하려면 모양을 얇게 떠야 합니다. 얇게 뜬 흙은 말릴 때나 구울 때, 외부 영향을 쉽게 받아 휘는데요. 휘어진 흙의 곡선으로 멋을 내고 싶었어요. ‘얇지만 튼튼한 그릇, 하얀색이 깃든 그릇’을 만들다 보니 결과적으로 백자토를 고르게 됐습니다. 고온에서 달군 백토는 제법 단단하거든요.

돌돌 말린 흙덩어리. 흙을 평평하게 밀고 잘린 조각을 이어 붙이면 입체적인 조형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기법을 '판 성형'이라 부른다.
돌돌 말린 흙덩어리. 흙을 평평하게 밀고 잘린 조각을 이어 붙이면 입체적인 조형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기법을 ‘판 성형’이라 부른다. ⓒ박성극

가장 까다로운 작업공정은 무엇입니까?

가마에서 꺼낸 그릇에 유약 바르기입니다. 한지 질감을 살리기 위해서 얇게 *시유 해야 합니다. 두께가 얇은 흙은 수분을 빨아들이는 힘이 약해요. 유약통에 담갔다 빼면 물이 뚝뚝 흘러서 문제인데요. 한지 질감을 살리기 위해 다른 작업을 추가해요. 그중 하나가 가스 토치로 그릇을 말리는 공정이에요. 제 생각에 백자 시유하는 과정에서 유약 바른 그릇을 하나하나 토치불로 건드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웃음)

밥국공기 세트. 작업 초창기부터 만든 조형이다. 크기나 두께는 조금씩 변화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밥국공기 세트. 작업 초창기부터 만든 조형이다. 크기나 두께는 조금씩 변화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박성극

한지를 닮은 그릇에는 어떤 한국적인 미(美)가 담겨 있나요?

한국적인 미(美)를 담아내려고 의식하진 않았지만, 생각해 보긴 했어요. 저는 한국의 아름다움이 ‘소박함’이라 생각해요. 소박함을 신경 쓰는 건 개인적인 체험 때문일 겁니다.

저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 동네에서 자랐고, 세계 여행할 때는 네팔 히말라야 같은 곳을 다녔거든요. 외국의 자연환경과 비교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박해요.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이 심심하다고 느꼈는데, 경기도 이천에 정착해서 오래 살고 보니까 안 보이던 게 보여요. 작은 스케일에서 나오는 멋이 한국의 아름다움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환경이 소박하면, 그런 데서 사는 사람도 소박하지 않을까요?

아! 시대 변화나 환경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전통 도자는 지금도 성공적으로 재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 도공과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죠. 옛사람들의 성격은 옛사람들이 만든 그릇에만 담길 겁니다. 요즘 그릇에는 요즘 사람들의 멋이 담기겠죠.

한지 시리즈를 수납한 카메라백. 작가는 이를 '모빌리티 연구'라 부른다. 기물의 운반편의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설명.
한지 시리즈를 수납한 카메라백. 작가는 이를 ‘모빌리티 연구’라 부른다. 기물의 운반편의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설명. ⓒ박성극

작가님이 담아내는 멋이 궁금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연구하시나요?

제 그릇 연구는 ‘실험’입니다. 작업 환경에 일부러 제한을 걸고 선택지를 좁히는 방식으로 연구하는 거죠.

환경을 일부러 제한하고, 주어진 문제를 하나씩 해결할 때 미처 몰랐던 작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작은 구멍 같은 걸 만들어 놓고,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흙덩어리를 이런저런 모양으로 뽑아내는 거죠. 그러다 보면 제가 만들어본 적도 없는 형상이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이즈가 나와요. 그런 걸 조합하고 분해하며 내심 원했던 결과물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실험 끝에 새로운 걸 얻는 건데요. 도자기의 형태를 머릿속에 미리 구상하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디자이너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작업실에서 계측을 거쳐 만드는 샘플 그릇. 초기 작품과 비교하면 그릇 두께는 점점 종이처럼 얇아지고 있다는 설명
작업실에서 계측을 거쳐 만드는 샘플 그릇. 초기 작품과 비교하면 그릇 두께는 점점 종이처럼 얇아지고 있다는 설명. ⓒ박성극

최근 새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 있나요?

얼마 전 찻잎을 보관할 그릇을 한지백자로 만들어봤어요. 뚜껑을 덮고 세우면 보관용기가 되는데요. 비스듬히 기울이면 찻잎이 다관(茶罐)에 굴러갑니다. 그릇이 아닌 도구를 응용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뚜껑이 없었어요. 만들고 직접 써보니 차를 준비하는 동안 먼지를 막을 뚜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뚜껑을 달면서 그릇이 된 거죠. 작품 만들 때는 이런 식으로 직접 만들어 봐야 풀리는 거 같아요. 뚜껑 크기나 밀폐 수준 같은 건 좀 더 테스트하고 있어요.

뚜껑이 달린 보관용기. 목적은 찻잎 보관과 분배. 찻잎을 그릇에 털 때 쓰는 '다하'를 응용했다
뚜껑이 달린 보관용기. 목적은 찻잎 보관과 분배. 찻잎을 그릇에 털 때 쓰는 ‘다하’를 응용했다. ⓒ박성극

디자인이 결정되면, 하루에 작품을 몇 점 만들 수 있나요?

머그컵 기준으로는 하루에 약 20여 개 정도입니다. 가마에 넣었다 터지는 그릇은 폐기하니까 실제로는 더 적죠. 크기가 작다고 많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종류마다 달라요. 작은 찻주전자 같은 건 하나 만드는데 하루 종일 시간을 쏟기도 해요. 흙덩이를 붙이는 공정이 많거나, 모서리가 각진 그릇일수록 까다롭고 오래 걸립니다.

경기도 이천의 작업실과 실험대. 그는 실험이 도예활동의 원동력이라 말한다
경기도 이천의 작업실과 실험대. 그는 실험이 도예활동의 원동력이라 말한다. ⓒ박성극

작가님은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나요?

제 취향은 실험 그 자체에 있는 것 같아요.

생흙을 빚어서 실험적인 작품을 가마에 넣으면 항상 들떠요. 흙이 거칠면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기대한 모습대로 도자기가 나올지 궁금해서 뜨거운 가마 문을 괜히 건드려봐요.

예컨대 원토로 차 그릇을 만들면, 흙이 물을 빨아들이는 정도가 달라요. 차 맛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항상 가마에서 나온 원토잔은 직접 시음을 해보죠. 뭘 어떻게 바꿔나갈지. 흙의 배합을 조금씩 바꿔보면서 실험을 이어가는데, 이 과정 자체가 감정을 부풀려요.

도자 공예가한테 중요한 감정은 이런 ‘들뜬 마음’같아요. 실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이 감정은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잊지 않고 싶지 않아요.(웃음)

생흙을 불에서 굽는 장면
2023년 봄, 박성극 작가는 전남 구례에서 열린 찻잔 만들기 행사에 참가. 지리산 자락 논두렁의 생흙으로 원시적인 토기를 만들었다.
2023년 봄, 박성극 작가는 전남 구례에서 열린 찻잔 만들기 행사에 참가. 지리산 자락 논두렁의 생흙으로 원시적인 토기를 만들었다. ⓒBOAN1942

작가님 그릇에는 한국 문화가 어떻게 담기나요?

무의식적으로 담기죠.(웃음) 한국적인 걸 원해서 한국적인 그릇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작품에 한국적인 요소를 넣는 작가님도 있죠. 저는 어쩌다 한지를 떠올렸을 뿐이고 그건 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던 겁니다.

사실 저한테 한지 시리즈가 나왔다는 게 재밌어요. 솔직히 제 도자취향은 정 반대거든요. 두껍고 무겁고 색이 어둡고, 쥐었을 때 손맛이 있는 그릇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지 백자는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저도 미처 몰랐던 작가로서의 가능성이요.

제가 만든 얇고 하얀 그릇은 첫 해외여행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낯선 경험에 빠지고 거기서 얻은 감동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던 날들이었어요.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작업자이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또 우리나라 문화를 담은 멋진 그릇을 만들기도 하겠죠?

2024 실험작. 알갱이가 굵은 흙으로 만든 흑유 다기
2024 실험작. 알갱이가 굵은 흙으로 만든 흑유 다기. ⓒ박성극

😈 “오히려 좋아!”라는 유행어가 떠오르네요. 엉뚱한 상상. 상상을 검증하기 위한 연구. 반복된 실험 끝에 발견한 나만의 조형. 공예가의 그릇에는 먹거리만 담기는 게 아니라 작가가 추구하는 멋과 태도가 담기는군요. 재료의 본연의 성질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멋을 발견하는 통찰력. 그건 저도 갖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