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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라는 세계

엘레먼트컴퍼니 최장순 대표가 미드저니로 만든 그릇 이미지

의미를 개척하는 능동의 사물

그릇은 내용물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이름으로 존재한다. 담긴 그릇에 따라 같은 음식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릇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만, 비워진 상태로 만들어지고 비워진 상태에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추구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과 양면성이 인간의 모습과 닮았고, 그 인간의 모습은 또 브랜드에 빗대어 표현되기도 한다.

실재의 그릇이 아닌 관념에 존재하는 그릇 이야기를 들어봤다. 브랜드의 의미를 찾고 만드는 엘레멘트컴퍼니의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장순이 기호학적 관점으로 ‘그릇이라는 세계’를 전달한다.


저마다 다른 모양의 그릇이 모여 식탁 위의 스카이라인을 만든다
저마다 다른 모양의 그릇이 모여 식탁 위의 스카이라인을 만든다. ⓒUnsplash의 Tom Crew

그릇은 식탁 위의 건축

그릇은 기계다. 기계는 흐름을 절단한다(Gilles Deleuze). 그릇은 밥상의 흐름을 절단해 아침 식사와 티타임을 생산한다. 여러 모양, 높이, 폭, 재질로 구성된 그릇은 저마다의 이합집산을 통해 식탁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한다.

그릇은 채소의 흐름을 절단해 ‘샐러드’를 만들고 조리된 쌀의 흐름을 절단해 ‘밥’을 만든다. 쟁반에 널려 있는 채소 조각 무침을 ‘샐러드’라 할 수 있을까. 그릇(Bowl)이라는 형식의 배제는 샐러드의 부재다. 같은 음식이어도 작은 그릇에 담기면 반찬이 되고, 밥그릇에 담기면 주식이 된다. 그릇은 음식의 의미를 규정짓는 기표(記標)이면서 대중적인 파롤(Parol)이다. 음식이라는 ‘내용’보다 그릇이라는 ‘표현’이 더 중요한, 이미지 대량 생산의 시대가 된 지 오래다.

AI 이미지 생성툴 MidJourney를 이용해 만든 그릇. 우주를 담은 그릇이면서 형태가 없는 그릇을 의도했다
AI 이미지 생성툴 MidJourney를 이용해 만든 그릇. 우주를 담은 그릇이면서 형태가 없는 그릇을 의도했다. ⓒ최장순

그릇은 의미를 생산한다

심연의 묵직한 무언가에만 핵심이 있다고 믿는 고지식한 본질주의자들은 발작적으로 형식을 무시하려 한다. 이들은 그릇의 형식보다 그것의 ‘담아낸다’는 기능을 중시하고, 그릇의 디자인보다 음식의 품질과 영양을 중시한다. 하지만 형식 없는 내용은 없다. 그릇은 그저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담아내는 도구적 존재가 아니다. 그릇은 자신이 품고 있는 내용물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혁명적 실천가’이자, 의미를 다른 차원으로 탈바꿈시키는 ‘능동적 기호학자’다.

머그컵은 음료를 위해 제작됐지만, 나는 가끔 머그컵에 쌀밥을 담아 돌아다니며 먹곤 한다. 콘플레이크는 음료와 쌀밥 중간 지점에서 머그컵에 담길 수 있는 손쉬운 내용물이다. 이 경우 머그컵은 쌀밥을 보다 캐주얼하고, 포터블(portable)한 새로운 음식으로 리포지셔닝(repositioning)한다. 형식은 내용을 생산한다.

그릇을 그저 ‘담는다’는 동사의 동의어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담기는 그 무엇’에만 관심을 갖는다. ‘마음이 중요하니 상갓집 복장은 대충 입고 가도 돼.’ ‘내 의도가 중요하니 말투는 좀 거칠어도 상관없어.’, ‘제빵 실력이 중요하니 빵은 대충 못생겨도 상관없어.’라는 식의 생각은 몸, 말, 디자인 등의 형식에 의미를 두지 않는 태도다.

하지만 몸, 말, 사물에는 모두 저마다의 그릇이 있다. 종종 그 그릇의 형식은 담기는 내용과 의도보다 훨씬 중요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형식 없는 의미는 공허하다.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형식은 맹목적이다.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태도는 건강에 좋지 않다.

이름은 브랜드를 담는 그릇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특정 용도에 맞게 제작된 제한적인 그릇이 되어선 안 된다는 공자의 말씀이다. 특정한 좁은 분야로의 전문적 기술에만 천착하지 않고, 전인적 인간으로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예(六藝)를 비롯한 역량을 두루두루 갖추라는 의미다. 이때 그릇은 ‘전문성’이다. 컨셉이나 이름을 만들 때, 그릇은 전문가의 탈을 쓰고 소환된다.

전문적인 특정 영역을 지칭하는 네임을 만들 땐, 주로 좁다랗고 긴 컵을 예로 들었다. ‘킥고잉(Kickgoing, 킥보드)’, ‘일렉클(Elecle, 전기자전거)’ 같은 네임은 좁고 길다란 그릇에 해당한다.

반면, 특정 분야의 전문가 같은 그런 그릇이 아니라, 다양한 사업군을 두루 포괄하는 큰 그릇 같은 브랜드 네임도 있다. 기업 브랜드 네임은 많은 사업군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넓은 접시나 대접에 비유되곤 한다. 특정 제품군을 연상시키지 않는 ‘애플(Apple)’이나 ‘삼성’같은 이름은 특정 사업군에 국한되지 않는, 큰 대접 같은 이름이다.

그릇은 그저 수동적으로 담아내기만 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릇은 그저 수동적으로 담아내기만 하는 사물이 아니다. ⓒUnsplash의 Rahul Kumbhar

정말 큰 그릇은 어떤 형태일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하였다. 일반에서 알고 있는 의미와 달리 이 말은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큰 그릇엔 형태가 없다. 형태 없는 그릇, 그래서 모조리 담을 수 있는 우주와도 같은 그릇. 일찍이 지혜로운 자들은 스스로 그런 그릇을 닮고자 내 몸을 작은 우주라 생각해 왔다. 그릇을 통해 우주를 보고 스스로를 우주에 맵핑한 것이다.

그릇은 그것이 담아야 할 내용물에 따라 깊이와 폭, 모양, 재질 등을 달리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사발, 접시, 찻잔, 놋그릇, 뚝배기, 주전자와 같은 식기류가 있는 한편 솥, 항아리, 도시락 통처럼 우리와 함께 살아온 대표적인 그릇도 있다. 신석기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빗살무늬토기 또한 그릇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찬탈 대상이 되었던 도자기 역시 대표적인 우리네 그릇이다.

브랜드는 각자의 철학과 가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릇 또한 그렇다
브랜드는 각자의 철학과 가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릇 또한 그렇다. ⓒUnslplash의 Angèle Kamp

브랜드와 그릇

브랜드 또한 그것이 담아야 할 철학과 가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브랜드는 그릇을 닮았다.

트렌디하고 유행을 잘 따르는 패션 브랜드들은 접시와 같다. 친환경 생태주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파타고니아(Patagonia)’는 탄탄하고 두께감 있는 텀블러를 닮았다. 지구를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최대한 수명을 연장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지구를 만들겠다는 ‘테슬라(Tesla)’ 또한 텀블러다. 조금은 더 세련되고 멋진 텀블러.

지속적으로 ‘안전’을 강조하며 세계 최초로 3점식 안전벨트를 고안했던 ‘볼보(Volvo)’는 공동체에 필요한 깊이 있고 은근한 맛을 담아내는 뚝배기와 같다. 에너지, 반도체 등 원천에 비유할 수 있는 기업 브랜드들은 항아리에 견줄만하다. 항아리에 담긴 양념과 장은 모든 요리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식재료이니까.

‘갤럭시(Galaxy)’, ‘아이폰(iPhone)’과 같은 모바일 브랜드는 다채로운 음식을 자주 바꿔 채우는 도시락통과 같다. 이처럼 그릇은 비즈니스를 통해 세계를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와 관점을 보여주는 좋은 교보재가 되기도 한다.

비워져 있어야 비로소 채움이 가능하다
비워져 있어야 비로소 채움이 가능하다. ⓒUnsplash의 Konrad Wojciechowski

비워야 담는다

본질주의자의 시선을 따라, 그릇의 본원적인 기능을 ‘담아내는 것’으로 보자. 하지만 담기 위해선 비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릇의 본질은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는 것’이다. ‘비움’은 언제나 ‘채움’에 선행한다. 비움과 채움의 이항대립으로부터 4가지 유형의 인간상을 유추할 수 있다. 비우는 사람, 채우는 사람, 비움을 거부하는 사람, 채움을 거부하는 사람.


1. 비우는 사람
그릇은 그 물리적 구조에 따라 비움과 채움이 동시에 공존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릇을 닮은 사람은 비우고 채우는 행위를 매우 자연스럽게 하는 성인(成人)이라 할 수 있다(이 정상적인 행위는 사실 매우 높은 도력을 요구한다).

2. 채우는 사람
비움을 거부하고 채워가려는 사람은 부지런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다.

3. 비움을 거부하는 사람
비우는 것도 거부하고 채우는 것도 실패한 사람은 배우지도 않고,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지도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오만과 독선으로 점철된 고집불통이라 해도 마땅하다 할 것이다.

4. 채움을 거부하는 사람
우리는 채우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끊임없이 비워내는 허욕(虛慾)의 사람, 스스로 이 세계에 대해 일체의 욕망도 갖지 않는 높은 도력의 선인(仙人)을 만나기도 한다.


Tom Crew가 Unsplash에 올린 그릇 사진
ⓒUnsplash의 Tom Crew

삼라만상이 그릇이다

살다보면 스스로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세계를 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얕은 지식과 관점으로 세상의 끝을 보기라도 한 듯 오만과 고집의 표본이 되는 사람도 있다. 조용히 세계를 학습하는 성실한 사람도 있고, 일체의 인위적 배움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비움을 추구하는 존재도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이 세상엔 수많은 그릇이 있다.

오랜 세월을 지키다 이가 나간 그릇부터, 예쁜 한 때의 모양을 뽐내며 매대 선반을 런웨이 삼아 당당하게 진열돼 있는 화려한 접시들까지 모두 공존하며 긍정돼야 할 존재다.

그릇은 내용을 담고, 내용을 생산한다. 몸, 말, 사물, 브랜드까지 모두 그릇을 닮아 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릇을 닮았다. 우리는 그릇에서 삶의 철학과 세계관을 엿본다. 그릇을 통해 엿본 광대한 우주는 우리를 작은 점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이내 그 우주를 그릇에 담는다.

😈 기호학은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 세상의 많은 것을 그릇에 빗대는데요. 그릇이라는 기호를 통해 어떤 의미가 탄생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공통점이 없는 낱말과 낱말을 묶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지적인 여행. 즐거우셨나요?

관점에 관여하다

뷰티 브랜드 팝업의 VMD를 손보는 유인성 디자이너
뷰티 브랜드 팝업 쇼룸 설치현장에서 만난 유인성 디자이너
뷰티 브랜드 팝업 쇼룸 설치현장에서 만난 유인성 디자이너 ⓒfrice

안녕하세요 인성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디자인 업계에서 일을 시작한지 16년 차인 브랜드 디자이너입니다. 그래픽, 패션, 리조트, 브랜드 에이전시, 건설, 부동산 개발 회사 등을 거쳤는데요. 창작과 라이프 스타일에 관여된 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간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프로젝트를 열심히 했죠. 지금은 공간 디자인을 포함한 브랜드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처음 맡았던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어떻게 기억하시나요?

네이버에서 UXDP라는 채용 프로그램을 열었어요. 2010년대 전후 디자이너 지망생 사이에서 인기였던 인턴십으로 기억해요. 연수원에 인턴을 11일 정도 합숙시키고 경쟁형 도전과제를 내요. 일종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죠. 저는 UXDP 참여를 마치고 브랜드팀에 배치됐어요. 그 당시 네이버는 디자인 조직을 크게 ‘브랜드/BX/UX’로 나눴죠. 브랜드팀은 네이버의 브랜드 전략과 각종 서비스를 관리했습니다. 저는 일부 서비스의 선행 개발에 참여했어요.

‘브랜드 경험Brand Experience’도 디자인하시는데요.
지금은 상식처럼 여겨지는 일이지만, 당시 한국에선 낯선 개념이었어요.

제가 입사했던 2000년대 후반, 디자이너 사이에 본격적으로 언급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이직하며 맡았던 실무가 브랜드 경험(BX) 디자인이어서 적응하며 조금씩 눈 떴던 거 같아요. 네이버를 떠나고 JOH.를 6년 정도 다녔습니다. 동료들이 이미 BX나 브랜딩이라는 개념을 실무에 접목시켜 대중적으로 전파하는 리더들이기도 했어요. 덕분에 빨리 깨우쳤죠.

유인성 디자이너의 디자인 노트. 아이디어 구상은 빈 종이에 간단한 썸네일을 그리는데서 출발한다
유인성 디자이너의 디자인 노트. 아이디어 구상은 빈 종이에 간단한 썸네일을 그리는데서 출발한다. ⓒfrice

브랜드 경험에 대한 여러 정의가 있지만, 이론서에 따르면

‘브랜드 경험은 정체성, 시각요소, 세계관 같은 걸 따로 설계하고
그것을 사용자가 물리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끔 연결하는 디자인 작업이다.’

라고 정리됩니다. 설명 자체가 너무 추상적입니다.(웃음)

실무를 잡더라도 딱 떨어지는 공식이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라 생각해요.(웃음) 브랜드 경험 디자인은 단순한 비주얼 디자인이 아닙니다. 상품이나 서비스가 가진 장점을 살리고, 그것을 좋아 보이게 만드는 일이죠. 이왕이면 브랜드에 얽힌 사람들이 서로 좋은 자극을 받고, 상호 유익한 도움이 이뤄지도록 판을 설계하는 게 핵심입니다. 저는 고객이 브랜드와 서비스를 만나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느끼는지 궁금해요. 브랜드를 만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 반응하는 지점이 궁금해서 계속 브랜드 디자인에 ‘관여’하게 되는 것 같아요.

‘관여’라는 단어가 인상적입니다. 브랜드에 어떤식으로 관여하게 되나요?

먼저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에 관여합니다. 브랜드와 클라이언트가 우리를 찾는 이유를 알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제시하죠. 페이퍼워크를 통해 의뢰인에게 프리젠테이션을 꾸준히 펼치는 식으로 방향성을 정하는 단계가 선행됩니다. 그다음에 시각화visualization 단계를 거치는데요. 디자이너는 이 과정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역할이기 때문에 온갖 업무에 관여되는 듯 합니다.

앞서 말한 업무를 끝내고 본격적인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면 종이나 컴퓨터 화면 같은 2D 표면에 컬러와 도형을 조합해 그래픽과 더불어 다양한 콘텐츠를 구현합니다.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분석하고, 시각요소를 위한 기획이나 전략을 만들어요. 이 과정에서 다양한 디자인 요소들을 배치하게 되는데요. 예를 들어 인테리어 프로젝트에서 가구가 키 요소라면 적합한 가구를 찾고, 영상 제작이 필요하면 영상전문가를 찾아내 일정을 주도적으로 짜요. 인력섭외와 일정관리는 브랜드 경험을 디자인하는 사람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시각요소에 개입하는 디자이너의 업무를 설명하기 위해 아카이브 노트를 펼친 유인성 디자이너
시각요소에 개입하는 디자이너의 업무를 설명하기 위해 아카이브 노트를 펼친 유인성 디자이너 ⓒfrice

또한 브랜드를 경험할 고객을 위한 공간에 관여합니다. 만약 오프라인 이벤트가 열린다면, 고객이 방문하는 공간에 세부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설계해야 합니다. 이건 디자이너 혼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각 분야의 전문가와 팀을 이루고, 목표달성을 위해 프로젝트를 발전시켜요. 자신감과 책임감을 갖고 건축 전문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며 세부사항을 조정하는 거죠.


직무를 브랜드 디자이너라고 소개하셨는데,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다양한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시작은 그래픽에 관여하는 것이었지만, 언제 어디서 일하더라도 브랜드 디자인에 대한 개념이 계속 깔려있었어요. 대림처럼 부동산 개발과 얽힌 조직에서 근무했을 땐 디벨로퍼의 관점을 익혔어요. 공간을 기획하고 이름을 붙이고, 그런 공간이 도시 안에서 어떤 기능과 콘텐츠를 가진 플랫폼이 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정하는 일을 했습니다.

두 번째 직장이었던 JOH.의 조직문화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JOH.는 대외적으로 『매거진 B』를 만드는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건축부터 F&B까지 각 분야별 전문팀이 일관된 방향성을 가지고 유기적으로 움직여요.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수주받으면 팀 별로 필요한 사람들이 모여 업무를 수행해요. 하나의 프로젝트도 다양한 카테고리에 걸쳐져 종합적으로 전개되는 거죠. 그러다 보니 저도 여러 업무에 관여했습니다.

본업인 디자인 에이전시 업무 외에도 『매거진 B』의 콘텐츠 제작에 일부 관여했다는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본업인 디자인 에이전시 업무 외에도 『매거진 B』의 콘텐츠 제작에 일부 관여했다는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트를 구경할 수 있었다. ⓒfrice
유인성 디자이너는 당시 협업이 브랜드 경험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시각 콘텐츠로 바꿔보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유인성 디자이너는 당시 협업이 브랜드 경험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시각 콘텐츠로 바꿔보는 소중한 기회였다고 회고한다. ⓒfrice
B's Cut의 촬영 시안. 각 호마다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할 제품을 골라 스튜디오에서 촬영한다. 디자이너는 사진작가에게 요청할 연출법을 시각화해서 전달한다
B’s Cut의 촬영 시안. 각 호마다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할 제품을 골라 스튜디오에서 촬영한다. 디자이너는 사진작가에게 요청할 연출법을 시각화해서 전달한다. ⓒfrice

브랜드 디자이너의 일은 장기간에 걸쳐 있는데다, 비가시적인 성과가 더 많습니다.
디자이너의 업무능력은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요?

‘관점’과 ‘방향성’이 브랜드 디자이너의 무기라고 생각해요. 두 가지가 참 중요해요.

좋은 ‘관점’과 ‘방향성’을 잡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하시나요?

극초반 아이디어 구상은 메모로 하는 편입니다. 레퍼런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인데요. 브랜드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워낙 레퍼런스를 많이 쥐고 있어요. “A브랜드가 B콘셉트로 팝업스토어 연다더라.” “C는 D에서 F를 시도했는데 흥행했다더라.” 온갖 정보가 귀에 들어와요.

그런 레퍼런스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핵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거죠. 메모에 담은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요.

개인적으로는 핀터레스트를 주의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AI까지 가세했어요. 트렌드를 스타일로 구분하고 순위를 매기는 서비스가 등장했고 유저가 필요로 하는 맞춤형 오픈소스를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죠. ‘이런 데이터 분석의 결과값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건가?’ 유행에 몸을 맡기는 현대 디자인 트렌드에도 조금은 경계심을 갖고 있어요.

지금 한국에서 전문 조직이 브랜드를 설계하는 경우, 데이터 기반 오픈소스툴 활용사례가 빈번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디자인 업무를 수월하게 해준다는 장점이 있어요. 좋은 툴입니다. 좋기 때문에 사용을 자제하라는 거죠. 정서적인 심상과 문제 해결을 위한 직관, 그리고 리서치 데이터를 접목시키는 건 디자이너의 역량이니까요. 이 세상이 점점 더 자극적이고 더 화려하고 더 시끄러운 곳으로 끌려가고 있어요. 데이터 분석에 의한 알고리즘이 알게 모르게 실무에 반영된다는 걸 의식하고, 좀 더 순간을 관찰하고 들여다보는 거죠.

레퍼런스를 떠나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그 안에 담긴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레퍼런스를 떠나 자유로운 아이디어를 메모하고 그 안에 담긴 직관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frice

브랜드에 관여하는 디자이너가 자신의 관점을 좋은 방향으로 성장시켜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관점 하나로는 결국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디자인은 결국 추상과 실제를 연결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모순적인 가치를 양립시키며 진전되는 사례도 빈번하죠. 브랜드가 추구하는 사업적인 가치를 따지려면 이성적인 관점을 가져야 할 테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남기 위해서는 동시에 정서적인 관점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유인성 디자이너가 기록한 토론 자료.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1~2주 간격으로 클라이언트 미팅에 필요한 PT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유인성 디자이너가 기록한 토론 자료.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1~2주 간격으로 클라이언트 미팅에 필요한 PT작업에 나선다고 한다. ⓒfrice

그래서 저는 프로젝트 초반에 클라이언트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서 좀 더 많이 듣고, 더 알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에요. 그러고 나서 어떤 직감이나 심상 같은 걸 놓치지 않고 디자인 솔루션과 연결을 합니다. 이건 직관 내지는 본능. 정서적인 측면이죠.

이게 경영전략같은 이성적인 측면과 결합이 잘 되면 좋은 브랜드 디자인이 태어나는 건데요.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기능과 정서의 연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연결에서 나온다고 봐요.

전문가로 활약하려면 디자인 솔루션을 여러가지 패턴으로 쥐고 있어야겠네요.

‘깃발 세우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예쁜 것과 좋은 것을 분류하고, 그것을 남들보다 먼저 얘기해서 명분을 선점하는 방법을 써요. 현상을 분석하고 거기서 얻어낸 직관을 연결하면서 실천가능한 디자인 프로젝트로 개발시킵니다.

저는 ‘경청’을 선호합니다. 가능하다면 일단 남들보다 더 많이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일단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다 듣고, 레퍼런스를 검토하며 아는 게 많아질수록 관점이 다양해져요. 관점이 다양해지면 문제를 해결하는 솔루션도 다양해집니다. a와 b만 만족시키지 않는 솔루션, 이질적인 c, d, e가 있어도 추진이 가능한 솔루션이 등장하는 거죠. 만약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완전히 틀어지더라도 나중에 계속 디자인을 이어나갈 수 있는 근거와 독특한 관점이 생기는 것 같아요.

브랜드 디자인의 초기작업은 기획/전략 구상이여서 실무자와 충분한 토론 과정을 거친다는 설명을 보탰다
브랜드 디자인의 초기작업은 기획/전략 구상이여서 실무자와 충분한 토론 과정을 거친다는 설명을 보탰다.ⓒfrice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가장 희열을 느낀 순간은 언제입니까?

열심히 고민한 디자인이 사람들에게 수용됐을 때입니다. 이제 브랜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대중화된 거 같아요.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은 생각보다 힘이 세거든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이미 우리는 어디론가 가고 있어요. 이미 누군가가 설계해둔 디자인에 의해서 말이죠.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디자인은 이미 스며들었다. 당신의 선택지는 사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결정됐다.」

이런 정의를 내릴 수 있을만큼요. 하지만 브랜드 디자인 이론을 이해하고 실제 사례를 접하다보면 남들이 만든 흐름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디자이너와 대중 모두가 브랜드 디자인을 비판적으로 의식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브랜드의 무언가를 관여하며 디자인할 텐데요. 쉽게 타인에게 휩쓸리지 않는 건강한 취향이 제게도 필요하고, 브랜드 디자인에 영향을 받을 분들에게도 이런 능동적인 태도가 중요할 겁니다. 누군가의 브랜드 디자인을 거스르려는 안간 힘이! 제가 여태까지 했거나, 앞으로 할 디자인에 반영됐으면 합니다.

2부로 이어집니다.
to be continued…😎

😈 여러분은 자신의 직업에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신가요? 비슷한 일을 하는 업계동료와 직업의 의미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 경험을 전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인 것 같습니다. 유인성 디자이너의 노하우가 담긴 기획 노트를 볼 수 있는 건 커다란 행운이었어요. 1부는 브랜드 디자이너의 관점을 살펴봤는데요. 이어지는 2부에서는 관점이 실제로 구현된 공간을 소개합니다. 보다 깊은 디자인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2부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