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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홀로 시대에 ‘분업’이 필요한 이유

2023년 2월에 문을 열어서 공방이름은 '이월(二月)'.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복층 양옥집 1층을 공방으로 개조했다

‘분업’으로 ‘협동’하다
– 수제그릇을 합리적으로 생산하기


2023년 여름, 프라이스는 부산 문현동을 방문했다. 도예가들이 팀을 이뤄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도자 공방에서 지켜본 것은 전통공예와 산업디자인의 융합이다. 이들은 개인 창작과 외주의뢰를 병행한다. 숙박업계나 유통업계에서 제작을 맡긴 수제그릇은 공예품이지만 공장 못지않은 생산량이 요구된다. 그들은 산업 디자이너처럼 생산 최적화를 고민했다. 젊은 한국 도자공예가들의 분업을 바라보며 알게 된 것을 정리했다.


2023년 2월에 문을 열어서 공방이름은 '이월(二月)'.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복층 양옥집 1층을 공방으로 개조했다
2023년 2월에 문을 열어서 공방이름은 ‘이월(二月)’.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복층 양옥집 1층을 공방으로 개조했다. ⓒfrice

노동이 아니라 협동

흙투성이 사내가 맨발로 프라이스를 맞이한다. 이름은 신현민. 부산-경남지역에서 활동 중인 도예가로 경성대학교 공예 디자인학과 졸업생을 부산 문현동에 모은 장본인이다.

그는 ‘n인조 분업’을 시도한다. 팀리더의 고민이 반영된 도자 제작 시스템이며, 도제식 도자 공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부산 기장군에서 전통 도자를 연구하는 아버지에게 가업을 물려받고 있다. 아버지는 달항아리 연구로 유명한 신경균 작가. 미대에서 학습한 공예이론과 부친과 함께 장작가마를 운영하며 얻은 실전경험이 든든한 자산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자산을 동료 작가와 공유하길 원한다.

# 빚기
홍성주 작가와 최한슬 작가가 토련기를 만져 흙덩어리를 뽑아낸다
이 흙을 빚으면 그릇성형이 시작된다
홍성주 작가와 최한슬 작가가 토련기를 만져 흙덩어리를 뽑아낸다. 이 흙을 빚으면 그릇성형이 시작된다. ⓒfrice
작가들은 분업 중 특정 업무를 전담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소부터 그릇을 버리는 일까지 모두 경험한다. 분업역할을 반복 수행하며 책임감과 실전감각을 얻는다. 이는 아카데미에서 학습하기 힘든 도자 제작 경험이다
작가들은 분업 중 특정 업무를 전담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소부터 그릇을 버리는 일까지 모두 경험한다. 분업역할을 반복 수행하며 책임감과 실전감각을 얻는다. 이는 아카데미에서 학습하기 힘든 도자 제작 경험이다. ⓒfrice

신현민 작가는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교훈 중 ‘분업’을 힘써 이식하려 한다. 이유가 있다. 그가 직접 보고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따라 가마터에 가면 일하는 어른들이 많았고, 그릇 제작에는 여러 사람이 달라붙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사람이 적게는 20명, 많게는 30명 정도 참여했다고. 작가뿐만 아니라 장작 패는 사람, 불 때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이 모여 각자 자기 몫을 했다는 것이다. 신 작가 자신도 어려서부터 작업을 도우며 실전경험을 쌓았다.

#말리고, 굽기
가지런히 포개진 그릇들. 선반에는 온도 조절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환경에 알맞게 건조할 수 있다. 잘 마른 그릇은 가마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
가지런히 포개진 그릇들. 선반에는 온도 조절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 환경에 알맞게 건조할 수 있다. 잘 마른 그릇은 가마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 ⓒfrice
인천 남동공단 제조업체에서 특수제작한 전기가마. 작품이 가마에 들어간다. 불은 가마 안에서 제멋대로 휜다.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 수제그릇에 고유한 멋과 감성을 부여한다.
인천 남동공단 제조업체에서 특수제작한 전기가마. 작품이 가마에 들어간다. 불은 가마 안에서 제멋대로 휜다.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 수제그릇에 고유한 멋과 감성을 부여한다. ⓒfrice
# 완성된 그릇
불을 쬔 그릇은 저마다 다른 흔적을 품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운명처럼 주인을 만나 고유한 존재감을 뽐낼 것이다
불을 쬔 그릇은 저마다 다른 흔적을 품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운명처럼 주인을 만나 고유한 존재감을 뽐낼 것이다. ⓒfrice

길쭉한 병을 다듬고 있는 신현민 작가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작품의 샘플이다
길쭉한 병을 다듬고 있는 신현민 작가. 클라이언트가 의뢰한 작품의 샘플이다. ⓒfrice

디자인 호텔에 도자공예품 채우기

이들의 분업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건 라이프스타일 산업군의 공예품 수요다. 고급 뷰티 제품이나 희귀 건강식품처럼 격식과 예우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선물이 인기를 끄는 가운데, 최근 들어 주목받는 물건이 바로 수공예품이다. 특히 제작 목적이 뚜렷하고 만듦새가 빼어난 공예가의 도자 그릇은 쓸모도 인기도 많다.

귀얄기법을 시연하는 신현민 작가. 전통 귀얄붓은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을 묶어 만드는데, 작가는 수수빗자루를 쓴다
귀얄기법을 시연하는 신현민 작가. 전통 귀얄붓은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을 묶어 만드는데, 작가는 수수빗자루를 쓴다. ⓒfrice
귀얄기법이란 분청사기 장식기법 중 하나. 넓고 굵은 붓으로 그릇 위에 백토를 발라 비정형 무늬를 새긴다.
귀얄기법이란 분청사기 장식기법 중 하나. 넓고 굵은 붓으로 그릇 위에 백토를 발라 비정형 무늬를 새긴다. ⓒfrice

숙박업계도 도자공예를 주목하는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 중 하나다. 취향의 세분화, 소비 양극화 등의 영향으로 대중의 소비 기준이 높아졌다. 대중이 상업 공간에 기대하는 경험은 ‘특별함’이다. 업계 실무자는 ‘특별함’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고민한다. 그중 ‘미적 체험’은 숙박업계 실무자가 채택하는 전략 중 하나. ‘공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객실과 로비에 예술성이 깃든 오브제를 배치하고 있다. 부산 문현동 도자 공방은 이런 대중적인 공예작품 수요를 공략하고 있었다.

귀얄 기법을 활용한 화병. 무심하게 덧칠한 유약의 모양새와 산화철이 타며 검게 그을린 비정형 무늬가 인상적이다
귀얄 기법을 활용한 화병. 무심하게 덧칠한 유약의 모양새와 산화철이 타며 검게 그을린 비정형 무늬가 인상적이다. ⓒ더블유디자인그룹

2023년 상반기, 호텔사업을 전개하는 더블유디자인그룹이 한옥을 주제로 공예적 미감을 표현하는 객실을 기획했다. 클라이언트는 전통적이면서 모던한 도자기를 원했다. 도예가 크루는 호텔사업 실무자에게 전통기법을 응용한 꽃병, 인센스 홀더, 컵 등의 도자그릇을 해답으로 제시했다. 손발을 맞춰 본 도자공예가의 분업은 성공적인 납품을 가능케 한다.

거친 원토를 1250℃ 장작가마에서 구워낸 까만 도자컵. 호텔 객실로 퍼져 한국적 미감의 경험을 전달할 예정이다
거친 원토를 1250℃ 장작가마에서 구워낸 까만 도자컵. 호텔 객실로 퍼져 한국적 미감의 경험을 전달할 예정이다. ⓒ더블유디자인그룹

작가는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얻고, 의뢰주는 만족스런 품질의 수공예품을 대량으로 획득한다. 실무자의 의지와 기업의 여러가지 속사정이 반영된 끝에 탄생한 릇이 결과적으로 도자공예의 대중화에 기여한 셈이다. 공예가가 디자이너로서 라이프스타일 산업군의 수요를 받아 창작에 나서는 건 비단 부산 문현동 공방에서만 벌어지는 일은 아니다. 의뢰인의 제작예산에 맞춰 공예가의 미감을 발휘한 그릇은 레스토랑이나 라이프 스타일 편집샵 등, 한국의 상업공간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린 끌로 굽을 파는 신현민 작가
새롭게 만들어 보려는 항아리의 조형을 테스트하고 있다. 최소 주 2회 공방에 들른다는 신 작가는 분업이 없어도, 각자 공방에서 도전과제에 몰입한다고 말했다
날카롭게 벼린 끌로 굽을 파는 신현민 작가. 새롭게 만들어 보려는 항아리의 조형을 테스트하고 있다. 최소 주 2회 공방에 들른다는 신 작가는 분업이 없어도, 각자 공방에서 도전과제에 몰입한다고 말했다. ⓒfrice

물리적인 실감과 성장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공예판에서 도예가를 육성하는 방식은 크게 바뀌었다. 오늘날 도예가는 대부분 대학에서 배출된다. 장인의 공방에서 숙식하며 도자기를 배우겠다는 낭만은 이제 없다. 보따리짐 매고 찾아와 제자로 받아달라는 예비 작가는 자취를 감췄다.

신현민 작가는 운좋게 가족을 통해 도제식 공예교육을 받았으나, 모두가 그런 기회를 누리진 못한다는 걸 주목한다. 경험과 실력을 따르는 위계서열, 책임지는 리더십, 리더의 하향식 업무 분배, 작업능률 향상. 신 작가는 도제식 교육의 효과를 점검하고 팀리더로서 장점을 이식하는데 집중한다.

분업이 끝나고 이뤄지는 공방에서의 집단 창작연구는 젊은 도예가가 쉬지 않고 실력을 쌓을 수 있는 힘이다. 각자 관심사에 맞춰 연구주제를 정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어 의견을 교환하는 것이다. 팀리더 신현민 작가에게 동료작가의 연구작 소개를 부탁했다.

연구하기
왼쪽부터 이홍준, 최한슬, 홍성주 作
왼쪽부터 이홍준, 최한슬, 홍성주 作

이홍준 작가의 ‘도자 에어조던 1’ ‘ 스니커즈를 흙으로 만들어도 원작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가?’라는 주제의식으로 만들었다고. 이 작가는 요즘 한국산 도자기를 외국인에게 파는 일에 관심이 많다.

최한슬 작가는 의례용 항아리를 연구한다. 연구주제는 죽은 사람을 기리는 항아리. 망자와 함께 땅에 묻히는 부장품에서 영감을 얻었다. 실용적인 쓰임새보다는 문화적 맥락을 고민하는 실험작이다.

홍성주 작가는 도자 조형물을 탐구한다. 조각칼로 흙덩이를 깎아 사람의 모습을 표현한 인센스홀더를 만들었다.

신현민 작가는 미대 졸업이 요리학원 자격증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자격증을 딴다고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한다는 보장이 없듯, 미대 졸업했다고 좋은 그릇을 만드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배운 틀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문득 박물관에서 본 ‘조선시대 가마터’가 떠오른다. 수백 년 전 도공은 평소엔 왕실이나 관아에 납품할 그릇을 만들고, 여유가 될 때 만들고 싶은 그릇을 빚었다고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업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도예가는 생계를 책임지고 나면, 나만 만들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몸과 정신을 연결해 손기술을 발휘하고 그릇에 특별한 감성을 부여하는 삶. 그런 삶이 담긴 그릇은 오늘도 내일도 귀하게 대접받을 것이다.

😈 효율화 된 분업은 두 가지 장점이 있네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작가 활동의 기초를 닦게 만듭니다. 혼자서 서너 시간 걸릴 작업을 여럿이서 한 두시간 안에 끝내는 것은 가성비를 추구하는 현대 사회의 지향점과도 닿아있습니다. 분업과 협동으로 ‘책임감’과 ‘실력’을 쌓는 것. “나만 아니면 돼!”라는 유행어가 밈처럼 도는 세상이라 더욱 귀한 마음씨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은 어떤 식으로 일하고 계신가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과 어떤 시스템을 갖춰 성장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백자에서 한지를 발견하다

경기도 이천에서 백자 시리즈를 만드는 박성극 작가
대표 작품 한지 시리즈 찻잔(좌). 박성극 작가(우)
박성극 작가는 재일교포 3세로 일본 시마네현에서 자랐다. 26살, 한국 여행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도자기에 매료되어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됐다.
박성극 작가는 재일교포 3세로 일본 시마네현에서 자랐다. 26살, 한국 여행 중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도자기에 매료되어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됐다. ⓒfrice

한지 시리즈 hanji series (2018)
한지(韓紙)의 질감을 간직한 백자 식기. 얇지만 단단하다. 방망이로 백자토를 두들겨 밀도를 높이고, 높은 온도(1280~1300℃)에서 환원소성하여 강도가 세다. 건조-소성 과정에서 생긴 변수는 한지 백자에 ‘자연스러운 선(line)’과 멋을 더한다.

박성극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 작업을 한다. 요즘엔 차(茶)도구 제작 실험에 푹 빠져있다.

SNS @parksongkuk
판매처 CHAPTER 1, 리움스토어

2023년 여름 한남동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챕터 원'에서 열린 테이블웨어 판매전시. 새로운 조형을 지닌 백자 식기를 만날 수 있었다.
2023년 여름 한남동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챕터 원’에서 열린 테이블웨어 판매전시. 새로운 조형을 지닌 백자 식기를 만날 수 있었다. ⓒfrice

흙에서 한지의 물성을 찾게 된 순간이 궁금한데요!

한지 백자는 2018년에 ‘자연스러운 선(line)’이라는 주제로 그릇을 만들 때 얻었어요. 한 달에 한 번. 스스로에게 새로운 주제를 던져서 도전적인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지는 인공적인 사물이지만, 찢어진 테두리나 주름 같은 건 보기에 자연스러워서 그 느낌을 흉내 내고 싶었어요. 알갱이가 굵고 거친 흙을 섞어본 거죠. 여러 가지 모습을 만들다 일상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릇이 얇으면서도 단단합니다.

닥나무 종이가 지닌 자연스러움, 나무껍질로 짠 종이의 물성을 흙으로 표현했어요. 흙으로 한지를 표현하려면 모양을 얇게 떠야 합니다. 얇게 뜬 흙은 말릴 때나 구울 때, 외부 영향을 쉽게 받아 휘는데요. 휘어진 흙의 곡선으로 멋을 내고 싶었어요. ‘얇지만 튼튼한 그릇, 하얀색이 깃든 그릇’을 만들다 보니 결과적으로 백자토를 고르게 됐습니다. 고온에서 달군 백토는 제법 단단하거든요.

돌돌 말린 흙덩어리. 흙을 평평하게 밀고 잘린 조각을 이어 붙이면 입체적인 조형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기법을 '판 성형'이라 부른다.
돌돌 말린 흙덩어리. 흙을 평평하게 밀고 잘린 조각을 이어 붙이면 입체적인 조형을 만들 수 있다. 이런 기법을 ‘판 성형’이라 부른다. ⓒ박성극

가장 까다로운 작업공정은 무엇입니까?

가마에서 꺼낸 그릇에 유약 바르기입니다. 한지 질감을 살리기 위해서 얇게 *시유 해야 합니다. 두께가 얇은 흙은 수분을 빨아들이는 힘이 약해요. 유약통에 담갔다 빼면 물이 뚝뚝 흘러서 문제인데요. 한지 질감을 살리기 위해 다른 작업을 추가해요. 그중 하나가 가스 토치로 그릇을 말리는 공정이에요. 제 생각에 백자 시유하는 과정에서 유약 바른 그릇을 하나하나 토치불로 건드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웃음)

밥국공기 세트. 작업 초창기부터 만든 조형이다. 크기나 두께는 조금씩 변화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밥국공기 세트. 작업 초창기부터 만든 조형이다. 크기나 두께는 조금씩 변화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박성극

한지를 닮은 그릇에는 어떤 한국적인 미(美)가 담겨 있나요?

한국적인 미(美)를 담아내려고 의식하진 않았지만, 생각해 보긴 했어요. 저는 한국의 아름다움이 ‘소박함’이라 생각해요. 소박함을 신경 쓰는 건 개인적인 체험 때문일 겁니다.

저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 동네에서 자랐고, 세계 여행할 때는 네팔 히말라야 같은 곳을 다녔거든요. 외국의 자연환경과 비교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소박해요. 그래서 예전에는 한국이 심심하다고 느꼈는데, 경기도 이천에 정착해서 오래 살고 보니까 안 보이던 게 보여요. 작은 스케일에서 나오는 멋이 한국의 아름다움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연환경이 소박하면, 그런 데서 사는 사람도 소박하지 않을까요?

아! 시대 변화나 환경 차이는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전통 도자는 지금도 성공적으로 재현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는 조선시대 도공과 다른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죠. 옛사람들의 성격은 옛사람들이 만든 그릇에만 담길 겁니다. 요즘 그릇에는 요즘 사람들의 멋이 담기겠죠.

한지 시리즈를 수납한 카메라백. 작가는 이를 '모빌리티 연구'라 부른다. 기물의 운반편의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설명.
한지 시리즈를 수납한 카메라백. 작가는 이를 ‘모빌리티 연구’라 부른다. 기물의 운반편의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설명. ⓒ박성극

작가님이 담아내는 멋이 궁금합니다.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연구하시나요?

제 그릇 연구는 ‘실험’입니다. 작업 환경에 일부러 제한을 걸고 선택지를 좁히는 방식으로 연구하는 거죠.

환경을 일부러 제한하고, 주어진 문제를 하나씩 해결할 때 미처 몰랐던 작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작은 구멍 같은 걸 만들어 놓고, 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흙덩어리를 이런저런 모양으로 뽑아내는 거죠. 그러다 보면 제가 만들어본 적도 없는 형상이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이즈가 나와요. 그런 걸 조합하고 분해하며 내심 원했던 결과물에 도달하는 것 같습니다.

실험 끝에 새로운 걸 얻는 건데요. 도자기의 형태를 머릿속에 미리 구상하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나는 디자이너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작업실에서 계측을 거쳐 만드는 샘플 그릇. 초기 작품과 비교하면 그릇 두께는 점점 종이처럼 얇아지고 있다는 설명
작업실에서 계측을 거쳐 만드는 샘플 그릇. 초기 작품과 비교하면 그릇 두께는 점점 종이처럼 얇아지고 있다는 설명. ⓒ박성극

최근 새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 있나요?

얼마 전 찻잎을 보관할 그릇을 한지백자로 만들어봤어요. 뚜껑을 덮고 세우면 보관용기가 되는데요. 비스듬히 기울이면 찻잎이 다관(茶罐)에 굴러갑니다. 그릇이 아닌 도구를 응용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뚜껑이 없었어요. 만들고 직접 써보니 차를 준비하는 동안 먼지를 막을 뚜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뚜껑을 달면서 그릇이 된 거죠. 작품 만들 때는 이런 식으로 직접 만들어 봐야 풀리는 거 같아요. 뚜껑 크기나 밀폐 수준 같은 건 좀 더 테스트하고 있어요.

뚜껑이 달린 보관용기. 목적은 찻잎 보관과 분배. 찻잎을 그릇에 털 때 쓰는 '다하'를 응용했다
뚜껑이 달린 보관용기. 목적은 찻잎 보관과 분배. 찻잎을 그릇에 털 때 쓰는 ‘다하’를 응용했다. ⓒ박성극

디자인이 결정되면, 하루에 작품을 몇 점 만들 수 있나요?

머그컵 기준으로는 하루에 약 20여 개 정도입니다. 가마에 넣었다 터지는 그릇은 폐기하니까 실제로는 더 적죠. 크기가 작다고 많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종류마다 달라요. 작은 찻주전자 같은 건 하나 만드는데 하루 종일 시간을 쏟기도 해요. 흙덩이를 붙이는 공정이 많거나, 모서리가 각진 그릇일수록 까다롭고 오래 걸립니다.

경기도 이천의 작업실과 실험대. 그는 실험이 도예활동의 원동력이라 말한다
경기도 이천의 작업실과 실험대. 그는 실험이 도예활동의 원동력이라 말한다. ⓒ박성극

작가님은 마음에 쏙 드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나요?

제 취향은 실험 그 자체에 있는 것 같아요.

생흙을 빚어서 실험적인 작품을 가마에 넣으면 항상 들떠요. 흙이 거칠면 예상하지 못한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기대한 모습대로 도자기가 나올지 궁금해서 뜨거운 가마 문을 괜히 건드려봐요.

예컨대 원토로 차 그릇을 만들면, 흙이 물을 빨아들이는 정도가 달라요. 차 맛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항상 가마에서 나온 원토잔은 직접 시음을 해보죠. 뭘 어떻게 바꿔나갈지. 흙의 배합을 조금씩 바꿔보면서 실험을 이어가는데, 이 과정 자체가 감정을 부풀려요.

도자 공예가한테 중요한 감정은 이런 ‘들뜬 마음’같아요. 실험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이 감정은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더라도 잊지 않고 싶지 않아요.(웃음)

생흙을 불에서 굽는 장면
2023년 봄, 박성극 작가는 전남 구례에서 열린 찻잔 만들기 행사에 참가. 지리산 자락 논두렁의 생흙으로 원시적인 토기를 만들었다.
2023년 봄, 박성극 작가는 전남 구례에서 열린 찻잔 만들기 행사에 참가. 지리산 자락 논두렁의 생흙으로 원시적인 토기를 만들었다. ⓒBOAN1942

작가님 그릇에는 한국 문화가 어떻게 담기나요?

무의식적으로 담기죠.(웃음) 한국적인 걸 원해서 한국적인 그릇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작품에 한국적인 요소를 넣는 작가님도 있죠. 저는 어쩌다 한지를 떠올렸을 뿐이고 그건 제 안에 이미 들어와 있던 겁니다.

사실 저한테 한지 시리즈가 나왔다는 게 재밌어요. 솔직히 제 도자취향은 정 반대거든요. 두껍고 무겁고 색이 어둡고, 쥐었을 때 손맛이 있는 그릇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지 백자는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저도 미처 몰랐던 작가로서의 가능성이요.

제가 만든 얇고 하얀 그릇은 첫 해외여행을 떠올리게 만들어요. 낯선 경험에 빠지고 거기서 얻은 감동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섰던 날들이었어요. 앞으로도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작업자이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면 또 우리나라 문화를 담은 멋진 그릇을 만들기도 하겠죠?

2024 실험작. 알갱이가 굵은 흙으로 만든 흑유 다기
2024 실험작. 알갱이가 굵은 흙으로 만든 흑유 다기. ⓒ박성극

😈 “오히려 좋아!”라는 유행어가 떠오르네요. 엉뚱한 상상. 상상을 검증하기 위한 연구. 반복된 실험 끝에 발견한 나만의 조형. 공예가의 그릇에는 먹거리만 담기는 게 아니라 작가가 추구하는 멋과 태도가 담기는군요. 재료의 본연의 성질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적인 멋을 발견하는 통찰력. 그건 저도 갖고 싶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