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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고기구이의 아슬아슬한 중재자, K-불판

여럿이 모여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 구워먹는 한국식 구이요리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난로회 풍경을 담은 19세기 민화

조선식 야외취식

다섯 명의 남자가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남자들의 모습은 제각기 조금씩 다르다. 고기가 뜨거운 듯 입으로 부는 남자, 구운 고기를 담은 접시를 들고 있는 남자, 술을 쭉 들이키려는 남자도 있다. 한 명이 쓴 남바위로 보아 날씨가 추운 모양이다. 그렇다면 불은 고기도 구워주고 따뜻함도 안겨주니 일석이조로 귀하다.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난로회 풍경을 담은 19세기 민화를 확대한 모습
19세기 민화. <성협 풍속화첩> ‘야연’ ⓒ국립중앙박물관

고기를 즐기는 남자들의 모습이 다채로운 가운데, 그림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가운데의 불판이다. 제법 잘 타오르는 불길 위에 둥글게 올라 앉아 중심을 잡아준다. 가운데가 옴폭 파여 있는 형국까지 감안하면 모양새가 갓과 흡사해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갓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대하드라마에서 비슷한 설정을 본 기억이 난다. 선비가 철로 쓴 갓을 쓰고 여행을 다닌다. 평소에는 품위를 지켜주고 햇볕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해주다가 식사 때는 만능 취사도구로 변한다. 철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닐 수 있다고? 요즘은 아라미드 섬유로 만들지만 삼십 년 전에는 진짜 철모를 쓰고 훈련을 받았다. 한국전쟁 때 취사에도 쓰였다는 철모였으니 철제 갓 쓰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어쨌든 불판은 그렇게 중심을 잡아준다.

이미 19세기에 민화로 그려졌을 만큼 우리는 고기구이를 좋아한다.

서울 후암동 도로 변에 놓인 숯불화로
서울 후암동 도로 변에 놓인 숯불화로. ⓒfrice

하지만 늘, 두 주인공인 고기와 불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관심을 독점해왔다. 생각해 보자. 고기라면 우리는 소냐 돼지냐 양이나 등등 동물을 따지고, 갈비냐 등심이냐 항정살이냐 등등 부위를 고민한다.

불도 사정은 비슷해서 편리함의 가스와 정통성의 숯불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처럼 고기와 불이 각광 받는 가운데, 정작 둘 사이를 중재해주는 불판의 존재는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불판으로 고깃집을 선택하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없을 것이다. 불판이 없거나 제 역할을 못하면 귀한 고기를 망칠 수 있고, 따라서 각 고깃집마다 고심 끝에 불판을 선택하지만 각광은 받지 못한다.

뿌리깊은나무 일천구백칠십구년 십이월호 - 서울, 한국의 진열장 中
뿌리깊은나무 일천구백칠십구년 십이월호 – 서울, 한국의 진열장 中 ⓒ에드워드 김

구이요리의 중재자, 불판

그렇다, 중재라고 했다. 한식에서 구이는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식탁 한가운데에 불을 놓고 직접 조리를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말해주듯 인간은 언제나 불을 갈망한다. 조리는 불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인류는 익힌 음식을 먹고 뇌를 발달시켰다. 그런 불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고 (예외는 있지만) 먹는 이가 직접 익혀 먹는다. 식사가 의식도, 유희도 될 수 있다.

그러한 특성이 생생함과 맞물려 한국의 고기구이는 해외에서도 K-푸드의 대표이자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스테이크, 아르헨티나의 아사도 등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조리 문법은 많다. 하지만 열원(섭씨 1000~2000도의 숯불 혹은 가스불)과 재료(주로 양념을 하지 않은 생고기)가 식탁에서 맞물려 자아내는 한식 고기구이의 생생함에는 나름의 독창성이 있다.


K-불판의 역할

한식 고기구이의 성격을 궁극적으로 불판이 결정하니 불판도 ‘K-불판’으로 격상된 느낌이다. K-불판의 중재는 두 갈래로 이루어진다.

불 위로 판이 깔리면 온갖 '구워먹을 것'을 올린다.
불 위로 판이 깔리면 온갖 ‘구워먹을 것’을 올린다. ⓒfrice

첫째, 공간적 중재자 역할을 한다.

이름처럼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수분을 품은 동물의 근육과 지방의 집합체인 고기는 부들부들하고 늘어지는 성질을 가졌다. 열원에 올렸을 때 고르게 익지 않기 때문에 판을 깔아야 평평하고 균일한 조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열에너지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고기구이는 크게 복사열과 전도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자는 전자파에 의한 직접 전달, 후자는 다른 매개체를 통해 간접 전달 되는 열이다. 이 두 열이 어우러져 고기의 수분을 증발시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익히는 한편, 고기 표면의 마이야르 반응을 유도해 복잡한 맛과 바삭한 질감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두 종류의 열에너지를 우리는 불판으로 편하게 통제한다. 복사열과 전도열의 노출 비율부터 세기까지 모두 불판이 좌우한다.


21세기 K-고기불판

1) 개방형

숯불을 피운 개방형 불판
고기를 올린 개방형 불판
ⓒfrice

완전 개방형 불판, 석쇠 일족을 예로 들어보자. 철사가 형성하는 면은 ‘판을 깔아주는’ 공간적 중재 역할에 치중하는 한편 고기를 직화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따라서 조리는 복사열에 의해 이루지니 ‘복사열 의존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형태와 면적을 규정하는 테두리에 철사만 걸쳐주면 된다. 그게 그거 같지만 복사열 의존형도 의외로 다양하다. 야외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에는 모기장도 불판으로 쓰이곤 했다. 그렇게 눈이 고운 것과 철근을 붙여 만든 과격한 것이 양 극단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굵기의 철사와 눈의 크기로 이루어져 판을 깔아준다. 주로 고기와 직접 접촉이 미덕이라 여기는 숯불과 짝을 이룬다.

2) 폐쇄형

솥뚜껑을 담은 폐쇄형 불판
폐쇄형 불판에 올라간 음식재료
ⓒfrice

다음으로는 ‘전도열 의존형’이 있다. 눈 혹은 구멍이 전혀 없는, 폐쇄형 불판으로 구이가 전도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작한 국물에 끓여 먹는 서울식 불고기의 불판과 삼겹살용 불판의 상당수가 여기에 속한다. 특히 돼지기름의 원활한 배출을 위해 경사가 지다 못해 곡선으로 진화한 후자가 흥미롭다. 복사열 의존형과 정반대로 열에너지의 고른 분배가 강점이라 가스불과 주로 짝을 짓는다.

3) 절충형

절충형 불판 위에 올린 고기
절충형 불판 위에 올라간 음식재료
ⓒfrice

세 번째로는 둘이 절충된 ‘야망형’이 있다. 복사열과 전도열을 모두 최선으로 활용하겠다는 야망에 젖어 다채로운 양태 및 빈도로 구멍이 뚫려 있다. 심지어 석쇠의 눈이 커지다 못해 야망형으로 발달한 경우도 있다. 전도열의 극대화를 위해 최대한 확보된 면에 복사열의 개입 및 환기를 위해 구멍을 낸 형국이다. 거의 모든 고기를 올려 구울 해법이 마련되어 있을 만큼 종류가 다양하다.

4) 욕심형

음식재료를 굽는 칸이 선명하게 분리된 욕심형 불판
욕심형 불판에 올린 음식재료

마지막으로는 ‘욕심형’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조리할 수 있는’ 불판이다. 핵심은 고기를 굽기 위한 ‘야망형’ 불판이다. 이것이 판 위에서 중심을 이루고 계란 등을 익히기 위한 ‘전도열 의존형’이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다. 심지어 중심에 찌개 뚝배기를 위한 공간을 낸 제품마저 있다. 직화구이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합치면 초월적인 불판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종합적인 효율은 따로 쓰는 것보다 더 떨어진다.

따라서 욕심형 불판은 ‘뇌절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뇌절’이란 적당한 선에서 끊지 못하고 계속 말이나 행동 등을 하다가 기어이 추한 꼴을 보이는 형국을 뜻하는 은어이다. 특히 계란을 위한 테두리가 문제이다. 계란이 눌어 붙을 가능성도 매우 높을 뿐더러 모양새가 좁고 수세미가 잘 안 들어가니 구석을 깨끗하게 닦기 어렵다. 공간이 나뉜 프라이팬의 태생적 한계인데 생각 없이 제품을 개발해 뇌절형이 되었다.

미국의 크리스 오 셰프가 개발한 K-BBQ 캠핑카
미국의 크리스 오 셰프가 개발한 K-BBQ 캠핑카. ⓒkbbqcar
가변형 식탁에 다목적성 가열조리를 위한 불판을 채택한 게 눈길을 끈다
가변형 식탁에 다목적성 가열조리를 위한 불판을 채택한 게 눈길을 끈다. ⓒkbbqcar

다만 이 ‘욕심형’이 맨 앞에서 언급한 19세기 민화의 불판의 직계 후예일 가능성만은 무시할 수 없다. 민화의 불판은 갓을 닮아 가장자리가 평평하고 가운데는 움푹 파여 있다. 따라서 고기를 굽는 한편 마늘이든 찌개든 무엇이든 가운데에 익힐 수 있다. 다목적성이 뇌절형 불판의 목표이자 미완성의 미덕임을 감안하면 둘 사이의 관계를 간과하지 않는 게 좋겠다.


오늘은 저 불판에 어떤 고기가 올라갈까?
오늘은 저 불판에 어떤 고기가 올라갈까? ⓒfrice

K-고기불판의 오늘과 내일

나름 조리의 즐거움과 효율을 좇아 불철주야 애를 쓰며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지만 사실 K-불판에는 개선의 여지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고기가 들러 붙는데 대한 대책이 미약하고 얇아 열효율이 좋지 않다. 사실 전도열 의존형이 아니더라도 K-불판은 상당 부분 공간적 중재 역할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K-불판의 단점이 잦은 교체를 촉발하니 설거지 등 유지 관리로 자원 또한 너무 많이 잡아 먹는다. 과연 대안이 있을까? 무쇠를 고려해볼 수 있다. 열전도율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머금은 열을 오래 머금는다. 게다가 고깃집 같은 곳에서 빠르게 반복해서 쓴다면 표면에 폴리머의 막이 생성돼 고기가 들러 붙는 것을 막아준다.

불판의 형태와 고기의 종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맛이 느껴지는 느낌
불판의 형태와 고기의 종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맛이 느껴지는 느낌. ⓒfrice

실제로 무쇠 불판은 이미 한식 구이의 환경에 도입이 되어 있는데, 우려가 조금 따르기는 한다. 무거운데다 열을 오래 머금으므로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체 상황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훨씬 더 높다. 관습처럼 당연시 여기기는 하지만 식탁에서 벌어지는 불 및 불판의 도입 및 교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가벼워 무쇠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지닌 탄소강 불판도 등장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사실 한식 구이에는 장점 만큼 단점도 많다. 고기를 잘게 썰면 너무 빨리 익고, 요즘 유행을 따라 스테이크처럼 두툼하게 썰면 잘 안 익는다. 이런 단점에 K-불판이 한몫 거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떠한 여건에서도 고기와 불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달구다 못해 태워가며 아슬아슬하게 중재하고 있는 K-불판의 노고에 대해서는 한 번쯤 되새겨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실제로 무쇠 불판은 이미 한식 구이의 환경에 도입이 되어 있는데, 우려가 조금 따르기는 한다. 무거운데다 열을 오래 머금으므로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체 상황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훨씬 더 높다. 관습처럼 당연시 여기기는 하지만 식탁에서 벌어지는 불 및 불판의 도입 및 교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가벼워 무쇠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지닌 탄소강 불판도 등장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 오늘날 한식에서 즐겨 쓰는 구이용 불판을 이렇게 살펴보니 고기 종류보다 더 다양한 불판들이 있네요. 식탁의 한가운데에서 식사의 리듬을 조율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되기도 하는 고기 불판. 한식 고기구이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 형성에 K-불판이 한몫했다는 점에 동의하시나요? 오늘도 맛있는 고기를 위해 계속 진화하고 있는 K-불판! 그 존재를 되새기고 더 나은 한식을 즐겨보아요. 😀

한지, 어디까지 쓸 수 있어요?

햇빛이 드리운 미색 한지

<1부에서 이어집니다>

둥글게 말린 색한지
ⓒfrice

한지, 이전에는 어떤 곳에 많이 쓰였었나요?

1980년대 이전에 한지가 가장 많이 사용된 분야는 건축 자재 분야였어요. 장판지, 벽지 수요가 많았죠. 병풍이나 족자처럼 표구 분야 수요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건축 자재는 기계로 만든 종이와 PVC 장판으로 대체되고, 표구는 액자로 대체됐죠. 한지의 역할이 대체되니, 쓰임새 역시 점점 줄고 있습니다.

노란 한지장판이 깔린 한옥 내부.
그렇다. PVC 노란 장판의 원조는 한지 장판. 한지 장판 색이 누리끼리했던 이유는 장판용 미색 한지에 여러 번 기름을 칠하고 경년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PVC 노란 장판의 원조는 한지 장판. 한지 장판 색이 누리끼리했던 이유는 장판용 미색 한지에 여러 번 기름을 칠하고 경년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서울역사박물관
오늘날 생산 중인 장판용 한지. 한지장판은 여러 장의 한지를 붙이고, 천연 콩기름을 침투시킨 뒤 옻칠을 더한다
오늘날 생산 중인 장판용 한지. 한지장판은 여러 장의 한지를 붙이고, 천연 콩기름을 침투시킨 뒤 옻칠을 더한다. ⓒ천양피앤비

03. 연구, 디자인, 도전

혹시 뜻밖의 산업 군에서 한지를 써보겠다는 제안이 있나요?

최근 자동차 업계에서 연구 제안이 들어왔어요. 한지를 차량 내부 인테리어에 사용하고 싶은데, 같이 고민해달라는 의뢰였죠. 자동차에 종이를 쓰는 것이 자칫 불가능해 보였지만 한지라면 다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또 오늘날 한지를 새롭게 쓸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해서 협업에 나섰습니다.

동양한지에서 차량 인테리어용으로 개발한 샘플 종이. 국내 완성차 그룹 계열사에서 의뢰했다. 직접 만져보니 다른 한지보다 질기고 튼튼하다
동양한지에서 차량 인테리어용으로 개발한 샘플 종이. 국내 완성차 그룹 계열사에서 의뢰했다. 직접 만져보니 다른 한지보다 질기고 튼튼하다. ⓒfrice

자동차 업계에서 요구하는 스펙에 맞출 수 있었나요? 한지는 수공예품이라 제작이 까다로웠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차량 인테리어용 한지는 실패했어요. 양산(대량 생산)이 어렵습니다. 튼튼한 한지를 만들더라도 균일한 품질을 내기 힘들었어요. 그리고 높은 열을 가하거나 200톤에 달하는 압착기로 한지를 누르는 실험을 거쳤는데, 양산용 자동차에 적용되는 극한 테스트는 한지도 견딜 수 없었어요.

지금은 공예가 선생님이 모터쇼에 출품할 콘셉트카에 직접 설치하는 수준이 최선이죠. 그래도 이런 시도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지의 현대적인 쓸모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다양한 산업 군에 있다는 것을 더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기억나는 다른 한지 연구 프로젝트가 있으신가요?

종로 물나무 사진관과 손잡고 ‘사진 인화용 한지’ 개발을 마쳤습니다. 저희는 ‘인쇄용 도침 한지’라 부르는데요. 성분은 국산닥 100%. 종이 분류 기준으로는 *2합 순지입니다. 한지에 디지털 사진을 인화하려는 디자인 프로젝트였습니다. 기존 한지를 프린트기에 걸면 종이 섬유질이 굵은 탓인지 한지가 기계에 걸리거나 구겨지는 문제가 있었어요.

인쇄용 도침 한지에 인화한 인물초상사진
인쇄용 도침 한지에 인화한 인물초상사진. ⓒfrice

‘도침’이라는 한지 제작 공정이 있어요. 종이를 두드려서 표면을 고르게 만드는 일인데, 도침을 강화하며 문제를 해결했죠. 이 종이는 미색 한지의 색감을 깊이 있게 유지하는 방향으로 개선을 시도 중입니다.

한지도 샘플북이 있을까요? 디자이너에게 종이 샘플북의 존재는 소중합니다.

있습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KCDF) 산하 홍보관에서 만든 ‘한지 미리보기 책’이 대표적입니다. 몇몇 종이 업체도 생산 가능한 한지들을 묶어 샘플북을 내고, 색이 들어간 색한지를 모아 색깔을 구분하기 위해 샘플북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기계지 샘플북과는 다릅니다. 훗날 샘플북에 있는 한지가 다 떨어져, 그 종이를 비슷하게 만들더라도 결과적으로 비슷하지 않은 종이가 나오거든요. 컬러 팔레트를 찍어 오차 없이 디자인을 보려는 기계지 샘플북과 다릅니다. 제 생각에 한지 샘플북은 역사적인 기록물에 가깝다 봐요.

북촌 한지가헌에서 제작한 ‘한지 미리보기 책’. 
국내 18개 공방의 400여 종 한지를 소개하는 책자. 문화재용, 인쇄용, 공예용, 서화용, 인테리어용 등 용도별로 한지를 분류해, 종이에 얽힌 정보를 제공한다
북촌 한지가헌에서 제작한 ‘한지 미리보기 책’. 국내 18개 공방의 400여 종 한지를 소개하는 책자. 문화재용, 인쇄용, 공예용, 서화용, 인테리어용 등 용도별로 한지를 분류해, 종이에 얽힌 정보를 제공한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04. 한지의 내일은?

한지가 요즘 위기라 들었습니다. 한지 업계가 마주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라 보십니까?

유통자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한지의 다양성이 줄어드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한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줄고, 종이 수요 자체도 줄어서 생산도 나란히 줄어드는 상황이죠. 예컨대 색한지(色韓紙)는 전국 각 지역에서 모읍니다. 지역별 한지는 염료의 숙성과 건조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나는데요. 이것은 전통한지의 특색이기도 해서 일부러 가게에 질 좋은 물건을 모아두려 해요.

세가지 색한지를 둥글게 말아 촬영한 사진
ⓒfrice

전국 각지의 장인들이 꾸준히 생산을 하셔야 다양한 색을 지닌 한지가 나오는데 그렇지 못해서 큰 고민입니다. 인기 있는 색은 계속 만들어지더라도, 중간을 받쳐줄 색이 줄어드니 결과적으로 한지의 컬러 스펙트럼이 줄어드는 거죠.

또 다른 문제는 수입 한지들을 선별하는 일인데요. 수입 한지의 재료 원산지나 생산지역을 추적하기 쉽지 않은 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한지 품질 관리는 앞서 언급한 다양성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내에서 만든 것도 표준을 만드는 게 어려웠는데, 해외에서 만든 것은 관리가 더 어렵죠.

한지의 표준이나 품질관리 기준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한지 품질 표시제’라는 게 있습니다. 한지 생산자, 제조 방식, 재료 원산지 등의 제반 사항을 표기하는데요. 한지의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추진된 제도입니다. 한지를 사용하는 구매자에게 한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전통한지가 그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었어요.

취지는 좋은데, 이를 검증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 모자랍니다. 만약 한지 생산처에서 사정이 생겨 표기된 정보를 지키지 못한다고 해도, 처벌이나 불이익을 주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한지는 제작 과정에서 수많은 공정을 거치는데, 이 중 한 부분만 헐거워도 품질 격차가 나타나요. 사람이 만드는 종이라서 결국 편차가 나타납니다. 아쉽지만 유명무실한 제도가 됐지요.

한지 디자인 현황을 설명하는 박창완
ⓒfrice

‘한지를 외국에서 싸게 들여오는 건 어떨까?’ ‘한국 전통과 한지의 우수성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자!’ 이런 고민으로는 한지가 점점 뒤처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한지는 지금 실제로 위태롭습니다. 특히 삼국시대 때부터 이어진 전통한지가 지금은 후계자가 없어서, 각 지역의 장인이 돌아가시면서, 지역의 전통한지 생산이 끊어지는 곳이 많습니다.

전통이 단절되는 것도 큰 문제군요.

한국은 ‘전통’이라는 화두가 ‘옛 것의 계승’과 연관됩니다. 그 어느 나라보다 변화가 빠르지만, 전통이나 전통의 순서를 건드리는 일만큼은 변화가 더디죠. 제 생각에 한국에서 ‘전통’과 ‘보존’이라는 개념을, 많은 분들이 같은 맥락으로 인식합니다. 저는 두 개념이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요.

동양한지에서 자체 개발한 염색 옻칠 한지
동양한지에서 자체 개발한 염색 옻칠 한지 ⓒfrice

전통은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되는 것입니다. 한지의 전통은 ‘닥나무 섬유로 만든 종이’라는 범주 안에서 시대의 요구에 맞춰 변화합니다. 보존은 문화재 보존용 한지나 전통한지 제작 기법처럼 ‘지켜야 할 옛 것’에 필요한 개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계승된 옛 것이 보존을 벗어나면, ‘그것은 전통이 아니다’라며 배척 받는 게 현실입니다. 보존이라는 명분이 전통을 막는 셈이죠.

“옛 것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건 계승이지 전통이 아니다.” 라는, 예전에 들었던 어느 지식인의 말씀이 기억나네요.

해외 사례 중 참고할 만한 게 있을까요?

해외 출장 때 만난 화지(일본 전통 종이) 관계자의 말씀입니다.

“원료가 국산인지 수입산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현시대에 사용될 수 있는 종이를 만들어 잊히지 않게 만드는 게 중요하죠. 옛날 방식으로 자국 전통 종이를 만드는 것은 계승되어야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현대에도 사용될 수 있는 종이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옻칠한지를 포갠 모습
옻칠한지를 포갠 모습 ⓒfrice
옻칠한지는 종이 표면에 가죽을 보는 듯한 거친 질감이 드리운다
옻칠한지는 종이 표면에 가죽을 보는 듯한 거친 질감이 드리운다. ⓒfrice

저는 이 말씀이 한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도 부합한다고 봐요. 혁신적인 제작시도나 제조공정의 현대화 같은 건 존중받아야겠지요. 해외 전통 종이 관계자분들은 저에게 “한지에 옻칠을 하는 건 좋은데, 왜 피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성분을 빼지 않느냐?”는 피드백을 전해주셨어요. 옻칠한지에 쓰는 원료는 옻나무에서 추출한 걸 그대로 칠하거든요. 실제로 한국에서 전통 옻을 다루는 분들은 팔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 있어요. 옻의 독한 성분 때문이죠.

‘옻의 특정 성분을 분리하면 그것은 정말로 전통에서 멀어지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대화 과정에서 전통의 개념이나 전통을 규정하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뒤섞이는 것 같아요.

밝은 조명 아래에서 한지의 질감은 도욱 도드라진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한지의 질감은 도욱 도드라진다.ⓒfrice

한지의 대중화를 위해 어떤 것을 해볼 수 있을까요?

유통자 입장에서 퍼포먼스를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일종의 쇼 엔터테인먼트를 제안하고 싶네요.

인사동 거리를 지나다니면, 서예나 악기 연주하는 분이 계시죠. 꿀타래 가게 사장님도 타래를 두 배 네 배 늘어뜨리며 지나가는 사람에게 볼거리를 만드시거든요. 한지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런 퍼포먼스가 거의 없었어요. 한지에 사람들의 감각을 사로잡는 특별한 물성이 없진 않거든요. 앞으로는 한지를 이용한 예능적인 퍼포먼스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인사동에서 한지를 뜨고 그걸 대중 앞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30여 년 전, 동양한지가 종로 견지동에 있을 때 매장 안에서 한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공중파 방송국에서도 촬영을 왔었고. 거리를 다니시던 분들이 한지에 관심이 생겨 문의도 많이 주셨어요. 한지가 건조될 때까지 기다리다 종이를 사 가셨던 손님들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컬러와 기법이 적용된 한지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다양한 컬러와 기법이 적용된 한지의 변화는 무궁무진하다. ⓒfrice

생산자에게 보조금을 지원하거나 관광지에 체험형 전시공간을 따로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지를 좀 더 대중적인 곳에서 재미있게 퍼포먼스를 하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지자체나 공공기관에서 한지산업을 위한 지원사업을 추진하신다면! 생산자나 유통자가 문화 진흥 프로젝트를 직접 만들 수 있게 지원을 하거나, 대중적인 공간에서 감각적인 퍼포먼스를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을 개선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동양한지는 국산 한지를 지키고 싶어요. 1968년부터 대대로 인사동을 지킨 전문가로서, 앞으로도 국내 생산 업체와 상생하려고 합니다. 한지를 디자인에 활용하는 분들도 국산 한지를 위주로 사용해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2부 인터뷰는 한지의 오늘을 업계 전문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시간이었어요. 한지를 만드는 사람, 한지를 쓰려는 사람 모두 고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에도 한지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자동차 인테리어 소재 연구나 사진 인화용 한지개발은 디자이너의 의지가 느껴지는 시도여서 눈길을 끄네요. 여러분은 한지의 내일을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오늘의 한지를 말하다

동양한지 박창완님이 한지를 꺼내는 모습
동양한지 박창완님을 담아낸 커버 이미지
동양한지 박창완님 ⓒfrice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한지를 연구하고 만들고 판매하는 박창완입니다. 경기도 김포에 한지 소재연구소를 만들었는데요. 염색이나 후가공을 거친 특수한지를 다양하게 생산하고 있어요. 저는 한지의 현대적인 쓸모에 관심이 많습니다. 이렇게 작업한 한지들은 인사동 동양한지에서 판매하고 있어요. 부친을 도와 남동생과 한지 가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01. 왜 인사동에 한지 가게가 몰려있을까?

부친께서 인사동 한지 전문가로 유명한 박성만 선생님이시죠.

맞습니다. 저는 교육학을 공부했어요. 대학원에서는 한지가 아니라 학생 인권을 공부했었죠.(웃음) 인사동에서 한지 가게를 운영하시던 부친께서 한지 업계로 들어오라고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한지의 가치를 높이고 맥을 이을 사람이 절실하다고요.

동양한지에 전시된 한지공예품 샘플과 판매중인 종이들
동양한지에 전시된 한지공예품 샘플과 판매중인 종이들 ⓒfrice

2009년부터 한지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를 위해 미술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국내 한지 장인을 만나 사례 분석과 제작 기법을 정리할 수 있었죠. 대학원에서 했던 학술 연구는 큰 힘이 됐습니다. 지금은 문화재 복원용 한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사동 동양한지는 50년 넘게 운영중입니다. 언제 어떻게 시작됐나요?

전주에서 할아버님이 일제강점기 때 한지를 만들어 파셨고, 부친께서는 유통에 힘쓰셨어요. 부친은 1968년에 서울 인사동으로 들어와 1972년부터 한지 가게를 여셨죠. 동양한지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입니다. 예전에는 인사동이 명동 예술거리의 배후지역이라고 해요. 전성기에는 인사동에 종이를 다루는 지업사만 40여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1982년생인데 인사동 한지 가게 아들이다 보니 이 동네에서 많은 것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계동에서 남산을 향해 바라본 도심(1982).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옛날 인사동 풍경이 보인다
계동에서 남산을 향해 바라본 도심(1982).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옛날 인사동 풍경이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가 초등학교 다니던 80년대 후반, 동양한지는 조계사 옆에 있었어요. 매장도 지금의 2배쯤 됐죠. 한지를 배송하는 차량만 8대였어요. 한지 뜨는 장인을 따로 모셔 매장에서 한지를 생산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인사동 거리에서 바라본 동양한지
인사동 거리에서 바라본 동양한지 ⓒfrice

옛날 인사동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나요?

부친 말씀에 따르면, 1960년대 후반 인사동은 안국동에서부터 인사동으로 내려오는 길 가운데에 실개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중심으로 골동품 매장이 있었죠. 아침이 되면 골동품을 수집한 리어카가 다녔다고 전해져요. 병풍을 수리하거나 족자를 꾸미는 표구사가 늘어나면서 부자재를 취급하는 필방, 지업사가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상권이 만들어지면서 ‘전통문화의 거리’가 된 거죠.

창완님의 기억에서 인사동은 어떤 풍경입니까?

제가 기억하는 건 ‘1990년대 인사동’입니다. 어린 시절 제 기억에도, 종로 골목에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 아저씨들이 엄청 많았습니다. 리어카에 실려있는 건 북촌이나 서촌의 한옥집에서 나온 물건들이었어요. 당시 토박이 주민이 집터를 허물고 새 집을 짓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집에서 벽지로 썼던 종이라거나 집 어딘가에 방치된 족자 같은 게 리어카에 실린 채 인사동을 떠도는 거죠.

1975년 8월 서울 명동 서울은행 본점 앞을 지나는 리어카 꾼들
1975년 8월 서울 명동 서울은행 본점 앞을 지나는 리어카 꾼들 ⓒ공유마당

리어카꾼이 “XX동에서 철거하다 나온 물건인데 필요하면 살래요?”라고 말을 붙이면서 인사동 가게를 돌아다녔어요. 그런 물건이 임자를 만나면 미술품이 되는 거였죠. 안목이 있는 분들은 거기서 문화재급 생활 도구를 건지기도 하셨어요.

“고서나 고미술품을 구하려면 인사동에 가야 한다”라는 소문 같은 게 생기고 실제로 인사동에서 그런 물건을 쥐고 계신 분들이 머무르는 거죠. 전통문화의 거리라는 인사동의 이미지는 당시 영향이 크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은 임대료 문제도 있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 상권이 되면서 떠나는 분들도 계시지만요.

말씀대로 인사동 거리를 걷다 보면, 예술거리보다는 관광지로 동네 역할이 바뀌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시대의 흐름을 역행할 수는 없는 거죠. 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에 기반한 문화는 실생활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고, 전통기술이 쓰이는 곳도 점점 사라지고 있거든요. 한지 가게도 많이 줄었어요.


동양한지에서 보관중인 한지들 닥나무 섬유가 인상적이다
ⓒfrice

02. 한지란 무엇인가?

한지는 정확히 어떤 종이입니까?

한지는 ‘닥나무 섬유를 떠서 손으로 만든 종이’를 통칭합니다. 한지[韓紙]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건 1958년 ‘대한민국 통계연감’인데요. 그전에는 닥나무 저[楮]에 종이 지[紙]를 써서 ‘저지’라 불렀어요. 전통한지는 닥나무를 비롯한 종이용 나무가 자라면 따로 수확을 해요. 나무결을 손으로 벗겨내 잿물에 삶고, 섬유를 모아 그것을 방망이로 두들겼죠.

미색 한지를 포개 접사용 특수렌즈로 촬영했다
ⓒfrice

화학적으로 보면 닥나무 섬유를 ‘수소 결합’해서 만든 종이입니다. 산도가 적은 중성지고요. 중성지는 산성과 알칼리성을 띄는 일반 종이보다 수명이 길어요. 그래서 천년을 간다는 거죠. 원료인 닥나무의 생장 환경, 한지를 만드는 그 날의 날씨, 장인의 컨디션, 원료의 처리 과정 등의 조합을 거쳐 한 장의 한지가 태어납니다.

한지를 한국에서 만들어야만 한지인가요?

원칙적으로는 「한국에서 자란 닥나무 섬유를 원료로, 한국 고유의 초지 기법인 외발뜨기 기법을 사용하여, 장인이 만든 수제 종이」를 얘기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한지의 범위를 「사람이 닥나무 섬유를 초지 기법으로 만든 종이」로 보는 게 옳다고 봅니다. 지금은 기계로 만들거나 손으로 만든 한지의 구분이 없어져 있어서 고민이네요.

최근 2~3년 사이에 닥나무 재배와 수확이 어려워지고, 인력난이나 비용 증가로 전통방식이나 제작 환경을 지키기 힘들어졌죠. 현실적인 이유로 한지의 범위는 느슨해졌습니다. 오늘날 한지 업계에서는 수입산 닥나무를 사용해 한국에서 만드는 것도, 한국에서 만들지는 않아도 닥나무 섬유로 만든 종이도, 기계로 만드는 것도 다 한지라 부르고 있어요.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로 범위가 넓어진 거죠.

참고로 해외에서도 한지와 비슷한 물성을 지닌 전통 종이를 생산합니다. 일본에서는 화지(和紙), 중국은 선지(宣紙)라고 부르죠.

전통한지 제작을 위해 닥나무 겉껍질을 벗겨 건조하는 모습
전통한지 제작을 위해 닥나무 겉껍질을 벗겨 건조하는 모습 ⓒ동양한지

특히 한. 중. 일 3국이 공통적으로 닥나무 섬유질로 종이를 만들어요. 종이 만드는 기술은 각 나라별 지역, 환경적 차이로 기법이 나뉘게 됐습니다. 제작 기법의 차이는 닥나무 섬유질 배열에 영향을 주는데요. 이것이 닥나무 섬유를 이용한 종이에 질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한국 전통한지의 경우, 발틀에 턱을 없애고 닥나무 섬유가 사방으로 자유롭게 배열될 수 있는 방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박창완님이 한국 전통 외발뜨기하는 모습. 발틀에 턱이 없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박창완님이 한국 전통 외발뜨기하는 모습. 발틀에 턱이 없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동양한지

전통방식을 고증한 한지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전통한지는 제작 공정을 현대화시킨 한지와 비교하면 광택, 질감, 냄새 같은 게 더 좋아요. 한지 장인의 공방 같은 곳을 가면 그 집에서만 나는 나무냄새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자연스러움이 전통한지에 깃들어있어요. 한지 특유의 옅은 풀냄새는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종이 자체가 뿜어내는 매력일 텐데요. 종이를 다루는 사람에게 마음의 안식을 줍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한지가 ‘쉼을 주는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한지에서 인상적인 질감이 드러난다
ⓒfrice

전문가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우수한 한지는 무엇인가요?

제 기준으로는 ‘미색 외발지’입니다. 오늘날 한지는 여러 가지 색을 지니고 있지만, 한지 속 섬유질이 파괴되지 않은 상태로, 닥나무가 지닌 색감을 드러내는 건 ‘미색’이라 생각합니다. ’외발지’는 외발뜨기라는 기법으로 만든 한지를 뜻해요. 종이를 뜰 때 닥나무 섬유를 넓게 펼치는 판을 ‘발’이라고 하는데요. 천장에 줄 하나만 매달아서 전후좌우로 흔들고, 풀려 있는 닥나무 섬유를 물에서 거르는 기법을 ‘외발뜨기’라 부릅니다.

미색 외발지를 쌓아 측면에서 바라봤다. 종이 모서리의 섬유질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다
미색 외발지를 쌓아 측면에서 바라봤다. 종이 모서리의 섬유질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답다. ⓒfrice

많은 분들이 「하얀색 한지가 좋은 한지냐?」라고 물어보세요. 표면이 깨끗하니 좋은 물건이라고 여기시는 거죠. 오히려 하얀색 한지는 약품 처리를 강하게 해야 하거든요. 결과적으로 닥나무 섬유질이 상하기 때문에 질 자체는 미색 한지보다 조금 떨어집니다.


동양한지에서 온 손님이 회화용 한지를 문의하는 모습. 어떤 목적으로 방문했는지 물었다.
“저희는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부원인데요. 동양화 그리기에 적합한 한지를 구하러 왔어요.”
동양한지에서 온 손님이 회화용 한지를 문의하는 모습. 어떤 목적으로 방문했는지 물었다.
“저희는 고려대학교 한국화회 부원인데요. 동양화 그리기에 적합한 한지를 구하러 왔어요.” ⓒfrice

오늘날 한지는 ‘누가, 왜’ 쓰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회화 분야에서는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한지는 기계로 만든 종이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한지만의 발색이 있기에 수요가 있습니다.

서양화가 류영신의 추상화 연작. 한지의 닥나무 섬유를 소재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서양화가 류영신의 추상화 연작. 한지의 닥나무 섬유를 소재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다. ⓒADAGP

한지의 물성을 디자인에 활용하려는 수요도 있어요. 한지는 원료인 닥나무의 섬유를 *고해하는 시간에 따라, **물질을 어떻게 했는지에 따라서 서로 다른 질감이 나타납니다.

2023년 북촌한지문화센터에 전시된 한지조명장치
2023년 북촌한지문화센터에 전시된 한지조명장치 ⓒstudio.sunnykim
닥나무 섬유가 구름 위를 떠다니는 용을 닮아서 '운용지雲龍紙'라 부른다. 동양한지는 운용지를 조명장치에 쓰기에 적합한 한지로 추천한다
닥나무 섬유가 구름 위를 떠다니는 용을 닮아서 ‘운용지雲龍紙’라 부른다. 동양한지는 운용지를 조명장치에 쓰기에 적합한 한지로 추천한다. ⓒfrice

조명 연출에 적합한 소재로는 ‘운용지(雲龍紙)’가 있어요. 섬유를 덜 갈아서 종이 속에 실타래 같은 게 떠있는 한지인데요. 종이를 빛에 비추었을 때 닥나무 섬유로 표현되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유리창에 붙이면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적합한 한지도 있어요. 텍스처감이 몽글몽글한 ‘구름지’같은 한지를 고를 수 있겠습니다.

측면에서 내려다 본 한지 뭉치
ⓒfrice

한지 테두리는 데클 엣지(Deckle edge)라 부르는 자연스러운 보풀이 있어요. 이처럼 한지의 물성을 다양한 목적을 갖고 활용하려는 분들이 한지를 들고 가서 실험하고 계십니다. 업계에 몸담으며 점점 한지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디자인적 실험이 참 소중한 흐름이라 생각해요.

(…2부에서 계속…)

😈 동양한지는 취재하러 갔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추천받아서 알게 됐어요. 한지가 필요하면 동양한지를 간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죠. 인사동의 수많은 종이 가게 중 디자이너가 관심을 갖고 들르는 곳이라면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란 짐작이 들었습니다.

인사동의 옛 모습부터 한지에 대한 전문가 지식까지 유익한 정보를 채집할 수 있었는데요. ‘한국의 종이’ 한지,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