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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과 부산, 그리고 인천으로 떠난 종교 스테인드글라스 탐방기

부산 남천동 성당 스테인드글라스는 한국 최대 규모로 알려져있다

신성하거나 신선하거나

스테인드글라스. 뜻을 풀자면 ’색유리‘요, 스타카토처럼 통통 튀다 부드럽게 펼쳐지는 일곱 글자에 이토록 신성한 이미지를 심어준 건 중세시대 유럽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신의 존재를 투영하기에 딱 좋은 매체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이어지던 시절이었고, 오래전부터 빛은 곧 신을 상징했으며 창틀에 박힌 스테인드글라스는 시시각각 다른 감도로 빛났으니까.

그러나 대표 이미지를 갖는다는 건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독 강하게 박힌 종교미술의 이미지 앞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도 딱 한 가지 면만 지니지 않는데 스테인드글라스라고 다를까? 만약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또 무엇이 보일까? 예술과 디자인이라는 필터를 쥐고 경부선을 넘나든 짧은 여행은 그런 사소한 물음표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가재울 성당

경의중앙선 신촌역과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사이, 홍제천이 한때 모래내라는 이름으로 흘렀던 가좌역. 4번 출구로 나와 모래내시장을 지나고 헨젤과 그레텔 속 빵 부스러기처럼 늘어선 가로수를 따라 걷는다. 첫 번째 목적지는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길쭉길쭉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는 풍경 속에 숨어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 통창으로 유명한 가재울 성당.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385-5에 위치한 가재울 성당의 외관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385-5에 위치한 가재울 성당 ⓒfrice

여기가 맞아? 솔직히 말하자면 첫인상은 그랬다. 회색빛 십자가가 아니었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외관이 담백했다. 남가좌동을 휩쓴 뉴타운 재개발의 결과물이었다. 1971년에 설립된 본당이 허물어진 후 2014년 문을 열었다는 가재울 성당은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며 주민센터에 위화감 없이 스며들었다. 자고로 스테인드글라스란 클래식한 건축물에 어울리는 것 아닌가 싶어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되었지만, 반전은 2층에서 시작됐다.

가재울 성당 2층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마주한다
가재울 성당 2층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마주한다 ⓒfrice

고요한 복도 저 편에서 빛나는 유리화와 그 아래 웅덩이처럼 고인 빛그림자.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의 아이콘 같은 만화영화가 하나쯤 있다. 내 경우엔 ‘미녀와 야수’였다. 비가 쏟아지는 밤, 초라한 행색의 노파를 내쫓아버린 왕자와 그의 차가운 심장에 저주를 건 마녀. 알록달록 유리화로 펼쳐지는 프롤로그는 어린 눈에도 아주 낭만적이었다.

장미꽃같은 빨간 동그라미는 예수의 심장을 의미한다
붉은 유리가 푸른 유리와 대비되며 인상적인 심볼로 다가온다
장미꽃같은 빨간 동그라미는 예수의 심장을 의미한다 ⓒfrice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장면이 되살아났다. 저 멀리 노랗고 파란 유리 조각들이 회오리치며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국내 최초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인 고(故) 이남규의 ‘예수 성심’(1988)이었다. 재개발 전까지 본당을 지키다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작품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했고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 반짝였다. 울퉁불퉁 깨진 유리들이 두꺼운 단면 안쪽으로 말간 바다를 품고 있었다. 장미꽃이라고 생각했던 빨간 동그라미가 예수의 심장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가재울 성당의 물고기 모양 스테인드글라스는 설치미술가 오순미 작 (2014). 가재가 많아 붙여졌다는 가재울 명칭과 모래내에서 영감을 받았다. 거대한 물고기는 구원을 상징하며 유리 전체의 작은 격자들은 신자 개개인을 나타내는 모래를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가재울 성당의 물고기 모양 스테인드글라스는 설치미술가 오순미 작 (2014). 가재가 많아 붙여졌다는 가재울 명칭과 모래내에서 영감을 받았다. 거대한 물고기는 구원을 상징하며 유리 전체의 작은 격자들은 신자 개개인을 나타내는 모래를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사진 frice, 참고 가톨릭 굿뉴스

하지만 이곳이 유명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2층과 3층을 아우르는 대성전 오른편, 모래알 같은 격자무늬 위로 부드럽게 헤엄치는 물고기 형상. 설치미술가 오순미와 건물 설계 단계부터 논의했다는 무지갯빛 창문이다. ‘모래내’와 ‘가재울’에서 영감받았다는 창문은 모티프에 충실했다. 화려한 밑그림도 장식도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거기에는 푸르스름한 새벽녘, 노랗게 물든 한낮, 뉘엿뉘엿 저무는 해질녘까지 다양한 시간대가 깃들어 있었다.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짤막한 시차가 생겨났다. 다른 것 없이도 색감이 곧 장식이었다.

노랗게 물든 한낮을 닮은 스테인드글라스 해질녘 오후의 시간이 공존한다
푸르스름한 새벽을 닮은 스테인드글라스. 해질녘 오후의 시간이 공존한다
푸르스름한 새벽과 노랗게 물든 한낮, 해질녘 오후의 시간이 공존한다 ⓒfrice

스테인드글라스의 세계를 제대로 마주한 건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오후 세 시를 넘기자 불현듯 햇빛이 스며들었다. 유리에 새겨진 숨결을 따라 물그림자 같은 흔적이 드리워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스테인드글라스란 단순히 색유리의 개념이 아니라는걸.

창문을 통과한 빛과 거기서 퍼져 나오는 그림자, 화창한 장조와 싱거운 단조가 만들어내는 리듬,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공간이 오묘한 빛깔 속으로 천천히 잠겨 들었다.


남천성당의 기울어진 형태는 배의 돛 모양을 닮았다. 항구도시 부산을 염두에 둔 것. 오른편의 열쇠모양 종탑은 천국의 열쇠를 들고 하늘로 향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남천성당의 기울어진 형태는 배의 돛 모양을 닮았다. 항구도시 부산을 염두에 둔 것. 오른편의 열쇠모양 종탑은 천국의 열쇠를 들고 하늘로 향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사진frice, 참고_부산일보

부산, 남천성당

서울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길은 조금 길었다. 아침부터 부산행 열차를 타고 한참을 달린 후 캐리어를 끄는 여행자들과 심드렁한 얼굴의 주민들이 뒤섞인 마을버스에 실려 덜컹덜컹. 3시간 남짓의 여정 끝에 드디어 ‘샤’ 모양 건물을 만났다. 잘라낸 케이크 같은 삼각형 옆으로 열쇠 모양 종탑이 세워진 풍경, 부산의 남천성당이었다.

부산 남천동 성당 내부
ⓒfrice

이곳의 시그니처는 45도 기울어진 벽면의 안쪽이다. 길이 53m에 높이 42m인 유리화로 온통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라는 유리화는 한평생 사제와 미술가를 넘나든 조광호 신부의 작품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시인과 화가를 꿈꿨으며 미(美)를 곧 진리라 여긴다는 70대 신부가 탐구한 아름다움은 어떤 모습일까.

부산 남천동 성당 내부. 한국 최대 규모 스테인드글라스 아트워크를 만날 수 있다
한국 최대 규모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부산 남천성당
한국 최대 규모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부산 남천성당 ⓒfrice

들어서자마자 평화였다. 창문 가장자리를 타고 구석구석 쏟아져 내리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반대편 벽 위로 어룽거리는 빛, 빛, 빛. 숫자와 단위로 읽었을 때는 알 수 없던 공간감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도하는 마음에는 주일이 없다는 듯 몇몇 신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다란 의자 위로 빛무리가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유리에 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후 소성과정을 거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에 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후 소성과정을 거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조광호 신부의 작품이다
유리에 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후 소성과정을 거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조광호 신부의 작품이다 ⓒfrice

평일 오후였고 온통 침묵이었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는 유리화는 추상화와 구상화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으로 존재감을 뽐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동그라미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는 동안 아래쪽으로 성경 속 인물들이 또렷하게 나타나는 식이었다. 어떤 선은 비 갠 하늘처럼 선명했고, 또 어떤 선은 붓질 대신 페인트를 뿌렸던 잭슨 폴록의 것처럼 거칠었다. 어제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만큼 맑고 생생한데 1995년작이라니, 새삼 스테인드글라스는 한번 만들어지면 처음의 빛깔과 형태 그대로 천 년을 간다는 말이 실감 났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로 427번길 15에 위치한 부산 남천성당. 의자 위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떨어지고 있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로 427번길 15에 위치한 부산 남천성당 ⓒfrice

머무는 내내 따라붙은 건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서 기도하고 사색하고 젖어들었을까. 하릴없이 겸허해지는 모든 순간이 여기에 녹아있다 생각하니 경건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작가에게 묻고 싶었다. 유리를 자르고 달구고 조각조각 맞춰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느냐고.

나오는 길에는 맨 뒷자리에 앉아 기도를 했다. 사실 기도라기보다는 소원을 비는 쪽에 더 가까웠지만, 평소 들춰보지 않던 이야기들이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왔다. 어쩌면 종교란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어떤 초월적 순간이 아닐까, 불현듯 그런 문장이 머릿속을 스쳤다. 빛은 여전히 창문 아래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인천, 강화 동검도 채플

마지막 목적지는 강화도 남동쪽의 작은 섬 동검도였다. 면적 1.6㎢에 불과한 그곳에 조광호 신부의 또 다른 작품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춥던 유학 시절, 알프스의 어느 작은 채플에서 얻었던 위로가 지어올린 곳. 누구나 방문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7평짜리 영혼의 쉼터.

인천 강화군 길상면 동검길 114에 위치한 자그마한 건물
인천 강화군 길상면 동검길 114에 위치한 자그마한 건물 ⓒfrice

인천 강화군 길상면 동검길 114에 위치한 자그마한 건물 ⓒfrice

갯벌을 지나 도착한 예배당은 ‘주인 없는 집’이라는 소개말답게 텅 비어 있었다. 이따금 트럭이며 자동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도로 옆쪽이었다. 벽면과 천장을 가로지르는 십자가만이 이곳이 기도하고 명상하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양 문에 우주가 빼곡하다
양 문에 우주가 빼곡하다 ⓒfrice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라는 이곳은 성인 다섯 명쯤 누우면 꽉 찰 만큼 좁았다. 그렇지만 정면 가득한 통창으로 갯벌이 훤히 내다보였고, 출입문에는 칸칸이 우주가 그려져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작지만 그 이면은 훨씬 넓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온 공간이 외치는 듯했다. 무엇보다 벽면마다 자리 잡은 스테인드글라스.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매끈한 삼각형과 길쭉한 사각형과 늘어진 오각형을 따라 충만하게 물들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강화도의 자연이 창 밖으로 보인다
실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창 밖 예수십자가 상과 나란히 우뚝 서있다
ⓒfrice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쉽게도 구름 낀 날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늘 환하게 웃던 사람이 미소를 지우고 보여주는 민낯 같았다. 음악이라면 무대 위에서 홀로 주목받는 독주가 아니라 다양한 악기들이 모여 이루는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빛의 예술이라는 건 빛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유리의 맨얼굴로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까? 살펴본 적 없던 물음표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름다움과 실용성 사이, 우리가 몰랐던 스테인드 글라스

인간은 아름다움에 접근함으로써 본래의 인간이 된다고 했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지만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던 스테인드글라스를 마주하면서 그 문장을 자주 더듬어 보았다.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 예술이라면 스테인드글라스는 가장 순수한 예술이었다. 그 앞에 서는 건 광활한 자연 앞에 서는 순간 같았다. 저항할 힘조차 없이 압도되는 것, 잠시 할 말을 잊게 되는 것. 바깥에서 스며드는 빛에 사로잡혀 있자면 안쪽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인간에게 빛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대체 무엇이 담겨있기에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걸까 생각하기를 여러 번.

빛을 통과시킨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의 아름다운 모습
ⓒfrice

그렇게 말랑한 순간들 사이로 실용적인 선택지가 불쑥 튀어나왔다. 혁신적일 것, 아름다울 것, 기능을 이해하기 쉬울 것, 오래 지속될 것, 환경친화적일 것, 최소한의 디자인으로만 이루어질 것.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가 일찍이 세운 ‘좋은 디자인의 원칙’이 거기에 녹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쓸모를 따지지 않는 작품에서 존재 이유가 확실한 제품으로 얼굴빛을 바꿨다. 요청하는 이 없이도 자라나는 이야기에서 들어주는 이가 있기에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되었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이라는 관점을 쥐고 떠났으나 그런 분류 기준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품은 가능성을 너무 오래 몰라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빈티지 소품이나 상업 공간 속 장식 요소 등으로 점차 친숙해지고 있지만 그것이 스쳐가는 트렌드인지 본질적인 확장인지는 알 수 없는 요즘, 이 영롱한 색유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 새로운 물꼬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이유다. 심미적인 아름다움과 효율적인 실용성이야말로 각자의 자리에서 인류를 구원해 온 요소니까. 물론 이건 아주 개인적인 시선의 끝, 그 앞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해진다.

지역축제를 다방에서 개최한 이유

마계인천 페스티벌 기획자들. 왼쪽부터 이창길 개항마을 대표, 양윤정 프로젝트 매니저, 인천맥주 박지훈 대표

지금까지 이런 축제는 없었다

축제는 관람객을 오래된 상가건물로 초대한다. 골목에서 100년 묵은 적산가옥을 만났다. 2층은 지역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재즈클럽이, 1층은 수상한 가라오케가 있다. 두 업장은 동시에 영업중이다. 어울리지 않는 것이 느슨하게 뭉쳐 독특한 미감을 발휘하는 동네. 축제 기획자들은 인천 구도심의 기이한 공간을 주목한다.

한국의 지역축제는 주로 광장에서 열린다. 수평적인 공간에 터를 잡아 잔치를 연다. 지붕이 뾰족한 임시 천막, 넓게 펼친 플라스틱 의자. 임시무대에서 펼쳐지는 찬조공연은 K축제의 전형. 2023년 9월, 인천 구도심에서 열린 어느 지역축제는 달랐다. 광장이 아니라 골목에서 페스티벌이 열렸다.

마계인천 페스티벌 기획자들. 왼쪽부터 이창길 개항마을 대표, 양윤정 프로젝트 매니저, 인천맥주 박지훈 대표
왼쪽부터 이창길 개항마을 대표, 양윤정 프로젝트 매니저, 인천맥주 박지훈 대표 ⓒfrice

7080라이브펍에서 진행된 노래경연대회에 열광하는 참가자들
7080라이브펍에서 진행된 노래경연대회에 열광하는 참가자들 ⓒfrice

광장이 아니라 좁은 밀실에서 이뤄지는 기묘한 축제였습니다. 어쩌다 이런 축제를 만들었나요?

창길 마계인천 페스티벌은 개항마을 대표 이창길과 인천맥주 대표 박지훈의 식사 중 수다에서 시작됐습니다. ‘A에서 B행사 열면 잘 어울리지 않을까?’ ‘C라는 곳에는 D를 모시고 E를 해보고 싶어.’같은 말이 현실이 된 거죠.

저희는 개항로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활동중입니다. 브랜드로 인식되지만, 회사나 협동조합은 아닙니다. 서로 계약관계로 묶이지 않았다는 게 핵심인데요. 이런 관계는 서로 매력이 없거나 마음에 안 들면 일을 안 만든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결혼은 아니고 연애. 일종의 다자간 연애상태라 볼 수 있겠네요.(웃음)

밀실과 밀실을 잇는 수직 통로를 거스르면 어느 순간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 각 공간의 테마와 쓰임이 새롭다
밀실과 밀실을 잇는 수직 통로를 거스르면 어느 순간 새로운 장이 펼쳐진다. 각 공간의 테마와 쓰임이 새롭다. ⓒfrice

지훈 축제행사는 지인과 술 마시면 자주 하는 이야기들의 연장선입니다. “이런 기획을 우리 동네에서 하면 정말 끝내주지 않을까?”라고 던지면 어느샌가 실행되는 거죠. 방향성과 색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놓으면, 다들 서로 못 참습니다. 뜻이 맞으니 일을 펼쳐야 직성이 풀리는 거죠. 마계인천 페스티벌도 사실 이렇게 판을 키울 계획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일이 되게끔 만들다 보니 계속 커졌죠.

인천맥주가 진행한 팝업스토어 이벤트와 한정판 크래프트 비어. '마계인천'이란 밈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천맥주가 진행한 팝업스토어 이벤트와 한정판 크래프트 비어. ‘마계인천’이란 밈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천맥주

박지훈 대표님은 이미 인천맥주를 통해 ‘마계인천’이란 이름을 걸고 팝업 이벤트를 여셨죠.  지역 노포와 협업에 나섰습니다.

지훈 페스티벌의 시작점입니다. ‘지금 타이밍에 판을 키우면 딱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어요. ‘마계인천’이라는 이미지는 호불호가 갈리는데, 이제 호(好)가 조금 더 많아지는 시기인 거죠. 처음엔 나쁜 시선으로 보던 분들도 ‘쟤들이 지금 뭔가 진실한 마음으로 애쓰긴 하는 구나’라는 식으로 응원해 주시는 걸 본능적으로 체감해요.

창길 박지훈 대표님은 원래 공연했던 사람이고 지금은 맥주 만드는 사람입니다. 존재 자체가 고유자원입니다. 서로 형편을 잘 알고 있으니, 지역 내 기획자끼리 협업을 추진하면 굉장히 빠르게 돌아가는 거죠. 마음 맞는 사람끼리 각자의 배경이나 발상을 이미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마계인천 페스티벌의 레퍼런스는 제 영국 유학시절에 있었어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얻은 영감이죠. 시내 곳곳에서 거리 공연을 볼 수 있었어요. 여기에 저희가 임대해서 쓰는 상업공간이 있어요. 수년간 인근 이웃과 맺은 관계도 있죠. 이번 축제는 각자의 자원이 유기적으로 뭉쳐 벌어진 협업입니다.

공식 포스터. 강렬한 색감과 일러스트가 특징이다
공식 포스터. 강렬한 색감과 일러스트가 특징이다. ⓒfrice

포스터부터 파격입니다. 일단 정보값을 담은 디자인이 적어요.

창길 없는 게 참 많았습니다(웃음) 보통 페스티벌과 비교했을 때 중앙 무대가 일단 없고요. 맵도 없었습니다. 포스터에는 타임 테이블도 느슨하게 적혀있어요. 다만 QR코드처럼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건 디자인이 크게 들어가 있어요. 링크 찍으면 정보 열람이 가능하니까. 중요한 정보는 웹사이트에. 올 사람들에게 중요한 정보만 노출시키자. 스마트폰 켜서 QR코드 찍을 정도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 행사정보를 보게 만드는 디자인이었죠.

저는 이게 본능을 따르는 일이라 봅니다. 계획이나 디자인 이전에 본능이 있어요. 행사를 기획한다면 뭐가 더 재밌을지를 따져요. 결국 더 이끌리는 방식을 따라가는 거죠. 개항로 축제의 핵심은 ‘재미’였어요. 철저하게 주최자 입장에서 재밌거나, 관람객 입장에서 재밌을 것 같은 행사만 추려서 진행한 거죠.

제가 얼마 전에 어느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회의에 들어갔어요. 페스티벌 계획서에 피드백을 남겨달라 하시기에 ‘진짜 말해도 되냐?’라고 물어봤습니다.

소신발언 하셨나요?(웃음)

창길 계획에 품바가 쓰여있었습니다. 품바나 사물놀이. 물론 할 수 있죠. 저는 회의 패널에게 물었어요 ‘행사 때 품바 보실 분 계십니까?” 다들 웃더군요. 안 볼 거라는 거죠.

페스티벌은 보통 관람형이긴 해요. 마계인천 페스티벌은 100% 참여형이라고 해야할까요. 흩어진 행사장을 전부 돌지 말지. 공연에 호응을 할지 말지. 물건을 살지 말지. 그러나 그 무엇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각자 알아서 하는 거죠. 이것만큼은 의도된 부분입니다.

고층건물에서 내려다본 한밤의 개항로
고층건물에서 내려다본 한밤의 개항로 ⓒfrice

‘개항로 프로젝트’는 인천 구도심의 건축공간을 활용하고 싶은 지역 소상공인의 느슨한 연합체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는 팝업 페스티벌을 시범운영하며 변화를 꾀합니다.

창길 지금보다 더 폭넓게 가져가고 싶다는 마음이 크죠.

많은 사람들이 도시부흥이나 지역재생을 희망해요. 교수, 상공인, 행정공무원, 대표주민이 모여 조직을 이루고, 목소리를 키우죠. 로컬 프로젝트를 만들어요. 아쉽지만, 잘 된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안 됐을까’를 고민해 봤어요. 제 생각은 “옛날엔 그런 조직이 필요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

‘로컬 디자인,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로 이해되네요.

창길 조직화가 통한다면, 이유는 전문성 때문일 거예요. 옛날엔 교수, 관공서 직원, 상공인 모두 각자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스페셜리스트였고. 역량이 뭉쳤을 때 시너지 효과가 났죠.

인터넷이 깔린 지금은 달라요. 지금은 누구나 전문성을 발휘할 수 있고, 평범한 이웃이 알고 보면 전문가인 거예요. 통닭집 사장님이 사실 뛰어난 예술가. 카페 사장님이 유능한 이공계 박사인 경우. 많잖아요. 옛날엔 상인은 상인이고, 교수는 교수였어요. 요즘 사람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쥐고, 상황에 맞게 드러내며 살아요.

바꿔 말하면, 이제 전문가가 다양하게 모일 필요가 없어요. 다양함을 간직한 개인이 서너 명 모여 행동하는 게 나을 수 있어요. 색이 분명한 사람들이 방향성을 맞춰 무언가를 시도하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다는 거죠. 설명하긴 어려운 생각인데.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이번 축제는 인천에서 이창길과 박지훈이라는 사람이 만났고. 그들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만들어낸 팝업 이벤트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뭔가 만들어 내면! 저희가 끼든, 안 끼든 지역 내에서 다음 일이 벌어지겠죠.

주말저녁 손님으로 가득찬 인천 신포시장.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노포가 밀집했다
주말저녁 손님으로 가득찬 인천 신포시장.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노포가 밀집했다. ⓒfrice

축제를 하려면 공간이 필요합니다. 
대관장소는 모두 상업공간이었고, 노포의 경우 지역상인들의 협조를 구해야하는데요.

윤정 노포와의 협업이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지역사회에서 상생과 협업은 정말 중요한 가치고, 필요한 일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지역에 좋은 일을 하니까, 이해받고 싶어.’ 혹은 ‘지역을 위한 일인데 협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들이 샘솟았어요. 하지만 현실은 핑크빛이 아니었죠.(웃음)

지역을 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해서, 청년들이 주체가 된다고 해서 모두가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죠. 누군가에겐 생계나 돈이 가장 중요할 수 있어요.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필요하더라고요. 한편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뜻이 맞는 분들을 만나거나, 생각을 바꾸는 분들도 계셔요. 아마 그런 경험들이 지속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인천 구도심은 디자이너에게 보물상자다.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 같은 건물에 모여있다. 기이한 미감을 뽐내는 그래픽 디자인이 길거리에 널려있다
인천 구도심은 디자이너에게 보물상자다.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 같은 건물에 모여있다. 기이한 미감을 뽐내는 그래픽 디자인이 길거리에 널려있다. ⓒfrice

창길 가장 고심했던 축제장소는 노래자랑대회와 신해철음악감상회였어요. 심야시간에 DJ파티까지 하려면 커다란 항만창고같은 걸 빌려야하나 고민했죠. 온갖 아이디어가 나오다 7080라이브펍과 다방으로 의견이 모였어요. 이곳은 중장년층 전용공간이기도 했고, 특히 MZ세대라면 갈 리가 없던 공간이잖아요. 의외성이 기대되는 거예요. 여러 가게를 돌며 후보군을 좁혔죠. 쾌적하지 못한 지하공간이나 ‘아! 여긴 너무 음침하다’ 싶은 곳은 걸렀어요.

지훈 7080라이브펍의 소파는 이제 돈 주고도 못 구할 인테리어입니다. 다방의 경우 흡연자들이 마음대로 흡연했을 거 같은 흔적이 곳곳에 있어요. 저희가 탐색한 공간이 마계라는 이미지와 비슷한 거죠. 그런 장소를 새롭게 꾸미고 희화화 시키는 거잖아요. 재미있는 행사 치르면서 나타날 색다른 모습을 기대했습니다.


동인천다방에서 만난 마계인천 페스티벌 기획자들
동인천다방에서 만난 마계인천 페스티벌 기획자들. ⓒfrice

행사 준비하면서 생긴 해프닝이 궁금합니다.

윤정 제가 현장에 투입돼서 페스티벌 기획을 진척시킨 건 정말 짧은 시간이었거든요. 가장 특이하다 느꼈던 건 소통방식이었어요. 기획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시를 내리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에요. 큰 그림에 대한 공유만 있고. 나머지는 알아서 움직여서 콘텐츠를 채운다는 인상? 예컨대 박지훈 대표님은 음향이나 무대세팅을 잘 아세요. 그러면 공연프로그램은 박 대표님이 임의로 행사준비를 진행시키는 거죠. 헛힘을 쓰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면요?

윤정 보통 축제가 열리면 홍보를 해야 하잖아요? 어디에 포스터를 붙이고 누구한테 알릴 건지. 서류를 써보는 게 상식이죠. 곁에서 지켜보면 두 분은 페이퍼 워크 거의 고민하지 않아요. 메인 디렉터 두 명이 ‘어떻게 하면 즐거운 페스티벌이 될 수 있을까?’만 고민하는 거죠. 분산되지 않는 에너지가 남다름을 만들지 않았을까요?

창길 박지훈 대표님과 손발 맞춘 세월이 워낙 깁니다. 알아서 움직이는 일이 많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문제가 안돼요. 하지만 저희도 알아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들이 있는데, 둘 다 체크를 못하는 거예요. 실수인지도 모르고 넘어갈 일들이죠.

그런 건 프로젝트 매니저인 윤정님이 중간에서 환기를 시켜주시는데(웃음) 엉뚱한 곳으로 걷는 소들을 원래 가려고 했던 길로 잘 몰아주시죠.

빠른 의사결정과 화끈한 실행력은 상대적으로 디테일을 약화시킵니다.  
윤정님처럼 디테일을 챙기는 멤버가 있기에 상호보완이 되는 거군요.

창길 제가 지방출장 후 복귀하는데, 문득 이번 행사준비 너무 전형적으로 간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축제를 여는 명분이나 목적에 휘둘린다는 느낌. 러닝메이트인 박지훈 대표님에게 연락했어요.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으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라고 말씀하셨죠. 바로 다음날 기존 기획을 조정했습니다.

‘우리가 진짜 하고 싶은 것만 하자’라는 원칙을 다시 세웠어요. 둘 다 찝찝했던 기획은 결국 ‘우리가 하고 싶은 걸 100% 하고 있지 않았다’라는 반증이죠.

신해철음감회는 40년 묵은 2층 다방에서 열렸다. 접근장벽이 높은 상업공간에 음악감상이라는 콘텐츠를 더하며 축제흥행스팟으로 도약했다
신해철음감회는 40년 묵은 2층 다방에서 열렸다. 접근장벽이 높은 상업공간에 음악감상이라는 콘텐츠를 더하며 축제흥행스팟으로 도약했다. ⓒfrice

여러분이 축제를 통해 진짜 하고 싶었던 게 정확히 무엇인가요?

창길 신해철음악감상회 같은 행사죠. ‘사람이 여럿 모여서 신해철 음악만 듣는 행사 있으면 미치지 않을까?’ ‘술 마시면서 노래 듣고 따라 부르면 재밌어 죽겠지 않을까?’ 이런 건 상식선에서 판단하면 아예 모임을 열 수조차 없어요.

하지만 축제니까. 금기를 넘는게 축제의 본질이니까 가능해집니다.

지훈 군중 속으로 들어가서 떼창을 하고싶은 마음. 향수를 건드리는 기획. ‘마계인천’이라는 축제 콘셉트와 부합하는 행사. 내심 하고 싶었던 이벤트. 저희가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창길 설득을 하면 안 되는 시대가 온 것 같아요. 예전에는 나랑 견해가 다른 사람들 설득해서 뭘 같이하자는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설득이 끝나면 설득된 방향에 맞춰서 둘의 색이 비슷해지잖아요. 설득이 거듭될수록 대한민국은 다 비슷한 색으로 물드는 거 아닐까? 그러면 점점 재미 없어지는 거 아닐까? 막연하지만 페스티벌에서는 그런 생각이 더 강했어요. “더 우리 스타일대로. 누구 따라 하지 말고”

인천 구도심에서 활동중인 로컬 크리에이터의 거점에서 다양한 한글 시각디자인요소를 발견했다
인천 구도심에서 활동중인 로컬 크리에이터의 거점에서 다양한 한글 시각디자인요소를 발견했다. ⓒfrice

준비과정에서 특별히 신경쓴 디자인이 궁금합니다.

지훈 한글을 적극적으로 쓴다는 점? 원래 한글을 시각디자인 요소로 쓴다는 건 일종의 죄악이었죠. 한글은 멋이 없고 다른 문자에 비해 미적인 퀄리티가 떨어지는 데다 디자인하기 까다롭다는 인식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문화적인 위상이 바뀌었어요. 한글이 예쁘다는 인식이 커졌고 한글을 활용한 디자인이 아름다워졌죠. 한글에 매기는 아름다움의 기준도 달라졌어요. 눈에 익숙해지면 그제야 아름다워 보이는 게 더러 있잖아요. 개항로 프로젝트 팀이 애용하는 한글 기반 디자인이 그런 거 같아요. 우리는 한글에서 멋을 느끼고 그것을 계속 입어보려는 거죠.

거리에 붙은 마계인천 페스티벌 공식 포스터
거리에 붙은 마계인천 페스티벌 공식 포스터 ⓒfrice

선뜻 채택 할 디자인은 아닙니다.

창길 포스터 최종시안을 결정할 때, 고민이 컸어요.

선택의 기준이 됐던 건 음반입니다 “지금 가장 트렌디한 인쇄물은 인기 앨범 재킷에 있다”라는 아이디어였죠. 뮤직 스트리밍 플랫폼에 들어가 인기차트 TOP20를 체크했어요. 각 앨범 커버 디자인의 유사성을 발견했어요. 트렌드에서 벗어나는 게 옳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습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