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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 고기구이의 아슬아슬한 중재자, K-불판

여럿이 모여 불판 위에 고기를 올려 구워먹는 한국식 구이요리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난로회 풍경을 담은 19세기 민화

조선식 야외취식

다섯 명의 남자가 고기를 구워 먹고 있다. 남자들의 모습은 제각기 조금씩 다르다. 고기가 뜨거운 듯 입으로 부는 남자, 구운 고기를 담은 접시를 들고 있는 남자, 술을 쭉 들이키려는 남자도 있다. 한 명이 쓴 남바위로 보아 날씨가 추운 모양이다. 그렇다면 불은 고기도 구워주고 따뜻함도 안겨주니 일석이조로 귀하다.

고기를 불판에 구워 먹는 난로회 풍경을 담은 19세기 민화를 확대한 모습
19세기 민화. <성협 풍속화첩> ‘야연’ ⓒ국립중앙박물관

고기를 즐기는 남자들의 모습이 다채로운 가운데, 그림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가운데의 불판이다. 제법 잘 타오르는 불길 위에 둥글게 올라 앉아 중심을 잡아준다. 가운데가 옴폭 파여 있는 형국까지 감안하면 모양새가 갓과 흡사해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갓은 아니었을까?

어린 시절 대하드라마에서 비슷한 설정을 본 기억이 난다. 선비가 철로 쓴 갓을 쓰고 여행을 다닌다. 평소에는 품위를 지켜주고 햇볕으로부터 얼굴을 보호해주다가 식사 때는 만능 취사도구로 변한다. 철로 만든 갓을 쓰고 다닐 수 있다고? 요즘은 아라미드 섬유로 만들지만 삼십 년 전에는 진짜 철모를 쓰고 훈련을 받았다. 한국전쟁 때 취사에도 쓰였다는 철모였으니 철제 갓 쓰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으리라. 어쨌든 불판은 그렇게 중심을 잡아준다.

이미 19세기에 민화로 그려졌을 만큼 우리는 고기구이를 좋아한다.

서울 후암동 도로 변에 놓인 숯불화로
서울 후암동 도로 변에 놓인 숯불화로. ⓒfrice

하지만 늘, 두 주인공인 고기와 불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관심을 독점해왔다. 생각해 보자. 고기라면 우리는 소냐 돼지냐 양이나 등등 동물을 따지고, 갈비냐 등심이냐 항정살이냐 등등 부위를 고민한다.

불도 사정은 비슷해서 편리함의 가스와 정통성의 숯불이 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처럼 고기와 불이 각광 받는 가운데, 정작 둘 사이를 중재해주는 불판의 존재는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불판으로 고깃집을 선택하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없을 것이다. 불판이 없거나 제 역할을 못하면 귀한 고기를 망칠 수 있고, 따라서 각 고깃집마다 고심 끝에 불판을 선택하지만 각광은 받지 못한다.

뿌리깊은나무 일천구백칠십구년 십이월호 - 서울, 한국의 진열장 中
뿌리깊은나무 일천구백칠십구년 십이월호 – 서울, 한국의 진열장 中 ⓒ에드워드 김

구이요리의 중재자, 불판

그렇다, 중재라고 했다. 한식에서 구이는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식탁 한가운데에 불을 놓고 직접 조리를 한다는 차원에서 그렇다.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말해주듯 인간은 언제나 불을 갈망한다. 조리는 불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인류는 익힌 음식을 먹고 뇌를 발달시켰다. 그런 불을 식탁 한가운데에 놓고 (예외는 있지만) 먹는 이가 직접 익혀 먹는다. 식사가 의식도, 유희도 될 수 있다.

그러한 특성이 생생함과 맞물려 한국의 고기구이는 해외에서도 K-푸드의 대표이자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미국의 스테이크, 아르헨티나의 아사도 등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조리 문법은 많다. 하지만 열원(섭씨 1000~2000도의 숯불 혹은 가스불)과 재료(주로 양념을 하지 않은 생고기)가 식탁에서 맞물려 자아내는 한식 고기구이의 생생함에는 나름의 독창성이 있다.


K-불판의 역할

한식 고기구이의 성격을 궁극적으로 불판이 결정하니 불판도 ‘K-불판’으로 격상된 느낌이다. K-불판의 중재는 두 갈래로 이루어진다.

불 위로 판이 깔리면 온갖 '구워먹을 것'을 올린다.
불 위로 판이 깔리면 온갖 ‘구워먹을 것’을 올린다. ⓒfrice

첫째, 공간적 중재자 역할을 한다.

이름처럼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수분을 품은 동물의 근육과 지방의 집합체인 고기는 부들부들하고 늘어지는 성질을 가졌다. 열원에 올렸을 때 고르게 익지 않기 때문에 판을 깔아야 평평하고 균일한 조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둘째, 열에너지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고기구이는 크게 복사열과 전도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전자는 전자파에 의한 직접 전달, 후자는 다른 매개체를 통해 간접 전달 되는 열이다. 이 두 열이 어우러져 고기의 수분을 증발시켜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익히는 한편, 고기 표면의 마이야르 반응을 유도해 복잡한 맛과 바삭한 질감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두 종류의 열에너지를 우리는 불판으로 편하게 통제한다. 복사열과 전도열의 노출 비율부터 세기까지 모두 불판이 좌우한다.


21세기 K-고기불판

1) 개방형

숯불을 피운 개방형 불판
고기를 올린 개방형 불판
ⓒfrice

완전 개방형 불판, 석쇠 일족을 예로 들어보자. 철사가 형성하는 면은 ‘판을 깔아주는’ 공간적 중재 역할에 치중하는 한편 고기를 직화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따라서 조리는 복사열에 의해 이루지니 ‘복사열 의존형’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형태와 면적을 규정하는 테두리에 철사만 걸쳐주면 된다. 그게 그거 같지만 복사열 의존형도 의외로 다양하다. 야외 취사가 가능했던 시절에는 모기장도 불판으로 쓰이곤 했다. 그렇게 눈이 고운 것과 철근을 붙여 만든 과격한 것이 양 극단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다양한 굵기의 철사와 눈의 크기로 이루어져 판을 깔아준다. 주로 고기와 직접 접촉이 미덕이라 여기는 숯불과 짝을 이룬다.

2) 폐쇄형

솥뚜껑을 담은 폐쇄형 불판
폐쇄형 불판에 올라간 음식재료
ⓒfrice

다음으로는 ‘전도열 의존형’이 있다. 눈 혹은 구멍이 전혀 없는, 폐쇄형 불판으로 구이가 전도열에 의해 이루어진다. 자작한 국물에 끓여 먹는 서울식 불고기의 불판과 삼겹살용 불판의 상당수가 여기에 속한다. 특히 돼지기름의 원활한 배출을 위해 경사가 지다 못해 곡선으로 진화한 후자가 흥미롭다. 복사열 의존형과 정반대로 열에너지의 고른 분배가 강점이라 가스불과 주로 짝을 짓는다.

3) 절충형

절충형 불판 위에 올린 고기
절충형 불판 위에 올라간 음식재료
ⓒfrice

세 번째로는 둘이 절충된 ‘야망형’이 있다. 복사열과 전도열을 모두 최선으로 활용하겠다는 야망에 젖어 다채로운 양태 및 빈도로 구멍이 뚫려 있다. 심지어 석쇠의 눈이 커지다 못해 야망형으로 발달한 경우도 있다. 전도열의 극대화를 위해 최대한 확보된 면에 복사열의 개입 및 환기를 위해 구멍을 낸 형국이다. 거의 모든 고기를 올려 구울 해법이 마련되어 있을 만큼 종류가 다양하다.

4) 욕심형

음식재료를 굽는 칸이 선명하게 분리된 욕심형 불판
욕심형 불판에 올린 음식재료

마지막으로는 ‘욕심형’이 있다. 요즘 유행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조리할 수 있는’ 불판이다. 핵심은 고기를 굽기 위한 ‘야망형’ 불판이다. 이것이 판 위에서 중심을 이루고 계란 등을 익히기 위한 ‘전도열 의존형’이 가장자리를 둘러싸고 있다. 심지어 중심에 찌개 뚝배기를 위한 공간을 낸 제품마저 있다. 직화구이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합치면 초월적인 불판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종합적인 효율은 따로 쓰는 것보다 더 떨어진다.

따라서 욕심형 불판은 ‘뇌절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뇌절’이란 적당한 선에서 끊지 못하고 계속 말이나 행동 등을 하다가 기어이 추한 꼴을 보이는 형국을 뜻하는 은어이다. 특히 계란을 위한 테두리가 문제이다. 계란이 눌어 붙을 가능성도 매우 높을 뿐더러 모양새가 좁고 수세미가 잘 안 들어가니 구석을 깨끗하게 닦기 어렵다. 공간이 나뉜 프라이팬의 태생적 한계인데 생각 없이 제품을 개발해 뇌절형이 되었다.

미국의 크리스 오 셰프가 개발한 K-BBQ 캠핑카
미국의 크리스 오 셰프가 개발한 K-BBQ 캠핑카. ⓒkbbqcar
가변형 식탁에 다목적성 가열조리를 위한 불판을 채택한 게 눈길을 끈다
가변형 식탁에 다목적성 가열조리를 위한 불판을 채택한 게 눈길을 끈다. ⓒkbbqcar

다만 이 ‘욕심형’이 맨 앞에서 언급한 19세기 민화의 불판의 직계 후예일 가능성만은 무시할 수 없다. 민화의 불판은 갓을 닮아 가장자리가 평평하고 가운데는 움푹 파여 있다. 따라서 고기를 굽는 한편 마늘이든 찌개든 무엇이든 가운데에 익힐 수 있다. 다목적성이 뇌절형 불판의 목표이자 미완성의 미덕임을 감안하면 둘 사이의 관계를 간과하지 않는 게 좋겠다.


오늘은 저 불판에 어떤 고기가 올라갈까?
오늘은 저 불판에 어떤 고기가 올라갈까? ⓒfrice

K-고기불판의 오늘과 내일

나름 조리의 즐거움과 효율을 좇아 불철주야 애를 쓰며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지만 사실 K-불판에는 개선의 여지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고기가 들러 붙는데 대한 대책이 미약하고 얇아 열효율이 좋지 않다. 사실 전도열 의존형이 아니더라도 K-불판은 상당 부분 공간적 중재 역할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K-불판의 단점이 잦은 교체를 촉발하니 설거지 등 유지 관리로 자원 또한 너무 많이 잡아 먹는다. 과연 대안이 있을까? 무쇠를 고려해볼 수 있다. 열전도율이 좋지 않기 때문에 한 번 머금은 열을 오래 머금는다. 게다가 고깃집 같은 곳에서 빠르게 반복해서 쓴다면 표면에 폴리머의 막이 생성돼 고기가 들러 붙는 것을 막아준다.

불판의 형태와 고기의 종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맛이 느껴지는 느낌
불판의 형태와 고기의 종류를 보는 것 만으로도 맛이 느껴지는 느낌. ⓒfrice

실제로 무쇠 불판은 이미 한식 구이의 환경에 도입이 되어 있는데, 우려가 조금 따르기는 한다. 무거운데다 열을 오래 머금으므로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체 상황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훨씬 더 높다. 관습처럼 당연시 여기기는 하지만 식탁에서 벌어지는 불 및 불판의 도입 및 교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가벼워 무쇠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지닌 탄소강 불판도 등장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사실 한식 구이에는 장점 만큼 단점도 많다. 고기를 잘게 썰면 너무 빨리 익고, 요즘 유행을 따라 스테이크처럼 두툼하게 썰면 잘 안 익는다. 이런 단점에 K-불판이 한몫 거든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떠한 여건에서도 고기와 불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를 달구다 못해 태워가며 아슬아슬하게 중재하고 있는 K-불판의 노고에 대해서는 한 번쯤 되새겨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다.

실제로 무쇠 불판은 이미 한식 구이의 환경에 도입이 되어 있는데, 우려가 조금 따르기는 한다. 무거운데다 열을 오래 머금으므로 식탁 주변에서 벌어지는 교체 상황 등에서 안전사고의 위험이 훨씬 더 높다. 관습처럼 당연시 여기기는 하지만 식탁에서 벌어지는 불 및 불판의 도입 및 교체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다만 가벼워 무쇠의 단점은 빼고 장점만 지닌 탄소강 불판도 등장하고 있어 주목할만 하다.

😈 오늘날 한식에서 즐겨 쓰는 구이용 불판을 이렇게 살펴보니 고기 종류보다 더 다양한 불판들이 있네요. 식탁의 한가운데에서 식사의 리듬을 조율하기도 하고, 볼거리가 되기도 하는 고기 불판. 한식 고기구이의 독특하고 고유한 문화 형성에 K-불판이 한몫했다는 점에 동의하시나요? 오늘도 맛있는 고기를 위해 계속 진화하고 있는 K-불판! 그 존재를 되새기고 더 나은 한식을 즐겨보아요. 😀

그릇이라는 세계

엘레먼트컴퍼니 최장순 대표가 미드저니로 만든 그릇 이미지

의미를 개척하는 능동의 사물

그릇은 내용물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이름으로 존재한다. 담긴 그릇에 따라 같은 음식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릇은 무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만, 비워진 상태로 만들어지고 비워진 상태에서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 추구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성과 양면성이 인간의 모습과 닮았고, 그 인간의 모습은 또 브랜드에 빗대어 표현되기도 한다.

실재의 그릇이 아닌 관념에 존재하는 그릇 이야기를 들어봤다. 브랜드의 의미를 찾고 만드는 엘레멘트컴퍼니의 대표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장순이 기호학적 관점으로 ‘그릇이라는 세계’를 전달한다.


저마다 다른 모양의 그릇이 모여 식탁 위의 스카이라인을 만든다
저마다 다른 모양의 그릇이 모여 식탁 위의 스카이라인을 만든다. ⓒUnsplash의 Tom Crew

그릇은 식탁 위의 건축

그릇은 기계다. 기계는 흐름을 절단한다(Gilles Deleuze). 그릇은 밥상의 흐름을 절단해 아침 식사와 티타임을 생산한다. 여러 모양, 높이, 폭, 재질로 구성된 그릇은 저마다의 이합집산을 통해 식탁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한다.

그릇은 채소의 흐름을 절단해 ‘샐러드’를 만들고 조리된 쌀의 흐름을 절단해 ‘밥’을 만든다. 쟁반에 널려 있는 채소 조각 무침을 ‘샐러드’라 할 수 있을까. 그릇(Bowl)이라는 형식의 배제는 샐러드의 부재다. 같은 음식이어도 작은 그릇에 담기면 반찬이 되고, 밥그릇에 담기면 주식이 된다. 그릇은 음식의 의미를 규정짓는 기표(記標)이면서 대중적인 파롤(Parol)이다. 음식이라는 ‘내용’보다 그릇이라는 ‘표현’이 더 중요한, 이미지 대량 생산의 시대가 된 지 오래다.

AI 이미지 생성툴 MidJourney를 이용해 만든 그릇. 우주를 담은 그릇이면서 형태가 없는 그릇을 의도했다
AI 이미지 생성툴 MidJourney를 이용해 만든 그릇. 우주를 담은 그릇이면서 형태가 없는 그릇을 의도했다. ⓒ최장순

그릇은 의미를 생산한다

심연의 묵직한 무언가에만 핵심이 있다고 믿는 고지식한 본질주의자들은 발작적으로 형식을 무시하려 한다. 이들은 그릇의 형식보다 그것의 ‘담아낸다’는 기능을 중시하고, 그릇의 디자인보다 음식의 품질과 영양을 중시한다. 하지만 형식 없는 내용은 없다. 그릇은 그저 무언가를 수동적으로 담아내는 도구적 존재가 아니다. 그릇은 자신이 품고 있는 내용물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혁명적 실천가’이자, 의미를 다른 차원으로 탈바꿈시키는 ‘능동적 기호학자’다.

머그컵은 음료를 위해 제작됐지만, 나는 가끔 머그컵에 쌀밥을 담아 돌아다니며 먹곤 한다. 콘플레이크는 음료와 쌀밥 중간 지점에서 머그컵에 담길 수 있는 손쉬운 내용물이다. 이 경우 머그컵은 쌀밥을 보다 캐주얼하고, 포터블(portable)한 새로운 음식으로 리포지셔닝(repositioning)한다. 형식은 내용을 생산한다.

그릇을 그저 ‘담는다’는 동사의 동의어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담기는 그 무엇’에만 관심을 갖는다. ‘마음이 중요하니 상갓집 복장은 대충 입고 가도 돼.’ ‘내 의도가 중요하니 말투는 좀 거칠어도 상관없어.’, ‘제빵 실력이 중요하니 빵은 대충 못생겨도 상관없어.’라는 식의 생각은 몸, 말, 디자인 등의 형식에 의미를 두지 않는 태도다.

하지만 몸, 말, 사물에는 모두 저마다의 그릇이 있다. 종종 그 그릇의 형식은 담기는 내용과 의도보다 훨씬 중요할 때가 있다. 다시 말하지만, 형식 없는 의미는 공허하다. 마찬가지로 의미 없는 형식은 맹목적이다. 형식과 내용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태도는 건강에 좋지 않다.

이름은 브랜드를 담는 그릇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특정 용도에 맞게 제작된 제한적인 그릇이 되어선 안 된다는 공자의 말씀이다. 특정한 좁은 분야로의 전문적 기술에만 천착하지 않고, 전인적 인간으로서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육예(六藝)를 비롯한 역량을 두루두루 갖추라는 의미다. 이때 그릇은 ‘전문성’이다. 컨셉이나 이름을 만들 때, 그릇은 전문가의 탈을 쓰고 소환된다.

전문적인 특정 영역을 지칭하는 네임을 만들 땐, 주로 좁다랗고 긴 컵을 예로 들었다. ‘킥고잉(Kickgoing, 킥보드)’, ‘일렉클(Elecle, 전기자전거)’ 같은 네임은 좁고 길다란 그릇에 해당한다.

반면, 특정 분야의 전문가 같은 그런 그릇이 아니라, 다양한 사업군을 두루 포괄하는 큰 그릇 같은 브랜드 네임도 있다. 기업 브랜드 네임은 많은 사업군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넓은 접시나 대접에 비유되곤 한다. 특정 제품군을 연상시키지 않는 ‘애플(Apple)’이나 ‘삼성’같은 이름은 특정 사업군에 국한되지 않는, 큰 대접 같은 이름이다.

그릇은 그저 수동적으로 담아내기만 하는 사물이 아니다
그릇은 그저 수동적으로 담아내기만 하는 사물이 아니다. ⓒUnsplash의 Rahul Kumbhar

정말 큰 그릇은 어떤 형태일까.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 하였다. 일반에서 알고 있는 의미와 달리 이 말은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래서 큰 그릇엔 형태가 없다. 형태 없는 그릇, 그래서 모조리 담을 수 있는 우주와도 같은 그릇. 일찍이 지혜로운 자들은 스스로 그런 그릇을 닮고자 내 몸을 작은 우주라 생각해 왔다. 그릇을 통해 우주를 보고 스스로를 우주에 맵핑한 것이다.

그릇은 그것이 담아야 할 내용물에 따라 깊이와 폭, 모양, 재질 등을 달리하며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사발, 접시, 찻잔, 놋그릇, 뚝배기, 주전자와 같은 식기류가 있는 한편 솥, 항아리, 도시락 통처럼 우리와 함께 살아온 대표적인 그릇도 있다. 신석기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빗살무늬토기 또한 그릇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찬탈 대상이 되었던 도자기 역시 대표적인 우리네 그릇이다.

브랜드는 각자의 철학과 가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릇 또한 그렇다
브랜드는 각자의 철학과 가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릇 또한 그렇다. ⓒUnslplash의 Angèle Kamp

브랜드와 그릇

브랜드 또한 그것이 담아야 할 철학과 가치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브랜드는 그릇을 닮았다.

트렌디하고 유행을 잘 따르는 패션 브랜드들은 접시와 같다. 친환경 생태주의 철학을 실천하고 있는 ‘파타고니아(Patagonia)’는 탄탄하고 두께감 있는 텀블러를 닮았다. 지구를 지속가능한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최대한 수명을 연장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지구를 만들겠다는 ‘테슬라(Tesla)’ 또한 텀블러다. 조금은 더 세련되고 멋진 텀블러.

지속적으로 ‘안전’을 강조하며 세계 최초로 3점식 안전벨트를 고안했던 ‘볼보(Volvo)’는 공동체에 필요한 깊이 있고 은근한 맛을 담아내는 뚝배기와 같다. 에너지, 반도체 등 원천에 비유할 수 있는 기업 브랜드들은 항아리에 견줄만하다. 항아리에 담긴 양념과 장은 모든 요리에서 실력을 발휘하는 식재료이니까.

‘갤럭시(Galaxy)’, ‘아이폰(iPhone)’과 같은 모바일 브랜드는 다채로운 음식을 자주 바꿔 채우는 도시락통과 같다. 이처럼 그릇은 비즈니스를 통해 세계를 대하는 서로 다른 태도와 관점을 보여주는 좋은 교보재가 되기도 한다.

비워져 있어야 비로소 채움이 가능하다
비워져 있어야 비로소 채움이 가능하다. ⓒUnsplash의 Konrad Wojciechowski

비워야 담는다

본질주의자의 시선을 따라, 그릇의 본원적인 기능을 ‘담아내는 것’으로 보자. 하지만 담기 위해선 비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릇의 본질은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는 것’이다. ‘비움’은 언제나 ‘채움’에 선행한다. 비움과 채움의 이항대립으로부터 4가지 유형의 인간상을 유추할 수 있다. 비우는 사람, 채우는 사람, 비움을 거부하는 사람, 채움을 거부하는 사람.


1. 비우는 사람
그릇은 그 물리적 구조에 따라 비움과 채움이 동시에 공존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릇을 닮은 사람은 비우고 채우는 행위를 매우 자연스럽게 하는 성인(成人)이라 할 수 있다(이 정상적인 행위는 사실 매우 높은 도력을 요구한다).

2. 채우는 사람
비움을 거부하고 채워가려는 사람은 부지런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다.

3. 비움을 거부하는 사람
비우는 것도 거부하고 채우는 것도 실패한 사람은 배우지도 않고, 스스로 욕심을 내려놓지도 않는 유형의 사람이다. 오만과 독선으로 점철된 고집불통이라 해도 마땅하다 할 것이다.

4. 채움을 거부하는 사람
우리는 채우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정신과 육체를 끊임없이 비워내는 허욕(虛慾)의 사람, 스스로 이 세계에 대해 일체의 욕망도 갖지 않는 높은 도력의 선인(仙人)을 만나기도 한다.


Tom Crew가 Unsplash에 올린 그릇 사진
ⓒUnsplash의 Tom Crew

삼라만상이 그릇이다

살다보면 스스로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세계를 대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얕은 지식과 관점으로 세상의 끝을 보기라도 한 듯 오만과 고집의 표본이 되는 사람도 있다. 조용히 세계를 학습하는 성실한 사람도 있고, 일체의 인위적 배움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비움을 추구하는 존재도 있게 마련이다. 이처럼 이 세상엔 수많은 그릇이 있다.

오랜 세월을 지키다 이가 나간 그릇부터, 예쁜 한 때의 모양을 뽐내며 매대 선반을 런웨이 삼아 당당하게 진열돼 있는 화려한 접시들까지 모두 공존하며 긍정돼야 할 존재다.

그릇은 내용을 담고, 내용을 생산한다. 몸, 말, 사물, 브랜드까지 모두 그릇을 닮아 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릇을 닮았다. 우리는 그릇에서 삶의 철학과 세계관을 엿본다. 그릇을 통해 엿본 광대한 우주는 우리를 작은 점으로 만들지만, 우리는 이내 그 우주를 그릇에 담는다.

😈 기호학은 의미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이 세상의 많은 것을 그릇에 빗대는데요. 그릇이라는 기호를 통해 어떤 의미가 탄생하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언뜻 보기에 공통점이 없는 낱말과 낱말을 묶어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지적인 여행. 즐거우셨나요?

한 그릇에 담긴 실용과 전통

20세기의 스테인리스 식기 선물세트

2010년 동아리 식당 선반에 백반에 나갈 반찬을 담을 멜라민 식기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2010년 동아리 식당 선반에 백반에 나갈 반찬을 담을 멜라민 식기가 차곡차곡 쌓여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자기’ 주장이 확실한 편, 멜라민 식기

15년 전쯤의 일이다. 한국학을 공부하는 해외 학생들 10여 명과 한식당에서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식탁 위에 음식이 차려지자 폴란드에서 온 학생이 “와!” 하며 탄성을 질렀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릇이 온통 ‘자기’라서 놀랐다는 것이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 이 집의 식기는 ‘자기’가 아니라 멜라민 수지(melamine resin)로 ‘자기’ 흉내를 낸 그릇이었다.

대성집의 선반. 김치, 깍두기, 고기 소스 등을 음식의 크기에 맞는 식기에 담는다
대성집의 선반. 김치, 깍두기, 고기 소스 등을 음식의 크기에 맞는 식기에 담는다. ⓒ서울역사박물관

멜라민 수지로 만든 식기가 국내 식당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들어서다. 멜라민 수지란 쉽게 말해 플라스틱의 일종인데, 열을 가했을 때 녹는 점이 높아서 놋그릇이나 도자기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그 덕에 제품으로 나오자마자 소비자들에게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식당 주인의 입장에서 봐도 멜라민 수지 식기는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식기다. 일단 무게가 가벼워서 손님상에 나를 때 좋고, 떨어뜨려도 쉽게 깨지지 않는다. 설거지할 때 뜨거운 물에 넣어도 모양이 뒤틀리지 않으며 행주로 닦기만 하면 바로 쓸 수 있다는 점도 그렇다. 얼핏 보면 백자로 만든 듯 보이는데 가격까지 저렴하다는 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편리성과 효율성에 ‘전통성’마저 갖춘 멜라민 수지 식기를 식당에서 마다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1970년 초반 이후 멜라민 수지 식기는 대표적인 한식당용 식기로 자리 잡았다.

세운상가 일대 식당의 점심상. 똑같이 생긴 멜라민 그릇에 이날 제공될 반찬이 일정하게 담겨있다
세운상가 일대 식당의 점심상. 똑같이 생긴 멜라민 그릇에 이날 제공될 반찬이 일정하게 담겨있다. ⓒ서울역사박물관

그 즈음 그 학생이 또 한번 물었다. 그렇다면 왜 밥그릇과 국그릇은 멜라민 수지가 아닌 ‘스테인리스 스틸(stainless steel)’이냐는 것이었다. 작고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이후 ‘스텐’) 밥공기가 상대적으로 앙증맞아 보인다고까지 했다.


스테인리스 식기에 담긴 궁중음식
스테인리스 식기에 담긴 궁중음식 ⓒ국립민속박물관

공기밥을 흔들어 먹는 이유, 스테인리스 식기

앙증맞은 밥공기의 탄생 비화를 이야기하자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양반들은 놋그릇을 좋아했다. 1940년대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쓸 병기를 만들기 위해 일반 가정에서까지 놋그릇을 강탈해가자 빼앗기지 않으려고 그릇들을 땅에 묻었을 정도였다.

한국인들이 20여 년 후 새롭게 등장한 스텐 그릇 때문에 놋그릇을 버렸다. 사용 전에 얼룩을 지우고 광을 내야 하는 놋그릇에 비하면 스텐 그릇은 관리의 어려움이 적었기 때문이다.

연탄 가스도 또다른 이유였다. 그 즈음 도시에서는 가정 취사용 연료가 나무 땔감에서 연탄으로 바뀌었는데, 연탄에서 나온 가스는 걸핏하면 놋그릇의 광택과 색을 망치곤 했다. 반면 스텐 그릇은 연탄 가스에도 변함이 없었다.

왼쪽부터 5첩 유기 반상기, 5첩 스테인리스 반상기
왼쪽부터 5첩 유기 반상기, 5첩 스테인리스 반상기. ⓒ국립민속박물관(좌), (우)
스텐 그릇 선물세트. 보자기에 정성들여 포장한 상자구성이 흥미롭다
스텐 그릇 선물세트. 보자기에 정성들여 포장한 상자구성이 흥미롭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인의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스텐 밥공기는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한식당에서도 필수품이 되었다. 마침 식량 수급이 불안정했던 시기였고, 쌀 소비를 줄일 방안을 찾던 정부 관료들은 바로 여기에 주목했다. 1973년 1월 10일,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스텐 밥공기를 지름 11.5cm, 높이 7.5cm로 만들어 공급하라는 서울 시장의 지시가 떨어졌다.

1973년 표준식단제를 실시하는 종로의 한 표준식당의 모습
1973년 표준식단제를 실시하는 종로의 한 표준식당의 모습. ⓒ서울기록원
1973년, 서울시는 대중음식점을 대상으로 한 표준식단제를 실시했다
1973년, 서울시는 대중음식점을 대상으로 한 표준식단제를 실시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조선뉴스라이브러리

‘밥심’으로 살았던 시민들이 이 조치를 따를 리 없었다. 그러자 서울시는 1976년 6월 음식점 운영자의 모임인 요식업협회를 압박했다. 스텐 밥공기의 규격을 지름 10.5cm, 높이 6cm로 또 한번 줄였고, 밥을 이 그릇의 5분의 4 정도만 담도록 강제하면서 ‘만약 서울시 소재 음식점에서 해당 규정을 위반하면 1회 위반에 1개월 영업 정지, 2회 위반에 영업허가 취소 처분을 내리겠다’고 한 것이다. 이 행정 조치는 통했다.

(좌)1960년대 후반부터 흔히 볼 수 있었던 뚜껑이 둥근 스테인리스 그릇. (우) 오늘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뚜껑이 평평한 스테인리스 그릇
(좌)1960년대 후반부터 흔히 볼 수 있었던 뚜껑이 둥근 스테인리스 그릇. (우) 오늘날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뚜껑이 평평한 스테인리스 그릇. ⓒ국립민속박물관(좌), (우)

2000년대 이후 스텐 밥공기는 더욱 작아졌다. 탄수화물 덩어리인 밥을 적게 먹어야 다이어트를 할 수 있다는 전문가의 주장 때문이었다. 2012년부터는 내면 지름 9.5cm, 높이 5.5cm의 스텐 밥공기가 한식당에 보급되었다.

스텐 밥공기의 뚜껑이 평평해진 것도 이 즈음이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에도 빨리 음식을 낼 수 있도록 미리 밥을 지어서 담아두었는데, 뚜껑이 평평하면 온장고에 차곡차곡 쌓아 둘 수 있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오래 둘수록 수분이 말라서 밥이 딱딱해진다는 점이었는데, 사람들은 이 딱딱한 밥을 맛있게 먹을 방법까지 찾아냈다.

바로 밥공기를 받으면 두 손으로 잡고 마구 흔드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면 바닥에 남은 수분이 위로 올라오면서 딱딱한 밥에 고루 퍼졌다. 폴란드 학생의 눈에 ‘앙증맞게’ 보였던 납작한 스텐 밥공기에는 이토록 유구한 역사가 숨어 있었다.


양은 냄비에 끓인 해물라면
양은 냄비에 끓인 해물라면. ⓒfrice

막걸리와 라면의 영원한 친구, 양은 식기

강의 아닌 강의를 하고 나니 목이 말라 막걸리를 주문했다. 양은 주전자가 등장하자 이번에는 이 그릇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나왔다. 양은 그릇은 알마이트(almite)로 만든 식기를 가리키는데, 알마이트란 순도 99.7%의 알루미늄을 전기 처리하여 산화 피막을 형성시킨 다음 노란색 코팅으로 방수 처리한 금속이다.

부뚜막 위의 선반 살강과 가스버너에 양은 냄비와 솥이 가득하다
부뚜막 위의 선반 살강과 가스버너에 양은 냄비와 솥이 가득하다. ⓒ국립민속박물관

알마이트 그릇은 1950년대 중후반 한국의 가정과 음식점에서 가장 많이 쓰인 식기였다. 당시 밥통부터 냄비, 주전자, 찬합, 수저통, 국자 등이 모두 알마이트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이토록 널리 사용된 이유는 알루미늄의 대표적인 원료인 명반석이 한반도 곳곳에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값도 그리 비싸지 않고 잘 깨지지도 않으며 놋그릇처럼 쉽게 더러워지지 않는 알마이트 그릇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국,찌개,라면 조리 용도로 사랑받는 양은 냄비
국,찌개,라면 조리 용도로 사랑받는 양은 냄비 ⓒ국립민속박물관

특히 알마이트 냄비 세트는 당시 신혼 가정 집들이 선물로 가장 인기가 좋았다. 주물 냄비에 비해 가벼우면서도 열 전도율이 높아서였다. 하지만 코팅이 벗겨지면 인체에 해로운 알루미늄에 곧바로 노출된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스텐 냄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지금도 라면은 양은 냄비에, 막걸리는 양은 주전자에 담아야 제 맛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장터좌판에 깔린 생활식기
장터좌판에 깔린 생활식기 ⓒ국립민속박물관

미학과 실용성 사이에 숨겨진 역사

이처럼 각각의 식기에는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특징은 크게 산업화를 기준으로 나뉜다. 산업화 이전에는 한 문화권 속 사회문화적 체계 등에 따라 식기의 종류와 형태와 재질 등이 결정되었다면, 대량 생산이 시작한 후부터는 효율성과 경제성, 편리성이 우선이었다.

우리 생활 속에 다양하게 머물러온 그릇들
우리 생활 속에 다양하게 머물러온 그릇들. ⓒ국립민속박물관(상), (좌), (우)

오늘날 우리의 식탁 위에는 다양한 식기가 마구 뒤섞여 있다. 자기 그릇과 놋그릇부터 스텐 밥공기, 멜라민 수지 찬그릇, 양은 주전자까지. 이런 ‘잡종적 식기’에는 식민 시대, 한국 전쟁과 피난, 급속한 도시화 과정 등 우리의 모든 역사가 녹아 있다. 미학적 측면에서만 보자면 개선해야 할 여지가 많은 식탁 앞에서 고민이 되는 이유다. 그 속에 담긴 역사마저 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 오늘날 우리 일상에는 한국 반상 문화를 함께 했던 플라스틱(멜라민 수지), 스테인리스, 양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의 식기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중 실용성을 기반에 둔 멜라민 그릇, 스테인리스 그릇은 탄생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의 식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디자인과 사용성을 더욱 개선해나가면서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어요. 인체에 해롭다지만 손 맛 입 맛 좋은 양은 그릇은 낯선 그리움과 추억을 담아 끝까지 우리 생활에 함께합니다. 이번 컬럼에서 우리 주변에 보이는 대표적인 식기의 탄생비화를 엿볼 수 있었는데요. 그릇에는 음식만 담기는 게 아니라 당시 사회상이 담겨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식탁에는 요즘 어떤 그릇이 올라가 있나요? 그리고 여러분은 거기에 무엇을 담고 계신가요?

유리창 가르다 세월을 여몄네

공방 앞에서 작품을 들고 바라보는 박옥경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이너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이너 박옥경님
ⓒfrice

나는 1.5세대 작가입니다.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공예는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 건축 인테리어가 대부분이던 1세대와 상업공간 인테리어가 급부상한 2세대 사이에 있어요. 2010년 이후부터 젊은 사람들의 소비패턴을 이해하고 그들을 상대로 사업을 해야 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부터 젊어야겠죠.

이제 작품 제작을 위해 미팅을 가지면, 담당자 대부분이 30~40대 초반인데요. 예전과 비교하면 현장에서 쓰는 언어도, 그들이 표현하려는 이미지도 젊다고 느낍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이너 박옥경님의 2000년대 초 업무사진
ⓒ박옥경

시작은 2003년입니다. 저는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회사에서 5~6년 근무했는데요. 일하면서 *베벨드 기법을 쓴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나 성당의 장식물이었어요. 제작법도 극소수만 알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도 어깨너머로 배워가며 일해야 했죠.

개신교회는 시트지에 성화를 새겨달라는 주문이 많았는데요. 드물게 스테인드글라스를 주문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시트는 너무 저렴해 보이고 수명이 오래가지 않으니, 스테인드글라스를 발주하는 거였죠. 가톨릭 성당은 주로 유학 다녀오신 분들이 맡았습니다. 해외유학 다녀온 수녀님이나 신부님이 제작법을 배워와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드셨어요.

베벨드 기법을 활용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사례
베벨드 기법을 활용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사례 ⓒ박옥경

꿈이 생겼습니다. 일반 건축물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접목시키고 싶었어요. 2009년에 회사를 떠나 독립을 했는데, 당시 국내에서 잘 쓰지 않는 새로운 유리를 수입했어요. 디자인 시안도 다시 짰죠. 새로운 유행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업을 다녔어요. 점점 발주처를 확장했는데, 서울 강남이나 도시개발이 한창이던 경기도 분당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요청이 들어왔죠.

일반 가정이나 상업 공간에 들어가는 스테인드글라스 수요가 아예 없진 않았어요. 2000년대 전후는 주택이나 아파트 중문에 들어가는 유리창이 인기가 많았는데요. 저는 베벨드 기법과 색유리를 배합하는 유리창 제작에 나섰죠. 종교 건축과 일반 건축에서 오는 의뢰를 병행하면서 창작을 이어 갔어요.


유리공방과 카페를 같이 해볼까?

2011년 일이네요. 일반 건축물에 조금씩 스테인드글라스 인테리어를 보급하는 중에 악재가 터졌어요.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가 발표됐거든요. 건축에 들어가는 예산이 통째로 줄어드니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장식용 인테리어부터 없던 일이 됐습니다. 당시 스테인드글라스 인테리어를 요청하던 아파트 공사현장 수요가 많아서 뼈아픈 일이었어요. 신축 아파트를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 넣는다는 오랜 꿈은 잠시 접게 됐습니다.

특수유리 계통이다 보니 그래도 발주는 조금씩 들어와서 회사는 운영할 수 있었어요. 경기침체가 생각보다 오래가니 버티기 힘들었죠. 뾰족한 개성이 없는 회사들은 유지가 어려웠습니다. 사업을 접는 업체가 서서히 늘어났어요. 저도 가지고 있던 재산을 지키기가 어려웠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포기할 순 없었어요. 첫 번째 돌파구로 *숍인숍을 기획했습니다. 같은 건물에 카페와 아틀리에를 동시에 운영하는 일이었죠.

영등포 양평동에 연 숍인숍 스테인드글라스공방. 작업실과 카페를 동시에 운영했다
영등포 양평동에 연 숍인숍 스테인드글라스공방. 작업실과 카페를 동시에 운영했다. ⓒ박옥경

당시 국내에선 생소했지만, 일본은 창작자가 팀 단위로 사업체를 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카페나 식당을 병행하는 공예작가가 있었죠. 한국도 일본처럼 곧 숍인숍 형식의 공방사업이 커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시작했는데요.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 이른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0년대 초는 지금처럼 골목 속에 숨겨진 가게를 인스타그램으로 보고 찾아가는 시대는 아니었네요. 그래도 왜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벤치마킹을 하러 많이 왔었어요.

영등포 양평동으로 공방 이사를 감행했습니다. 다른 유리공장이나 외주업체에서 발주를 넘겨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어요. 동시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죠. 공간을 나눠서 일부는 카페로 꾸몄습니다. 바깥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카페, 거기서 안쪽으로 한 번 더 문을 열고 들어오면 공방. 손님이 유리공예를 지켜볼 수 있는 작업공간이죠.

팩토리가 아니라 아틀리에.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작업현장이 아니라 예쁘고 쾌적한 공간을 만듭니다. 차도 마시고 작업도 할 수 있는 공간. 나만의 감성을 드러내는 작업장, 분위기 있는 장소를 만들려는 시도였어요.

손님들은 카페인 줄 알고 들렀다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낯선 소재를 신기하게 여겨요. 시간이 더 지나면, 손님들이 창업하는 가게에 인테리어로 써보고 싶다고 주문을 하더군요. 대중친화적인 공간에서 만난 손님이 때때로 작품 의뢰를 요청하는 클라이언트로 변신해요. 이는 제가 불황을 견딜 수 있던 힘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공예의 새로운 흐름입니다. 일반인도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드는 거죠.

색연필로 스케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아이디어
색연필로 스케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아이디어 ⓒ박옥경

‘디자인’의 힘

수익은 크지 않았지만 숍인숍 사업을 하던 2010년대 초반은 디자인의 힘을 느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색다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가 열렸어요.

새로운 인테리어 소재를 써보려고 하는 건축사 사무실, 인테리어 업체에서 발주가 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며 스테인드글라스의 영역이 종교건축뿐만 아니라 상업이나 일반건축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겁니다.

이 시기부터 클라이언트에게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발주에 큰 영향을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조형을 제안하기 힘들었던 회사부터 위기가 찾아오는 걸 실감했죠. 2010년까지만 해도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를 정직원으로 채용한 회사가 거의 없었어요. 시각디자인을 할만한 인재도 없었으니까요. 필요하면 디자이너를 프리랜서로 고용해 오더를 받는 분위기였죠.

프로그램을 활용해 제작된 도안. 사용될 유리의 텍스처나 컬러를 실제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다.
프로그램을 활용해 제작된 도안. 사용될 유리의 텍스처나 컬러를 실제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다. ⓒ박옥경

우리는 가업승계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컴퓨터 다루는 게 능숙했던 아들 덕을 봤습니다. 고등학생 때 스테인드글라스 시안을 종이에 옮겨보라고 권유했는데, 아들은 컴퓨터로 작업을 해서 시안을 뚝딱 만들더군요. 지금은 회사 대표이자 메인 디자이너인 박진영입니다.

“아들의 이 재능은 누굴 닮은 걸까?”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故박치성 화가가 있습니다. 인천에서 평생 그림만을 고집하며 작업했던 사람. 아들 진영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화실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접하는 생활을 했거든요. 거기에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제 영향이 얹히지 않았을까요? 스테인드글라스를 시작한 나 때문에 아들도 잠재력을 스테인드글라스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가업승계는 우리 가족의 운명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테인드글라스 2D 도안과 제작을 마친 유리창
스테인드글라스 2D 도안과 제작을 마친 유리창 ⓒ박옥경

너는 내 운명

2010년대 불황은 길었습니다. 작업공들이 다른 일을 찾아 하나둘 그만두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호황일 땐 제작팀, 시공팀, 디자인팀으로 나눠서 여러 명의 직원을 두기도 했었습니다. 불황 끝에 작업이력이 있는 중견 작업자들이 벌이를 위해 이직한 상태여서 결국 인력난을 실감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분야에서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만큼,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젊은 인재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현장
왼쪽부터 박진영 작가, 박옥경 작가, 남한울 작가
왼쪽부터 박진영 작가, 박옥경 작가, 남한울 작가 ⓒfrice

인터넷에 스테인드글라스 교육공지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수업에 회화과를 나온 미대생이 찾아왔어요. 지금은 며느리가 된 남한울 작가죠. 이것도 참 인연이네요. 손발이 착착 맞았던 수강생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아들 박진영과 셋이서 팀이 됐습니다. 업체에서 받은 오더를 해내느라 자정까지 작업하는 일이 부지기수지요. 새로 시작한 회사인 양 열심을 다했던 나날입니다.


디자이너의 역할 : 의심↓ 확신 ↑

디자인을 강화하고 젊은 피를 수혈하니, 경쟁력이 생겼습니다. 특히 컴퓨터 시안이 큰 힘이 됐어요. 당시만 해도 많은 업체가 시안을 손으로 그려서 색연필이나 컬러 사인펜으로 그려서 의뢰인에 보여줬어요. 수작업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시연이 훨씬 디자인의 폭을 넓힌다는 걸 실감했어요.

“우리는 컴퓨터까지 활용해서 시각디자인의 완성도를 추구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디자이너의 역할은 의뢰인이 원하는 디자인을 대신해 주는 사람들인 거죠. 파트너에게 신뢰감을 주는 게 우선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업장이나 건축물에 설치했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중요해요.

상업공간 스테인드글라스 시안과 실제 제작 사례
상업공간 스테인드글라스 시안과 실제 제작 사례 ⓒ진영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업계가 젊어지고 있습니다. 점점 젊은 업체 대표나 젊은 담당자를 만나는 일이 늘고 있어요. 그들이 원하는 디자인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이 생각 못 한 것을 역제안했을 때 자부심을 느낍니다.

오늘날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은 예견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현장에서 시안이 구현될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힘이죠. “생각도 못 했던 기발한 곳에 설치 됐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디자인을 하신다면, 분명 훌륭한 작업을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사명감을 갖고 유리공예를 더 크게 키울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색다를 것. 고유할 것. 독특할 것.

요즘 젊은 사람들이 찾는 실내 인테리어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디자인을 더한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래서 수요가 늘고 있는 듯해요. 젊은 사람들한테 저변이 확대되는 게 신기해요. 변화의 한복판에서 젊은 창작자에 다양한 경험을 전수해 주고 싶습니다. 당장 공방 식구부터요.

직원 모두가 너무나 자기 몫을 잘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오래오래 감각 있는 창작자로 활동하도록 도와야죠. 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지만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저도 성심을 다해 작업하고 있어요. 경험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될 때. 인생선배의 경험담은 큰 힘이 됩니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여성창작자의 기억에서 공예작가이자 사업가, 엄마이자 선생님이기도 했던 모습을 발견합니다.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절실함, 살며 배운 것을 나누려는 다정함. 여러분에게도 작가가 움켜쥐려 했던 마음이 닿기를 바랍니다.

호텔카페에서 가배를 마시면 기분이 조크든여

조선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는 무용가 최승희

(3) 호텔카페에서 가배를 마시면 기분이 조크든여

식민지 조선이라는 환경에서 최승희를 내세운 스타 마케팅은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최고급 핫 플레이스를 즐기는 새로운 커피 풍속을 낳았다. 이전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커피가 일상에 깊게 스며들고 분위기 있는 다방이나 카페 같은 곳이 자연스러운 커피 소비 공간이 되기 시작했다. 한국 커피 문화 이야기 마지막 3화는 한국 커피 보급의 기원과 호텔카페 이야기.

커피를 추출하는 모습
ⓒfrice

한국 최초의 커피를 찾아서

우리나라 커피는 14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사람들은 흔히 1896년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고종이 시름을 달래며 커피를 마신 게 처음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도입된 경로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커피는 개항 이후 선교나 상업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들이 들여왔을 것이 분명하다. 개항기 조선에 오간 선교사, 외교관, 사업가는 물론 여행객들이 묘사한 기록 여러 곳에 이미 커피가 등장한다.

1884년부터 3년간 의료 선교사로 일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의 기록에도 “어의(御醫)로 궁중에 드나들 때 홍차와 커피를 시종들로부터 대접받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커피는 조선에서 궁중뿐만 아니라 궁 밖에서도 낯선 음료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퍼시벌 로웰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1885년 발행)
퍼시벌 로웰의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1885년 발행) ⓒ진용선

1884년 겨울 한강 변 언덕에 있는 누각(樓閣)에서 조선의 유행품(the latest nouveaute)인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1883년 조미수호통상사절단을 수행해 안내하는 임무를 맡은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 1855∼1916)이 남긴 책의 1884년 1월 기록이다. 어느 추운 날 한강 변 ‘슬리핑 웨이브’에서 조선의 유행품 커피를 처음 마셨다는 내용이 실렸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과 왕실에서 즐겼다는 커피는 주로 조선 고위 관료들과 외국인들이 마셨다. 백성들이 마시는 음료는 아니었다. 하루하루 각박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에게 커피는 특권층의 사치품으로 비칠 뿐이었다.

로스팅을 마친 커피빈
ⓒfrice

외국인들이나 왕실에서 소비되는 특권층의 기호품이었던 커피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과 인천의 외국인 호텔을 중심으로 판매되면서 ‘가배(珈琲)’ 또는 ‘양탕(洋湯)국’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커피가 대중에 알려진 시기는 1910년 강제한일합병조약을 전후로 커피를 파는 호텔과 근대식 다실(茶室), 카페가 곳곳에 생겨나면서부터다. 1913년 남대문 역 ‘깃사텐(喫茶店)’을 시작으로 1920년부터는 경성 중구 본정(本盯, 명동과 충무로1가)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다방이 문을 열었다.

옛날 성냥갑 사진. 다방 내부 사진.
과거 다방은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는 공간이라고 해서 '끽다점喫茶店'으로도 불렸다
과거 다방은 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는 공간이라고 해서 ‘끽다점喫茶店’으로도 불렸다. ⓒ서울역사박물관

‘끽다(喫茶)’라는 말처럼 차를 즐기는 일본식 다실이었다. 일본인에 뒤질세라 1927년에는 서울 종로에 영화감독 이경손이 처음 문을 연 다방 ‘카카듀’를 시작으로 다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종로, 명동, 충무로 등지에 이국적인 분위기의 외래어로 이름을 붙인 많은 다방이 생겨났다. 다방 운영은 주로 문인이나 예술가 들이 했다. 〈날개〉의 작가 이상(李箱)은 다방 ‘제비’를 열어 문인들의 사랑방이자 서울의 명물이 됐다.

이들은 프랑스의 살롱 문화를 국내 다방에 접목해 시화전이나 미술전, 낭독회, 출판 기념회 등을 개최하거나 문인들과 화가 등 예술인과 지식인 들이 책을 읽고 함께 토론하는 자연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지식인들에게 다방은 국내외 정세를 논의하고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조선호텔과 유리로 천정과 외벽을 마감한 썬룸의 모습
조선호텔과 유리로 천정과 외벽을 마감한 썬룸의 모습. ⓒ진용선

1914년 조선철도국이 건립한 최고급 호텔인 조선호텔에는 실내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찻집인 ‘썬룸(Sunroom)’이 있었다. 썬룸은 실내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 환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궁우(皇穹宇)가 있는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조선총독부 철도국은 조선에서 대중적 인지도가 가장 높은 스타인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9)를 내세워 마케팅을 시작했다. 단순히 호텔 이미지를 높이려는 전략이라기보다는 부유한 젊은 층까지 끌어들이려는 전략이었다.

썬룸에서 커피를 마시는 최승희. 최승희를 모델로 내세운 조선호텔의 썬룸은 모던 보이, 모던 걸의 핫 플레이스가 됐다
썬룸에서 커피를 마시는 최승희
최승희를 모델로 내세운 조선호텔의 썬룸은 모던 보이, 모던 걸의 핫 플레이스가 됐다 ⓒ진용선

최승희 스타 마케팅과 새로운 커피 풍속

1938년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발행한 사진 홍보물인 《조선의 인상》에는 조선호텔의 모습과 썬룸 사진이 실려 있다. 유리로 천정과 외벽을 마감하고 열대 식물이 드리운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썬룸에서 당대의 대표적인 신여성이라는 20대 후반인 모던 걸 최승희가 여유롭게 커피를 즐기는 모습이었다. 반응은 빠르게 나타났다.

아름답고 세련된 모습의 최승희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당시 청춘 남녀에게 최신 유행의 상징인 커피를 마셔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한몫했다. 이곳의 인기 메뉴가 아이스크림과 커피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유한 젊은 층의 발길이 이어졌다. 최승희를 모델로 내세운 조선호텔의 썬룸은 호텔 라운지 바와 함께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의 핫 플레이스가 됐다.

무용가 최승희, 1911-11.24-1969.8.8
무용가 최승희, 1911-11.24-1969.8.8 ⓒ국립현대미술관

춤은 기생이나 추는 것이란 세간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며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듯이 최승희는 커피를 소위 모던 걸 모던 보이의 최고 기호품이 되게 했다. 단발머리에 서구식 옷과 신발로 꾸미고 화장을 한 최승희의 모습을 보고 많은 남성과 여성 들이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되어 낭만을 한껏 누렸다.

서양식 옷을 입고 폼을 있는 대로 잡는 이들은 벽과 지붕을 유리로 이어 햇볕이 잘 드는 썬룸에서 커피를 즐기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소비하기 시작했다. 덩달아 애피타이저로 시작해 커피로 끝나는 조선호텔 서양 요리도 인기를 끌었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여름 조선호텔에서 열린 만찬 메뉴. ‘御献立(오콘타데)’라고 쓰인 메뉴에는 서양 요리 풀코스에서부터 후식인 과일과 커피 등의 식단이 인쇄. 가장자리는 은박으로 품격 있게 마감했다
일제 강점기인 1940년 여름 조선호텔에서 열린 만찬 메뉴.
‘御献立(오콘타데)’라고 쓰인 메뉴에는 서양 요리 풀코스에서부터 후식인 과일과 커피 등의 식단이 인쇄.
가장자리는 은박으로 품격 있게 마감했다. ⓒ진용선

조선호텔에서 열린 만찬 메뉴에는 ‘오르데뷰르’라는 에피타이저에 이어 ‘청갱즙(淸羹汁)’, 선어증소(鮮魚蒸燒), 다진 쇠고기인 ‘우만육(牛挽肉)’, 어린 새고기인 ‘추번소(鶵燔燒)’가 나오고, 디저트로 과실(果實), 아이스크림이 식탁에 올려진 후, 마지막에 ‘가배(珈琲)’로 마무리됐다.

아무나 커피를 마실 수 없을 시절 모던 걸과 모던 보이는 조선호텔에서 서양 요리를 즐기고 커피를 마셔야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어쩌면 요즘으로 치면 인플루언서가 어떤 제품을 먹으면 그것을 따라 하는 현상이나, 남이 하면 나도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 소위 신인류의 포모(Fomo) 현상이 그때부터 통했던 셈이다.

요약하면 식민지 조선이라는 환경에서 최승희를 내세운 스타 마케팅은 모던 보이 모던 걸이 최고급 핫 플레이스를 즐기는 새로운 커피 풍속을 낳았다. 이전까지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커피가 일상에 깊게 스며들고 분위기 있는 다방이나 카페 같은 곳이 자연스러운 커피 소비 공간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인의 삶에 깊숙히 스며들기에 이른다.

아침이면 나는 늘 커피와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서재에서 모카(moka, 이탈리아 에스프레소용 주전자)에 커피를 채우고 압력과 함께 끓어오르기 시작할 때, 그 소리에 묻어나오는 진한 커피 향이 나는 참 좋다. 

필터에 담긴 커피가 뜨거운 물과 섞여 내려오는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향기의 맛, 그리고 그날 기분에 따라 진하게 엷게 손수 내리는 커피를 배우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점점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알면 사랑에 빠진다. 한국의 커피 문화 시리즈 3부작이 여러분에게도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란다.

😈 박물관장님의 K-커피 문화 이야기는 어땠나요? 1부는 다방의 추억. 2부는 얼죽아의 기원. 3부는 카페 문화 보급을 다뤘어요. 다양한 수집자료와 생생한 경험담이 인상 깊습니다. 어제 마신 커피를 알면, 내일 마실 커피가 훨씬 맛있어지지 않을까요? 이번 시리즈가 여러분의 커피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기 바랍니다 🙂

얼죽아 비긴즈! 한국인은 언제부터 아이스 커피에 열광했을까?

유리잔에 담긴 아이스 커피

(2) 얼죽아의 기원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아아’나 이를 즐기는 ‘얼죽아’의 전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찬물을 지극히도 좋아한 오래된 문화의 결과물이다.

아이스 커피
ⓒfrice

찬물을 즐겨 마시는 나라는 이 세상에 몇 나라 되지 않는다. 그중에 얼음 가득 벌컥벌컥 잘 마시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러니 아이스 아메리카노조차 생소한 외신에서 혹한에 두꺼운 패딩 잠바를 입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다니는 한국 사람을 보고 놀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여름이면 ‘열은 열로 다스린다’는 ‘이열치열(以熱治熱)’로 음식을 먹었는가 하면, ‘이냉치냉(以冷治冷)’으로 약재를 달여 만든 음료를 식혀서 마시거나 차갑게 마셨다. 음식 온도에 대한 개념도 더 차갑고 뜨거운 걸 좋아하다 보니 서로 연결이 되어 차가운 걸 먹거나 뜨거운 걸 먹어도 ‘시원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시원하다’는 말은 온도의 높낮이가 아니다. 차가운 걸 먹든 뜨거운 걸 먹든 몸에 변화가 생겨나 기운이 잘 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뜨거운 걸 먹어도 시원하고 차가운 걸 먹어도 시원하다고 알며 자라다 보니 평소에도 찬물을 즐겨 마시는 습관은 자연스러워졌다. 한겨울에 얼음 동동 동치미를 자연스레 즐겨온 음식 문화도 한몫했다.

얼음을 채취해 저장하는 일은 오래되었다. 《삼국사기》에도 신라 지증왕 6년(505년) 얼음 저장을 담당하는 기관인 빙고전(氷庫典) 이야기가 등장하고, 조선시대 《승정원일기》에도 영조 14년(1738년)에 석빙고(石氷庫)를 축조해 겨울에 채집한 얼음을 여름철에 사용할 수 있도록 장기간 보관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 이후에도 현대까지 냉장고가 나오기 전에는 한강의 얼음을 잘라 식용으로 쓰기도 했다.

화려하게 장식한 크림 커피 메뉴
ⓒfrice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같은 냉커피는 모든 나라에서 즐기는 음료가 아니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에는 에스프레소에 얼음 3~4개 정도를 잘게 부숴 넣은 카페 프레도(Cafe Freddo)가 있고, 에스프레소에 부순 얼음을 채워 넣고 아이스크림을 얹은 후 휘핑크림과 초콜릿 가루로 마무리하는 카페 플라페(Cafe Flappe)도 있다.

중남미에는 얼음에 커피 음료를 갈아 만든 커피 프로스티(Coffee Frostie)도 있지만 얼음 덩어리를 가득 채우는 커피는 아니다.“사람 떠나고 차가 식었다(人走茶凉)”는 속어 때문인지 중국 사람들은 항상 따뜻한 차나 커피를 마신다.

유리잔에 얼음이 동동 뜬 커피가 담겨있다
ⓒfrice

외신이 주목한 한국인의 ‘얼죽아’ 사랑은 어릴 때부터 찬물이나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게 습관이 된 데서 비롯된다. 그 습관에 날개를 달다 보니 열은 열로, 냉은 냉으로 통하는 법을 몸에 익혔기 때문이다. 국민 음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게 아니다.

한편 아이스 커피의 유행은 ‘대가리를 부비대며’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전통적, 봉건적 관습과 풍속에 저항하며 새로운 맛을 탐닉한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있어 가능했다.

『여성조선』, 신년호, 여성조선사 1933.1 / 최계복, 『두 여인(수원)』, 1933-1944
『여성조선』, 신년호, 여성조선사 1933.1 / 최계복, 『두 여인(수원)』, 1933-1944 ⓒ국립현대미술관

‘얼죽아’의 기원, 모던 보이와 모던 걸

일제 강점기 모던의 상징이었던 다방은 ‘아이스커피’라는 새로운 커피를 선보였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겨울. 외신에서 맹추위에 추워서 얼어 죽을지언정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포기하지 않는 한국인의 커피 문화로 집중 조명을 한 것도 아이스커피 ‘얼죽아(Eoljukah)’였다.

K-팝 인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외국에 알려진 ‘아아(Ah-Ah)’도 실은 일제 강점기 경성 시내에 다방과 카페가 들어서고 이를 즐기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이 등장하면서부터 생겨난 핫한 메뉴였다. 1930년 7월 16일자 〈조선일보〉에는 서구식 용모와 옷차림으로 꾸민 청춘 남녀가 자유연애와 낭만을 만끽하며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풍자하는 글이 실렸다.

조선일보 1930년 7월 16일자 신문기사. 아이스 커피가 언급된 당대 커피 문화를 묘사하고 있다.
ⓒ조선일보

칼피스, 파피스도 조커니와 잠 오지 안케하는 컵피에도 ‘아이스컵피’를 두 사람이 하나만 청하여다가는 두 남녀가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먹는다. 사랑의 아이스컵피-이집에서 아이스컵피-저집에서 아이스컵피-그래도 모자라서 일인들 뻔으로 혀끗을 빳빳치펴서 ‘아다시! 아이스고히가, 다이스키, 다이스키요!(전 아이스커피가 좋아요, 좋아)’, ‘와시모네-?(나도 그래) 혼부라당 백의(白衣)껄이 아니라 제 밋천 드리고 다니는 마네킹껄이 이것이라면 머릿속은 텡비여도 자존심 만흐신 그들은 필작 노할 게로군.

– 조선일보, 1930년 7월 16일자 中

‘모던’의 성지와도 같은 경성 진고개(오늘날 충무로, 명동) 일대를 거닐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소비하는 모던 커플에게 아이스커피는 인기 메뉴였다. 그러나 을사늑약과 한일강제합병 전후에 태어난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들이 무슨 짓을 해도 눈에 잔뜩 거슬릴 뿐이다.

심지어는 둘이 머리를 맞대고 다정하게 아이스커피 한잔을 즐기는 모습조차 “대가리를 부비대고 보리줄기로 쪽쪽 빠라먹는다”고 비꼬았다. 일본어를 쓰며 새로운 유행인 아이스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기성세대는 꼴사납게 본 것이다. 당시 갑자기 등장한 모던 풍속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불편한 심기가 드러난다.

조선호텔에서 티타임을 가지는 사람들
ⓒ진용선

그런데도 신세대가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소비하고 그것을 즐기는 변화의 물결은 막지 못했다. “이집에서 아이스컵피-저집에서 아이스컵피”라는 표현처럼 아이스커피는 당시 다방이나 카페에서 인기 메뉴 가운데 하나였다. 자유연애를 꿈꾸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에게는 ‘사랑의 아이스커피’였다. 아이스커피는 이렇게 기성세대의 근심 어린 시선 속에 유행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때 일본식 영어표현인 ‘아이스 커피’가 정착했다. ‘iced coffee’라는 표현을 뒤로 한 채.

‘라떼 그 잡채!’ 박물관장님이 내려준 20세기 K-다방 이야기

20세기 다방에서 쓰던 물건들

(1) 다방문화와 믹스커피

정선 아리랑박물관에서 민속자료수집에 일평생을 바친 진용선 박물관장의 시리즈 컬럼을 소개한다. 한국의 커피 및 카페 문화는 어떻게 변화해왔으며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K-다방 이야기 1화는 박물관장님이 내려준 라떼토크.

1993년에 촬영된 다방의 간판 ⓒ국립민속박물관
1993년에 촬영된 다방의 간판 ⓒ국립민속박물관

20세기 K-다방 회고록

다방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문인들에게는 ‘창작을 위한 산실’이었으며, 다방의 전성기도 시작된 1960년대부터는 문인이나 예술가 등 지식인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오갈 데 없는 실업자들이 일자리에 대한 한 가닥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방은 사무실에서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던 또 다른 사무실이자 친구들과 약속을 잡는 아지트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은 ‘사장’이니 ‘전무’니 하는 직함을 박은 그럴싸한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마치 사무실인 양 다방에 죽쳤다. 다방에서 마담이 “김 사장님 전화요.” 하면 대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돌릴 정도로 사장 허세가 심한 곳이었다.

1993년에 촬영된 다방의 간판 ⓒ국립민속박물관
1993년에 촬영된 다방의 간판 ⓒ국립민속박물관

강원도 정선의 함백 거리를 걸었다. 조동시장 삼거리에서 감리교회로 가는 길, 우체국 옆에서 개울가 쪽으로 난 큰 골목길. 갈라지는 골목골목마다 약산다방, 삼화다방, 함백다방, 맥심다방, 신화다방이 있던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만남을 즐기며 이야기가 오가던 곳. 한때는 저곳에서 많은 이들이 세상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느라 북적이던 곳이다. 밤이면 보석처럼 다방 간판들이 빛나던 곳이다.

한국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할 때 사용하던 커피병과 커피잔. 함백다방명함과 파란 보자기가 눈에 띈다. ⓒ진용선
한국 다방에서 커피를 배달할 때 사용하던 커피병과 커피잔. 함백다방명함과 파란 보자기가 눈에 띈다. ⓒ진용선

기억의 저편에는 아직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직원이 정성스레 내어 주는 계란 동동 모닝커피와 쌍화차, 파란 보자기에 보온병을 싸들고 분주히 커피를 배달하는 여직원의 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그런 시대였다. 함백광업소 폐광 이후 다방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가운데 2010년대 중반까지 힘겹게 명맥을 유지하던 함백다방도 어느덧 옛날이야기가 되어 가고 있다.

다방에서 제공하는 성냥곽 ⓒ국립민속박물관
다방에서 제공하는 성냥곽 ⓒ국립민속박물관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이 변하기 마련이다. 사람은 늙어 세상을 달리하고, 주변의 익숙한 풍경도 사라져간다. 한때 화려했던 다방은 온데간데없고 기억 속에서 사라져간다. 허물고 서둘러 새것을 세우다 보니 한때 누군가와 커피를 마시던 소중한 다방도 추억에 머물 뿐이다. 다방에서 “둘 둘” 하면 직원이 설탕 두 스푼 크림 두 스푼을 넣어 휘저은 뒤 스푼으로 떠서 맛을 보고 다시 저어 건네주던 이상한 풍경에 웃음 짓는다.

1976년 5월 29일자 7면에 실린 일명 '꽁초커피'.
커피를 정량보다 적게 넣고 대신 1/3 개비 분량의 담배가루를 섞어 색을 진하게 하거나 소금과 계란 껍데기를 넣어 커피맛을 내게 했다. ⓒ경향신문
1976년 5월 29일자 7면에 실린 일명 ‘꽁초커피’.
커피를 정량보다 적게 넣고 대신 1/3 개비 분량의 담배가루를 섞어 색을 진하게 하거나 소금과 계란 껍데기를 넣어 커피맛을 내게 했다. ⓒ경향신문

다방의 성행과 부침 속에 한국 커피의 역사도 쌓여 갔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정부가 모든 다방에서 커피 판매를 전면 금지했다. 그럼에도 커피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혼돈의 시기를 겪으면서 커피가 귀한 상품이 되다 보니 전국 곳곳에 소위 ‘미제 장사’, ‘미제 아줌마’들이 생겨났고, ‘맥스웰하우스’ 커피는 커피의 대명사가 되어 이들의 필수 품목이 되었다.

원두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때는 담뱃가루와 톱밥, 콩가루, 달걀 껍데기를 섞어 색깔을 진하게 낸 가짜 커피인 ‘꽁초 커피’를 파는 꼼수를 부리다 적발되기도 했다. 일부 다방은 퇴폐 카페를 흉내 내다 당국의 철퇴를 맞았고, 엽차 잔에 몰래 위스키를 팔기도 했다.

당시 커피믹스는 현재 우리가 아는 기다란 스틱모양이 아니라 직사각 형태였다. ⓒ진용선
당시 커피믹스는 현재 우리가 아는 기다란 스틱모양이 아니라 직사각 형태였다. ⓒ진용선

믹스커피의 탄생과 다방의 몰락

1974년 동서식품이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크림인 ‘프리마(Prima)’를 개발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판매를 시작한 ‘커피믹스’는 우리나라 커피 문화에 혁명과도 같았다. 휴대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방습포장된 일회용 인스턴트 커피는 언제 어디서든지 끓인 물만 있으면 손쉽게 마실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품이었다.

청양장 커피 행상 ⓒ국립민속박물관
청양장 커피 행상 ⓒ국립민속박물관

무엇을 먹더라도 섞고 비벼 먹는 ‘비빔밥 문화’와 ‘빨리빨리’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커피, 설탕, 크림의 황금 비율을 읽어 소비자들의 기호를 극대화한 우리나라 고유의 커피였다. 그 바탕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방에서 즐기는 커피와 설탕, 크림의 이상적인 비율에 대한 ‘빅 데이터’가 있었기 때문이다.

증평장 커피가판대 ⓒ국립민속박물관
증평장 커피가판대 ⓒ국립민속박물관

커피를 언제 어디서나 쉽게 마실 수 있고 커피의 맛과 향이 좋아지자 다방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다. 다방도 자구책 마련에 몰두했다. 대학가나 젊은 층이 많이 찾는 다방들은 DJ를 둔 음악 다방으로 변했고, 중소 도시 다방을 중심으로 ‘레지’들이 직접 커피를 배달하는 서비스로 어려움을 타개하려 했다. 진한 화장과 야한 복장의 레지, ‘티켓 다방’이 사회 문제로 크게 부상해 다방이 퇴폐업소의 이미지로 인식된 것도 1980년대 무렵이다.

여기에 더해 1980년대 중반 원두를 갈아서 물을 끓여 손수 내리는 커피의 인기와 함께 커피 전문점 붐이 일어나면서 다방은 나이 든 사람들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커피’ 하면 ‘다방’, ‘다방’ 하면 ‘커피’로 명맥을 이어온 다방도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내리막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를 담은 유리잔
ⓒ frice

한국인 1명은 1년에 커피 512잔을 마신다

한국에서 이제 커피는 쌀보다 더 많은 소비가 되는 식품이 되었다. 다방의 뒤를 이은 커피 전문점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으며, 커피도 캔, 병, 컵, 페트병 등 다양한 형태에 담겨 제품으로 나오고 있다.

2018년 국제커피협회(ICO)의 ‘세계 커피 소비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커피를 많이 수입한다. 2022년에는 한 포대에 60킬로그램짜리 230만 포대를 수입했다. 2022년 국내 커피 시장 규모가 10조 원을 넘었고, 국민 1인당 연간 평균 512잔을 마시는 ‘커피 공화국’이다.

구한말 미국을 다녀오며 “서양 사람들은 차와 커피를 우리네 숭늉 마시듯 한다.”라고 한 유길준(兪吉濬)도 한반도에서도 커피를 숭늉 마시듯하는 ‘커피 공화국’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서 커피는 140년에 이르는 문화적 산물로 자리매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