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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드글라스 작업자들이 사용하는 도면

유리창 가르다 세월을 여몄네

  • 어쩔K

유리창 가르다 세월을 여몄네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이너 박옥경님
ⓒfrice

나는 1.5세대 작가입니다.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공예는 1세대에서 2세대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종교 건축 인테리어가 대부분이던 1세대와 상업공간 인테리어가 급부상한 2세대 사이에 있어요. 2010년 이후부터 젊은 사람들의 소비패턴을 이해하고 그들을 상대로 사업을 해야 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부터 젊어야겠죠.

이제 작품 제작을 위해 미팅을 가지면, 담당자 대부분이 30~40대 초반인데요. 예전과 비교하면 현장에서 쓰는 언어도, 그들이 표현하려는 이미지도 젊다고 느낍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이너 박옥경님의 2000년대 초 업무사진
ⓒ박옥경

시작은 2003년입니다. 저는 교회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하는 회사에서 5~6년 근무했는데요. 일하면서 *베벨드 기법을 쓴 작품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스테인드글라스는 교회나 성당의 장식물이었어요. 제작법도 극소수만 알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도 어깨너머로 배워가며 일해야 했죠.

개신교회는 시트지에 성화를 새겨달라는 주문이 많았는데요. 드물게 스테인드글라스를 주문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시트는 너무 저렴해 보이고 수명이 오래가지 않으니, 스테인드글라스를 발주하는 거였죠. 가톨릭 성당은 주로 유학 다녀오신 분들이 맡았습니다. 해외유학 다녀온 수녀님이나 신부님이 제작법을 배워와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드셨어요.

베벨드 기법을 활용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사례
베벨드 기법을 활용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사례 ⓒ박옥경

꿈이 생겼습니다. 일반 건축물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접목시키고 싶었어요. 2009년에 회사를 떠나 독립을 했는데, 당시 국내에서 잘 쓰지 않는 새로운 유리를 수입했어요. 디자인 시안도 다시 짰죠. 새로운 유행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영업을 다녔어요. 점점 발주처를 확장했는데, 서울 강남이나 도시개발이 한창이던 경기도 분당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요청이 들어왔죠.

일반 가정이나 상업 공간에 들어가는 스테인드글라스 수요가 아예 없진 않았어요. 2000년대 전후는 주택이나 아파트 중문에 들어가는 유리창이 인기가 많았는데요. 저는 베벨드 기법과 색유리를 배합하는 유리창 제작에 나섰죠. 종교 건축과 일반 건축에서 오는 의뢰를 병행하면서 창작을 이어 갔어요.


유리공방과 카페를 같이 해볼까?

2011년 일이네요. 일반 건축물에 조금씩 스테인드글라스 인테리어를 보급하는 중에 악재가 터졌어요.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가 발표됐거든요. 건축에 들어가는 예산이 통째로 줄어드니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장식용 인테리어부터 없던 일이 됐습니다. 당시 스테인드글라스 인테리어를 요청하던 아파트 공사현장 수요가 많아서 뼈아픈 일이었어요. 신축 아파트를 스테인드글라스로 채워 넣는다는 오랜 꿈은 잠시 접게 됐습니다.

특수유리 계통이다 보니 그래도 발주는 조금씩 들어와서 회사는 운영할 수 있었어요. 경기침체가 생각보다 오래가니 버티기 힘들었죠. 뾰족한 개성이 없는 회사들은 유지가 어려웠습니다. 사업을 접는 업체가 서서히 늘어났어요. 저도 가지고 있던 재산을 지키기가 어려웠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포기할 순 없었어요. 첫 번째 돌파구로 *숍인숍을 기획했습니다. 같은 건물에 카페와 아틀리에를 동시에 운영하는 일이었죠.

영등포 양평동에 연 숍인숍 스테인드글라스공방. 작업실과 카페를 동시에 운영했다
영등포 양평동에 연 숍인숍 스테인드글라스공방. 작업실과 카페를 동시에 운영했다. ⓒ박옥경

당시 국내에선 생소했지만, 일본은 창작자가 팀 단위로 사업체를 꾸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카페나 식당을 병행하는 공예작가가 있었죠. 한국도 일본처럼 곧 숍인숍 형식의 공방사업이 커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시작했는데요. 지금 돌이켜 보면 너무 이른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2010년대 초는 지금처럼 골목 속에 숨겨진 가게를 인스타그램으로 보고 찾아가는 시대는 아니었네요. 그래도 왜 이런 공간을 만들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이따금 벤치마킹을 하러 많이 왔었어요.

영등포 양평동으로 공방 이사를 감행했습니다. 다른 유리공장이나 외주업체에서 발주를 넘겨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어요. 동시에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했죠. 공간을 나눠서 일부는 카페로 꾸몄습니다. 바깥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 카페, 거기서 안쪽으로 한 번 더 문을 열고 들어오면 공방. 손님이 유리공예를 지켜볼 수 있는 작업공간이죠.

팩토리가 아니라 아틀리에.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 작업현장이 아니라 예쁘고 쾌적한 공간을 만듭니다. 차도 마시고 작업도 할 수 있는 공간. 나만의 감성을 드러내는 작업장, 분위기 있는 장소를 만들려는 시도였어요.

손님들은 카페인 줄 알고 들렀다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낯선 소재를 신기하게 여겨요. 시간이 더 지나면, 손님들이 창업하는 가게에 인테리어로 써보고 싶다고 주문을 하더군요. 대중친화적인 공간에서 만난 손님이 때때로 작품 의뢰를 요청하는 클라이언트로 변신해요. 이는 제가 불황을 견딜 수 있던 힘이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한국 스테인드글라스 공예의 새로운 흐름입니다. 일반인도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드는 거죠.

색연필로 스케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아이디어
색연필로 스케치한 스테인드글라스 아이디어 ⓒ박옥경

‘디자인’의 힘

수익은 크지 않았지만 숍인숍 사업을 하던 2010년대 초반은 디자인의 힘을 느꼈던 시기이기도 했어요. 색다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디자인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대가 열렸어요.

새로운 인테리어 소재를 써보려고 하는 건축사 사무실, 인테리어 업체에서 발주가 늘었습니다. 시대가 바뀌며 스테인드글라스의 영역이 종교건축뿐만 아니라 상업이나 일반건축으로 자연스럽게 확장된겁니다.

이 시기부터 클라이언트에게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발주에 큰 영향을 차지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합니다. 조형을 제안하기 힘들었던 회사부터 위기가 찾아오는 걸 실감했죠. 2010년까지만 해도 컴퓨터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를 정직원으로 채용한 회사가 거의 없었어요. 시각디자인을 할만한 인재도 없었으니까요. 필요하면 디자이너를 프리랜서로 고용해 오더를 받는 분위기였죠.

프로그램을 활용해 제작된 도안. 사용될 유리의 텍스처나 컬러를 실제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다.
프로그램을 활용해 제작된 도안. 사용될 유리의 텍스처나 컬러를 실제에 가깝게 보여줄 수 있다. ⓒ박옥경

우리는 가업승계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컴퓨터 다루는 게 능숙했던 아들 덕을 봤습니다. 고등학생 때 스테인드글라스 시안을 종이에 옮겨보라고 권유했는데, 아들은 컴퓨터로 작업을 해서 시안을 뚝딱 만들더군요. 지금은 회사 대표이자 메인 디자이너인 박진영입니다.

“아들의 이 재능은 누굴 닮은 걸까?” 어린 시절로 돌아가면 故박치성 화가가 있습니다. 인천에서 평생 그림만을 고집하며 작업했던 사람. 아들 진영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화실에서 생활하며 그림을 접하는 생활을 했거든요. 거기에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제 영향이 얹히지 않았을까요? 스테인드글라스를 시작한 나 때문에 아들도 잠재력을 스테인드글라스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가업승계는 우리 가족의 운명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테인드글라스 2D 도안과 제작을 마친 유리창
스테인드글라스 2D 도안과 제작을 마친 유리창 ⓒ박옥경

너는 내 운명

2010년대 불황은 길었습니다. 작업공들이 다른 일을 찾아 하나둘 그만두는 사례가 늘어났습니다. 호황일 땐 제작팀, 시공팀, 디자인팀으로 나눠서 여러 명의 직원을 두기도 했었습니다. 불황 끝에 작업이력이 있는 중견 작업자들이 벌이를 위해 이직한 상태여서 결국 인력난을 실감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분야에서 디자인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만큼, 취지를 이해할 수 있는 젊은 인재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 작업현장
왼쪽부터 박진영 작가, 박옥경 작가, 남한울 작가
왼쪽부터 박진영 작가, 박옥경 작가, 남한울 작가 ⓒfrice

인터넷에 스테인드글라스 교육공지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스테인드글라스 수업에 회화과를 나온 미대생이 찾아왔어요. 지금은 며느리가 된 남한울 작가죠. 이것도 참 인연이네요. 손발이 착착 맞았던 수강생을 직원으로 채용하고 아들 박진영과 셋이서 팀이 됐습니다. 업체에서 받은 오더를 해내느라 자정까지 작업하는 일이 부지기수지요. 새로 시작한 회사인 양 열심을 다했던 나날입니다.


디자이너의 역할 : 의심↓ 확신 ↑

디자인을 강화하고 젊은 피를 수혈하니, 경쟁력이 생겼습니다. 특히 컴퓨터 시안이 큰 힘이 됐어요. 당시만 해도 많은 업체가 시안을 손으로 그려서 색연필이나 컬러 사인펜으로 그려서 의뢰인에 보여줬어요. 수작업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한 시연이 훨씬 디자인의 폭을 넓힌다는 걸 실감했어요.

“우리는 컴퓨터까지 활용해서 시각디자인의 완성도를 추구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디자이너의 역할은 의뢰인이 원하는 디자인을 대신해 주는 사람들인 거죠. 파트너에게 신뢰감을 주는 게 우선입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업장이나 건축물에 설치했을 때,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려주는 것도 중요해요.

상업공간 스테인드글라스 시안과 실제 제작 사례
상업공간 스테인드글라스 시안과 실제 제작 사례 ⓒ진영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 업계가 젊어지고 있습니다. 점점 젊은 업체 대표나 젊은 담당자를 만나는 일이 늘고 있어요. 그들이 원하는 디자인 니즈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들이 생각 못 한 것을 역제안했을 때 자부심을 느낍니다.

오늘날 스테인드글라스 디자인은 예견력이 중요한 것 같아요. 현장에서 시안이 구현될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힘이죠. “생각도 못 했던 기발한 곳에 설치 됐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디자인을 하신다면, 분명 훌륭한 작업을 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사명감을 갖고 유리공예를 더 크게 키울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색다를 것. 고유할 것. 독특할 것.

요즘 젊은 사람들이 찾는 실내 인테리어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디자인을 더한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래서 수요가 늘고 있는 듯해요. 젊은 사람들한테 저변이 확대되는 게 신기해요. 변화의 한복판에서 젊은 창작자에 다양한 경험을 전수해 주고 싶습니다. 당장 공방 식구부터요.

직원 모두가 너무나 자기 몫을 잘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오래오래 감각 있는 창작자로 활동하도록 도와야죠. 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해 나아가고 싶습니다. 일선에서 한발 물러났지만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저도 성심을 다해 작업하고 있어요. 경험을 전하고 싶습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될 때. 인생선배의 경험담은 큰 힘이 됩니다. 세대와 세대를 잇는 여성창작자의 기억에서 공예작가이자 사업가, 엄마이자 선생님이기도 했던 모습을 발견합니다. 위기를 극복하려 했던 절실함, 살며 배운 것을 나누려는 다정함. 여러분에게도 작가가 움켜쥐려 했던 마음이 닿기를 바랍니다.

정리 프라이스
글/사진
 박옥경

박옥경 작가는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합정 데코라티프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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