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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남천성당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서울과 부산, 그리고 인천으로 떠난 종교 스테인드글라스 탐방기

  • 어쩔K

서울과 부산, 그리고 인천으로 떠난 종교 스테인드글라스 탐방기

신성하거나 신선하거나

스테인드글라스. 뜻을 풀자면 ’색유리‘요, 스타카토처럼 통통 튀다 부드럽게 펼쳐지는 일곱 글자에 이토록 신성한 이미지를 심어준 건 중세시대 유럽이다. 아닌 게 아니라 신의 존재를 투영하기에 딱 좋은 매체였을 것이다. 모든 것이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이어지던 시절이었고, 오래전부터 빛은 곧 신을 상징했으며 창틀에 박힌 스테인드글라스는 시시각각 다른 감도로 빛났으니까.

그러나 대표 이미지를 갖는다는 건 또 다른 면모를 보여줄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독 강하게 박힌 종교미술의 이미지 앞에서 문득 궁금해졌다. 사람도 딱 한 가지 면만 지니지 않는데 스테인드글라스라고 다를까? 만약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또 무엇이 보일까? 예술과 디자인이라는 필터를 쥐고 경부선을 넘나든 짧은 여행은 그런 사소한 물음표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가재울 성당

경의중앙선 신촌역과 디지털미디어시티역 사이, 홍제천이 한때 모래내라는 이름으로 흘렀던 가좌역. 4번 출구로 나와 모래내시장을 지나고 헨젤과 그레텔 속 빵 부스러기처럼 늘어선 가로수를 따라 걷는다. 첫 번째 목적지는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길쭉길쭉한 아파트 단지로 변해가는 풍경 속에 숨어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 통창으로 유명한 가재울 성당.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385-5에 위치한 가재울 성당의 외관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385-5에 위치한 가재울 성당 ⓒfrice

여기가 맞아? 솔직히 말하자면 첫인상은 그랬다. 회색빛 십자가가 아니었더라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외관이 담백했다. 남가좌동을 휩쓴 뉴타운 재개발의 결과물이었다. 1971년에 설립된 본당이 허물어진 후 2014년 문을 열었다는 가재울 성당은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며 주민센터에 위화감 없이 스며들었다. 자고로 스테인드글라스란 클래식한 건축물에 어울리는 것 아닌가 싶어 반신반의하는 마음이 되었지만, 반전은 2층에서 시작됐다.

가재울 성당 2층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마주한다
가재울 성당 2층에 들어서면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마주한다 ⓒfrice

고요한 복도 저 편에서 빛나는 유리화와 그 아래 웅덩이처럼 고인 빛그림자. 누구에게나 유년 시절의 아이콘 같은 만화영화가 하나쯤 있다. 내 경우엔 ‘미녀와 야수’였다. 비가 쏟아지는 밤, 초라한 행색의 노파를 내쫓아버린 왕자와 그의 차가운 심장에 저주를 건 마녀. 알록달록 유리화로 펼쳐지는 프롤로그는 어린 눈에도 아주 낭만적이었다.

장미꽃같은 빨간 동그라미는 예수의 심장을 의미한다
붉은 유리가 푸른 유리와 대비되며 인상적인 심볼로 다가온다
장미꽃같은 빨간 동그라미는 예수의 심장을 의미한다 ⓒfrice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그 장면이 되살아났다. 저 멀리 노랗고 파란 유리 조각들이 회오리치며 우주를 이루고 있었다. 국내 최초 스테인드글라스 작가인 고(故) 이남규의 ‘예수 성심’(1988)이었다. 재개발 전까지 본당을 지키다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작품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할 만큼 거대했고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 반짝였다. 울퉁불퉁 깨진 유리들이 두꺼운 단면 안쪽으로 말간 바다를 품고 있었다. 장미꽃이라고 생각했던 빨간 동그라미가 예수의 심장이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가재울 성당의 물고기 모양 스테인드글라스는 설치미술가 오순미 작 (2014). 가재가 많아 붙여졌다는 가재울 명칭과 모래내에서 영감을 받았다. 거대한 물고기는 구원을 상징하며 유리 전체의 작은 격자들은 신자 개개인을 나타내는 모래를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가재울 성당의 물고기 모양 스테인드글라스는 설치미술가 오순미 작 (2014). 가재가 많아 붙여졌다는 가재울 명칭과 모래내에서 영감을 받았다. 거대한 물고기는 구원을 상징하며 유리 전체의 작은 격자들은 신자 개개인을 나타내는 모래를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사진 frice, 참고 가톨릭 굿뉴스

하지만 이곳이 유명한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2층과 3층을 아우르는 대성전 오른편, 모래알 같은 격자무늬 위로 부드럽게 헤엄치는 물고기 형상. 설치미술가 오순미와 건물 설계 단계부터 논의했다는 무지갯빛 창문이다. ‘모래내’와 ‘가재울’에서 영감받았다는 창문은 모티프에 충실했다. 화려한 밑그림도 장식도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거기에는 푸르스름한 새벽녘, 노랗게 물든 한낮, 뉘엿뉘엿 저무는 해질녘까지 다양한 시간대가 깃들어 있었다. 어느 쪽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짤막한 시차가 생겨났다. 다른 것 없이도 색감이 곧 장식이었다.

노랗게 물든 한낮을 닮은 스테인드글라스 해질녘 오후의 시간이 공존한다
푸르스름한 새벽을 닮은 스테인드글라스. 해질녘 오후의 시간이 공존한다
푸르스름한 새벽과 노랗게 물든 한낮, 해질녘 오후의 시간이 공존한다 ⓒfrice

스테인드글라스의 세계를 제대로 마주한 건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오후 세 시를 넘기자 불현듯 햇빛이 스며들었다. 유리에 새겨진 숨결을 따라 물그림자 같은 흔적이 드리워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스테인드글라스란 단순히 색유리의 개념이 아니라는걸.

창문을 통과한 빛과 거기서 퍼져 나오는 그림자, 화창한 장조와 싱거운 단조가 만들어내는 리듬,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공간이 오묘한 빛깔 속으로 천천히 잠겨 들었다.


남천성당의 기울어진 형태는 배의 돛 모양을 닮았다. 항구도시 부산을 염두에 둔 것. 오른편의 열쇠모양 종탑은 천국의 열쇠를 들고 하늘로 향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남천성당의 기울어진 형태는 배의 돛 모양을 닮았다. 항구도시 부산을 염두에 둔 것. 오른편의 열쇠모양 종탑은 천국의 열쇠를 들고 하늘로 향하고 싶은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다. ⓒ사진frice, 참고_부산일보

부산, 남천성당

서울에서 목적지를 찾아가는 길은 조금 길었다. 아침부터 부산행 열차를 타고 한참을 달린 후 캐리어를 끄는 여행자들과 심드렁한 얼굴의 주민들이 뒤섞인 마을버스에 실려 덜컹덜컹. 3시간 남짓의 여정 끝에 드디어 ‘샤’ 모양 건물을 만났다. 잘라낸 케이크 같은 삼각형 옆으로 열쇠 모양 종탑이 세워진 풍경, 부산의 남천성당이었다.

부산 남천동 성당 내부
ⓒfrice

이곳의 시그니처는 45도 기울어진 벽면의 안쪽이다. 길이 53m에 높이 42m인 유리화로 온통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라는 유리화는 한평생 사제와 미술가를 넘나든 조광호 신부의 작품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시인과 화가를 꿈꿨으며 미(美)를 곧 진리라 여긴다는 70대 신부가 탐구한 아름다움은 어떤 모습일까.

부산 남천동 성당 내부. 한국 최대 규모 스테인드글라스 아트워크를 만날 수 있다
한국 최대 규모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부산 남천성당
한국 최대 규모 스테인드글라스가 설치된 부산 남천성당 ⓒfrice

들어서자마자 평화였다. 창문 가장자리를 타고 구석구석 쏟아져 내리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빠져나가는, 반대편 벽 위로 어룽거리는 빛, 빛, 빛. 숫자와 단위로 읽었을 때는 알 수 없던 공간감이 눈앞에 펼쳐졌다. 기도하는 마음에는 주일이 없다는 듯 몇몇 신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다란 의자 위로 빛무리가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유리에 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후 소성과정을 거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에 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후 소성과정을 거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조광호 신부의 작품이다
유리에 유약으로 그림을 그린 후 소성과정을 거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조광호 신부의 작품이다 ⓒfrice

평일 오후였고 온통 침묵이었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는 유리화는 추상화와 구상화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으로 존재감을 뽐냈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동그라미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는 동안 아래쪽으로 성경 속 인물들이 또렷하게 나타나는 식이었다. 어떤 선은 비 갠 하늘처럼 선명했고, 또 어떤 선은 붓질 대신 페인트를 뿌렸던 잭슨 폴록의 것처럼 거칠었다. 어제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만큼 맑고 생생한데 1995년작이라니, 새삼 스테인드글라스는 한번 만들어지면 처음의 빛깔과 형태 그대로 천 년을 간다는 말이 실감 났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로 427번길 15에 위치한 부산 남천성당. 의자 위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떨어지고 있다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로 427번길 15에 위치한 부산 남천성당 ⓒfrice

머무는 내내 따라붙은 건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앞에서 기도하고 사색하고 젖어들었을까. 하릴없이 겸허해지는 모든 순간이 여기에 녹아있다 생각하니 경건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작가에게 묻고 싶었다. 유리를 자르고 달구고 조각조각 맞춰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느냐고.

나오는 길에는 맨 뒷자리에 앉아 기도를 했다. 사실 기도라기보다는 소원을 비는 쪽에 더 가까웠지만, 평소 들춰보지 않던 이야기들이 나도 모르게 툭툭 튀어나왔다. 어쩌면 종교란 나를 들여다보게 하는 어떤 초월적 순간이 아닐까, 불현듯 그런 문장이 머릿속을 스쳤다. 빛은 여전히 창문 아래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인천, 강화 동검도 채플

마지막 목적지는 강화도 남동쪽의 작은 섬 동검도였다. 면적 1.6㎢에 불과한 그곳에 조광호 신부의 또 다른 작품이 있다고 했다. 마음이 춥던 유학 시절, 알프스의 어느 작은 채플에서 얻었던 위로가 지어올린 곳. 누구나 방문할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는 7평짜리 영혼의 쉼터.

인천 강화군 길상면 동검길 114에 위치한 자그마한 건물
인천 강화군 길상면 동검길 114에 위치한 자그마한 건물 ⓒfrice

인천 강화군 길상면 동검길 114에 위치한 자그마한 건물 ⓒfrice

갯벌을 지나 도착한 예배당은 ‘주인 없는 집’이라는 소개말답게 텅 비어 있었다. 이따금 트럭이며 자동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도로 옆쪽이었다. 벽면과 천장을 가로지르는 십자가만이 이곳이 기도하고 명상하는 곳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양 문에 우주가 빼곡하다
양 문에 우주가 빼곡하다 ⓒfrice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라는 이곳은 성인 다섯 명쯤 누우면 꽉 찰 만큼 좁았다. 그렇지만 정면 가득한 통창으로 갯벌이 훤히 내다보였고, 출입문에는 칸칸이 우주가 그려져 있었다. 물리적으로는 작지만 그 이면은 훨씬 넓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온 공간이 외치는 듯했다. 무엇보다 벽면마다 자리 잡은 스테인드글라스. 해가 뜨고 질 때마다 매끈한 삼각형과 길쭉한 사각형과 늘어진 오각형을 따라 충만하게 물들 모습이 눈에 선했다.

강화도의 자연이 창 밖으로 보인다
실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창 밖 예수십자가 상과 나란히 우뚝 서있다
ⓒfrice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쉽게도 구름 낀 날이었다. 빛이 들지 않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늘 환하게 웃던 사람이 미소를 지우고 보여주는 민낯 같았다. 음악이라면 무대 위에서 홀로 주목받는 독주가 아니라 다양한 악기들이 모여 이루는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빛의 예술이라는 건 빛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유리의 맨얼굴로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까? 살펴본 적 없던 물음표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름다움과 실용성 사이, 우리가 몰랐던 스테인드 글라스

인간은 아름다움에 접근함으로써 본래의 인간이 된다고 했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지만 제대로 들여다본 적 없던 스테인드글라스를 마주하면서 그 문장을 자주 더듬어 보았다.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 예술이라면 스테인드글라스는 가장 순수한 예술이었다. 그 앞에 서는 건 광활한 자연 앞에 서는 순간 같았다. 저항할 힘조차 없이 압도되는 것, 잠시 할 말을 잊게 되는 것. 바깥에서 스며드는 빛에 사로잡혀 있자면 안쪽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인간에게 빛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대체 무엇이 담겨있기에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걸까 생각하기를 여러 번.

빛을 통과시킨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의 아름다운 모습
ⓒfrice

그렇게 말랑한 순간들 사이로 실용적인 선택지가 불쑥 튀어나왔다. 혁신적일 것, 아름다울 것, 기능을 이해하기 쉬울 것, 오래 지속될 것, 환경친화적일 것, 최소한의 디자인으로만 이루어질 것. 디자이너들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가 일찍이 세운 ‘좋은 디자인의 원칙’이 거기에 녹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쓸모를 따지지 않는 작품에서 존재 이유가 확실한 제품으로 얼굴빛을 바꿨다. 요청하는 이 없이도 자라나는 이야기에서 들어주는 이가 있기에 만들어지는 이야기가 되었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이라는 관점을 쥐고 떠났으나 그런 분류 기준이 과연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묻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품은 가능성을 너무 오래 몰라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빈티지 소품이나 상업 공간 속 장식 요소 등으로 점차 친숙해지고 있지만 그것이 스쳐가는 트렌드인지 본질적인 확장인지는 알 수 없는 요즘, 이 영롱한 색유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닿아 새로운 물꼬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이유다. 심미적인 아름다움과 효율적인 실용성이야말로 각자의 자리에서 인류를 구원해 온 요소니까. 물론 이건 아주 개인적인 시선의 끝, 그 앞에서 또 다른 누군가는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해진다.

정리 프라이스
글/사진 전하영

전하영은 전세계 아티스트를 소개하는 아트 라이터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건 예술과 인문학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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